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최초로 화약제조법을 터득한 최무선이 1377년에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화기를 생산했던 것도 모두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최무선이 제작한 화포는 1580년 진포해전에 처음 사용하였다. 겨우 100척의 고려전함이 500여 척에 달하는 왜구선단을 화포로 불태우는 성과를 올렸다.
어떤 국가가 화약 무기를 처음으로 개발하고 나서 육상전보다 해상전에서 화길르 처음 사용한, 아마도 세계적으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화기의 발전은 조선시대 이순신이 활약할 시기에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천지현황, 지자총통, 현자총통이었다.
조선의 장거리 화기의 발달과 이를 이용한 전술은 이순신이 일본수군을 연속적으로 격파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인 판옥선의 뛰어난 성능도 빼놓을 수 없다. 판옥선은 기존 배의 선체에 상장을 올린 것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배가 높아져서 병사들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사격할 수 있었지만 적은 배에 침입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일본선박과 조선선박의 차이점은 조선선박은 두꺼운 판자를 쓰고 쇠못이 아닌 나무못을 썼는데, 참나무로 된 나무못은 물에 닿게 되면 팽창하게 되어 결합부위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이점이 있었다. 일본선박은 쇠못을 박아 판자를 연결했는데 배가 움직일 때마다 못구멍이 차츰 넓어져 물이 새거나 부패하기 쉬웠다고 한다.
대포를 발사할 때에는 강한 반동이 생기는데 배에서 화포를 쏘려면 이 반동을 견뎌낼 정도로 선박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순신이 즐겨 쓴 다른 전술은 기만전술이다. 정찰활동과 같은 기본전술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조선수군에는 또 다른 비밀병기인 귀선 즉 거북선이 있었다.
이순신은 태종(1413년) 이래 자취를 감췄던 거북선을 왜 다시 만들 결심을 하였을까?
거북선의 역할은 돌격선으로 가장 최전방에서 적군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즉 거북선은 어디까지나 일본수군의 백병전을 막아내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삼도수군의 본영이었던 한산도와 인근 섬들에게는 수군과 관련된 많은 지명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한산도 인근에는 대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화살에 쓸 대나무를 재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었다. 식용소금을 제조하던 염개, 숯과 기타연료를 제조하던 숯덩이골, 수군에서 필요한 질그릇을 생산했다는 뜻의 독안바위, 군기를 제작하는 곳이었다는 야소, 수군의 군복을 제작했던 옷바위 등이 있다.
전시상황에서의 이순신의 용병술
이순신은 수군을 강화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했으며 그것이 현실적으로 부가함이 드러나고 오히려 여건이 악화되자 최소한 수군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병력모집과 예산문제로 위로는 관찰사들과 끊임없이 입씨름을 벌였고 아래로는 군관과 수령들에게 압력을 행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이순신은 소금을 제조하게 하고 고기잡이를 시키며 나무를 베어 내다 팔게 했는데, 일반적인 장수들도 식량이 부족해지면 군사들에게 둔전 정도는 경작하게 했지만 이런 일까지 시킨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순신의 수군병력 모집방식은 확실히 덕치를 표방하던 당시 조선 관리들의 느슨한 운용방식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의 효율성 중심의 행정방식은 평시에는 비판을 초래했겠지만 전시라는 비상상황으로 인해 용인되었다.
이순신이 있기까지 유성룡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결코 중직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급 관리가 아무리 혼자서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승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으며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상급 관리 특히 고급 문관의 지원은 선택요소가 아니라 필수요소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