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전주종합경기장 단상(斷想)
이희근
2016년 4월 7일(토)은 전주문인회에서 양평에 있는 황순원문학관으로 문학기행을 가는 날이었다. 전주종합경기장 정문(구 수당문)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나는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많은 추억이 서린 종합경기장을 들러보고 싶어서였다.
전주종합경기장은 제44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기존의 논을 메우고 1963년에 준공되었다. 그 후로 1980년에 제61회 대회가. 1991년에는 제72회 대회가, 그리고 2003년에는 제84회 대회가 개최된 장소였다.
제44회 전국체육대회가 개최될 당시에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고 축구선수로 그 대회에 참가했다. 제61회 대회에는 전라북도축구협회전무이사로, 그리고 제72회 대회에는 전라북도축구협회부회장으로 참가했으며, 제84회 대회에는 고교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후였다. 이 경기장과 얽힌 추억이 많은 이유였다.
내가 전국체육대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제39회(1958 서울) 대회였다. 그 후로 매년 참가해왔지만, 전주에서 그 대회를 유치하고 개최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경기장도 문제였지만, 각 시·도의 선수들과 임원을 수용할 숙박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63년에 제44회 대회를 이곳에 유치하고, 전북도민의 저력을 발휘하면서 온 국민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체전은 획기적인 사건이 동반되었다. 저44회 대회는 국내 최초의 민박(民泊)체전이었다. 부족한 숙박시설을 보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이 대회를 통해서 전주는 멋과 맛의 고장이며 인심 좋은 고장임을 전국에 또 한 번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맛의 고장’이란 그 지역의 음식점에서 식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전주는 달랐다, 이미 콩나물국밥과 비빔밥으로 맛의 고장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전국에서 모여든 선수들이 민박을 통해서 각 가정에서 맛을 본 음식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음식이 고들빼기김치였다. 신문에서는 ‘인삼김치’라고 대서특필했다. 거기에 깃들인 모주도 전주가 맛의 고장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데 한몫을 했다. 또 선수들이 묶고 있는 이웃주민들이 응원단을 구성하여 각 경기장마다 다니면서 응원전을 펼쳤다. 타 시·도에서는 상상도 못한 대회였다.
제61회 대회는 민박이 아닌 한국 최초의 분산 대회였다. 전주 익산 군산 3지역에서 종목별로 분산 개최되었다. 입장식이나 폐막식에서 볼 수 있었던 카드섹션 대신에 바디섹션을 선보인 대회였다. 그 후로 1991년에 개최된 제72회 전국체전에서는 7개 시·군에서, 2003년도의 제84회 대회에서는 13개 시·군에서 분산 개최되었다.
전국체전 외에도 전국소년체전이나 전국규모의 많은 행사가 이 경기장에서 유치되었다. 70년대에는 매년 대통령배국제축구대회가, 80년대에는 수퍼리그축구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프로축구가 탄생한 후에는, 2002년 월드컵경기장이 준공될 때까지, 이곳은 전북현대축구팀의 홈구장으로 사용되었다. 축구선수였고 축구협회 임원 그리고 심판이었던 나와는 인연이 많았던 경기장이었다. 더구나 축구협회사무실이 경기장 스탠드 밑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어느 지역을 가나 대부분의 경기장마다 출입문이 네 개였다. 대개 동·서·남·북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문이 다른 문보다 규모가 큰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슷한 콘크리트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전주종합경기장은 달랐다. 수당문은 삭막한 몰골을 들어내 보이는 콘크리트 문이 아니라, 은은한 한국미를 자랑하는, 단청으로 말끔히 단장된 고풍어린 일주문이었다. 그것을 보고 선수들은 전주가 천년고도(千年古都)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경기장 동편으로 도열해 심어져있던 이태리포플러나무들이 외지에서 온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부분 조경수로 듬성듬성 빈 공간을 채우기에 급급했는데, 키가 큰 포플러가 단지처럼 한쪽을 메우고 있었다. 라이터가 없던 시절에 성냥개비로, 이쑤시개와 나무젓가락, 그리고 펄프용으로 경제성이 많은 그 나무들을 보고 많은 선수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지금은 그 자리에 100m달리기 4레인이, 그리고 나머지는 주차라인이 그려져 있다.
나는 야구장 쪽의 문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외6문 옆에 축구협회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청소년연맹 전북지부’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조금 더 지나자 빈 공간에 고속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의 신축공사로 임시주차장이 되었다.
나는 동쪽에 있는 등나무 휴게소로 들어섰다. 제법 넓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등나무 일부가 제거되고 간이 농구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 옆에는 한 친구가 성화를 든 채 발가벗고 서 있었다. 그 친구는 흔하디흔한 ㅇㅇ탑(塔)이나 ㅇㅇ상(像)이란 명패도 얻어달지 못한 채 맨몸인 무명의 성화주자였다. 자세히 쳐다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친구의 몸이 온전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경기장이 준공될 때부터 줄곧 거기에 혼자 서 있었다.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하여 전국을 순회하고 도착한 성화를 높이 쳐들고 서 있는 그 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게다가 보는 사람마다 욕심을 낼 정도로 크고 튼실한 거시기를 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가끔 수난을 당했다. 그 파란만장한 일화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 별로 구역을 정해서 봉사활동으로 경기장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구역은 모 여자고등학교가 담당했다. 화젯거리가 된 연유였다. 없어진 거시기를 두고, 학생들이 청소하면서 보고 욕심이 생겨 떼어갔다거나, 또 집에서 순진한 딸의 이야기를 들은 과부들이 욕심을 부린 것이라는 등 설왕설래했었다. 훼손된 것이 확인되는 대로 관리사무소에서 원상을 회복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탈이 없이 그것을 온전히 달고 있었다. 내가 웃으면서 거시기도 온전하다고 말했더니, 이제 곧 회갑이 돌아오니 늙어서 그런지 욕심을 부리는 사람도 없고, 또 쳐다보는 사람도 없지만, 다행이 사람들이 자기 몸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일찍 욕심을 비웠기 때문이란다. 욕심을 부리다가는 늙었을 때 몸에 붙어 있던 이름표를 떼어내거나 개명까지 하는 수모를 당하기 십상이라며 수당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내가 수당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철거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정문이 ‘수당문’이라는 문패만 땐 채 버젓이 온전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은 나에게는 정문이라는 말도 생경했다. 문우회에서 보내온 문자메시지에 ‘정문(구 수당문)’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수당문이 정문으로 개명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종합경기장에는 별도의 정문이란 호칭이 없었다. 설계도에는 동·서·남·북문이었다. 하지만 전주의 특색을 나타낼 수 있는 출입문 하나를 설계하고 그 비용을 (주)삼양사에 의탁했다. 그 회사 회장의 호를 딴 수당문이 된 연유였다. 그래서 전주시민들은 지금까지도 수당문 외에는 경기장의 문 이름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편의상 수당문 외의 북문은 ‘수영장입구문’, 서문은 ‘야구장입구문’, 남문은 ‘벽계가든맞은편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시민연대에서 수당문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보도를 접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었는데 ‘수당문’이란 현판만 철거되었다. 그것을 보고 이름표를 떼어내거나 바꿔 달면 모든 것이 청산된다는 생각이 들어 찜찜했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이어서 집행을 유예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욕심을 부르지 않고 바보처럼 사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란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