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585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삼수갑산의 고장
양강도의 한복판에 위치한 갑산군은 조선시대에 갑산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죽을 때 죽을망정 할 말은 해야겠다는 뜻이 담긴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가도 할 말은 있다’ 또는 자신에게 닥쳐올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떤 일을 단행할 때 하는 말인 ‘삼수갑산을 가서 산전을 일궈 먹더라도’라는 속담이 이어져 내려오는 갑산군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동쪽으로는 건주위 동량북계까지 105리요, 남쪽으로는 단천군계까지 90리, 북청부계까지 132리다. 서쪽으로는 삼수군계까지 65리, 북쪽으로는 혜산진까지 115리, 서울과의 거리는 1383리다.
갑산군은 본래 허천부(虛川府)였다. 고구려의 옛 땅으로 고려 때는 여진족이 살았으나 세종 때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여진족을 몰아냈다. 예로부터 삼수갑산이라고 하면 하늘을 나는 새조차 찾지 않는 산간벽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땅이 아주 기름지고 기후가 몹시 추웠고, 당시 호수는 356호, 인구는 891명이었다. 갑산 땅으로 유배를 왔던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그중 한 사람이 허난설헌의 오빠 허봉이었다. 오빠가 갑산으로 유배를 간다는 소식을 들은 허난설헌은 「갑산으로 귀양 가는 오라버니께」라는 애달픈 시 한 편을 남겼다.
멀리 갑산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고원 길에 행색이 바쁘겠네.
귀양 가는 신하야 충신 가태부와 같다지만 임금이야 어찌 초회왕(楚懷王)일까.
가을하늘 아래 강물은 잔잔하고 변방의 구름은 석양에 물들겠지.
서릿바람에 기러기 울고 갈 제 걸음을 멈추고 차마 가지 못하리라.
“무당을 좋아하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높이 여긴다. 무당과 박수를 믿어 질병에 걸리면 소를 잡아 귀신에게 기도한다”라고 실려 있는 갑산군은 개마고원을 따라 백두산까지 뻗어 있는 산줄기를 타고 해발 800~1300미터의 큰 고원 지대에 위치한다. 나라 안에서 높은 산과 높은 봉우리, 높은 고개가 많아 갑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갑산군에서 제일 높은 산은 해발 2448미터의 두설봉이다. 이곳으로 부임했던 심수경은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지었다.
변방에 가을 다하려 하니 모든 숲에 붉은 단풍 비치네.
강은 마치 중국과 뚜렷이 가르듯 땅은 흡사 역말 길 그치듯 하네.
풍속은 말 타는 일 익히길 숭상하고, 정자의 이름은 활을 건다는 괘궁정.
재주도 없이 함부로 절도사 되어 오랑캐 굴복시킬 대책도 없다네.
최전방의 절도사가 되어 여기저기 바라보면 수심만 쌓이고, 혹여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난감하기만 한 심사를 노래한 시다. 이곳의 물산은 다른 지역의 물산과 사뭇 다르다. 구맥(瞿麥)이라고 하는 귀리, 화피(樺皮)라고 하는 벚나무 껍질, 초서피(貂鼠皮)라고 하는 노랑가슴담비 가죽, 수달, 사향, 수포석 등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주요 물산이었다.
개마고원 초원거대한 분지 안에 구릉이 연이어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고원으로, ‘한국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은 북쪽의 압록강, 동쪽의 운총강계곡, 남쪽의 장백정간과 백두대간에 둘러싸여 있다. 지역에 따라 서부의 낭림군 일대를 낭림고원, 남서부의 장진군 일대를 장진고원, 부전군 일대를 부전고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마고원은 행정구역상 삼수ㆍ갑산ㆍ장진ㆍ신흥ㆍ김형권 군 등에 위치하며, 중생대 구조운동 후 준평원이 되었다가 신생대 3기 말에 일어난 경동지괴 운동에 의해 융기되어 고원이 되었다. 한편 일부 지역은 4기 초 용암이 분출되어 용암대지를 형성하였다. 북부의 압록강 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하나 남쪽과 동쪽에서는 급경사를 이룬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 지류에는 갑산ㆍ장진ㆍ무산 등의 대지가 펼쳐진다. 허천강과 장진강 사이에는 북수백산ㆍ차일봉 등이 솟은 북수백산맥이 뻗어 있고, 부전강과 장진강 사이에는 연화산ㆍ희색봉 등이 뻗어 있으며, 장진강 서쪽에는 와갈봉ㆍ낭림산 등이 솟아 있다.
두만강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 강변에서 빨래를 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개마고원에는 허천강ㆍ능귀강ㆍ장진강ㆍ부전강ㆍ삼수천ㆍ후주천ㆍ후창강 등 압록강의 지류가 흐르며, 강의 계곡에는 부전호ㆍ낭림호ㆍ황수원저수지 등이 있다. 이 하천과 저수지들은 수력발전뿐만 아니라 뱃길과 뗏목 수송로로도 이용되었다. 대륙성 기후 특성이 뚜렷한 곳으로, 지역에 따라 연평균 기온은 1~4도,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18~20도, 7월 평균 기온은 16~21도다. 백조봉ㆍ칠발산ㆍ활기봉ㆍ동점령산ㆍ백세봉ㆍ희색봉 등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겹겹이 솟아 있다. 이곳 삼수갑산을 한 편의 시로 남긴 사람이 김소월이다.
삼수갑산 왜 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메뇨.
오고 나니 기험(奇險)하다. 아하 물도 설고 산 첩첩이라.
내 고향을 도로 가자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삼수갑산 멀더라
아하 촉도지란(蜀道之亂)이 예로구나. 삼수갑산이 어디메냐.
내가 가고 내 못 가네. 불귀(不歸)로다. 내 고향을 아하 새더라면 떠가리라.
임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내 못 가네.
오다가다 야속하다.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둡네.
내 고향을 가고 지고 삼수갑산 날 가둡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이렇게 오지이자 첩첩산중으로 알려진 삼수갑산을 자진해서 왔다가 세상을 등진 사람이 대한제국 말의 고승 경허선사다. 말년에 승복을 벗어던지고 ‘경허’라는 이름을 ‘난주(蘭州)’라고 바꾼 그는 삼수갑산에서 서당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어느 날 그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 내일 가네.”
“가시다니 어디로 가십니까?”
“그저 바람 따라 갈 뿐이네.”
다음 날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갔을 때 서당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난주는 정좌한 채 영면한 상태였다. 제자들은 난주를 양지바른 야산에 묻었다. 3년 뒤 그의 제자인 만공이 찾아와 보니 묘 앞에 ‘난주선생지묘’라고 쓰인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만공은 다비를 하고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시비에 물들지 않는 바람 같은 손[객(客)]이 있어
난득산(難得山) 기슭에서 세월 밖의 노래[겁외가(劫外歌)]를 불렀네.
갈 길도 다하고 이 저문 날에
먹지도 못하는 저 두견새가 솥 적다 솥 적다 울고 있네.
두만강 하류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며 퇴적작용으로 생긴 섬이 많고 강 어귀에는 삼각주가 형성되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북한ㆍ중국ㆍ러시아 3개국이 국경을 이루고 있어 군사 요충지였다. 또한 두만강 상류의 무산 부근엔 철광석, 중류의 회령군에서 하류의 아오지에 걸쳐 갈탄 산지가 있어 손꼽히는 지하자원 지대를 이룬다. 또한 임야지가 전 유역의 94퍼센트를 차지하므로 임야자원도 풍부하다.<검색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