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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2018년은 이스라엘 역사상 큰 의미가 있
는 해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들이 1948년 5월 14일 약 1,900년 만에
나라를 되찾아 건국 70주년을 맞은 것이다.
이에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원
연맹과 독일 March of life(생명의 행진)
단체가 주관하고 이스라엘 정부의 적극적
인 후원으로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에 우리 교회도 초
청받았다.
이 행사는 이스라엘 리블린 대통령의 영
상 축하 메시지와 정보통신부장관 외주요
인사들의 축사가 있었으며, GOD TV와
독일방송을 통해 생방송되었다.
우리 교회 선교팀은 5월 13일, '2009
이재록 목사 초청 이스라엘 연합대성회'
의 개최 장소인 예루살렘 ICC에서 있었던
오프닝행사에 VIP로 참석했다.
14~15일에는 국회 방문과 VIP 컨벤션
참석 등 각종 만남을 통해 김진홍 장로(G
CN방송 국장)가 인사말과 더불어 당회장
이재록 목사와 만민의 선교 사역에 대해
소개했다.
▶2018년 이스라엘 건국 70주년을 맞았
다. 하지만 동시에 이로 인해 중동 및 이슬
람권에서는 대규모 반이스라엘 시위가 나
타났으며,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났으며 이 때는 라마단이
라 이슬람권 입장에서는 더욱 반이스라엘
감정이 늘어났다.
▶2017년 박지훈이 시구 수준의 공으로
이분에게 끝내기를 맞았다.
▶ 2015년 세계 기타리스트들의 ‘영원한 영웅’ B.B. 킹 별세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전설 비비 킹(B.B. King)이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15일(이하 현지시간) 미국의 일간지 USA투데이는 AP통신을 인용해 14일 비비 킹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비비킹은 지난 5일 당뇨로 인한 탈수 증세로 라스베이거스 자택 근처에 위치한 병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된 바 있다.
한편, 비비 킹은 미국 내 흑인 블루스의 산 증인으로 지난 1987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헌액된 바 있다.
https://youtu.be/SgXSomPE_FY
▶2014년 축구 선수 박지성,
현역은퇴 선언.
▶2012년 디아블로 3의 전야제가 있었다
▶2010년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가
발사되었다
▶2009년 국내 첫 조류 발전소,
울돌목 조류발전소 준공.
▶2009년 미안마 아웅산 수치 여사 투옥
총 13년간 가택에 연금돼 온 미얀마의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64) 여사가 2009년 5월 14일 투옥됐다. 수치 여사는 이날 ‘미국인의 자택 잠입 사건’과 관련해 법을 위반한 혐의로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됐다. 수치 여사의 변호인측은 “수치 여사가 가정부 2명과 함께 옛 수도인 양곤의 ‘인세인 감옥’으로 이송됐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아웅산 수치 여사.
이번 수감은 지난 3일 밤 존 윌리엄 예토(Yettaw·53)라는 미국인 남성이 호수변에 있는 수치 여사의 자택에 헤엄을 쳐서 잠입한 뒤 이틀간 머물고 몰래 빠져나오다 체포된 데 따른 것이다.
군정 치하의 미얀마에서는 심야에 친족이 아닌 손님을 맞은 사람은 즉각 현지 관리에게 통보해야 한다. 또 외국인 손님은 아예 미얀마인 집에서 숙박할 수 없다. 수치 여사 변호인측은 수치 여사와 가정부들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최고 징역 5년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재판은 오는 18일 인세인 감옥에서 시작될 예정이다.
예토가 수치 여사의 자택에 잠입한 동기와 잠입 후 행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치 여사의 변호인측은 예토의 행동이 개인적인 모험심에 따른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주장한다. 예토 역시 출입금지 지역에 불법 침입한 혐의와 이민법을 위반한 혐의로 14일 기소됐으며, 최대 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이번 사건은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오는 5월 27일을 불과 2주 앞두고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군부측에서 함정을 팠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야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이끌고 있는 수치 여사는 1988년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공로로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그동안 군정의 탄압을 받아 여러 차례 가택연금을 당했다. 가장 최근의 가택연금 조치는 지난 2003년 5월에 내려졌다.
▶2008년 조용기 목사가 원로목사 추대
예배.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1만5천여 명의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열 림.
▶2005년 고교생들의 두발제한 폐지 집회
▶2004년 헌법재판소,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기 각판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됨
▶2003년 카를로스 메냄 전 아르핸티나
대통령 사퇴, 차기 대통령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취임
▶2002년 수지 김 사건의 피의자
윤태식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됨.
▶2001년 필리핀 피의 총선~ 83명 사망.
▶ 20001년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총리
뇌경색으로 사망
▶1998년 한글판 조선왕조실록 발견
조선왕조실록
한글로 된 조선왕조실록이 있었다. 제작연도는 구한말 때인 1908년 경, 대한제국 황실이 `왕조 정사`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국어학자료팀 이광호 박사는 1998년 5월 14일 조선조 시대 최고의 사료인 `조선왕조실록` (국보 151호)중 현종(18대)에서 철종(25대)에 이르는 기사를 발췌해 한글로 번역한 `실록초본`을 서고에서 발굴,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조선왕조 실록은 가로 23.4cm 세로 34.4cm, 총 1백37장 규모에 다섯개의 구멍을 뚫어 명주실로 제책한 `실록초본`이 1908년 국왕을 위해 편찬된 왕실역사서 `국조보감`과 짝을 이뤄 왕실내 여성과 아동을 위해 만든 한글판 `국조보감`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글씨는 남성의 필체로 짐작되는 단정한 해서체다. 내용은 인명만 한자이고 나머지는 순한글이며 왕의 등극 사망 왕세자책봉 종묘사직제사 정치사건 등 국왕의 재위 당시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서술하는 형식으로 돼있다.
남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은 1968년부터 1993년까지 26년에 걸쳐 민간단체인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국역완간됐으며, 북한에서는 1972년부터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실 주도로 시작돼 1991년 완간됐다. 남한판 실록은 주석과 색인이 충실한 반면 번역이 연구용이라는 지적을 받은 데 비해 북한판 실록은 순한글로 번역해 대중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번역했지만 학술적 이용에는 문제가 많다는 평을 듣고 있다.
▶1998년 프랭크 시나트라 사망
http://en.wikipedia.org/wiki/Frank_Sinatra
프랜시스 앨버트 시나트라(Francis Albert Sinatra)는 1915년 12월 15일 미국 뉴저지 호보켄(Hoboken)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꿈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19살이 되던 1939년에 한 라디오 프로 콘테스트에 입상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가수의 길을 택했다. 그 후 반세기를 넘겨 1998년 사망에 이를 때까지 가수로써 영화배우로써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며 전후(戰後)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이자 '팝 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군림했다. 그는 불멸의 명곡 '마이 웨이(My Way)'를 남겼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가장 먼저 My Way를 떠올린다.
1953년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
그런데 프랭크 시나트라의 다른 노래를 얘기해보자면 대부분이 난감해한다. 그에게는 마치 '마이 웨이' 단 한 곡만이 존재한다고 느껴질 정도다. 더불어 그가 역사상 손꼽히는 재즈 싱어였다는 인식 역시 매우 미미한 편이다. 돌이켜보면 프랭크 시나트라가 꽃다운 청춘을 보냈던 1930~50년대는 바로 재즈 사의 황금기였다. 그는 언제나 재즈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노래했고 그 노래들은 모두 오늘날의 재즈 스탠더드로 정착되었다. 실상 프랭크 시나트라와 재즈의 연결고리는 애초부터 설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1996년 권오기 통일원장관,
북한에 4자회담 수용을 촉구
▶1993년 정부, 5.18 명예회복 방안에
대한 후속조치로 연행구금등 보상금
지급키로 확정.
▶1993년 통계청, 「83~92년 실업구조
변화」 발표. 실업자수는 1983년
61만3000명, 92년 46만3000명
▶1992년 정부,과학기술투자를 국민
총생산(GNP)2.24%에서 2.8%인 7조
2000억원으로 늘리기로.
▶1992년 미 고장난 위성 궤도재배치
엔데베호 우주유영 8시간만에
▶1992년 이삼노 일ㆍ북한수교회담
북한대표, 북한에서 플루토늄을 증식
카네기재단 보고서, 사실이라고 시인
▶1990년 문교부 문화부 총무처간 마찰을
빚었던 도서관 업무가 문화부 소관으로
3부간 최종 합의.
▶1990년 KBS 부분 정상화
▶1990년 외무부는 비자발급업무를
개시하지 않고 있어 주한 소련 영사처장
대리에게 공식 항의했다'고 발표.
▶1989년 전교협, 서울ㆍ부산등 전국
10개지역서 교원노조발기인대회 강행
▶1988년 정부, 통일논의와 자료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정
▶1987년 공기업민영화방안 확정,
국민은행 등 7개기관 3년내 민영화,
한국전력 등 3개기관의 주식 매각키로
▶1986년 문교부, 전국 111개 대학에
교직원에 의한 수색작업을 지시.시위용
품 7590점 수거
▶1985년 서울역 앞에서 200여
대학생 시위, 5개대생 115명 연행
▶1984년 세계보건기구(WHO) 이사회,
한국을 서태평양 지역을 대표하는
이사국으로 선출(제네바)
▶1984년 미국 연방대법원, 통일교주
문선명 목사에게 징역18개월 확정
▶1984년 해운항만청, 해운회사
63개사를 통폐합하기 위한
해운산업합리화방안 발표
▶1983년 찰스 도미니카연방 수상 내한
▶1982년 미국 국방성, 주한 미군사령관
로버트 W.세네월드 대장을 임명
▶1981년 경북 경산에서 열차 추돌,
사망 54명·부상 253명
1981년 5월 14일 오후 4시 경상북도 경산군 고사면 경부선 매호건널목 상행선에서 부산발 대구행 보통급 열차가 앞서가던 서울행 특급열차를 추돌, 승객 52명이 사망하고 2백33명이 부상했다. 철도사상 최대의 이 참사는 급행열차가 건널목에 버려진 오토바이를 들이받고서 현장수습을 위해 후진하던 중 안전신호를 무시하고 과속으로 뒤따라오던 보통급행에 들이받쳐 일어났다. 열차까지 동원한 현장검증이 실시됐고 황해중 철도청장이 물러났다.
열차추돌사고 현장
▶1976년 공연윤리위원회 설립
▶1976년 북, 중앙 인민위, 인민 무력부장
최현 해임, 후임에 오진우 임명.
▶1976년 남산 3호 터널 기공
▶ 1973년 미국 스카이랩 1호 발사, 워싱턴-동경간 하틀라인(비상전화선) 개통
△미국 스카이랩 발사(1973.5.14)
아폴로 계획이 종료되자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스카이랩(Skylab) 계획을 실행했다. 스카이랩은 소련의 살류트 1호(1971년)에 이은 세계 두 번째이자 미국의 첫 우주정거장. 아폴로 우주선 발사에 사용했던 새턴V 로켓의 3단 추진체를 개조해 만들었다. 무게 74.7t, 길이 26m에 지름 6.7m의 크기로, 3명의 승무원이 거주할 수 있는 구조였다.
1973년 5월 14일 스카이랩은 무인으로 발사되어 435㎞ 궤도에 올려졌다. 뒤이어 5월 25일과 7월 28일, 11월 16일 세 번에 걸쳐 3명씩 모두 9명의 우주비행사들이 스카이랩을 방문했다. 이들은 지구와 태양, 우주를 관측하는 임무와 각종 무중력 실험을 수행했다. 15만장이 넘는 태양 사진과 4만5천장의 지구 사진을 찍었으며, 거미가 무중력상태에서도 거미줄을 친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입증해 보였다.
승무원들이 우주에 머문 시간은 총 171일. 그 중 세 번째 팀은 84일 동안 우주에 체류하는 기록을 세웠다. 스카이랩에는 식탁이나 침대, 욕실 등 이전의 우주선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시설들이 많이 설치되었는데, 모두 장기간 우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운동을 할 수 있는 러닝머신과 자전거도 구비되었으며, 72종류의 다양한 음식도 제공되었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은 승무원들이 하루 동안 무전기를 끄고 일방적인 휴식을 취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4년 2월 8일을 끝으로 승무원들의 임무는 종료되었다. 스카이랩은 5년 더 궤도를 돌다 1979년 7월 11일 인도양과 호주 서부에 파편을 남기며 추락했다. 대기마찰로 고도가 점점 떨어져 결국 대기권에 진입해 불타버렸다.
▶1971년 일본, 재일동포 북송 재개
▶1969년 중앙정보부, 국회의원 김규남
등60여명 관련된 간첩단 사건 발표
▶1963년 민정당 창당(대표 김병로,
대통령 후보 윤보선). 공화당,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
▶1963년 남대문(숭례문) 국보 제1호 중수
공사 완공 준공식-윤태일 서울 시장
- 숭례문 건립과 수리의 역사
- 숭례문 수난의 역사
- 숭례문 화재가 남긴 것
- 숭례문 복구를 위한 노력
- 우리 곁에 돌아온 숭례문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6429&cid=58838&categoryId=58841
▶19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 창설
1955년 5월 14일 동구권 국가들을 하나로 묶는 바르샤바조약기구(WTO)가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체결됐다. 이 조약기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항하기 위해 체결된 `동구 우호 상호원조 조약`이라는 군사동맹 조직으로 조약체결국은 소련·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알바니아·동독 등 8개국이다.
나토 외무장관들과 전 바르샤바조약국 대표들이 1995년 12월 6일 벨기에 브뤼셀의 나토본부에서 정기모임을 하고 있다.
이 조약은 소련의 위성국들에 대한 지배 강화 및 사회주의국가들의 동맹 강화를 목적으로 체결됐다. 조약의 내용은 무력 공격의 위협에 대처하는 협의 및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 방위가 근간을 이룬다. 이날 서명국들은 국제문제 해결에 있어 무력사용의 자제에 동의하고 군비철폐와 평화를 위해 협조할 것을 다짐했다.
▶1952년 정부, 제4차 개헌안
(대통령직선제˙양원제) 제출.
▶1950년 공군항공기 "건국호" 헌납
▶1948년 북한 12시부터 대남 송전 중단,
남북협상 결렬.
▶ 1948년 이스라엘 건국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팔레스타인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65만명의 유태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지도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스라엘 건국`을 알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을 이끌었으며 신생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된 벤 구리온이었다.
서기 135년 로마제국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한 후 유태민족은 가혹한 보복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후 유태인들은 가는 곳마다 경제, 문화적으로 빼어난 성취를 이루었지만 민족종교를 중심으로 강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바람에 그 지역의 다른 민족과 융합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여러 차례 박해의 대상이 됐고 결국은 잃어버린 옛 땅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자는 시오니즘운동이 19세기말부터 시작됐다.
1882년 팔레스타인에 최초의 시온주의자 정착촌이 건설됐고 1918년 중동을 점령한 영국은 밸포어 선언을 통해 시오니즘을 지지했다. 그러나 유태인과 아랍민족의 지지가 동시에 필요했던 영국이 이후 애매한 입장을 보임으로써 유태인 국가 건설은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에 결정적인 불을 댕긴 것은 역설적이게도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세계로부터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최대 강국으로 떠오르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친시오니즘에 힘입어 팔레스타인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고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가와 유태국가의 두 부분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유태민족에게는 비원의 성취였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유태인 테러단체의 폭력을 피해 원주민의 70%에 해당하는 72만명이 돌아올 기약도 없이 서둘러 살던 곳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은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마치 유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1928년 조명하 의거,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미노미야
기니히코 육군 대장을 독검으로 공격.
1928년 5월14일 오전 9시55분경, 무개차 한 대가 대만 타이중(臺中)시 다이쇼초(大正町) 도서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차가 커브길을 도는 순간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차로 뛰어올랐다.
차 안에는 대만 주둔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한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가 타고 있었다. 청년이 독이 묻은 단검으로 구니노미야를 찔렀으나 독검은 그의 왼쪽 어깨를 스치기만 하고 운전사 손에 꽂히고 말았다. 다시 군인을 향해 독검을 던졌다. 역시 빗나갔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된 청년은 스물 세살의 조명하(趙明河)였다.
조명하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6ㆍ10만세운동을 겪고 나서였다. 대만은 조명하가 일본에서 상하이로 가던 중 일시 체류하고 있던 곳이었다. 조명하는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해탄을 건너 낮에는 공장ㆍ상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며 기회를 노렸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않자 상하이에서 뜻을 펼칠 생각이었다.
구니노미야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사망했고, 조명하는 황족위해죄로 그해 10월10일 이국땅에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처형됐다.
▶ 1913년 록펠러재단 설립
▶ 1907년 파키스탄 근대화에 기여한 대통령(1958-1969) 아유브 칸 출생
▶ 1905년 제1회 관-사립소학교 연합운동회 개최
▶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개막
▶1901년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
(김창식, 김기범)
▶ 1863년 독일 작곡가 페르디난트 바이어 사망
▶ 1811년 파라과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1796년 제너, 천연두 예방백신 ‘종두’ 첫 임상시험
제너가 우두법을 개발하자 한때 “소 고름을 맞으면 사람이 소로 변한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당시 사람들이 느낀 공포를 재치 있게 풍자한 제임스 길레이의 만평(1802년 작).
1796년 5월 14일, 에드워드 제너가 소로 인해 병에 걸린 하녀의 손바닥 종기에서 고름을 채취, 하녀의 여덟 살 난 아이에게 주사했다. 최초의 종두 주사였다. 종두(種痘)는 사람 몸에 우두를 접종하는 것이고, 우두(牛痘)는 병에 걸린 소의 몸에서 뽑아낸 면역물질을 뜻한다. 따라서 이날 주사한 고름은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한 최초의 백신인 셈이었다. 백신이란 말도 소를 뜻하는 라틴어 ‘바카(Vacca)’에서 나왔다. 아이가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자 제너는 6주후 진짜 천연두에서 뽑아낸 고름을 주사했다. 역시 아무런 탈이 없었다. 천연두로부터 인류가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두창(痘瘡)의 일본식 명칭인 천연두는 유사이래 인류를 괴롭혀 온 ‘죽음의 사자’였다. 치사율도 높은 데다가 목숨을 건져도 얼굴에 곰보를 남겼다. 로마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와 영국 여왕 메리 2세를 쓰러뜨린 것도 천연두였다. 우리나라에서도 1951년에 4만3000명이 병에 걸려 1만1000여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될 정도로 극성을 부렸지만 1960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보고는 없다.
세계적으로도 1977년 소말리아 환자를 마지막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져 세계보건기구(WHO)가 1980년 5월 ‘천연두 박멸’을 선언함으로써 인류가 ‘정복’한 유일한 전염병이 됐다.
▶ 1787년 미국 필라델피아서 헌법개혁 위해 대륙회의 개최
▶ 1771년 사상가 오엔 출생
▶ 1727년 18세기 영국의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 풍경화가 게인즈버러 출생
▶ 1686년 독일 물리학자 가브리엘 파렌하이트 출생
▶ 1610년 프랑스 부르봉왕조 창건한 앙리4세 피살
‘낭트 칙령’을 공포,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킨 장본인인 앙리 4세가 1610년 5월 14일 구교도 광신자의 칼에 찔려 숨을 거뒀다.
1533년 스페인 북부의 돈독한 칼뱅파 개신교인 여왕인 어머니와 카페의 혈통인 방돔 공작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프로테스탄트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키워졌다. 그후 1572년 신ㆍ구 양 교도의 화의를 다지기 위해 프랑스 왕 샤를 9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앙리 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ㆍ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게다가 구교도가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자 에스파냐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 칙령’을 공포했다. 내전을 정리하고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왕이 된 앙리 4세는 베르뱅조약을 맺어 에스파냐와의 국경문제를 정리하고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30년간 계속된 내전을 종식시키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여러 가지 사회제도를 개선해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힘쓴 공로로 그는 오늘날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 1452년 이조 5대 왕 문종 서거
▶ 1316년 독일 왕 및 보헤미아 왕(1346-78)이며, 신성 로마 황제(1355-78) 카를4세 출생
https://youtu.be/CoojWyLY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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