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살상-임진왜란, 스님들의 고뇌
불광 잡지 4월호
정운(전前 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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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이다. 사위국의 유리왕은 어린 시절, 외가였던 카필라국에서 천대받았던 경험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언제고 보복할 마음을 먹고 있다가 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카필라국을 패망시키는 일이었다. 어느 날 유리왕은 전쟁 준비를 마치고, 카필라국을 향해 갔다. 카필라국에 다다를 무렵, 길녘에 부처님께서 뙤약볕 마른나무 밑에 앉아계셨다.
유리왕은 부처님을 보고 말에서 내려 말했다.
“부처님 저쪽 큰 나무 아래 녹음이 우거진 곳에 계시지 않고, 그늘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작은 나무 밑에 계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고향 카필라국은 이렇게 초라한 작은 나무나 다름이 없소. 저 큰 나무그늘보다 나의 고향 같은 이 작은 나무그늘이 더 편안 하다오”
유리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유리왕은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했고, 네 번째는 부처님도 길을 막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나의 고향 카필라국의 인연도 다하였구나.’라고 하셨다.
이 내용을 ‘깨달은 성자도 고향에 대한 애착’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필자는 달리 본다. 부처님 입장에서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중생이 죽음을 맞이함이 안타까웠을 거라고 본다. 어느 누군들 귀하지 않은 생명이 있겠는가?! 가해자 국가 사람이든 피해자 국가의 사람이든 부처님에게는 모두 똑같은 자식 같은 중생들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하고, 200년 동안 전란이 없던 평화로운 강산에 중생들의 피가 낭자할 때, 우리나라 조선시대 승려들은 어떠했을까? 부처님이 어느 나라 중생이든 똑같이 자식처럼 여겼듯이 스님들께서 가해자인 일본인이라고 죽이고 싶었을까? 혹 죽어가는 동족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서산대사의 제자 중 사명대사처럼 의승군으로 활동한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적군이지만 승려가 칼을 들고 사람을 살상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70여명인데, 당시 승려들이 사회상황에 대처했던 점을 네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의승군을 이끄는 의승장으로 활약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서산휴정ㆍ기허영규ㆍ뇌묵처영ㆍ사명이다. 둘째는 의승군도 아니고 산중에서 수도하는 것도 아닌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분들인데, 편양언기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의승군으로 잠깐 활동했다가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은둔한 경우인데, 경헌敬軒ㆍ청매인오ㆍ기암법견 등이다. 넷째는 수도에만 전념하면서 승려의 본분을 지켰던 소요태능ㆍ정관일선ㆍ부휴선수[휴정과 동문] 등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 승려들의 신분이 보장된 위치도 아니었다. 승군으로 활동했던 스님들이 살생업보인줄 뻔히 알면서도 살육현장에 나갔던 이들이 적지 않다. 한편 철저하게 오롯한 출가수행자로서의 길을 걸었던 분들도 많다.
수행자로서 철저하게 본분을 지킨 승려가 옳은가? 불살생을 어기면서까지 적군에게 칼을 겨눈 승려가 잘한 것인가? 국가가 온전해야 종교인의 삶도 있는 법이다. 조국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근자에 한국불교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호국불교 승려들을 내세우지만, 필자 입장에서는 반대도 지지도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였든 그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요, 어떤 길을 선택했든 승려들의 공통점은 중생에 대한 대비심大悲心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의승군으로 출전했던 경우와 철저하게 수행자의 길을 걸었던 두 부류 입장에서 승려들을 만나보자.
먼저 오롯한 승려의 길을 걸은 선사를 만나보자. 서산대사에게 크게 4대 제자가 있다[훗날까지 4대분파로 나뉘어 법이 전승됨]. 즉 사명유정ㆍ편양언기ㆍ소요태능ㆍ정관일선이다. 엄밀히 따지면, 사명유정 이외 세분 승려는 오롯한 승려의 길을 선택한 분들이다. 이 가운데 대표로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을 만나보자.
정관은 ‘승려로서 전란에 참여하는 것은 불도에 어긋난 일’이라고 하면서 ‘승려는 산중에서 청정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관은 휴정의 제자 가운데 장자 급에 해당한다. 사명대사가 전쟁이 끝나도 산중으로 돌아오지 않자, 빨리 산중으로 돌아올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보내었다. 이는 『정관집靜觀集』 ‘상도대장년형上都大將年兄’으로 전한다. 정관은 서산 대사 문파의 맏형으로서 중심을 잡고 있었다.
정관은 휴정 문하에서 수행한 뒤 법을 전해 받았다. 임진란이 발생했을 때 정관의 세속 나이 60에 해당한다. 정관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전쟁으로 죽어간 이들을 위한 수륙재를 지냈다. 정관은 경전을 강의하며, 삼문三門을 중시하였다. 삼문이란 염불정토와 간화선[徑截門], 불교학[圓頓門]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는 삼문일치라고 볼 수 있다. 정관은 전란에 은둔하면서 독자적인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던 대표적인 선사이다. 정관의 수행관은 그의 선시에 드러나 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세속을 떠나 발우 하나 지니고, 세상사를 벗어 던지다.
속세를 벗어난 노을과 안개, 마음에 흡족하니
중생의 어지러운 욕심과 번뇌, 좇을 일이 아니다.
유유悠悠한 세월, 마음 따라 한가로이 보내며
산천을 따라 자재롭게 노닌다.”
혼란한 시대에도 본분을 잃지 않는 수행자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정관은 임진란 이후 세태 풍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승려들이 절을 떠나 활동하면서 속세의 습관이 싹터서 출가한 뜻을 잊어버리고 계율을 버려둔 채 허명만을 쫓고 있다. 교단에 많은 폐해가 생겨나고 있다.”
다음은 정관스님과 반대로 전쟁에 참여했던 호국승려인 사명대사를 만나보자.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은 국가에서 실시한 승과에 18세에 급제했다. 사명은 20대 후반에 직지사 주지를 역임한 뒤 1575년 31세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한다. 묘향산 보현사에서 주석하고 있는 서산대사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얼마 후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났다. 사명은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천명을 이끌어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어서 1593년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자, 선조로부터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 받았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는데, 네 차례 회담에서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여러 조항들을 하나하나 조목 조목 들어 논리적인 담판으로 왜장을 물리쳤다.
이렇게 회담하는 와중에 사명은 선조대왕에게 ‘백성을 편안토록 해야 하며,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군수 무기 준비’를 건의했다. 또한 사명대사는 불교와 관련된 여덟 가지를 제안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승려들에 대한 침해가 너무 심해 고통 받고 있으니, 국가적인 배려를 해달라는 요구였다. 선조는 철썩 같이 약속해놓고, 유생들의 반발로 승려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물거품이 되었다.
1594년 사명이 의령에 주둔했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였고, 산성 주위를 개간해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하였다. 선조대왕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벼슬을 내렸다. 사명은 1604년 휴정이 입적하는 무렵, 선조의 부탁으로 일본에 들어갔다. 사명은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선조는 왜란이 종결된 뒤 몇 고승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 가운데 사명을 도성 가까이 두고자 요청함으로서 사명은 잠시 도성에 머물렀다. 그러다 사명은 영의정 벼슬을 받았지만, 바로 물리치고 승려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사명대사에게 호국승려의 모습만 있을까? 그렇지 아니하다. 사명대사는 불교교학에도 뛰어났으며, 선시에도 능한 서정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명집』의 서문을 쓴 허균(1569~1618)은 사명의 선시에 대해 “뜻이 맑고도 격조가 높다. 내 중형도 몹시 칭찬하면서 그는 충분히 당나라의 아홉 승려와 비교할 만하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또한 사명은 글씨가 왕희지체에 능했는데, 부휴선수[서산휴정과 사형사제]와 함께 당대의 ‘이난二難’이라 불리었다.
사명은 사숙이었던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와 매우 가까웠다. 사명대사는 부휴와 법형제처럼 서로를 존중하는 인연이었다. 사명대사가 부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라가 어지러워서 저는 승려로서의 본분사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저 대신 스님께서 열심히 정법正法을 이어주십시오.”
이에 화답으로 부휴는 이렇게 편지를 보내었다.
“바람에 나부끼며 어촌을 지난다.
구름 장삼 모래 울리는 백리의 명사길,
그대 생각에 애가 닳는구나.”
부휴선사가 의승군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전쟁터에 있는 사명대사를 얼마나 안쓰러워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정관스님은 오롯한 수행자로서의 길을 선택했지만, 승군이었던 사명을 비난하거나 질타하지 않았다. 왜란이 끝나고, 1641년에 사명이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상송운대사上松雲大師’라고 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먼 길을 떠나는 사명대사에게 늙어 병들어서 전송하러 가지 못한다고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한분의 의승군을 꼽는다면, 승려로서 최초로 출전해 8백 의승군을 일으킨 기허영규(騎虛靈圭, ?~1592)이다. 자신과 국적이 동일한 중생에게 꽂히는 칼날을 대신 받겠다는 영규대사의 그 연민심을 어찌 과소평가하랴!
앞에서 언급한대로 전란에 스님들이 저마다의 길을 걸었지만, 자신과 길이 다르다고 책망하지 않았으며, 어떤 길이었든 스님들의 목적은 중생을 위한 염원이었다. 불교사에 부처님과 승려들은 길 위의 삶, 중생과 함께였다. 바로 화광동진和光同塵ㆍ회두토면灰頭土面ㆍ말토도회抹土塗灰라고 볼 수 있다. 즉 중생이 살고 있는 진흙 밭에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의승군이었던 휴정ㆍ사명ㆍ영규대사의 바람도 그러했으리라. 이들의 행보는 현 한국불교의 기틀이요,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었다고 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