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속에 뼈가 있다
"말 속에 뼈가 있다." 사자성어로 만들어 '언중유골(言中有骨)'
이라고 쓰기도 하지만, 순수 우리 속담이다.
"말 뒤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뜻이 있다."는 뜻이다.
'숨은 뜻'을 '뼈'로 대체한 표현이기에 수사법 가운데 환유(換喩)에 해당한다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말'로 기록되어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불교이지만, 간화선의 경우 수행의
도구인 화두도 '말'이고, 깨달음을 저울질 하는 법거량도 '말'이며,
깨달음 후에 짓는 오도송도 '말'이고,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는 열반송 역시
'말'로 이루어져있다. 역설적이게도 선(禪)은 철저한 '언어의 종교'다.
보리달마 스님의 서래(西來) 이후 선불교가 탄생했다고 하지만,
동아시아 사상사의 흐름에서 보면 선을 탄생시킨 교학적 토대는
인도 중관학의 변용인 삼론학(三論學)이다.
삼론이란 인도 중관학의 대표적인 문헌인 《중론》과 《십이문론》과
《백론》의 세 가지 논서를 일컫는 말이다. 구마라습(344~413년)
스님이 번역한 이들 세 논서에 의거한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인도 중관학을 동아시아에선 삼론학이라고 부른다.
구마라습 스님이 이들 세 논서를 번역, 소개함으로써 동아시아인들은
반야경에서 가르치는 공성의 의미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고,
이 때의 삼론학을 고(古)삼론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383~414년)의 논문 모음집인
《조론》등에서 고삼론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구마라습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흉노족의 침입으로 (418년)
장안이 황폐화 되면서 고삼론의 가르침은 망실되고 만다.
그 후 6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고구려 요동 출신의 승랑(僧朗, 450-530년 즈음)
스님이 남조(南朝) 불교계에 나타나면서 삼론학을 부흥하여 천태학,
선불교, 화엄학의 발생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승랑이 전한 삼론학을 신(新)삼론이라고 부른다.
승랑의 증손제자인 길장이나 혜균의 저술을 통해 승랑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데 승랑의 사상 가운데 '이내이제(理內二諦)'이란 게 있다.
"진제와 속제의 이제(二諦)는 모두 이법(理法) 속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불전의 가르침 가운데, 외견상 상충하는 듯한 부분이 많다.
무아와 윤회, 공과 계율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제의 틀을 도입하면 교리의 모순은 사라진다.
'무아, 공'과 같이 분별을 타파하는 가르침은 진제이고 '윤회, 게율'과
같이 분별에 입각한 가르침은 속제로, 서로 범주가 다르기에 상충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이제는 교법, 즉 '가르침'의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이를 이제시교론(二諦是敎論) 또는 약교이제설(約敎二諦說)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진리를 달에 비유하고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가르침에 비유한다.
여기서 이법은 달, 교법은 손가락에 해당한다.
이 비유에서 손가락과 달이 분리되어 있듯이,
일반적으로 교법인 가르침과 이법인 진리는 다르다고 본다.
그런데 '교법인 이제의 손가락'이 '이법인 진리의 달'에 속에 있다는 것이
승랑의 '이내이제' 사상이다. 선승들의 파격적 '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마치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듯이,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파격적 언행 그 자체가 진리의 현현이다.
요컨대 선승들의 경우 "손가락이 그대로 달이다." 말 속에 뼈가 있듯이···.
속담 속에 담은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