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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마르코 8,27-33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조커’(2019)는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악의 화신이 되어 가는지를 담아내었습니다.
광대복장을 입고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에게 젊은 아이들은 구타하고 조롱하며 가진 것을 빼앗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시장 밑에서 일할 때 태어난 고담시의 시장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 생활에서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도 어머니의 망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사실 아들을 감금하고 폭행하였습니다.
믿을 사람은 어머니 한 분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을 학대하고 이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조커는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 온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던 이들에게 보복을 합니다.
그리고 고담시티의 악의 상징이 됩니다.
이 영화는 조커가 끊임없이 관객을 향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이런 상황에서는 나처럼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영화는 ‘보통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다 조커가 될 수밖에 없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악이 정당화됩니다.
우리는 한 평범하고 모범적인 직장인이 어떻게 악의 화신이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유태인 6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유용한 시스템을 고안하여 학살을 도운 1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그도 그저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승진하려고 나라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적인 게 그렇게 나쁜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적인 것이 좋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을 사탄이 되게도 만듭니다.
아무리 세상의 많은 악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인간이니까 이럴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자신이 짐승이라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적이라는 말은 거의 사탄이 되는 것까지도 정당화하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에서 “생각하는구나.”의 단어는 ‘프로네오’인데 ‘흥미를 가지다, 관심을 가지다.
애정을 두다.’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에 관심을 가지면 사탄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탄이 되려고 해서 사탄이 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사탄이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사탄도 자신들은 영원한 종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분개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질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것이 사람을 사탄도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조커가 ‘나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만 가졌어도 끊임없이 ‘인간이면 다 이럴 거야!’라는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을 거슬렀으며,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거슬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98)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만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임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느님이 되라는 악마의 유혹에 이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 안에 하느님과 대적할 모든 요소들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을 누르는 길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죄를 짓는다면 이미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체성혈로 하느님의 본성을 모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성체를 하느님이라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하느님이라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8,27-33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극적인 삶의 전환에 대한 묵상도 은혜롭지만,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에 대한 묵상도 참으로 풍요롭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 사도는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나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은 꼭 저를 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그리 저와 빼닮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제자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래서 결심하고, 시작은 잘하는데, 뒷받침이 그렇게 안 됩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될 것 같은데, 삶이 받쳐주지를 못합니다.
첫출발 때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이 달려들던 그 열렬한 마음, 예수님을 향해 활활 타오르던 그 불같은 열정, 순수한 신앙, 그런 초심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는데...생각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일단 용감히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워낙 신앙의 기반이 약하다보니, 의지력이 부족하다 보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분위기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수제자 직분까지 맡다 보니 거기서 오는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세속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삶보다는 육적인 생활에 익숙해 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단의 대표 격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요청과 제자단의 미성숙 사이에 끼여
참으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학창시절, 돌아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당신들이 담당하셨던 학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먼저 반장을 불러 혼을 내거나 족쳤습니다.
제자단의 반장이었던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이 맡았던 직책상 무수히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혼도 엄청 많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엄청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옛 삶의 방식, 옛 사고방식을 떨치지 못하는 제자들,
무조건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엄청난 꾸중을 하시는데, 반장인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꾸중을 듣습니다.
꾸중의 강도가 엄청납니다.
화들짝 놀랄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베드로 사도의 문제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십자가 신비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으로 다가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개방성 부족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 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따졌던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토록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한참 기다려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지속적으로 수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한 우리지만, 아직도 고통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부족한 우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목요일 강론>
(2025. 2. 20. 목)(마르 8,27-33)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의 은총’을 얻는 것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29-33).”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왜 나의 제자가 되었느냐?”, 또는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이 ‘그리스도(메시아)’ 라고 믿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고, 스승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는 “저희는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스승님을 따릅니다.”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바꾸면, “너희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
또는 “너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입니다.
대답은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또는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유가 처음에는 ‘현세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교리를 잘 모르고, 구원이 무엇인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때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더라도 교리를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알고 만나면서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냥 현세적인 소원을 비는 것으로 멈추어 버리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여기서 ‘불쌍하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외면하고 현세적인 것만 원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만 바라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쌍한 일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신앙인이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병이든지 어떤 사고든지 여러 가지 급박한 상황이 생길 때가 많고, 그럴 때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여정을 더 잘하기 위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만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신 것은,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은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후에야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먼저 믿어야만
‘예수님은 그리스도’ 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할 자격이 생긴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모두 체험하고
믿음이 완성된 다음에 만들어진 책입니다.
기록할 때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일 뿐이고,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 때마다 받아 적은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을 하실 때마다 적은 현장 기록도 아닙니다.
‘성전 정화’ 장면에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
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말리다가 크게 혼난 일은, 그때까지는 ‘머리로만’ 믿고, 아직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마귀 들렸다는 뜻도 아니고, 사탄의 길을 걷고 있다는 뜻도 아니고, 그가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이 사탄이 하는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제자는 스승이 가는 대로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세속에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앞설 수도 있지만,
신앙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면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4-25)”
4)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바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이고, ‘사람의 일’은 사도들의 ‘인간적인 애정과 판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직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모르던 때였고,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십자가의 길’을 말렸을 뿐입니다.
<나중에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되고 믿게 되었을 때에는, ‘온 삶’으로 예수님 뒤를 따르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