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천위 기행 31-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우인회(友人會)는 유가(儒家)의 후손들로 모여진 유림단체의 하나이다 운계형님께서 가입하여 회 발전에 기여하셨다. 현재는 정종식씨가 운계형님의 뒤를 이어 활동하고 있다. 불천위기행은 회원이 기록한 집도 있고, 직접 탐방하여 자료를 모아쓰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자료는 직접 사람이 와서 작성한 자료이다. 현재 모아진 자료 수는 46편에 이르고 있다.>
책에 파묻힌 산중의 선비, 전장으로 달려간 까닭은 ?
“대국란(大國亂)에 사대부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아들들과 함께 격문 만들어 의병 모집 왜적에 대항
전장서 공 세우고도 벼슬 뿌리치고 고향서 후학양성
‘조수(鳥獸)와 산림(山林)은 공이 멀리 숨었다하고
병마(兵馬)와 병기(兵器)는 공이 잘 싸웠다 말 하네
자벌레처럼 굽히기도 하고 매와 같이 날기도 하였으니 시대가 그러했다.
공이 무엇을 구했겠는가 그 의(義)를 행하였다
구름처럼 산위에서 나와 삼농(三農)을 윤택하게하고
폈다가 거두어서 태공(太空)으로 돌아갔도다.‘
영의정 조현명이 지은 호수(湖叟) 정세아(1535-1612) 신도비에 나오는 글이다.
호수(湖叟)는 일개 유생으로 지냈으나 국난이 발생하자 분연히 일어나 국난극복을 위해 의병을 모아 전장에 투신했다. 그리고 국난이 평정된 뒤에는 모든 공은 남에게 돌리고 아무런 욕심이나 미련 없이 다시 고향의 제자리로 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공부하고 살다간 선비이다.
1.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호수(湖叟)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에서 태어난 호수는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자랐다. 부친은 자식들에게 특히 효제(孝悌)를 독실하게 가르쳐다.
부모의 뜻에 따라 1558년(24세)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생각이 없었다.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의리를 강구(講究)하고 날마다 시와 예로써 자녀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어버이가 세상을 뜨자 자양 산중에 은거하면서 글공부와 더불어 일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국은 호수를 산중에 편안하게 은거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영천성 복성한 호수(湖叟).
1592년 임진왜난이 일어나자 호수는 그해 5월 책을 덮고 국난극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장자 의번에게 “ 불행하게도 나라에 대란이 일어나서 임금께서 피란하시는 이 난국에 초야에 묻힌 사대부로서 어찌 안연(晏然)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강약은 상대가 되지못할지 모르나 구제를 못하면 죽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여러 아들들과 함께 전열을 가다듬고 격문을 만들어 의병 모집을 했다.
격문을 보고 듣고 원근지역에서 모여든 의병이 한 달도 안돼 90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곽재우는 현풍에서 권응수는 신녕에서 의병을 일으켜 함께 도와가며 왜적과 맞섰다. 그런데 당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의병의 공적이 자신의 공적보다 우월할 것을 두려워해 수시로 의병활동을 저해하고 억제하자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어 초유사 학봉 김성일에게 글을 올려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장수들이 겁이 많으니 목을 베어야한다고 진정하기도 했다. 학봉은 그 충의(忠義)를 칭찬하면서 조치를 취했고 그 후 의병활동이 자유로워졌으며 마침내 영남의 반을 수복하였다.
7월에는 병마절도사 박진이 호수를 의병대장으로 삼았고 또 초유영(招諭營)에서는 호수를 영천군의 의병장에 임명했다. 그 후 권응수, 박의장, 전대임 등과 더불어 영천성에 머물던 왜적을 궤멸시키고 성을 회복하였다.
그 공을 논할 때 누가 “이번 전공은 호수선생으로 부터 나온 것인데 누가 성생의 공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해서 부귀를 버리고 취하지 않습니까”하니 호수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직분이다. 내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의 위급상황에 따른 것일뿐이지 공명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다행히 신령한 힘을 얻어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으면 족하지 그 외에 무엇을 바라겠는가”라고 답했다.
3.호수(湖叟)는 경주성 전투에서 아들을 잃다.
8월에 경주의 적을 공격할 때는 호수가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병마절도사 박진의 병사와 합세 아들 의변과 함께 친히 선봉장이 되어 혈전을 벌렸다. 그때 적의 기병과 복병의 기습으로 절도사의 군사가 무너지고 호수의 의병만 고군분투하면서 의번을 비롯해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성을 되찾았다.
이 전투에서 의번은 부친이 적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는 적진을 향해 돌진해 포위망을 뚫었고 호수는 그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번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면서 계속 부친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부친을 구하기 위해 세 차례나 포위망을 드나들면서 의번의 몸은 수십 군데나 창을 받고 만신창이가 된 채 적과 싸우다가 탔던 말이 총알에 맞아 포위당하게 되고 결국 휘하 장사 10여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4.의번의 무덤을 시총(詩塚)이라 부른다.
그리고 의번은 부친을 구하고자 세 변째 적진에 뛰어들면서 그의 종 억수에게 “군사가 패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전사한줄 알았다) 나는 장차 도적들의 손에 죽기를 작정했다 하자만 너는 따를 필요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하고 말했다. 그러자 억수는 울면서 “주인과 종의 의리가 군신이나 부자의 의리와 같다고 압니다. 이제 주인이 죽기를 결심했는데 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적들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했다.
경주성 전투에서 부친을 구하려다 전사한 의번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호수는 그가 남긴 시와 친구들의 만사 및 제문을 모아 그가 입던 의관과 함께 관에 넣어 장사를 지냈는데 사람들이 그 무덤을 시총(詩塚)이라 불렀다.
이 시총은 영천댐 주변의 기룡산 자락에 있는 정씨묘역인 하천묘역에 있다. 그리고 시총 바로 아래에는 그의 종 억수의 무덤이 있고 매년 묘사 때 제사를 지내며 그 의리를 기리고 있다 생사를 같이한 주인과 종이기에 죽어서도 함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시총비명(詩塚碑銘-오광운 찬)에 있는 글의 일부다. ‘시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문(詩文)은 체백(體魄)에 대신 할 수 있으니 시로써 무덤을 하는 것은 예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반드시 뼈로 장사 지낸 것을 옳다 하고 시로 장사 지내는 것은 부당하다 생각나...., 그 사람의 시는 오래되어도 썩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 무덤이 얼마나 위대 하겠는가“
5.호수(湖叟)는 전공은 다른 이에게 돌리고 고향에 은거하다.
1593년에는 명나라 구원병의 도움으로 난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호수는 거느림 군사를 생원 조희익에게 넘겨준 뒤 자양 옛 고장으로 돌아와 시내 위에 집을 짓고 스스로 강호수(江湖叟)라 부르며 유유자적하였다.
1599년에는 자호정시를 세우고 후학양성에도 힘썼다. 당시지은 시 ‘자호정사에 올라
(登紫湖精舍) 일부다.
장년의 뜻 적장의 머리 벨 것을 기약했건만
쇠잔해진 이 몸 귀밑털이 셀 줄이야
노쇠하고 병드니 어찌 출세 길 달릴 것인가
한가로이 물러나서 청류를 구경함이 내 분수에 맞다.
백구는 강호수를 싫어하지 않고 찾아주니
이제부터 청안으로 죽을 때 까지 쉬리라.
이듬해에는 체찰사 오리 이원익이 호수의 명성을 듣고 자호정시를 찾기도 했다.
1602년에 승사랑 군자감봉사에 제수되었으나 “전쟁터에 부자가 출전해 아들이 전사한 터에 어떻게 공을 받고 벼슬길에 나아가겠는가“하고 받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임란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중건하고 사액을 받았다. 1605년에는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채록(採錄)되었다.
1607년에는 이원익의 천거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양산, 물금 지역 역장)에 임명되어 병화로 폐허된 역을 복구하는 등 선정을 펼친 뒤 곧 고향으로 돌라왔다. 후에 그곳 아전과 졸병들이 그 선정을 기려 송덕비를 세웠다. 황산도 찰방을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머물다 1612년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6.호수(湖叟)와 교우한 사림(士林)들
사귄 친구로는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여헌(旅軒) 장현광, 창석(蒼石) 이준, 모당(慕堂) 손처눌 등이다.
호수가 별세한 후 여헌은 조상하는 글에서 “공이 고을에 계실 때는 경박한 자가 부끄러워할 줄 알고, 게으른 자는 그 잘못을 깨닫는 마음을 낼 줄 알았다. 기리고 선을 행하는 자는 믿는 바가 있어서 감히 방자하지 못하게 했으니 그 무거운 바를 알 수가 있겠다”라고 평가했다.
호수(湖叟)가 임진왜란 전공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599년에 세워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자호정사-강호정(영천시자양면성곡리) 원래 자양면 용산리에 있었으나 영천댐 건설로 1977년 현재의 위치에 이전 복원했다.
7.호수(湖叟) 불천위 이야기
제수로 붉은 색의 송기떡을 쓴다. 호수불천위 제사는(기일 음력 11월 3일) 는 호수종택(영천시 대전동) 사랑채 마루에서 지냈으나 8년 전 부터는 종택 바로 앞에 지은 양옥 주택(노종부 홀로 거주)에서 모시고 있다. 노종부와 제관들이 거동하가 불편한 데다 기일이 한창 추운 때라서 불편함이 많았고 그 불편함을 덜기위해 20여 년 전에 새로 마련한 공간이다.
대구에서 살고 있는 호수 16세 종손은 정현목(1964년생)씨는 여건이 되는 대로 다사 원래 한옥종택에서 제사를 모실 생각이라고 말했다. 제사는 합설로 모시며 고위 비위 기일 모두 제사를 지낸다. 제사는 1시쯤에 시작하여 제관은 30여명이다.
제수로 붉은 색이 나는 송기떡(송편과 절편)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인데 유래는 잘 모른다고 했다. 제주는 아직 집에서 쌀로 담근 청주를 사용하고 있다.
불천위 관련기록은 없고 시호를 받고 나서부터 불천위로 모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시호는 1788년에 받았다.
호수종가 불천위 제사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으로 제사를 보다 잘 모시기 위해 만든 참제소계(參祭所稧)가 있다. 약 90여 년 전(1923년)부터 운영되고 있다. 처음에는 멀리서 말 타고 오는 제관들의 음식이나 말 먹이 비용, 노자, 제산세 등을 지원했으나 지금은 제수 마련 비용을 일부 지원하고 있다. 현제 회원은 약 500명이다.
불천위 사당은 호수종택 왼쪽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6년전 사당의 감실과 신주를 도난당했고, 벽채에 버팀목을 만들어 그 위애 얹어놓은 형태의 현재의 감실은 도난당한 감실을 본따 새로 만든 것이다.
8.호수(湖叟) 정세아 약력
o1535년 영천 출생
o1558년 진사시 합격
o1592년 영천에서 의병장
o1599년 자호정사 건립
o1605년 선무원종공신 3등
o1607년 황산도찰방
o1615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추증
o1619년 가선대부 병조참판 증직
o1732년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교지가 내림.
o1788년 시호 강의(剛義 : 致果殺賊曰剛, 先君後己曰義)-과단성을 이루어서 적을 죽인 것을
剛이라고하고, 인군 즉 나라를 먼저하고 자기를 뒤에 하는 것을 義라고 한다.
<자료옮김> : 정병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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