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코 8,34-9.1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하는 것이 싫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말씀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든 에너지의 98%를 그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썼었다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몇 더 들어왔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보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급이 낮은 사람들은 얼른 자신들의 술잔을 비웠습니다.
보스는 그냥 보지도 않고 아무 곳에 술을 부었습니다.
졸병들은 술을 따르는 곳에 재빨리 술잔을 갔다대어 술을 받았고 넘치기 전에 약간 잔을 들어 올려 따르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보스는 다른 곳을 보며 본인이 원하는 곳에 술을 부었고 그 때마다 졸병들이 잔을 갔다대며 술을 한 방울도 바닥에 흘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스가 주는 술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도 웃어른이 따라준 술을 다른 곳에 붓거나 버린다면 큰 실례가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이고 거룩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그 비운 만큼만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랑을 흘려버리거나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사랑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며 그 한 사람에게 온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더 합당한 사람을 더 사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며 받아들이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에너지는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받아들이겠다면 언제든 사랑할 준비를 하되 그 사람에게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코 8,34―9.1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꼭 끌어안으십시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는 예수님의 강력한 권고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제 가슴을 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를 따르는 사람’ 즉 당신의 제자(弟子)가 되기 위한다면,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① 자신을 버리고. 40년 가까이 버리고 또 버린다고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산더미 같습니다.
징글징글한 악습, 수시로 솟구치는 분노,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무력감과 우울감, 끝까지 남아 괴롭히는 깊은 상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자만심...
버리는 일, 말은 쉽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버리고 또 버리고, 나 자신조차 버리고, 버렸다는 생각조차 버린 어느 날, 그토록 염원했던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리라 확신합니다.
그때 우리는 보다 기꺼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토록 염원했던 주님의 현존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②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어떤 것들인가? 생각해봅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니게 되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참 큰 십자가입니다.
내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현실 또한 만만치 않은 십자가입니다.
매일 백번 천번도 더 탈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고달픈 삶의 현실 역시 큰 십자가입니다.
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그는 십자가 중의 왕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들을 외면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십자가들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보다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 십자가들을 짊어지라 하십니다.
주어진 십자가들을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라 하십니다. 꼭 끌어안고 가라 하십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십자가는 점차 괴로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성장과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선물 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③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매일 새롭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한 고을에 오래 머무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옮겨 다니셨습니다.
지리적, 공간적인 이동도 이동이지만, 영적인 이동 역시 거듭되었습니다.
나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또다시 삶으로. 높음에서 낮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어찌 그리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인지 모릅니다.
다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대하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후회스런 순간들,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참했던 순간들, 죽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깊은 상처, 쥐구멍으로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부끄러움, 큼지막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흑역사들에 연연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들, 부단히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어제의 나를 딛고 기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금요일 강론>
(2025. 2. 21. 금)(마르 8,34-9,1)
<희망, 믿음, 기쁨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8,34-9,1)”
1) 여기서 ‘부끄럽게 여기다.’ 라는 말은, “관계를 끊다. 관계 맺기를 거부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누구든지 나를 믿기를 거부하고,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또는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면”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그는 마지막 날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그 자신이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는, 영혼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죄 속에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는,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 재림하실 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하시는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2)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한탄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 23,37-39).”
이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박해자들과 죄인들도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대상’입니다.
<아무도, 그 어떤 죄인도 구원사업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인데, 구원받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자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기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입니다.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는,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그날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반대로, ‘지금’ 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어떤 어려움’은 일상생활의 ‘작은 불편’에서부터
목숨을 잃는 일, 즉 ‘순교’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누구든지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희망하기 때문이고, 그 구원을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나의 희망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입니다.
바로 그 확신에서 ‘기쁨’이 생깁니다.
희망, 믿음, 기쁨이 곧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처음부터 신앙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이 힘들기만 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희망이 잘못되었거나, 즉 잘못된 것을 희망하는 사람이거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4)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희망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사람은 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입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야분원의 나눔입니다
+ 마르코 복음 8,34ㅡ9,1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자들과 군중에게 당부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께서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영속적이고 전인적인 방식으로 예수님께 향해야 하며, 예수님과의 친교가 다른 모든 가치보다 앞설 때 가능합니다.
살면서 내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겨운 일을 감당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로부터 구원을 기다리는 참된 제자의 자리입니다.
* 기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시는 예수님,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면 목숨을 잃을 것이고, 당신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는다면, 당신께서 몸소 도와주시어 제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각자는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목숨을 가지고 있고, 목숨과 바꿀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을 통하여 목숨을 얻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따르는 것만이 사라지고 마는 지상의 삶을 뛰어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당신의 생명을 살기 위하여 제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십시오!
믿음과 지혜의 성령을 저희에게 보내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