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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상인]물감장사로 자금모아 병영극장 설립 | ||||
부산에서 장남이 물감공장, 둘째와 셋째 강진읍과 병영면에서 물감 도매상 운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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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터 상업문화가 풍미했던 병영면 일대에서는 6.25전쟁 후 다양한 업종의 대상(大商)들이 등장하게 된다. 대상이란 거부(巨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샛말로 도매상 정도를 말한다. 도매상을 대상이라고 한 것이 의아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상업규모를 파악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옛날에는 상인들이 보부짐에 성냥 몇 갑, 기름 한 병, 빨래비누 몇 개를 넣어 짊어지고 각 시장을 돌아 다니며 팔았다. 성냥장수에게 성냥을 공급해 주는 도매상은 틀림없이 대상(大商)으로 보였을 것이고, 기름장수에게 드럼통 몇 개를 놓고 기름을 공급하는 도매상 역시 대상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전쟁후라서 물건이 아직 풍족하지 않을 때였지만 주민들이 많이 사용하는 생필품은 도매상을 탄생시키는 주력 품목이었다. 병영면 소재지에 가면 삼성슈퍼란 슈퍼마켓이 있다. 삼성슈퍼 주변은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병영면소재지의 중심가였던 곳으로 길 건너편에 포목집이 다섯 개나 됐고, 왼쪽으로는 털옷을 짜는 편물점이 3~4개, 사진관 2개가 밀집해 있었다. 삼성슈퍼의 주인인 김관홍사장(57)의 부친과 부친의 형제들은 물감도매상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이다. 무명옷이 전부였던 시절에 서민들은 흰무명에 물감을 들여 옷을 만들어 입곤 했기 때문에 물감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요 생필품 중의 하나였다. 김관홍 사장의 부친인 김석수씨(1965년 작고)는 형제가 4명 있었다. 첫째인 김석훈씨가 일제때 부산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풍미양행이란 물감공장을 차렸다. 김석훈씨는 동생들에게 물감 도매상을 해볼 것을 권장했다. 그래서 둘째인 김석현씨가 강진읍장 주변에 덕성상회란 물감가게를 차렸고, 셋째인 김석수씨는 병영면 소재지에 삼성상회란 물감가게를 역시 개업했다. 안정적인 물감 공급원을 가지고 있었던 형제들은 급속도로 상권을 확장해 갔다. 김관홍 사장에 따르면 부산에서 오는 물건은 대략 세가지 였다. 얼음처럼 딱딱한 양잿물과 물감, 조단이라는 일종의 첨가물이었다. 보통 한달에 한번 정도 물건이 왔는데 대형 드럼통이 열 개가 넘게 들어왔다. 물건은 주로 부산에서 여수까지 배편으로 이동해 와서 화물업체가 부두에 도착한 물건을 병영으로 운송해 왔다. 물감은 색상이 다양해서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이 준비됐다. 원하는 물감과 양잿물, 조단이를 섞어 뜨거운 물에 끓이면 흰 무명옷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원하는 아름다운 색상으로 바뀌어 나왔다. 양잿물은 주로 근 단위로 팔았다. 엿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이것을 끌과 망치를 이용해 조심조심 내려치면 호박엿 깨지듯이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양잿물은 흰옷을 더욱 희게하는데 그 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다. 양잿물을 사마귀에 바르면 죽기도 했다. 장날이 되면 삼성상회 앞에는 물감과 양잿물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늘 줄을 섰다. 사람들은 삼성상회를 물감방이라고 했다. 물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방이라는 뜻일 것이다. 보부상들은 삼성상회에서 물건을 받아 그 길로 장으로 가서 소매가격에 이를 되팔았다. 강진읍의 덕성상회도 급속히 번성했다. 큰형님의 공장에서 직송된 물감과 양잿물은 제품이 괜찮아서 강진 사람들의 입소문을 금방 탔다. 삼성상회는 병영면소재지에서 비누공장도 운영했다. 양잿물과 쌀의 죽재를 섞어 만들었는데 색깔이 검정색이어서 흙비누라고 불리기도 했다. 물감장사로 돈을 모은 형제는 사업다각화를 시도했다. 병영에 극장을 지은 것이다. 때는 1963년 이었다. 초창기 극장은 대단히 번성했다. 일주일에 두 편 정도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관람석이 항상 만원이었다. 영화프로는 김석수 사장이 광주의 구월영화사라는 영화보급사에 올라가서 필름을 직접 가지고 내려오곤 했다. 병영극장에서는 영화뿐 아니라 연예인 쇼도 자주 열렸는데 왕년의 인기 연예인 고 서영춘씨나 백설희씨 등도 병영극장의 무대를 장식했던 인물들이다. 그러다가 병영극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고 사업도 기울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김석수 사장이 1965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삼성상회의 물감사업은 모친 정명복(1969년 작고)씨가 이어 받았다. 그러나 물감은 건강에 매우 해로운 것이었다. 김석수씨의 형제들이 비교적 단명을 했는데 양잿물과 물감을 오랫동안 취급해서 그렇지 않느냐는 걱정이 나오기도 했다. 정명복씨가 사망한 후 삼성상회는 업종을 바꾸었다. 1960년대 말의 일이다. 삼성상회는 양잿물 드럼통과 물감통을 걷어내고 과자류 도매상을 시작했다. 가업은 김석수 사장의 큰 딸이 이었다. 오랫동안 장사를 했던 집안이라 업종전환 후에도 꽤 장사가 잘 됐다. 삼학소주 총 판매점을 하면서 인근 장흥과 해남 등지까지 삼학소주를 판매했다. 각 마을에 있던 구판장에도 이런저런 과자류를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김관홍 사장은 중학교에 다닐 적에 집에만 오면 자전거를 타고 과자를 배달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김 사장은 "마을 구판장에 빼지 않고 배달한게 사카린이었는데 여름에는 사카린 한봉지를 큰 주전자에 넣어 물에 타서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며 꿀컥꿀컥 마시던 시절이 엊그제 같이 느껴진다"고 회고했다. 삼성상회가 삼학소주 총판을 할 당시 병영에는 '병영소주'라는 소주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다. 1950년 중반에 세워진 공장이었는데 요즘 청세주를 생산하는 병영주조 자리가 소주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 사장이 김남식씨였는데, 집안 친척이었던 김견식씨는 18세 되던 1957년에 병영주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김견식(73) 사장은 80년대 초반에 양조장을 인수했고, 지금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청세주와 설성막걸리를 생산하는 어엿한 양조장 사장이 됐다. 김견식 사장에 따르면 병영소주는 70년대 초반까지 해성소주라는 상표를 달고 생산됐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식량으로 술을 만들지 말라는 법령을 공표함에 따라 생산이 중단됐다. 당시 강진읍에서는 은하소주라는 유명한 소주가 생산되던 시절이다. 소주는 주로 큰 독에 담아 장흥과 해남, 광주등의 소매점에 공급했고, 막걸리는 큰 플라스틱 통에 담아 자전거에 싣고 배달했다. 소주 제조가 금지된 이후 병영소주는 고구마를 이용해 소주를 만드는 방법을 도입하는 등 여러 가지 자구노력을 했으나 결국 70년대 중반이 못돼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70년대 말 이후에는 막걸리 소비까지 줄어들어 경영이 악화되자 총 지배인이었던 김견식 사장이 양조장을 인수하게 됐던 것이다. 김견식 사장은 "농사철이 되면 막걸리를 사려는 사람들이 양조장 문을 열기도 전에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며 "수십년 동안 침체됐던 막걸리 시장이 요즘들어 되살아 난 것은 큰 다행"이라고 말했다. |
첫댓글 한 편의 '시네마천국'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네.
등하불명이란 말이 실감나는 글이네 한기자님 덕분에 상세한 역사를 알고 가네 우리가 아는 인물들도 나오니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