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東邦)의 등불
타고르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가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끔히 솟아나는 곳.
쉼 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끝없이 펴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잠을 깨소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시 100선 중 60
part 3 그대의 눈이 노래를 좇으리
채빈 엮음
[작가소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요약 인도 시인. 벵골 문예 부흥의 중심이었던 집안 분위기 탓에 일찍부터 시를 썼고 16세에는 첫 시집 《들꽃》을 냈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이었으나 갈수록 현실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교육 및 독립 운동에도 힘을 쏟았으며, 시집 《기탄잘리》로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원어명 : Rabīndranāth Tagore
출생-사망 : 1861.5.7 ~ 1941.8.7
본명 : 타쿠르
국적 : 인도
활동분야 : 문학, 철학, 음악
출생지 : 인도 콜카타
주요수상 : 노벨문학상(1913)
주요저서 : 《기탄잘리》(1910)
콜카타에서 태어났다. 벵골어로는 타쿠르(Ṭhākur)라 한다. 벵골 명문의 대성(大聖)이라 불리는 아버지 데벤드라나트의 15명의 아들 중 열넷째 아들로, 형들도 문학적 천분이 있었고, 타고르가(家)는 벵골 문예부흥의 중심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11세경부터 시를 썼고, 16세 때 처녀시집 《들꽃》을 내어 벵골의 P.B.셸리라 불렸다. 인도 고유의 종교와 문학적 교양을 닦고, 1877년 영국에 유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며 유럽 사상과 친숙하게 되었다. 귀국 후 벵골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동시에 스스로 작품의 대부분을 영역하였고, 산문·희곡·평론 등에도 문재를 발휘하여 인도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唯美的)이었으나, 1891년 아버지의 명령으로 농촌의 소유지를 관리하면서 가난한 농민생활과 접촉하게 되어 농촌개혁에 뜻을 둠과 동시에, 작풍에 현실미를 더하게 되었다. 아내와 딸의 죽음을 겪고 종교적으로 되었으며, 1910년에 출판한 시집 《기탄잘리 Gī tāñ jalī》로 1913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아 세계에 알려졌다.
그뒤 세계 각국을 순방하면서 동서문화의 융합에 힘썼고, 캘커타 근교에 샨티니케탄(평화학당)을 창설하여 교육에 헌신하였으며 벵골분할 반대투쟁 때에는 벵골 스와라지 운동의 이념적 지도자가 되는 등 독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가 세운 학당은 1921년에 국제적인 비스바바라티대학으로 발전하였고, 오늘날에는 국립대학이 되었다.
시집에 《신월(新月) The Crecent Moon》 《원정(園丁) The Gardener》(1913) 등, 희곡에 《우체국 The Post Office》(1914) 《암실의 왕 The King of the Dark Chamber》(1914), 소설에 《고라 Gorā 》(1910) 《카블에서 온 과실장수》, 평론에 《인간의 종교》 《내셔널리즘 Nationalism》(1917) 등이 있다. 벵골 지방의 옛 민요를 바탕으로 많은 곡을 만들었는데, 그가 작시·작곡한 《자나 가나 마나 Jana Gana Mana》는 인도의 국가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M.K.간디와 함께 국부(國父)로 존경을 받고 있다.
한편, 타고르는 한국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시, 《동방의 등불》 《패자(敗者)의 노래》를 남겼다. 《패자의 노래》는 최남선(崔南善)의 요청에 의하여 쓴 것이고,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그 대신 《동아일보》에 기고한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첫댓글 잠에서 깨어나라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건강하신 가운데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