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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하소설
‘혼불’ 배경 종갓집 불
▲15일 새벽 화재가 발생한 전북 남원시
사매면 삭녕 최씨 종가에서 소방대원들이
진화(鎭火) 를 한 뒤 정비작업을 하고
있다. /남원시 제공
혼불’ 배경인 최씨 종가.작가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가 된 전북 남원의
삭녕(朔寧) 최씨 종가에서 불이나 종가의
대를 이어온 할머니가 숨졌다.
2007년 5월 15일 오전 1시10분쯤 남원
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녕 최씨 종가
안채에 불이나 1시간30분 만에 목조한옥
25평이 모두 탔으며, 안방에서 잠자던 종부
(宗婦) 할머니 박증순(93)씨가 사망했다.
이 집은 소설 ‘혼불’에서 최씨 종가 며느리
3대 일가가 일제 강점에서 6.25전쟁 때
까지 수난과 애환을 겪어온 곳이었다.
박 할머니는 조선 성종의 스승이던 폄재
공 최온의 12대 종부로, 먼 친척인 작가
최명희에게 집안 내력과 듣고 겪은 일들을
구술해 주었고, 그 자신 소설 속 종부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2015년‘노래하는 신부(神父)’
반예문 별세
노래하는 신부(神父)’로 알려진 미국인 반예문(89·레이먼드 설리번) 신부가 지난 15일 미국 뉴욕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선종(善終)했다.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된 반 신부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55년 한국에 왔다. 청주교구에서 15년간 활동했고 이후 서울에서 가톨릭 매스컴위원회 총무로 일했다.
고인은 1982년 ‘가톨릭 가요대상’을 제정했고, ‘바보처럼 살았군요’ ‘잊혀진 계절’ 등 좋은 가요를 영역(英譯)해 외국에 알리는 일에 앞장서면서 ‘노래하는 신부’로 잘 알려졌다.
1989년 한국을 떠나 뉴욕 메리놀회 본부에서 생활해 왔다.
▶2012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디아블로 3 전세 계 출시
▶ 2009년 북한, 개성공업지구에서
대한민국 기업에게 주어진 특혜를
전면적으로 무효화한다고 선언함.
입출입차량이 끊긴
파주시 남북출입사무소 일대
북한이 2009년 5월 15일 개성공단 임금·임대료·세금 등의 조건을 자기들이 다시 정할 것이며 남한이 이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단에서 철수해도 좋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무책임한 처사"라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혀, 2004년 3월 시작된 개성공단 사업이 존폐 기로에 놓였다.
북한의 개성공단 관할 기구인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은 이날 남측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를 통해 보낸 통지문에서 "개성공단에서 6·15 공동선언(2000년)의 정신에 따라 남측에 특혜적으로 적용했던 토지 임대값과 사용료, 노임, 각종 세금 등 관련 법규와 계약들의 무효를 선포한다"고 말했다. 이어 "변화된 정세에 맞게 개정된 법과 규정을 시행하기 위한 절차에 착수할 것"이라며 "남측 기업들은 우리가 통지한 사항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집행할 의사가 없다면 개성공단에서 나가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남측 기업이 철수해도 좋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통일부 김호년 대변인은 논평에서 "북한 선언은 개성공단의 안정을 위협하는 조치로 정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음을 명백히 밝힌다"며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억류 중인 유씨 문제와 관련, 정부 당국자는 브리핑에서 "거래의 대상도, 협상의 대상도 아니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유씨 문제로 우리 근로자들이 굉장히 불안해한다"며 "이는 개성공단의 본질적 문제"라고 했다.
▶2009년무형문화재 김유감씨 별세
▶2007년 마부노호 소말리아에서 피랍됨.
한국인 4명 을 포함한 마부노 1,2호 선원
24명이 피랍 174일 만인 11월 4일 모두
석 방되었다.
▶2007년 마크 로스코의 '화이트 센터'
현대미술 최고 가 낙찰
▶2007년김성은 전 국방장관 별세
▶2005년서해 입파도 일가족 보트 참사
서해 섬에서 휴일을 보내고 돌아오던 한 가족이 탄 보트가 침몰해 7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숨진 이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으나 찬 바닷물에서 14시간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구자훈(39·회사원·경기 안산시)씨 형제·자매(2남3녀)와 가족 등 14명은 휴일인 15일 서해상의 섬 입파도(경기도 화성시 우정면)로 야유회를 갔다가 오후 4시쯤 경기도 화성시 전곡항으로 귀갓길에 올랐다. 구씨는 먼저 자신의 아내와 딸, 동생인 자희(여·30)·자영(28)씨, 자희씨 남편인 김심환(33·서울 서대문구)씨 등 모두 8명을 구씨 소유의 0.7t짜리 레저용 보트(7~8인승)에 태우고 전곡항으로 향했다. 마침 파도도 없는 데다 보트도 최고 시속 30노트(54㎞)로 달릴 수 있어 평소 같으면 1시간 남짓이면 갔다 올 거리(약 13㎞)였다.
그러나 보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섬에 남아 발을 동동 구르던 자훈씨의 동생 자경(여·28)씨 등 가족 6명은 자훈씨와 휴대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들은 4시간 뒤인 오후 8시 20분쯤 해경에 신고했다. 해경은 신고한 지 1시간 만인 이날 오후 9시 24분 출동, 2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해 경비정 8척과 헬기 2대로 밤새 수색을 벌여 이튿날인 16일 오전 6시 20분쯤 자희씨를 구조했다. 자희씨는 김 양식장 부표를 붙잡고 상반신을 물 밖으로 내놓은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고 해경은 전했다. 그러나 나머지 가족 7명은 모두 인근 해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 2005년 명왕성의 위성 닉스와 히드라가
허블우주 망원경에 의해 발견됨.
▶2004년 아동문학가 어효선 선생 사망.
▶2003년노무현 대통령,
미국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
▶2003년국립공주박물관서 국보 1점 등
문화재 4점 분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발생한 국보 문화재 강탈 사건은 허술한 보안시스템과 근무자들의 안일한 근무태도로 빚어졌다. 국보 19점, 보물 4점 등 문화재 1만여점을 전시·보관 중인 국립공주박물관의 야간 근무자는 3명이었고, 비상사태 시 서로 연락할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전시실에는 폐쇄회로TV(CCTV)와 적외선 감지기가 설치돼 있었지만 가동되지 않거나 제 구실을 못했다.
15일 밤 10시쯤 공주박물관 당직근무자 박모(35·학예연구사)씨는 바람을 쐬러 당직실 옆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 셔터와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다. 10시 25분쯤 검은 복장을 한 30대 남자 2명이 뛰어들어왔다. 순간 건물에서 20m 떨어진 경비초소 청원경찰(2명)에게 알리려고 박씨는 소리를 질렀지만 곧 제압을 당했다. 범인들은 각각 전기 충격기와 칼로 박씨의 목에 전기충격을 가하고 위협, 박씨의 팔과 다리를 뒤로 묶고, 눈과 입을 테이프로 가렸다. 범인 중 한 명은 박씨를 감시하고 나머지 한 명은 안으로 들어가 전시실 유리창을 깼다. 몇 분 후 인기척이 없어 박씨가 결박된 손을 풀고 가려진 눈을 떠 보니 범인들이 도주한 뒤였다. 경찰에 신고가 들어온 시각은 10시 44분. 범행은 불과 10여분 만에 이루어졌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공주박물관에는 보안방범시설로 CCTV 4대, 적외선 감지기 6대, 당직실에서 경비초소와 파출소로 연결된 비상벨 1개가 있다. 하지만 CCTV는 2층에만 설치돼 있고, 야간에는 작동을 중지시켜 사실상 야간 침입자에 대한 감시기능을 하지 못했다. 1층 전시실과 1~2층 사이 계단에 설치된 적외선 감지기는 당직자가 야간에만 작동하도록 되어 있지만, 사건 당일 벨은 울리지 않았다. 경찰은 “박씨가 감지기를 작동시키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고 말했다. 또 당직실과 연결된 출입문 안쪽에 셔터가 있지만 당직자들은 이를 거의 내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작년 4월 공주박물관으로 발령받은 이후 당직 때 출입문 셔터를 내린 적이 한 번도 없다” 고 말했다.
문화재청과 충남지방경찰청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도난 당한 문화재 4점의 회수를 위해 16일 이례적으로 20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도난 문화재 사진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2001년 한기총 탈북난민보호
유엔 청원운동본부가 서명을 달성하고
유엔에 청원대표단을 파견하다.
▶2000년 대한민국'니카라과 정상회
▶1996년동편제 판소리 대가
강도근 명창 별세
▶1995년국제언론인협회(IPI)
제44회 연례총회 서울서 개막
▶1993년일본 프로축구리그 `J리그` 출범
▶1993년한학자 신호열씨 별세
▶1991년일본 자민당 아베 신타로 사망
일본 자민당 최고실력자중의 한사람인 아베 신타로가 1991년 5월 15일 별세했다. 아베는 자민당의 주요직책인 간사장정조총무회장, 내각의 주요 포스트인 관방외무통산장관 등을 빠짐없이 역임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사망하기 전 4년 반 동안 총리총재 자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그 자리에 앉아보지 못했다. 아베는 포스트 가이후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는 1989년 6월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돼 책임을 지고 간사장을 사임했으나 다케시타, 가네마루씨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당내 제2파벌 영수로서 대권에 강한 의욕을 보여왔다. 다케시타 전 총리, 미야자와 전 부총리 등과 함께 일본의 `뉴리더`로 불리던 그는 다케시타의 후임 총리로 거의 확실해 보이기도 했으나 리크루트 스캔들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베씨는 다이쇼(大正)13년(1924년) 야마구치켄에서 태어났다. 동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잠시 마이니치 신문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다 1958년 총선거 때 출마, 첫 당선함으로써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는 3번째 선거인 1963년 총선거에서는 낙선했으나 곧 컴백, 지금까지 11회 당선을 거듭했다.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라는 가계의 덕택과 성실한 인품, 원만한 성격으로 신망을 쌓았다. 그는 미키 내각 때(1974년) 농상으로 첫 입각한 것을 계기로 관방장관, 통산상과 외상을 역임했다.
자민당 내에서도 간사장을 비롯, 정조회장·총무회장 등 주요 3역을 모두 거쳤다. 특히 1982년 나카소네 내각 발족과 동시에 취임한 외상은 연속 4기, 재임기간 3년8개월에 이르는 최장수였으며 일본의 국제국가로서의 공헌을 목표로 한 `창조적 외교`를 제창함으로써 국제적 지명도를 높였다.
▶1988년소련, 아프가니스탄 철수 시작
▶1988년한겨레신문 창간
▶1982년영국 특공대 포클랜드 상륙
▶1982년스승의 날 부활(1973년 중단)
▶1980년대학생 가두시위 절정
▶1974년한국-네팔, 국교수립
▶1973년국무회의에서
새 가정의례준칙 의결
▶1973년국회의사당 본관 상량식
여의도 국회의사당 3개 건물 중 본관 상량식이 1973년 5월 15일 열렸다. 국회의사당은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 가진후 6년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1975년 9월 1일에 준공됐다. 3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국회의사당은 여의도공원에서 바라보아 정면에 의사당 본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국회도서관, 왼쪽에는 의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의사당 본관은 화강석으로 된 너비 50m의 대계단과 기단 위에 세워진 높이 32.5m의 대열주(大列柱) 24개, 대열주가 받쳐주는 처마와 밑지름 64m의 돔으로이루어진 지붕으로 구성되어있다. 열주는 경회루의 석주를 본뜬 것으로, 24절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상징하는 것이며 돔은 원만한 결론을 지향하는 의회정치의본질을 상징하는 것이다. 총 대지면적은 33만평방미터제곱(10만평)이고, 지하2층 지상6층의건물로 지반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69.19m, 연건평은 8만1444평방미터제곱(2만4680평)이다.
ㅗ
▶1972년미국, 27년 만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
1972년 5월15일 0시, 사이렌과 기적소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 전역에 울려퍼졌다. 27년간의 미국 통치에서 벗어나 ‘오키나와현(縣)’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오키나와현 지사는 “오키나와라는 영원한 새 생명의 탄생”이라며 감격해했지만 진보진영은 핵과 미군기지없는 전면반환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반환은 예정대로 진행돼 국제선은 국내선이 됐고 우측에서 달리던 차량은 좌측으로 달렸다.
류큐(琉球) 왕국이라는 독립국가로 한국ㆍ중국ㆍ일본ㆍ동남아를 연결해 온 해상무역 중심지 오키나와가 일본령이 된 것은 1609년 가고시마(鹿兒) 영주가 이곳을 복속한 뒤부터였다.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정식 편입됐지만 일본 본토로부터는 언제나 버려진 섬이었다.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부터 석달간 미군ㆍ일본군 간에 벌어진 오키나와전투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전투로 미군 1만5000명과 일본군 6만 500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주민들도 12만명이나 희생됐다. 본토방어를 위해 시간을 벌기위한 ‘옥쇄작전’ 때문이었다. 일본의 총알받이였던 것이다. 패전 후에도 오키나와는 미국과 일본의 흥정대상이었다. 군사요충지로 오키나와를 필요로 했던 미국에게 일본은 오키나와를 바치고 그 대가로 미ㆍ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7년신라 문무왕 해중릉 발견
1967년 5월 15일 경북 경주시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약2백m 앞바다에 있는 대왕바위에서 바닷물 속에 지어진 문무대왕릉이 발견됐다
1977년 5월 5일 촬영된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해중릉.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이라고도 한다.
둘레 약 2백m의 대왕바위에 정확한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수로를 깎아내고 그 중앙에 패진 4평 가령의 해중못에 해중릉이 조영되어 있다. 유골은 그 못안 석함속에 안치된 것으로 보이며, 그 위에 길이 3.59m, 두께 0.9m의 큰거북 모양의 화강암 개석이 덮여졌다.
이런 릉의 조영방식은 사문을 배치하고 그 중에 사리를 안치한 기원전 2세기의 `산치`탑을 위시해 5, 6세기 중국육조시대의 목탑 그리고 신라의 봉황사탑, 백제의 미륵석탑 등의 양식과 비슷하다. 문무대왕은 "내가 죽으면 서국(인도) 식으로 화장을 하여 동해에 장사를 하라. 그러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으리라."는 뜻의 유언을 했었다.
▶1964년라오스내전 격화
▶1963년동경올림픽 남북 단일팀 협상
홍콩서 개시
▶1958년한강 인도교 보수후 개통
한국전쟁당시 다리를 폭파했던 이들이
다시 모여 준공식
▶1957년영국 수소폭탄 실험 성공
(세계에서 3번째 수폭 보유국)
1957년 5월 15일 영국이 중부 태평양상에 있는 크리스마스섬에서 수소폭탄개발 실험에 성공했다. 이날 4발 제트기폭격기인 바리안트는 고도 9.100m에서 영국 최초의 수소폭탄을 투하했고, 폭탄은 3,000m의 고도에서 폭발했다. 실험지역에는 해군함정이 배치됐고 일반선박은 출입이 금지됐다.
중부 태평양에 위치한 크리스마스섬에서
실시된 영국의 수소폭탄 실험 모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구름을 형성했다
미국과 소련의 핵실험으로 세계의 방사능 수치가 상승하고 있는 것을 우려한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2월 영국의 실험이 예고됐을 때 반대를 표명했다. 일본 정부도 특사를 파견해 맥밀런 수상에게 중지를 요청했으나 결국 영국은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의 수소폭탄 보유국이 됐다.
▶1957년제25회 임시국회
야당만으로 개회식
▶1956년제3대 대통령선거 실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 당선
▶1955년오스트리아 주권회복조약 조인
▶1948년제1차 중동전쟁 발발
1948년 5월 15일 아랍제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5월 14일 이스라엘의 지도자 벤 구리온이 이날 소집된 제4회 전국평의회 석상에서 전세계를 향해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했고, 이틀 후인 5월 16일 미국 소련 일본 등이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이스라엘군의 장갑차를 습격, 불태우고
있는 아랍인들.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 후
익일부터 중동전쟁이 시작됐다.
전쟁 초기에는 아랍제국이 우세했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아랍제국은 패배를 거듭했다. 조정에 나선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1949년 7월 21일 휴전이 성립됐지만, 휴전은 잠시뿐 지금까지도 중동의 화약고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전쟁 패배로 100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겼으며 아랍게릴라가 조직됐다.
▶1946년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발표
▶1940년나일론 스타킹
미국 전역에서 판매 시작
▶1932년일본 군장교 쿠데타.
수상을 사살 (5.15사건)
▶1911년최초의 동시상영 영화 `The Lost
Chord`와 `The Fall of Troy` 상영
▶1902년시인 정지용 출생
향 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 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출처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55857&cid=42840&categoryId=42853
▶1901년모펫,
한성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 설립
▶ 1899년 독립운동가 이붕해 출생
▶ 1884년 독립운동가 오성술 선생 출생
▶ 1859년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퀴리부인의 남편) 출생
▶ 1855년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 출생
이 땅의 어린이들을 천연두의 위협에서 구해낸, 지석영
서양의 종두법을 배우다
1879년 전국에 천연두가 창궐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지석영의 조카딸도 그해 사망했다. 한의학을 공부했던 지석영은 천연두의 창궐에 한의학의 무력함을 통감했다. 서양에서 실시하고 있는 종두법이라는 것을 조선의 아이들에게 시행할 수 있다면 수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3년 전 스승인 한의사 박영선(朴永善)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도쿄 순천당의원 의사에게 우두종두법을 배우고 일본인이 쓴 [종두귀감]이라는 책 한 권을 갖고 돌아왔다. 박영선은 그가 배운 종두법과 그 책을 제자들에게 강의했는데, 지석영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지석영의 귀에 당시 부산에게 일본 거류민의 치료를 위해 의료행위를 하고 있던 제생의원 원장과 해군 군의관이 종두법을 알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난했던 지석영은 20일 동안 걸어서 부산 제생병원을 찾아가 필담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 열의에 감복한 원장은 종두법을 가르쳐주기로 하고, 대신 지석영은 당시 일본인 거류민들이 편찬준비를 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위한 한국어 사전 작업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렇게 부산에서 보낸 두 달이라는 시간은, 서양의 종두법을 배우고 서양 의학의 우수성을 확인한 지석영이 이후 서양 의학을 도입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국문학에 관심을 갖는 기회도 만들어주었다.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한학과 의학을 배우고
지석영은 1855년 5월 15일 서울 원동(지금의 낙원동)에서 지익용(池翼龍)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신분은 양반이었으나 매우 가난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지익용은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한의원을 차렸으면 살림이 좀 나아졌을지도 모르지만 직접 의업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당시 의업은 중인층의 직업이었으므로 중인 취급을 받을까 염려했던 듯하다.
그러나 중인층의 한의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특히 당시 이름 있던 한의사인 박영선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탐구열이 매우 강했던 넷째아들 지석영을 당시 양반자제들이 다니던 서당에 보낼 형편이 안 되자 친구인 박영선에게 보내 한학과 의학을 공부시켰다.
직접 일본에 가 우두묘의 제조기술까지 습득
부산의 제생의원으로부터 두묘(痘苗, 천연두의 예방으로 쓰이는, 소의 몸에서 뽑아낸 면역물질)와 종두침, 접종기구, 일본 거류민들에게 부탁하여 구한 서양의학 서적 몇 권을 가지고 상경하던 지석영은 충청도 충주군에 있는 처가에 들렀다. 그곳에서 장인을 설득하여 두 살 된 어린 처남에게 첫 종두를 실시했고, 그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을 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우두 접종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묘가 제한된 양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접종하기 위해서는 두묘의 지속적인 공급이 필요했다. 접종법은 배웠지만 두묘를 제조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던 지석영은 1880년 수신사 일행에 수행원 자격으로 직접 따라나서 우두묘의 제조기술을 완전히 습득하고 돌아왔다. 귀국한 뒤에는 서울에 종두장을 차려 백성들을 계몽하면서 본격적으로 우두접종사업을 펼쳐나갔다.
우두접종 의무실시로 수많은 어린이들의 생명 구해냈으나 친일 행적으로 오점 남겨
그 무렵 지석영은 개화당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그는 우두의 실시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혁신을 중심으로 한 선진적 개화사상을 주장한 개화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러던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당의 일원이자 일본 의사와 접촉하여 종두법을 수입한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다행히 몸은 피했지만 종두장은 군인들의 손에 완전히 불타버렸다. 정국이 안정된 뒤 지석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부활시켜 계속 종두를 보급했고, 전라도와 충청도에도 우두국을 설치해 종두법을 가르쳤다.
1883년에는 정부의 개화정책 입안에 직접 참여하고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한 뒤 성균관의 서적을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개화파가 몰락하자 지석영의 관직 생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가운데 1885년 [우두신설]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한 최초의 서양의학서이다.
1887년 지석영은 조세 등 국정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가 국왕에게 닿기도 전에 “흉악한 지석영이 우두를 놓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구실 밑에 도당을 유인하여 모았다”는 이유로 수구파들의 탄핵을 받아 강진 신지도에서 5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그는 다시 교동에 우두보영당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실시했다.
세가 다시 바뀌어 1894년 개화파들이 집권하면서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지석영은 이에 적극 참가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공은 개화파 정부로 하여금 [종두규칙]을 제정하게 하여 전국 모든 어린이들에게 의무적으로 우두접종을 실시하도록 한 일이다. 그로 인해 19세기 말 이 땅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생명을 구하고, 마맛자국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할 수 있었다.
친일개화정권 당시 그는 형조참의에 기용되었다. 그 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들이 상륙하던 무렵, 대구 감영의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어를 잘하는 지석영은 일본군의 통역과 길 안내를 맡는 등 동학농민운동의 토벌에 도움을 주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동래 부사가 되었다가 동래부 관찰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또한 뒷날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를 낭독한 친일 행적은 그 일생에 큰 오점으로 남는다.
한글 연구와 어린이 교육에도 큰 기여
한편, 지석영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하면서, 밀 재배의 경제성을 설파하고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한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표시하지 못하는 음이 없고 매우 배우기 쉬운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연구하지 않고 민간에 맡겨버린 결과 혼륜(混淪)과 와오(訛誤)가 심하여졌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며 한글을 새롭게 재정비하여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했다. 고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을 공포했는데, 이는 지석영의 작품이다. 신정국문이 학계에 논란을 일으키자 지석영은 한글 연구를 위한 조직으로 1907년 국문연구소를 설립했고, 그가 교장으로 있는 의학교에 국문연구회를 창립했다. 주시경, 박은식 등이 이 연구회의 연구원이었다.
지석영은 또한 한글에 대한 서적으로 [언문]을 저술하는 등 한글연구와 한글운동을 전개해나가면서 한자의 뜻과 음을 한글로 표시하는 방법의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옥편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자전석요(字典釋要)]를 펴내기도 했다. 그 외 국채보상연합회 부소장, 대한자강회 평의원, 기호흥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도 펼쳤다.
1899년 지석영의 청원에 따라 최초의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의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공식적인 서양의학 교육기관이다. 1907년 의학교가 대한의원 의육부로 개편되면서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10년 사직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둔의 삶을 살다 1935년 2월 1일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총독부에서 협력을 부탁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3․1운동 등 독립운동에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 1845년 러시아의 동물학자, 미생물학자 메치니코프 출생
▶ 1818년 근대 인도의 철학자, 종교개혁가 타고르 출생
▶ 1713년 프랑스의 천문학자 라카유 출생
▶ 1712년 백두산정계비 세움
▶ 1644년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자살로 홍광제가 남명(南明)의 초대 황제로 즉위
홍광제가 1644년 5월 15일 남명(南明)의 초대 황제로 남경에서 즉위했다. 남명 정권은 명나라 수도 북경이 청나라에 함락되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경에 이주해 있던 황족들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였다.
황족들은 숭정제가 죽은 후 황태자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어 황족가운데 한 사람인 복왕을 감국(황제를 대신하여 국사를 담당)으로서 국사를 담당케 했다. 이것이 이른바 남명 정권으로 복왕은 그후 제위에 올라 홍광제라 칭했다.
홍광제의 남명 정권은 부패와 무능으로, 즉위 1년만인 1645년 5월15일 청군에 의해 남경이 점령됨으로 막을 내렸다. 융무제, 영력제가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나 청군의 공격과 관료들의 무능, 부패로 결국 18년동안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청의 군사들을 피해 멀리 미얀마까지 도주했으나 뒤쫒은 오삼계에 의해 처형됐다.
▶ 1397년 세종대왕 탄생
우리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왕, 세종대왕
‘성군’ 또는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는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이순신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당대에 이미 ‘해동요순’이라 불려 지금까지 비판이 금기시되다시피 했으며, 초인화·신화화된 부분마저 있다. 그러나 신격화의 포장을 한 겹 벗겨버린다 해도 세종이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는 사실에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태종의 전격적인 결단,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조선의 제 4대 왕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1418년 6월 3일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은 세자 이제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태종실록]을 통해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세자를 폐하고, 반면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주상이 장년이 되기 전까지 군사 문제는 직접 결정하고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와 6조, 그리고 상왕이 함께 의논한다는 조건부 양위이긴 했지만 전격적인 결단이었다.
그렇게 조선 제4대 왕에 오른 세종의 나이는 당시 스물 둘.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왕세자로 책봉되는 바람에 준비가 부족했다. 집권 초기 대부분의 사안에 “상왕의 뜻이 이러하니” 또는 “상왕께 아뢰어보겠소.”라는 말을 반복해야 될 만큼 어려운 입장이었다. 엄한 아버지의 테스트를 받는 갑갑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세종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무섭게 공부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 David Hepworth at ko.wikipedia.com>
호학의 군주,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의 군주이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법학∙천문∙음악∙의학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본인 스스로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딱 한 가지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 외에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씩 읽었다고 했다. “몹시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밤새 글을 읽어,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도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는 태종의 말이 전할 정도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을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사실 세종은 그저 경전의 문구나 외워 잘난 척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 깊은 생각을 하라고 학자들에게 주문하고는 했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전권을 행사하게 된 세종은 태종이 만들어놓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태종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을 완성해나가는 방법으로 세종이 택한 방법은 매우 학구적이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유학의 경전과 사서를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사항까지 규정해나갔다. 작은 법규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쭉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다.
조선의 제도와 학문, 예술의 기틀을 잡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제도 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서들이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종은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로워지도록 학자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사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자치통감] 완질을 구해 읽고 학자들을 동원해 이에 대한 주석서인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는데, 이 주해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전과 사서에서 찾아낸 제도를 적용하려면 우리 땅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지방관들에게 각 지역의 지도∙인문지리∙풍습∙생태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고, 이를 수합하여 편찬했다. 많은 자료를 간행하려다 보니 인쇄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세종 치세에 인쇄 속도가 10배로 성장했다.
물론 이렇게 많은 내용을 세종 혼자 연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농업∙지리∙측량∙수학∙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조세∙재정∙형법∙군수∙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했다. 이때 정해진 규정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과학기술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종 초에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했으며,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을 통해 향악을 뒤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세종의 위대함은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세종이 위대한 성군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국사를 돌보던 세종은 결국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세종 최대의 업적이면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창제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종 단독 작품인지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엄청난 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단.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세종의 말과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를 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라고 훈민정음 서문에 정인지가 쓴 글을 종합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실제 목적을 짐작해볼 뿐이다.
정신을 따라오지 못한 육체의 한계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초인적인 연구를 해나가다 보니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30대 초반부터 풍질이 발병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하루 종일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 스스로 “체력이 딸리니 생각이 이전처럼 주밀(周密)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보인다. 1440년부터는 독서도 거의 못했던 듯하다.
집권 후반기에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개편하고 세자에게 서무를 결재토록 해, 왕에게 집중되었던 국사를 분산시켰다. 건강상의 이유이기도 했지만,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로 인해 자신의 유교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된 책들을 수십 권씩 직접 검토하던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다.
https://youtu.be/FPuiRb_fTXA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