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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 4 달음질하더니 - 요 20: 10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 20: 4 달음질하더니 -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
두 제자가 함께 뛰어가고 있음을 연상케 한다. 얼마나 급히 뛰어갔는지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도착했다.
1]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두 제자는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어 있고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추측에 동의했건 예수의 부활을 떠올렸건 간에(물론 전자일 가능성이 많지만, 9절 주석 참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심리상태로 침착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어색할 것이다.
2]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베드로보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이라고 본다(Lenski, Tenney).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3절 참조) 요한이 무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이 곧 요한의 사도적 우월성을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
요 20: 5 세마포 놓인 것 -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
몸을 안으로 굽히며 자세히 관찰하여 살펴보았다.
그 둘이 같이 달음질하였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았다.
1] 구부려
이는 헬라어 '파라큐사스'(*)를 번역한 말로서 자세히 관찰하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베드로처럼 적극적이지 않고 세심한 요한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2]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그러나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을 할 뿐 선뜻 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혹자는 요한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수의가 무덤 안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신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이 시신을 존귀하게 여겼거나 시체를 만지는 부정(不淨)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8절).
세마포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감쌀 때 사용한 삼베를 가리킨다.
* 마 27: 59 -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성경상으로 살펴보면 삼베는 시체를 싸는 것 외에도 성막의 앙장(仰帳)
* 출 26: 1 -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찌니
귀족의 복장
* 창 41: 42 -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돛
* 겔 27: 7 - 애굽의 수 놓은 가는 베로 돛을 만들어 기를 삼았음이여. 엘리사 섬의 청색 자색 베로 차일을 만들었도다.
이불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 잠 7: 16 -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요 20: 6 무덤에 들어가 보니 -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
베드로는 거침없이 무덤 안에 들어가 확인했다.
시몬 베드로는 뒤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았다. 과연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다.
1]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베드로의 행동은 그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단숨에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양태로 나타난다.
앞 절과 본 절에서는 무덤 안에 세마포가 있었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은 확인은 세마포의 존재가 시체 도둑설을 반증(反證)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거듭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7절 주석 참조)
요 20: 7 머리를 쌌던 수건 -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
단지 그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다.
1]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튈리그메논'(*)은 '싸다', '봉하다'라는 뜻으로 수건이 식탁보가 접혀있는 것처럼 납작한 형태가 아니라 둥그렇게 말려있는 모양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이 머리에 말려있던 대로의 모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용하기 전의 처음 상태로 말려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손과 발이 세마포로 묶여 있고 '머리에는 수건이 감겨 있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온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으로부터 몸만 빠져나오는 신비한 방식으로 부활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만약 세마포와 수건이 처음 싸여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있고 예수께서 몸만 빠져나간 것이라면 그것을 요한이나 다른 복음서 제자들이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는 표현에서 '딴'(*, 알라)이 '따로 떨어진'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자일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에는 수건과 세마포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목 길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나란히 뉘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한이 세마포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수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적은 시체 도둑설을 반박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체를 훔쳐 갔다면(마 27: 64) 세마포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벗겨내어 잘 정돈해 놓았을 가능성은 회박하기 때문이다.
* 마 27: 64 -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예수님의 시신은 살아나셨으므로 그것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다. 그 몸이 다시 사셨으므로 그 세마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더욱이 머리 수건은 쌌던 대로 놓여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지 영적 현상이 아니었음을 증거한다.
십자가 위에서 상하셨고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되었던 바로 그 몸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히 몸의 부활이었다.
요 20: 8 보고 믿더라 -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베드로의 용기 있는 행동에 요한도 함께 들어갔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하였다. 여자들도 확인하였고 베드로와 요한도 확인하였다. 빈 무덤은 그의 몸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1]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베드로가 담대히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고 나자 요한도 힘을 얻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믿더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난다.
Ⓐ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믿게 되었다. (Barrett, Godet, Hosknys).
특히 고데(Godet)는 '보고'와 '믿더라'의 두 동사가 모두 단수형임에 주목한다.
2-7절에서는 두 제자가 함께 언급되고 9절과 10절에서도 함께 언급되지만 유독 본 절에서만 단수형인 동사를 사용하여 그 다른 제자를 따로 언급한 것은 저자 요한이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보이며, 따라서 사도 요한이 여러 제자 중 최초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이 해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어찌하여 베드로나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설령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의의를 총체적로 이해한 것도 아니며(9절), 보지 않고 믿는 것에 비해(29절) 충분하지 못한 믿음이었다.
Ⓑ 본문의 '믿더라'는 말의 뜻을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Broomfield).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전자에 가깝다.
요 20: 9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베드로와 요한은 성경에서 예표한 부활의 의미를 아직까지 깨닫고 있지 못했다.
1]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께서 기절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가능성은 없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군인들은 그의 죽음을 확인했고 또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렀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장사했기 때문이다. 또 설사 그렇게 회생(回生)하셨다 하더라도 죽다 살아난 자가 무덤을 막았던 무거운 돌을 밀어 제치고 군사들의 경비를 물리치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 마 27: 62-66 –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도둑질할 가능성도 없다. 그 무덤 문은 큰 돌로 막혀 있었고 군사들의 경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시신을 훔쳐 숨겨두고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하며 그 거짓말을 위해 핍박을 받고 순교까지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의 원수들이 그의 시신을 도적질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의 몸의 부활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되기 어렵다.
2]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본 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부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요한이(혹은 베드로도) 무덤 안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님의 부활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의인의 부활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한 정도였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구원사적(救援史的)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말하는 성경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시 16: 10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Sanders, Tenney).
* 시 16: 10 -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 시 110: 1, 4 –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사 53: 11-12 –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 성구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 중에도 언급되고 있다.
* 행 2: 27 -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 행 13: 35 -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눅 24: 44-47에 잘 묘사된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표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 눅 24: 44-47 –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요 20: 10 집으로 돌아가니라 -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
마리아가 무덤에 머물러 있었던 것에 반해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제자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1]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한과 베드로는 각각 자기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동의 숙소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공동 번역 참조).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요한의 경우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8절), 베드로는 다소 기이한 생각을 가지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돌아갔을 것이다.
* 눅 24: 12 -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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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을 보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샬롬.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잠 11:31).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이 즐거워야 행복해 진다고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모든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게 되므로
얼굴엔 늘 미소를 짓게되고 밝고 유쾌하게 된답니다.
얼굴에 환한 웃음과 함께 오늘도 멋지게 시작하시고요.
항상 웃음이 있는 그런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