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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 44,18-21.23ㄴ-29; 45,1-5
복 음 : 마태 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무소유의 자유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제자들의 삶을 이어가는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아니 물질에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者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19-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눈에 드는 모습으로 빛나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가난은 놀라운 선물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노력해서 벌었다 하지만,
내가 노력할 수 있도록 마련된 이 세상없이는 내 노력은 헛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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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춘추전국시대 송나라 학자였던 장자(莊子)는 집이 가난했다.
참다못해 이웃 위나라를 다스리던 文侯를 찾아가 곡식을 사기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문후는 흔쾌히 승낙 하면서 영지에서 수입이 들어오면 그 때 은 삼백 냥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하루가 급한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붕어 한 마리가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동해에서 온 붕어는 길 가던 제게 물을 한 바가지만 갖다 주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쪽 오나라와 월나라 왕을 찾아가는 길인데,
그곳 서강의 강물을 끌어다가 살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붕어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선생이 강물을 끌어다 준다지만 (나는 이미 죽었을 테니)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는 편이 나을 것이오.'라고 했습니다."***홍인표
어느 수련자의 강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 은총은 한 번에 하나밖에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은총을 또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럴 때 사람이 행동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지금 가지고 있는 은총을 계속 가지고,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은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지금 가지고 있는 은총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첫 번째 방법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처음에는 은총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나면서 그 은총이 내가 이룩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룩한 것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하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다시 은총을 주실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네딕도 성인 축일인데, 우리 사부님이야기하기가 좀 그렇지만
오늘 복음은 사부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복음이었습니다.
첼라노 전기 1생애 1부 9장을 보면
프란치스코는 마티아 사도 축일날 이 말씀을 듣고
즉시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그리고 사부님은 환희에 넘쳐 자신이 방금 들은 영혼에 유익한 말을 완수하기 위해 서둘러 댔다.
그리고 자기가 들은 바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하는 데에 있어서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사부님은 왜 이 말씀을 듣고 이것을 실행하는데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했을까요?
사부님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일을 해서 샀다고 생각하는 나의 집,
내가 돈을 벌어서 샀다고 생각하는 나의 옷, 먹을 것.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우리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그분에게서 왔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았고, 믿었던 것입니다.
청원소에서 무전여행을 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머리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전여행을 할 때 형제들은 우산을 챙기고, 비옷도 챙기고, 할 때
저는 아무것도 안 챙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는데
비올 때 우산이나 비옷하나 못 챙겨주실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 이틀은 좋았는데, 삼일 째 되는 날 비가 엄청 왔습니다.
우산도 비옷도 없어서, 비를 엄청 맞았습니다.
비를 쫄딱 맞고, 어느 기사식당에서 밥을 얻어먹고 가려는데
주인 아주머니께서 비가 오는데 어떻게 가냐면서 비옷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사분께서 익산까지 차도 태워주시면서 만원까지 주셨습니다.
‘와! 하느님께서 나에게 모든 것을 베푸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든 생각은 이제 돈으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이 있으니까 적어도 오늘 저녁 자는 것은 걱정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인정이나 어디서 재워달라고 하고,
정 안되면 찜질방에 가서 자면 되지 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논산에 도착해서 여러 군데 노인정에 들어가서 재워달라고 했지만 번번이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당에 갔습니다.
성당에서 재워달라고 했지만 성당에서도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찜질방에 가서 자면 됐기 때문입니다.
성당까지 퇴짜를 맞으니 이제 밤이 되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원을 들고 찜질방을 향했습니다.
그랬더니 찜질방에 이런 문구가 붙어있었습니다.
몇 일 까지 내부 수리 중, 쿵. 하고 주저앉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었던 찜질방마저 안 되니
밖에는 비도 오는데 잘 곳은 없고, 노숙을 해야 됐습니다.
그래서 갈 곳이 없어서 다시 성당으로 갔습니다.
성당에 갔더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화장실에 가보니 화장실 문이 열려 있어서
성당 화장실에서 비를 피하면서 잠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화장실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내가 가진 돈 만원을 믿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돈이 없었다면 정말 더 간절하게 재워달라고 청했을 텐데...
이렇게 무전여행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임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가진 것들을 버려두고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하루를 살아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제 재미있는 유머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맞춰 보세요.
“노처녀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저는 시집가라는 말, 늙어 보인다는 말 등을 예상했지요. 그런데 정답은 다음의 말이라고 합니다.
“아줌마! 꼭 처녀 같아요!!”
어때요? 정말로 싫어하는 말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듣기 싫은 말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반드시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어야 할까요?
기분이야 좋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말이 꼭 내게 좋은 것이 아닐 때가 더 많습니다.
반대로 그 순간에는 듣기 싫은 말이지만 결국은 내게 도움이 되고 커다란 힘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하고 유익한 말을 들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청년은 자기 부모가 이야기하는 성당 가라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다고 합니다.
강요의 목소리로 들려서 성당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짜증이 날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부모가 왜 성당에 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무슨 혜택이 주어져서 하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다 사랑하는 자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싫어해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지요.
솔직히 당신이 뽑은 제자들의 모습은 그리 대단하지 못합니다.
부족함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지요.
돈도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거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기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파견하시고, 고생길이 훤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파견을 했을 때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을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자들이 듣기 싫어할 그러한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됩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으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더 큰 열정을 갖게 되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주님의 이 명령은 계속됩니다.
정말로 따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를 따를 때 과거의 제자들처럼 큰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예찬
-하느님 자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강론 주제는 ‘성 베네딕도 예찬’이요 결국은 ‘하느님 자랑’입니다.
성 베네딕도뿐 아니라 모든 성인들이 하느님의 자랑이었고, 하느님 역시 성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서강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서강의 자랑이어라.’
서강대의 교표인데 서강 대신, 하느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느님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어라.’
그대로 성인들의 경우에 들어맞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지요.
베네딕도 성인은 이 경우에 잘 맞는 분이셨기에
이름 역시 ‘축복 받은 이’라는 뜻의 베네딕도였습니다.
여러분 역시 축복 받은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 처럼 살 수 있는 길을 알려드립니다.
첫째, 성인은 늘 하느님을 찾았던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내적여정에 충실하라고 ‘정주서원’을 한 분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찾아야 안주가 아닌 정주요 늘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
1독서 잠언 말씀처럼 지혜는 숨겨진 보물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찾을 때 선사되는 내적성장이요 숨겨진 보물인 지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찾는 일보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 일은,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이요
베네딕도 성인 역시 평생 하느님 찾는 일에 항구하셨습니다.
마지막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향해 떠날 때의 임종장면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성전에서 영성체를 모신 후 양 팔을 벌려 기도하며
선종하실 때의 이 아름다움 장면은 그대로 평생 삶의 요약입니다.
둘째, 성인은 늘 하느님을 섬겼던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인은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인 수도공동체를 설립하셨습니다.
주님 역시 제자들에게 군림하거나 지배하거나 권세를 부리는 사람이 아닌
섬기는 사람이 되라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로 우리 중심 한 가운데에 섬기는 분으로 자리 잡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영성의 잣대는 겸손이요 주님을 섬길 때 선사되는 겸손입니다.
주님을 섬길 때 저절로 이웃을 섬깁니다.
분도수도자의 두 번째 ‘수도자다운 삶’의 서원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에서 섬기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수도자다운 삶이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미사 중 기도문 마다 나오는 ‘섬김’이란 말마디입니다.
‘복된 베네딕토 아빠스를 하느님을 섬기는 학교의 큰 스승으로 삼으셨으니’
‘저희가 그를 본받아 주님만을 찾고 섬기게 하시어’
‘저희가 복된 베네딕토의 가르침에 따라 주님을 충실히 섬기며’
바로 매일 우리 수도자들이 바치는 성무일도와 미사시간이
주님을 환대로 섬기는 시간이요, 주님 역시 우리를 환대로 섬기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환대로 섬기는 ‘하느님의 일’인 기도에 충실할 때
저절로 이웃 형제들 또한 환대로 섬기게 됩니다.
바로 환대와 섬김의 모범이 예수님이요 그의 훌륭한 제자 성 베네딕토였습니다.
셋째, 성인은 늘 하느님을 사랑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덕의 잣대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우리 분도수도자들의 세 번째 순종 서원은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랑하기에 저절로 순종이니 사랑의 자발적 순종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물론 성인들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베네딕토 성인 역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기적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호기심에서 발동된 기적이 아니라 이들의 사랑에 감동하신
하느님의 개입에 의한 기적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2독서 콜로사이서 말씀처럼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평화, 찬미, 감사’ 등 줄줄이 따라오는 덕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영성에, 완덕에 본질적인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새 사람’의 전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라 하시며,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하십니다.
바로 성 베네딕도가 ‘새 사람’이 되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늘 주님을 찾는 정주의 삶에 충실할 때 지혜의 열매요,
늘 주님을 섬기는 ‘수도자다운 삶’에 충실할 때 겸손의 열매요,
늘 주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사랑의 순종에 자비로운 삶입니다.
그대로 마음이 순수한 새 사람이 됩니다.
수도생활의 궁극 목표라는 마음의 순수 안에 포함되는 지혜, 겸손, 자비의 삼위일체 덕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섬기심으로
우리 모두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첫댓글 아침 일찍 발인하는 장례일정에 맞춰 새벽부터 준비.
아녜스형님과 함께 영안실에 도착해보니...
(오라는 시간보다 30분일찍 갔고만, 떠남과 동시에 도착한 듯...)
온데 간데 없고...
상주에게 전화해보니 벽제를 향해 가고 있다고...
불교식으로 이루어지는 장례이기는 하나...
며느리 상주가 신천동 성당에서 구역장, 레지오 단원으로
오랫동안 봉사를 한 터.
이왕지사 나온 김에 집으로 돌아가 형님 차를 운전하고
5명이 벽제를 향해 출발!
잠실대교를 건너는데 굵은 빗방울은 떨어지고
용산쯤에서 쏟아지더니 서울 끝자락 행주대교 쯤에선 쏟아 붓는 꼴...
네비도 없이 길을 안다는 자매의 지시에 따라 가는데...
이쯤일 거 같은데 나오지는 않고... 물어보니 지나쳐 왔다고.
되돌아 돌아 돌아 도착한 벽제.
전자안내판엔 진행중 뜨고...
대기실 찾느라 또 일행끼리 헤어지고 찾느라...
난리브루스 끝에 겨우 합류...
11시 31분 완료라는 안내판 믿고
휴게소에 모여 짧은 연도, 영광의 신비를 바치는 중에
11시쯤 냉각중 이란다.
상주 돌려보내고 11시10분 완료 믿고
묵주기도 중단하고 부랴부랴~~~
흐미 벌써 떠나려고 한단다...
영구차를 따라 다보정사납골당을 향해 벽제를 출발!
오마나! 자동차가 배고프다고 밥달라네...
불안해 하시는 형님 달래며 양주까지는 갔는데...
아무래도 불안.
주유소찾아 기름을 넣는 순간 영구차는 온데간데 없고...
다보정사 납골당으로 전화를 하니 네비없이 온다는 말에 어이없어하고...
택시타고 오란다.
이럴 땐 무식이 용기!
영구차 탑승한 자매와 중계하기로 하고...
걍 내달렸다.
빨강 불이면 살짝 옆으로 돌아 달리고...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보니 빨강불!
멈춰 바라보니 영구차 바로 뒤!
캭~~~ 이런 일이!...
왜 납골당 여자가 걍 택시 타고 오랬는지를 실감하며 장지에 도착.
이후 일정은 보고 안드려도 비됴시죠?
포천 쪽은 완전 빵꾸?난 하늘... 쏟아 붓는 빗속이라니...
원~ 이렇게 정신없이 찾느라 헤매인 장지수행은 난생 처음!
늦은 묵상글 올리는 변이었슴다~
애쓰셨습니다. 사랑은 때론 용감하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