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언제 받는가?
어릴 때 우리 동네에 그 시대엔 보기 드문 이층 양옥집을 넓고 근사하게 짓고,마당도 정원이라고 부를 수준의 집에서 사는
가족이 있었다. 다른 식구와는 접점이 없었으나 그 집 할머니는 매일 식모를 데리고 시장을 보러 나오기에, 상인들은 모두 그 할머니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 할머니를 반기는 상인은 아무
도 없었다. 나도 그 할머니를 지금도 기억하는데 언제나 한복을 입고 다녔고 목소리가 그렇게 모질고 사나웠다. 노인의 목소리 엔 살아온 인생과 심성이 담겨 있는 것을 나는 그 때는 몰랐으나,
정말 싫었다는 느낌은 아직도 남아있다. 여름엔 모시 일습을 입고 겨울엔 본견 비단으로 만든 옷에 털 마고자까지 입고 다니 면서,그렇게 거만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보는 눈빛은 항상 멸시에 가득 차 있었고, 누구에게든지 하대를 했다. 그러나 울 엄마는 그 할머니 못지않은 앙칼진 목소리로 댓거리를 했는데, 싸움 하는 것을 두어번 보았다. 엄마는 상인으로서의 친절이 그다지 없는 사람이었고, 좋은 손님에게만 좋게 대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양옥집 할머니는 우리 가게에 자주 오는 편이었는데,아버지가 있을 때는 아무 문제 없이 물건을 많이, 잘 사가지고 갔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길고 긴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고 맞장구를 잘 치면서 추임새까지 넣었다. 그 할머니의 이야기는 순전히 자신과 집안 자랑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고녀까지 다닌 것과 부친이 무슨 벼슬을 하고 잘 살았다는 내용이었다. 육이오 사변 에도 부산에 살았기에 전쟁의 피해는 조금도 입지 않고,도리어 더 부자가 된 그런 이야기들을 아버지는 웃으면서 다 들어 주었다. 나는 그것이 몹시 못마땅했는데 장사를 하기 위해 그 고약한 할머니의 비위를 맞춰주는 듯한 느낌이 그렇게 싫었다. 투정하는 내 말을 듣고 난 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쳐다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할마니래 전생에 아주 많은 복을 지어서 저렇게 사는 거 아이갔네? 자신의 복 자랑하는 거이니 들어 주어도 되지 않간?"
"아부지, 잘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그런 겁니꺼? 그라모 걸뱅이들은 아주 아주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라예? "
아버지는 크게 웃으면서 내 두 손을 쥐고 토닥거렸다.
"사람마다 다른 거이제, 그러나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 현세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있는 거이는 틀림없어. 그러나 그렇게 잘 살면 서도 마음이 바늘밭이니 그 복도 길지 않갔지 않네. 이 아바이래 그런 할마이가 가여워서리 친구해 주는 거이디 ."
"그럼 복이 없어지믄 저 할마시, 가난해지는 겁니꺼? ."
"그런 거는 아니디, 복이 있고 없고, 언제 받고 없어 지는가는 아무도 모르디. 그런데 마리야, 이 아바지는 한 가지는
알고 있단 말이다 ."
아버지는 내가 맞춰 보라는 듯 웃으며 나를 바라 보았다. 아버지가 아는 한 가지가 무얼까? 내가 말해 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자 아버지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는 말이디, 어떤 사람이래도 알수 있는 거인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디, 저 사람은 지금 복을 짓고 있구나, 저 사람은 있는 복도 날려 먹는구나 하고 말이디. 양옥집 할마이레 그렇게 많은 복을 타고 났으니 복을 나누어 주면서 순하게 살아가믄 얼마나 조캈네? 생을 거듭해서 복을 받으며 잘 살거인 데,있는 복을 까먹으며 사는 것이 아바지는 측은한 마음이 되지 않칸? 일제 시대에 고녀까지 다녔으면 그 시대의 여자로 최고를 배운 거인데, 다른 사람에게 동전 한 푼을 주지 못 하니, 그저 가엾지 안칸? "
아버지의 이 말이 틀림없이 맞는 것임을 후일 스승을 만나서 알게 되었다. 복을 짓고,복을 버리고는 결국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지금 사는 모습이 내 복의 결과임을 안다. 그러면 고칠 수 없는 것인가? 아버지는 왕자로 태어나서 왕이 되는 사람 드물고,거지로 태어났지만 거지로 죽는 사람 드물 다고 가르쳐 주었다. 관상,수상,팔자보다 윗길은 심상이며,마 음밭에 무엇을 심는가가 바로 자신의 운명이라고 했다. 너무나 맞는 말이고 그대로 되어가는 것 을 느끼며 살아간다. 양옥집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중풍으로 쓰러져서 그 후 다시는 만나지 못 했다. 부모님이 주고 받는 이야기 속에서 할머 니와 양옥집 식구들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알게 되었다. 양옥집 식구들은 어느 날 야밤에 이사를 갔고 구구한 소문만 남았다.
무엇이었을까...부잣집의 고명딸로 태어나서 그 시대에 고녀까지 마친 할머니의 꽃길은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선을 베풀고 살면서 주변에서 존경을 받고 살았더라면 양옥집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반드시 달라졌을 것이다. 무엇을 하고자,무엇이 되고자 마음먹는 순간부터 운명의 키는 틀어지 면서 전혀 다른 곳을 향해 간다. 그러니 이 무섭고 어려운 시대에 우리들은 우리의 운명의 키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똑똑히 보아야 한다. 인간이 굳이 선을 바라고 향할 필요는 없지만,그 선을 행함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면 선을 향하는 것이 옳다. 박복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팔자같지만,내가 작은 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내 운명은 달라지며 복이 만들어진다. 그럼 복 받을려고 선행을 해야하는가? 작정하고서라도 해야 한다. 그러면 운명의 키의 향하는 곳이 달라짐을 살아 오면서 많이 보았다. 내가 일부러라도 선행을 하고 덕을 베푸는 순간이 바로 복을 짓는 순간임을 살아가면서 깨닫는다.
권영심 ( 2025.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