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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찾아가십니까?>
우리는 요즘 누구를 찾아갑니까?
하고 있는 일들이 술술 잘 풀리면 좋겠는데, 꼬이고 꼬입니다. 인생이 괴롭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를 찾아갑니까? 혹시라도 이상야릇한 분위기의 철학관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녀의 시험 철이 다가오면 어디를 찾아갑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위덩어리를 찾아가지는 않습니까?
승진을 앞두고, 선거철을 앞두고 어디를 찾아갑니까? 결코 기대서는 안 되며, 절대로 찾아가서는 안 될, 그리고 언젠가 허망함만을 느낄 ‘유력인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큰 실수를 하는 것이며, 잘 못 찾아가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다짐합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 이면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동안 좋다는 곳, 정말 대단하다는 사람, 참 진리를 가르쳐준다는 스승, 효험이 있다는 곳... 세상 곳곳을 다 찾아다녀봤지만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만이 영원하신 분,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그분만이 내 존재 전체를 내어맡겨도 괜찮은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찾아갑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명쾌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삶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유한한 것, 잠시 지나가는 것,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참 진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데나 찾아가서는 안 되겠지요.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잠시의 위로 정도겠지요. 감언이설이겠지요. 거짓된 공약이겠지요.
그들의 가르침에는 오류투성이입니다. 괜히 잘못 찾아갔다가는 패가망신입니다.
결국 우리가 찾아갈 곳은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참 진리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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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사도9,31-42 요한6,60ㄴ-69
“일어나라”
-부활의 삶-
오늘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신체적 장애보다 더 두려운 것이 마음의 장애일 것입니다.
진정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부활할 때
치유되는 마음의 장애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부활의 삶입니다.
밤에 잠드는 것도 신비요 새벽에 잠깨어 일어나는 것도 신비입니다.
그대로 부활의 삶을 상징합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잠자리 들기 전 끝기도 강복 중 ‘거룩한 죽음’ 대신
‘거룩한 새 아침’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어느 분의 기발한 조언도 생각납니다.
그러나 거룩한 죽음의 밤 있어, 거룩한 새 아침의 부활입니다.
매일 아침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다시 일어나 부활의 삶을 시작하는 우리들입니다.
어제 사울을 회심시킨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은 베드로를 통해 치유 이적과 소생 이적을 행하십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베드로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의 영과 생명으로 충만한 말씀에
8년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던 애네아스는 치유되어 일어납니다.
“타비타, 일어나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 죽었던 타비타를 살려냅니다.
‘일어나다’는 말은 바로 부활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매일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단골 용어가 바로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평생 이렇게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게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부활의 삶의 비결은 따로 없습니다.
매일, 평생, 죽을 때까지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살아가는 길뿐입니다.
주저앉고 싶은, 드러눞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일어나야 하는 것 역시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유혹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주십니다.
이래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끊임없이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고백할 때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와 더불어 주님의 힘은 바로 내 힘이 됩니다.
하여 매일의 미사와 성무일도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고 고백할 때 충만한 은총입니다.
사실 예수님 말고 찾아갈 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여 매일 주님을 찾아 성전 미사와 성무일도에 참석하는 우리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을 찾아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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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는 많은 주머니가 있습니다. 이 주머니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들고 다니기 불편하니까 이 주머니에 넣으라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한때는 주머니가 많은 옷들이 유행했습니다. 그만큼 기능이 많은 옷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머니에 많은 것이 들어 있으면 옷맵시가 나지 않습니다. 볼록 튀어나온 바지 주머니와 양복 주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만약 동전이 주머니 안에 있으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소리 역시 사람들의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것이지요.
아무튼 주머니의 용도는 많은 것을 넣으라는 것이지만, 넣으면 넣을수록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사실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넣고 다니는 것은 건강에도 그리 좋지 않다고 하지요. 뒷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다니면 골반 뼈가 틀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결국 옷에 달려 있는 주머니들은 급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용하면 오히려 볼품도 없고, 건강에도 안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런 주머니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주머니 안을 욕심을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던가요? 그리고 욕심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건강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불안한 마음과 비교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욕심으로 내 안의 주머니를 가득 채우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할까요?
주님이 내 안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집착하다보니 욕심으로 채워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물질적인 것으로 주머니를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랑으로 주머니를 가득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즉, 욕심 주머니가 아닌, 사랑 주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몇 명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시몬 베드로가 대표로 대답하지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면 절대로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지 않고, 주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면서 내 안의 주머니를 사랑으로 가득 채워나갈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 주머니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욕심 주머니입니까? 사랑 주머니입니까?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들의 마음에는 욕심 주머니로만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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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토요일>(2013. 4. 20. 토)(요한 6,60ㄴ-69)
<모령성체(冒領聖體)>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도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열두 사도만 남고 다 떠나버렸습니다(요한 6,66).
떠나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믿지 않겠다고 떠난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자 믿음을 버린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고 그렇게 쉽게 떠나버렸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원래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도 않으셨고,
떠나는 제자들을 붙잡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남아 있는 사도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이 말씀은 '너희도 떠나려면 떠나라.' 라는 뜻인데,
성체성사 교리는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서 납득시킬 수 있는 어떤 이론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 할 '하느님의 신비'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베드로의 이 대답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말씀이 이해가 안 되더라도 믿고 따르겠다.'입니다.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라는 말은
예수님 말고는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라는 말은
성체성사 교리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메시아라고 믿는다.' 라는 뜻입니다.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자기의 믿음에 대한 강한 확신을 나타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대답일 것입니다.
또 베드로가 '저희' 라고 표현한 것은
사도들이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 곁에 남았지만,
다른 사도들처럼 믿었기 때문에 남은 것이 아니라,
그냥 남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요한 6,64)."
유다가 믿음을 잃은 것이 성체성사 교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예수님 곁에 남아 있다고 해서
그것이 꼭 믿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이 어떤 세속적인 목적으로
날마다 열심히 성당에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유다는 성찬례 제정 뒤에도 한동안
최후의 만찬 장소에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루카 22,21).
유다도 성체를 받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교회 최초로 '모령성체'를 한 사람이 됩니다.
이미 배반을 한 상태에서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기 때문에
그가 성체를 받아먹은 것은 성체를 모독하는 모령성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배반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그에게 성체를 주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다른 제자들에게 끝까지 배반자의 이름을 밝히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유다 자신이 스스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가 모령성체를 한 것을 예수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유다가 자기에게도 성체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성체를 먹기 전에 먼저 회개부터 했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영혼은 이미 죽은 것과 같았고, 무덤 속에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배반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신 것,
유다의 발을 씻어 주신 것, 성체를 주신 것은 모두
그를 다시 살리려는 사랑이었고 은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사랑과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버렸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는 성체를 받아먹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는커녕 영원히 멸망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도, 또 아무리 놀라운 은총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과 은총 자체가 쓸모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쪽에서
사랑과 은총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체의 사랑과 은총을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데,
우리는 과연 그 사랑과 은총을 어떤 영혼의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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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인 눈을 가졌다는 확증은? >
러시아 우주 비행사인 가가린(Yurii A. Gagarin)은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 29분 만에 지구의 상공을 일주함으로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감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구는 푸른빛이었다. 하느님은 우주의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러나 10년 뒤, 1971년 아폴로 15호의 승무원으로 달을 탐사한 미국의 우주 비행사 제임스 어윈(James B. Irwin)은 가가린과 달리 이렇게 말했습니다.
“달나라에 있는 동안 나는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서 체험했습니다.”
세상 마칠 때까지 세상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눠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역시 두 부류로 나눠졌습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나눠지는 이유가 사람은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은 영적인데 사람들이 육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육적인 인간에서 어떻게 영적인 인간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1888년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당대에 명사가 되었고 수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깜짝 놀랄 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그 서두에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문 기사의 보도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기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이 사람은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라고 보도한 신문을 찢어 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 후 그는 드디어 다이너마이트 뇌관의 발명으로 다이너마이트는 광산과 철도, 터널공사 현자에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만년에 그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생리학, 의학, 문학, 화학, 평화의 각 부분으로 나누어 각 분야에 공헌한 자에게 상으로 주라고 유언했습니다. 이리하여 노벨상이 제정되어 노벨이 죽은 12월 10일에 매년마다 수상식이 열립니다.
노벨의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무기제조 사업을 했고 노벨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거들어 무기제조에 손을 댔던 무기 상인이었습니다. 그 때는 돈이 보였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대면했을 때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즉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돈이 안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은 배우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은 영이신데 우리 자신들이 육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인간들, 그래서 당신의 성체 성혈의 신비를 이해 못해서 떠나려는 이들을 굳이 붙잡지 않으십니다. 차원이 다른 부류와는 친교를 이룰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라는 동네에서 한 장님을 치유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치유를 해 주었더니 사람이 나무처럼 보인다고 하고 두 번째 치유를 하니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는 것은 영적인 눈을 띄어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사람이 나무로 보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이 생명나무임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장님을 다시 베싸이다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다시 죄를 지어 영적인 눈을 잃게 될까봐 그런 것입니다.
즉 영적인 눈은 당신에게서 오는 성령으로 띄어지게 되는데 죄를 짓지 않아야 그 성령이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은 내 안에 죄의 저항이 너무 강해서 성령께서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처음에 매우 육적인 사람이었지만 영적인 사람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눈이 멀어 장님이 되었을 때 지은 노래를 감상해봅시다.
태양의 찬가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결국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는 눈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모든 것에서 찬미를 볼 수 있는 눈을 지녔다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합시다. 내가 새로 태어났다는 것이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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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갖게 됩니다. 누구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하고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 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 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이 말씀은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당신이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 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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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배가 제게 전자 우편(이메일)을 보내며 답장을 부탁했는데, 답장이 없다고 화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읽은 기억이 없다고 해명하였습니다. 그러자 후배는 전자 우편에는 수신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수신 확인’이라는 기능이 있는데, 거기에는 제가 읽었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거짓말쟁이로 내몰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달랬습니다. “너와 내가 함께 지낸 세월이 있다. 그동안 나를 겪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냥 내 말과 인격을 신뢰해 줄 수는 없느냐?”
그 후배는 저의 이 말에 화를 가라앉혔습니다. ‘수신 확인’으로는 제가 읽은 것이 맞겠지만, 그것보다도 저와 후배 사이의 돈독한 관계, 저에 대한 인격을 신뢰하며 읽지 않은 것으로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믿기 어렵지만 제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군중과 몇몇 제자들이 거부감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가르침이지만, 그동안 자신이 겪어 온 예수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주님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도 베드로처럼 주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성과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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