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스포츠 경향신문에서 옮겨옴
내가 아는 한 오래도록 암암리에 혹은 진정으로 대중들에게 끊임 없는 사랑을 받아온 가객 "김민기"가 하늘여행을 떠났다.
동시대를 함께 한 동년배까지는 조금 미흡할 시대의 친구 하나를 잃은 듯한 상실감이 무척이나 크다.
또 한 사람의 실존이 허상으로 존재하게 될까 걱정되기도 한...
사실 그는 뒷전의 사람으로 존재하며 알게 모르게 시대를 관통했던 소신있는 가수이자 연극, 뮤지컬, 연예인들의 대부요
수많은 보컬리스트들을 세상에 존재시킨 "위대한"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도 아깝지 않을 역사적 인물이기도 한,
그런 그 남자 김민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예견하고 있었어도 많이 애달프다.
시대적 배경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죄다 알고 있을테지만 1951년 생으로 서울대 미대를 다녔다.
미대 출신 가수, 이미 그의 정서를 포착하고도 남음이다.
게다가 은연중에 표출된 음악이나 세상, 그림에 대한 그의 소신이나 주관, 자존감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정도 이기도 한.
무튼 그가 세상에 등장한 1971년은 사실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서는 미미한 존재였고
무언가 불안을 잠식하는 시대상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와중에 그가 발표한 "아침 이슬"은 본인보다 "양희은" 버전으로 더욱 유명해졌고
두 노래의 느낌은 상당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와 세상을 아우르는 노래가 되어버렸으며
어느샌가 민중의 노래로 돌변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랬다.
서슬퍼런 나랏님의 위세에 대항하는 노래로 낙인이 찍힌 채 그렇게 "아침 이슬"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던
유신 반대 운동에서 절절히 불려지는 대항의 노래로 인식된 채 정부 탄압에 의한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 덕분에 노래를 하지 못하게 되어 공장 노동자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었고
덕분에 공장 노동자의 결혼식 축가로 만들어진 "상록수"는 의외로 시위 현장의 노래가 되었다.
굳이 앞에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한 김민기는 뒷전에서 "공장의 불빛" "늙은 군인의 노래"등등 을 발표하며 활약을 하게 된다.
하였어도 온갖 탄압과 핍박이 그의 일상을 좌지우지하여 핍박의 세월을 견뎌내기 위헤 그는 또다른 방법으로
제 세상을 이끌어 나갔고 1991년, 대학로에 그의 세상이 오롯이 담길 "학전" 소극장을 개관한다.
이후로는 스스로를 "뒷것" 이라 불러 "뒷전내기"였던 김민기가 빛을 발하는 시점이 도래하여
그의 새로운 시선과 철학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세월을 건너가게 된다.
그러나 욕심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그만의 "학전"은 세상사와 관계 없이 흘러가면서도
창조공간으로서의 역할과 자존감을 지킨 소극장으로서의 존재가치는 상승곡선을 타게 되었다.
와중에 아이들과 사람에 대한 애정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렇게 어렵게 소극장 뮤지컬을 주도하면서 라이브밴드를 도입하기도 하고 그 유명한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한
특별하고도 다양한 학전의 특징을 드러낸 공연들이 기획되고 제작되므로써 창작의 발판을 놓기도 하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구호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창작 뮤지컬의 산실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 시절 학림다방과 학전은 내 기억 속의 공간이기도 하다.
여하튼 수많은 보컬리스트들이 당연하게 거쳐온 "학전"은 대중적 인지도를 열망하는 가수들의 통과의례처럼 거쳐오는 곳이자
그 시절의 정서적 함양을 고취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한 수많은 가수들의 집결지요 집합체이기도 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많은 이들이 학전 출신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하는데는 죄다 이유가 있는 법.
그만큼 "김민기" 이름 석자는 대중 문화의 이정표요 방향점이기도 했다는 말이겠다.
어쩻든 개인적으로 엄청 좋아하는 가수 윤도현을 비롯하여 고인이 된 유재하 동문팀과 고 김광석은
학전의 간판으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박학기나 알리·동물원·장필순·권진원·유리상자·이한철·이은미·
자전거탄풍경·여치·시인과촌장·크라잉넛 등등과 지금은 이름도 생소할 그러나 그 역시 특별할 "이정선"이나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노찾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학전을 거쳐오면서 성장을 하고
이후로는 대중적 인지도를 갖게 되었으니 그 시절의 학전의 위력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단한 무대 이었음에 틀림 없다.
게다가 현재의 우리가 만나는 설경구를 비롯한 많은 배우나 연예인들이 학전을 거쳐 이름값을 하고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으니 대중문화 산실로서의 학전의 입지와 역할은 대단하였으나
세월은 그가 가려는 길에 깃발을 들어주지는 못했고 그가 이루고자 하였던 꿈의 길은
세상사에 휘둘린 채 끝자락을 보이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2024년 3월, 학전은 폐관을 결정하며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그리고 김민기의 투병 소식을 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방송은 언젠가 맞게 될 그의 마지막을 준비한 듯
"뒷것 김민기"를 방송했다.....사실 티비 시청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가 걸어온 길을 기리는 것인가? 그를 방송이라는 매체에 끌어넣는 건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나
사실은 그의 많은 노력이 단 두편의 방송으로 전부 대변되긴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망서렸던 이유도 있었다.
내가 아는 그와 남들이 아는 그, 그리고 대중이 인지하는 김민기는 일치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도 존재했기도 한.
어쨋거나 김민기는 하늘여행을 떠났다.
가족들에게 차후를 부탁하면서 "할만큼 했다"와 그의 인생이 남에게 민폐 끼치기 싫었던 부분이 전부였으므로
가는 길조차 화환이나 조의금을 거절했다는 소식이 어쩌면 그에게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학전"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정비되어 그동안 거쳐온 단계를 좀더 아이들에게 확장하여
아이들이 원하는 미래지향적인 공간으로 도약할 듯하다.
조카가 운영하는 "학전"은 비로소 김민기가 원했던 차세대를 위한 아이들의 꿈의 공간이 될 것 같다.
고 "김민기"가 지향하였던 세상이 지금의 세상에서 끝나지 아니한 채 다음 세대까지 쭈욱 이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의 놓이기도 하면서 그동안 학전을 거쳐 성장을 하였던 수많은 연예인들과 대중가수들은
그에게 후광 입은 덕을 어찌 표현했는지도 묻고 싶다.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 않은 덕분에 저렇게 "학전"이 휘청거리기도 했고 폐관에 이르렀으며 그 누구하나 보듬어 안고
경제적 나눔과 공유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말 뒷전 가객 김민기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그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거쳐간 많은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그에게 힘을 보탰더라면
폐관이라는 불명예를 지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이 아침에 "학전블루"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야말로 블루...우울감과 상실감이 온몸을 스쳐가는 듯하여 "아침이슬" 한자락을 소리내어 불러본다.
그리고 그의 상징적 표현이었을 "처마밑에 한 아이...울고 서있네"를 읊조려 본다.
그 아이.....
개인적으로는 엄청 존경한다 라는 표현을 해도 전혀 무리되지 않을 사람 김민기는
그 어떤 위대한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지만 늘 "뒷전내기" 이기를 자청하였다.
그가 있어 청바지 세대가 대변이 되고 서정성의 극치를 알게 했지만
이즈음에는 그를 알고 있을 세대는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암울하기도 하다.
하여 그 즈음을 공유하였던 우리 세대만이라도 그를 기억해야 할 듯하다.
강성인듯하여도 기본적으로 인간애를 기본으로 하는 김민기를 잃었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운 오늘
그들이 먼저 써내려간 K 문화가 지금은 세계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그의 하늘여행을 애달아 하면서 비님 또한 애도하는 중이겠다.
추신 : ■ '사람 김민기' / 김택근
김민기 선생이 떠났다.
독재시대를 건너온 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누군가에게 부음을 전하려 했건만 받을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쳤던 무명의 청춘들은 어디에서 늙어갈까.
언제 어디에서 자신의 젊음을 벗었을까.
먼 하늘을 보다가 ‘아침이슬’ 맺혀있는 젊은 날의 어디쯤에 내렸다.
1970년대는 살기(殺氣)가, 1980년대는 광기(狂氣)가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있었다.
20세기에 청춘을 묻었건만 기억하면 아직도 최루탄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서 김민기의 죽음을 ‘아침이슬’로 씻기었다.
잿빛 하늘 아래 희뿌연 거리에서 ‘아침이슬’을 부른 자들은 이제 흰머리에 등이 굽었다.
정연했던 논리에도 검버섯이 피었다.
용케 살아있구나. 많이 흘러왔구나.
그런데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를 가려다가 멈춰서 있는가.
왜 이리 남루한가.
김민기는 전설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에는 광휘가 묻어있었다.
맨손으로 민주화를 외쳤던 시위대에 김민기의 노래는 연대의 무기였다.
하지만 너무도 서정적이었다.
독재를 타도하기에는 노랫말이 고왔다.
그럴수록 곡을 만든 김민기는 강철 같은 투사여야 했다.
모습을 감춰버렸기에 오히려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그의 노래에 물든 젊은 가슴에 신비로운 전사로 각인되었다.
이윽고 김민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그는 물샐 틈 없는 투사가 아니었다.
절세의 저항가수라는 금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제 노래는 젊은 날의 일기 같은 것이었어요.”
자신의 노래가 과대 포장되어 유통되었다며 송구하다고 했다.
그렇게 고백하고 김민기는 작은 마을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화가인 김민기가 그리고 싶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벌판으로 달려가 바람을 안아보았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두 눈에 빗물을 담았다.
그렇게 다시 소년이 되었다.
일생 소년으로 살았던 권정생 선생도, 선생이 섬겼던 예수님도 사람을 찾아 헤매지 않았던가.
김민기의 노래를 부를 때는 기교를 부리거나 포효하면 안 된다.
과한 애드리브(즉흥연주)도 삼가야 한다.
노랫말이 가난하고 음들이 격하게 출렁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김민기의 노래는 잘 부르기 어렵고 못 불러도 티가 나지 않는다.
슬프지만 슬픔을 빠져나와 담백하다. ‘
서울로 가는 길’처럼 시대의 아픔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었다가 풀어낸 모두의 이야기들이다.늙으신 부모님을 두고 고향을 등지는 일이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웠는가.
당시 젊은이들은 그렇게 눈물을 뿌리며 고향을 떠나왔다.
그 아픔을 천연덕스럽게 옮겨놓고 있다.
“앞서가는 누렁아 왜 따라나서는 거냐. 돌아가 우리 부모 보살펴드리렴.”
이렇듯 가슴 저미는 구체적인 슬픔이 들어있지만 노래는 단조가 아니다.
김민기의 노래에서는 절규와 분노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김민기는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세상 속에 들어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작은 오두막 하나 짓고 작은 일을 하고 싶어 했다.
투쟁 속에도 절망, 희망, 휴식, 연민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을 편 가르는 어떤 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쑥스러워할 것을 알면서도 남은 자들이 그를 찾는다.
물론 어디든 조용하고 경건하다.
하지만 유족들도 그를 닮았나보다.
고인의 뜻에 따라 어떤 추모공연이나 추모사업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추모하지 않음이 진정한 추모인 사람, 생전에 명예와 미움을 태워버린 사람, 김민기.
작가 서해성은 그의 넋이 너무 아름다워서 영전에 꽃을 올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노래가 될 수 없는 문자로 이렇듯 그를 기리는 일이 허허롭다.
그는 하늘에서만 빛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마을에 불이 켜지면 별들의 노랫소리를 담아 내려올 것이다.
모든 잘난 것들이 사라진 마을에는 또 다른 김민기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내려 두리번거릴 것이다.
주막을 발견하면 어떤 속기(俗氣)도 묻어있지 않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 삶도 떠내려가고 있다.
노을 뒤편의 어둠이 보인다.
노래 한 곡 받쳐들고 우리도 머지않아 어딘가에 내려야 한다.
무엇을 받들고 무엇을 버려야 김민기 마을에 들 수 있을까
(경향신문/ 김택근 시인)
첫댓글 한시대를 풍미했지~!
덕분에 김민기에 대해 더 잘 알게되었네~! 그분 노래를 잠시 좋아는 했으니 연극을 위해 그렇게 텃밭 노릇을
한것은 이번에야 알게되었다네 연극 보는 일과
참 멀게 살았다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엄청 존경한다 라는 표현을 해도
전혀 무리되지 않을 사람 김민기.
그가 있어 청바지 세대가 대변이 되고
서정성의 극치를 알게 한다는..
강성인듯하여도 기본적으로 인간애를 기본으로 하는 인간 김민기를 잃었다는 사실은 통탄스럽다요.
그의 명복을 빌면서 아쉬움도
@햇살편지 그런분이셨구만요.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이 간다음에 알게된다더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inks 아마도 지금 세대들은 잘 모를 수도 있을 터.
그것이 좀 아쉽기도 하더라는.
그가 지향했던 뒷전내기 가 아쉬운 부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