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2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코 8,34-9.1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하는 것이 싫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말씀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든 에너지의 98%를 그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썼었다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몇 더 들어왔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보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급이 낮은 사람들은 얼른 자신들의 술잔을 비웠습니다.
보스는 그냥 보지도 않고 아무 곳에 술을 부었습니다.
졸병들은 술을 따르는 곳에 재빨리 술잔을 갔다대어 술을 받았고 넘치기 전에 약간 잔을 들어 올려 따르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보스는 다른 곳을 보며 본인이 원하는 곳에 술을 부었고 그 때마다 졸병들이 잔을 갔다대며 술을 한 방울도 바닥에 흘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스가 주는 술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도 웃어른이 따라준 술을 다른 곳에 붓거나 버린다면 큰 실례가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이고 거룩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그 비운 만큼만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랑을 흘려버리거나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사랑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며 그 한 사람에게 온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더 합당한 사람을 더 사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며 받아들이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에너지는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받아들이겠다면 언제든 사랑할 준비를 하되 그 사람에게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마태 16,13-19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
오늘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은 계속됩니다.
벳사이다를 떠나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한 수제자, 언제나 듬직한 반석 같고 큰 바위 같은 제자 베드로를 축복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7-18)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막중한 임무, 엄청난 역할을 수여하십니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정말이지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은, 세상 전부를 쥐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존재 자체로 우리 후배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손에 쥔 분으로, 그 어떤 시련과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았던 분, 넓직한 반석같이 든든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에게도 한때 치명적인 과오, 치욕적인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과 더불어 참 제자가 되기 전, 그는 여러 측면에서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도로 사도의 성격은 과격했고 불같았으며, 마치 럭비공 같아 어디로 튈줄 몰랐습니다.
때로 조용히 있었으면 50점이라도 딸텐데, 괜히 먼저 나서다가 스승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수난의 시기, 그는 스승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배반하는, 결정적 과오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재 양성의 귀재이신 예수님의 탁월하고 예술적이며 인내로운 단련에 힘입어, 베드로 사도는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 제자로 거듭납니다.
작은 바람에도 쉼없이 흔들리던 나약한 갈대 같았던 베드로는 그 어떤 시련과 고초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큰 바위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 사도는 매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수제자 배반 사건’을 떠올리며 크게 울었답니다.
낮 동안에도 틈만 나면 송구한 마음에 울고 다녔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눈자위 주변은 늘 붉게 물들어있었으며, 짓물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왕이면 작은 모난 돌맹이가 아니라, 크고 든든한 반석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 흡족해하실 반석,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편히 앉아 쉬고 갈 수 있는
그런 반석이 되기 위해, 뾰쪽하고 모난 부분들을 갈고 또 갈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강론>
(2025. 2. 22. 토)(마태 16,13-19)
<‘반석’은 가장 아래쪽에서 전체를 떠받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1)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은, 당신의 구원사업에 인간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사업은 인간들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라는 예수님 말씀은, 교회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입니다.
-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나 자신’이 구원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신앙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도 아니고, 교회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교회나 예수님께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또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시상식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선교활동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선교활동도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 실천은, 사실상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활동을 잘했다고 교회가 시상식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잘못된 일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칭찬해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지붕’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반석’은 건물의 가장 밑에서 전체를 떠받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전체를 섬기는 가장 낮은 자리를 주셨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여기서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직책은 ‘섬기는’ 직책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군림하고 권세를 부린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고, 사랑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보다 더 높아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일을 하시니, 직책을 맡은 이들은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로 내려가서 섬기는 일을 실행해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 사도를 만나셨을 때,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분명히,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과 관련이 있는데, 그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를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 취소하시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그에게 ‘보속’을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가 실천해야 할 보속은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돌본다.’는 말은, ‘군림하고 권세를 부린다.’가 결코 아니고, ‘섬김’을 통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는데, 베드로 사도 자신도 ‘예수님의 양들’에 포함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석으로 임명하신 베드로 사도를 잘 섬기라고 양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양들은 목자들을 섬기는 존재들이 아니라, 목자들의
인도를 받아서 구원의 길을 걷는 존재들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요한 10,15) 예수님을 본받아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을 잘 섬겨야 하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만일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삯꾼’처럼 살면(요한 10,12-13), 예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되고, 또 자기 자신의 구원에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