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420주년 특별전..
[개막식과 충무공 편]
이흥우 관리부장
지금부터 임진왜란 420주년 특별전 개막 축하 테이프 컷팅을 하시겠습니다.
호명되시는 내빈께서는 앞으로 나오셔서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선영제 전쟁기념사업회장님,
2. 류한성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부회장님,
3. 이수희 무공수훈자 중앙회장님,
4. 이필섭 장군님(정책자문위원장),
5. 김동호 장군님,
6. 윤은기 중앙공무원교육원 원장님,
7. 전보삼 한국박물관협회 회장님,
8. 이대용 장군님,
9. 이양구 군사편찬연구소장님,
10. 박용배 6·25전쟁 60주년사업 단장님
11. 시공업체 예와가 이재완 대표께서 앞으로 나오셔서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테이프 컷팅에 앞서 잠시 사진촬영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커팅은 사회자 구령에 맞추어 하시겠으며, 참석 내빈께서는 박수로 축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左☞ 예와가 이재완 대표, 민경백 장군, 이양구 소장(군사편찬연구소), 이대용 장군,
류한성 부회장(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선영제 전쟁기념사업회장, 이필섭 장군(정책자문위원장),
김동호 장군, 윤은기 원장(중앙공무원교육원), 전보삼 회장(한국박물관협회),
이어서 임진왜란 특별기획전을 관람하시겠습니다.
서규화 학예부장이 안내하겠습니다.
서규화 학예부장의 해설이 진행된다.
임진왜란의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해설들을 간추려 보자
1592(壬辰 宣祖25년) 4월 일본군 20여만명 부산 상륙 조선 침략 개시부터
12월 의병 김면·최경희·정인홍 등 성주성 회복
임진년의 전쟁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진주대첩 기록화
김시민장군 이하 군민들이 일치 단결하여 싸우던 진주 대첩의 상황을 그린 기록화(김인화 작)
초입에 설치된 ‘신기전기 화차’
1451년 문종 때 처음 제작되었으며 신기전기를 화차의 수레위에 올려 놓고 사용.
수레의 발사 각도를 조절한 뒤 각 줄의 신기전 약통에 부착된 점화선을 한데 모아 불을 붙이면 동시에
15개씩 윗층에서 아래층까지 차례로 또는 한꺼번에 100발이 발사
1592년 4월, 일본은 “조선에 길을 빌려 당나라를 정벌하겠다”는 구실로 평화로운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 때 조선은 200여 년간 지속된 평화 속에서 상무정신이 약화되어 있었다.
조선은 무기력하게 20일만에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선조 임금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양반 지배층은 분열하고, 군역은 부패하여 군대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의 허약한 실체를 그대로 들어 냈다.
조선은 전쟁을 대비하지 않고 평화로운 일상에만 안주했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했다.
적에게 속수무책으로 국토를 유린 당하게 되었다,
이 후 300년이 넘어 지난 후에도 국방을 소흘히 한 결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36년간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이제 또 일본은 주변국들과 영토분쟁을 야기하면서 군사적으로 재무장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420년 전 임진왜란이 준 교훈은 현재에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임진왜란, 예견된 전쟁.
16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은 명나라의 정치적 혼란한과 쇠퇴의 기미를 틈타 여진족이 다시 힘을 키웠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후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경제부흥과 강력한 군사력을 토대로 불평세력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는 한편 자신의 대륙진출 야욕을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다.
동래부 순절도 (보물 392호)
1592년 4월 15일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을 받아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 이하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그린 그림으로, 부산진 순절도(보물 391호) 1592년 4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부산진에서
왜군과의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과 함께 보물로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점령한 왜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조선군은 왜군에 비해 부대 규모, 무기 등에서 현저한 열세를 보이며 연패를 거듭하였다.
왜군이 부산에 착륙한 지 20여일만에 서울이 점령되었고,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을 가야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왜군의 침투로
전쟁이 시작되다.
대륙진출을 꿈꾸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9개부대 15만 8,700명의 육군 병력과 구군 9,000명, 후방 경비 임무를 맡은 1만 2천명의 병력으로 침략군을 편성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부대가 부산으로 몰려오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1만 8,700명을 실은 700여 척의 일본군 대선단은 오전 8시 쓰시마의 오우라항을 출발, 하루 밤을 부산 앞바다에서 지낸 뒤 이튿날 부산진성을 공격하였다.
풍전등화
임진왜란 초기 해상방어를 담당했던 경상좌 · 우수군이 완전 붕괴되어 제해권을 상실하면서 조선의 방위체제는 위기상항에 빠졌다. 따라서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부산에 상륙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경상도 연안은 초토화 되었다.
육지에서의 방어 역시 비효율적인 방어 전략과 무기 체제의 열세, 훈련 미비로 인해 연패를 거듭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은 침략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못되는 시기에 한성까지 진격하였고, 평안도 및 함경도 지역까지 유린하기에 이르렀다.
조·명 연합군이 반격하다
일본군이 침력을 개시한 지 한 달도 체 되지 않아 호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의주로 피난한 선조까지 위협을 받게 되자 조선 조정은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명은 일본군이
‘가도입명(假道入明:조선에서 길을 빌려 명을 친다)’을 내세워 평양을 함락시키자 자국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592년 7월 15일 명의 요양부총병 조승훈이 6천의 병사를 이끌고 들어와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무리한 공격과 일본군의 기습작전에 의해 대패함으로써 1차 원군은 실패로 끝나고 강화협상에 들어갔다.
평양성 탈환도(平壤城 奪還圖)
1592년 12월 25일 4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온 이여송은 1593년 1월 6일부터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서 조선군과 함께 고나시부대로부터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그 결과 함경도에 머물던 가토 부대도 고립을 우려하여 한성 쪽으로 철수하면서 개전 이후 수세에 처했던 뮥전의 형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그림은 평양성 탈환전투를 묘사하면서 명군 일색으로 명을 강조하여 그린 정치·실용적 목적이 강한 전쟁기록화이다. 당시의 존명의식과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평양성 탈환전투와 행주대첩
명의 2차 원군으로 1592년 12월 요동에 도착한 이여송과 4만의 병력은 1593년 1월 조선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공격, 탈환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한성 이북의 전 병력을 한성에 집결시켜 한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명 연합군은 한성 이북의 대부분 지역을 단시일 내에 되찾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전세는 크게 변하게 되었다.
한편 전라도 관찰사 권률 장군이 명군과 함께 도성 수복을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2월 12일 대병력으로 공격했다. 권률 장군과 관군은 격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행주산성의 승리는 일본군의 한성 철수에 기여하였다.
강화회담과 정유재란
전쟁이 장기화되고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자 일본은 강화 교섭을 요청하였다.
7년의 전쟁 중에 전투기간은 1년 6개월이며, 나머지 기간은 외교전인 강화회담이었다.
조선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92년 8월 평양에서 시작된 명과 일본의 협상은 일본군이 한성에서 퇴각한 1593년 이후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상호 거짓 보고와 전승자로서의 태도와 조건만을 요구해오던 강화는 1596년(선조 29)에 이르러 결국 결렬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선조 30) 재침략 명령을 내리고, 1만 4,500명의 병력을 앞세워 공격해 옴으로써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행주대첩기록화(幸州大捷記錄畵)
1593(선조 26)년 2월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권률이 1만여명의 병사로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는 일본군 3만여명을 크게 무찌른 전투 장면을 담은 기록화.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이며,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입고 돌을 날아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장전(長箭): 싸움에 쓰는 긴 화살.
통아(筒兒): 활과 화살을 꽂아 넣어 등에 지도록 만든 물건
편전(片箭) : 애기살로도 불리는 화살로 보통 화살의 절반 정도 크기로 30cm 남짓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화살촉이 날카로워 갑옷과 투구를 뚫을 수 있는 전투용 화살
통개(筒箇) : 활을 쏠 때 화살집과 활을 넣는주머니를 연결하여 내기 쉽도록 만든 것
소승자총통(小勝字銃筒)
가승자총통(加勝字銃筒)
조총(鳥銃)
上大- 불랑기 4호(佛狼機 四號)
* 길이 97.5cm. 구경 4cm.
조선중기 이후에 불씨를 손으로 화약선에 점화 발사하는 화기로는 유일한 후장식(後裝式) 화포이다. 이 화포는 불랑기 중에서 네 째로 큰 불랑기 4호로, 1994년 2월 6일 목포시 석현동의 동아콘크리트 모래 하치장에서 발견되었으며, 명문이 자세하지 않아 제작연대는 알 수 없다. 국립경주박물관 대여품
上小- 불랑기 자포(佛狼機 子砲) 보물 제861호
1~5호까지 있으며, 발사틀 구실을 하는 모포(母砲)와 실탄을 장진하여 모포에 삽입해서 발사하는 자포(子砲)로 분리되는 후장식(後裝式)이다. 자포는 5개씩 있어 연속발사할 수 있다. 쏘는 방법은 자포에 중약선(中藥線)·반약(半藥)·토격(土隔)·연환(鉛丸) 등을 장진하고 불랑기모포(佛狼機母砲)에 장진한 자포를 삽입한 뒤에 자포가 발사반동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병부(柄部:손잡이) 쪽에 달린 멈치못을 꽂은 다음 점화하여 발사했다. 육군박물관에 소장
下左-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선조 때 이장손이 만든포탄. 임진왜란 때 경주 부윤 박의장이 이를 사용하여 경주성을 탈환하였으며, 해군의 함포에도 이용되어 많은 일본의 함선을 부수었다.
下右- 황자총통(黃字銃筒) 보물 제886호
총통은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화포로 그 크기와 사용되는 화약의 양, 발사거리에 따라 4가지이다. 큰 순서대로 천자문에서 이름을 따 천(天)·지(地)·현(玄)·황(黃)자총통이라 하는데 그 중 가장 크기가 작은 것이다. 편리한 이동을 위한 것으로, 1587(선조 20)년에 만들었다.
지자총통 [地字銃筒]
천자총통(天子銃筒) 다음으로 큰 우리나라 고유의 화포이다.
지자총통으로는 보물 제862호로 지정된 것과 보물 제863호로 지정된 것이 있다.
모두 1557년(명종 12)에 만들어진 것으로 청동제이다.
보물 제862호에는 "地嘉靖三十六年三月日金海府都會監官柵管李大胤匠人金連"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863호는 처음 것과 크기와 성능이 비슷하지만 손잡이의 위치나 도화선 구멍의 위치가 다르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충무공 편]
난중일기(亂中日記) 국보 제76호
임진왜란(1592~1598) 때 이순신(1545~98)이 쓴 일기.
누구에게 h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으므로 본래는 이름이 없었으나, 1795(정조 19)년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할 때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지금꺼자 불리고 있다. 엄격한 진중 생활과 국정에 관한 솔직한 감회, 전투 후의 비망록과 수군 통제에 관한 비책들이 실려 있다. 소장: 이순신 기념관
이순신 선무공신교서(李舜臣 宣武功臣敎書) 국보 제1564-1호
1604(선조 37)년에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 18명에게 공신 칭호를 내린 것으로 이순신에게 1등을 내리고 덕풍부원군에 봉한 교서. 77행에 걸쳐 이순신이 세운 공적에 대한 찬양과 공신으로 책훈함에 따른 상(본인과 부모, 처자를 3계급 승진 시키고, 노비 13구와 토지 150결, 은자 10량, 표리 한단,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는 내용이다. 소장: 이순신 기념관
선유호상교서(宣諭犒賞敎書) 국보 제1564-2호
1596(선조 29)년 9월 15일에 이순신 이하 각 진의 군사들에게 병조좌랑을 보내어 상을 주고 잔치를 베풀며 노고를 위로하는 교서. 소장: 이순신 기념관
위에 귀도(鬼刀)
영패(令牌) - 조선시대
서간첩(書簡帖) 국보 제76호
<난중일기>의 부록격으로 이순신이 친척들에게 보낸 6편의 편지를 서첩으로 만든 것.
이순신의 인간미와 함께 전란을 걱정하는 애틋한 심정을 볼 수 있다. 소장: 이순신 기념관
임진장초(壬辰狀草) 국보 제76호
<난중일기>의 부록격으로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주요 전투의 출전 경과, 일본군의 현황,
군사상의 건의사항, 진중의 경비 및 준비 상황들을 조정에 올린 보고서(장계)의 초본 소장: 이순신 기념관
이순신 시판(李舜臣 詩板)
이순신의 류성룡이 시를 차운한 시를 판각함
‘次 統相忠武公李舜臣
土納神龜未覺飢 토납신귀미각기
신령스런 거북을 삼켰다 토했다 배고픈 줄 모르니
定禪老釋已無思 정선노석이무사
참선에 든 늙은 중은 이미 사념이 없어라
猶應一念難消盡 유응일념난소진
그래도 응당 한 가지 생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리니
記我潭邊問朮時 기아담변문출시
내가 못가에서 백출을 구하던 때를 기억하게나
이덕홍 거북선도(李德弘 龜船圖)
이덕홍(1541~1596)의 간재선생문집 책판 중 거북선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홍은 세자를 따라 성천까지 호종하고, 상소문에 거북선도를 첨가하여 바다에는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를 사용할 것을 진언했다.
신구이순신차초(申救李舜臣箚草)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투옥되었을 때, 정탁이 이순신의 공적을 나열하고 장수가 상황을 판단해 병력을 움직이는 것이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음을 역설하여 이순신을 구명하고자 올린 상소. 소장: 안동유교박물관
정탁영정(鄭琢影幀)
정탁영정(鄭琢影幀) 보물 제487호
1604(선조 37)년에 호성공신 3등 책록을 기념하여 선조의 왕명에 의해 그려진 정탁(1526~1605)의 공신상. 정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송하였으며, 정유재란 때는 광해군을 호종하였고, 목중의 이순신이 죄가 없음을 아뢰어 구원하는 등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안동유교박물관 소장
정탁 호종공신(扈從功臣) 교지
코무덤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무자비하게 조선 군사와 백성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묻은 곳.
아래 단지는 당시 절여 담았던 옹기
이순신의 장검(지휘 및 수양에 사용했던)을 체험코너 들어보세요~
일본갑주(日本甲冑)
17세기 일본 무사의 갑옷과 투구.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갑옷 및 투구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
출처: 하일사랑의 쉼터 (일운회) 원문보기 글쓴이: 만주를 찾아서
첫댓글 임진왜란 420주년 특전 개막식을 현장에서 동참한 정서를 느끼며 그 의미 되새겨보는 시간 가졌습니다.감사합니다.
보스님 감사 합니다..제 개인 카페에 올린것을 이곳에서 같이 공유 하고자 하나 가져 왔습니다..보스님 휴일 즐겁게 잘 보내십시요..
참 왜구놈들~~~
임진 왜란의 한장면 입니다,,새해福 많이 받으세요
첫댓글 임진왜란 420주년 특전 개막식을 현장에서 동참한 정서를 느끼며 그 의미 되새겨보는 시간 가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스님 감사 합니다..
제 개인 카페에 올린것을 이곳에서 같이 공유 하고자
하나 가져 왔습니다..
보스님 휴일 즐겁게 잘 보내십시요..
참 왜구놈들~~~
임진 왜란의 한장면 입니다,,새해福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