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두타산이 보이고 부드러운 능선이 흐르는 아늑하고 야트막한 구릉(丘陵)들이 바다를 향해 삐
죽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는 삼척(三陟) 앞바다가 깨끗하고 아름답다 구릉 (丘陵) 사이사이에
펼쳐지는 고운 백사장과 백사장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포구들 찰랑이는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
며 사랑하는 이의 손길처럼 따사롭게 어루만진다.
창문을 열고,
7번 국도를 달리면 솰솰 들어오는 자연의 바람은 상쾌하게 콧잔등을 스친다 공양왕 (恭讓王)
일가가 살해된 살해재를 넘으면서 흥망성쇠 (興亡盛衰) 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궁촌리 앞
바다는 오늘도 여전히 파도에 밀려가고 밀려온다.
근덕면 궁촌리 고돌치 바닷가 언덕위에 공양왕(恭讓王)무덤이 쓸쓸하게 누워있다 오른쪽에 큰
무덤이 공양왕 (恭讓王) 무덤이고 좌측에 두기의 무덤은 왕세자 석과 둘째 왕자 우의 무덤이고
약간 위쪽에 봉분이 있는 둥 없는 둥 밋밋한 무덤은 시녀(侍女)의 무덤이다.
흔한 비석(碑石)조차,
하나 없고 상석도 못 갖춘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무덤에 들풀만 무성하다 우왕 창왕이 쫓겨나고
이성계에 의해서 왕좌에 앉게 된 공양왕은 이성계 일파에게 살해되는 비운을 맞아 비참하게
최후를 마감하는 그날 천둥 치고 난폭한 폭우가 쏟아졌다 공양왕(恭讓王)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던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 (善竹橋) 에서 살해되자 거리낌 없는 이성계는 그로부터 3개월 후
1392년 7월 스스로 왕이 되면서 조선의 개국을 알린다.
공양왕(恭讓王)은 험난한 유배 (流配)길에 올랐고 마지막 유배지(流配地) 삼척에서 꺼림하게
여겼던 이성계는 자객을시켜 공양왕(恭讓王)과 두 아들을 살해재에서 목을 옭아 죽이고 만다
왕위를 양위한 공양왕(恭讓王)이 어리석다 하는데 역사 (歷史) 기록은 승자의 기만과 위선일
수밖에 없다 삼척유배지 (三陟流配地) 에서 잠깐 살았다고 궁촌리 공양왕 (恭讓王) 이 살해된
언덕은 살해재로 불리고 있다 도대체 운명이 뭐란 말인가 옥좌에서 쫓겨 난지 3년 마지막 유
배지(流配地) 삼척 (三陟) 땅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으니 운명이란 걷잡을 수 없는광풍과도 같
아서 인생을 한 순간에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마는 것인가.
그 억울한,
영혼(靈魂)의 숨소리는 거대한 동해를 뒤덮을 폭풍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공양왕(恭讓王)의 최
후를 생각하며 가만히 능 곁에 쪼그려 있으니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바람이 무성한 풀
을 흔들어 놓는다.갑자가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져서 무덤가에 풀 한 움큼 뜯어서 언덕 아래로
홱 뿌려 본다 공양왕릉(恭讓王陵)은 서쪽을 향하고 언덕 위를 지나면 바다가 보이고 저 멀리
수평선으로 소리 없이 밀려든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토해내며 다시 밀려간다.
유배지(流配地) 에서,
저 바다를 바라보며 고려사직 생각에 한없이 눈물 흘렸을 것이다 삼척(三陟)땅에 조선 건국에
관련된 또 하나의 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이곳 궁촌 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으
로 매년 벌초를 하고 제사도 지내 주고 있다 고양시 원당 공양왕릉(恭讓王陵)을 전에 가보니
왕릉의 면모를 감추고 있는데 궁촌리 공양왕릉(恭讓王陵)몸통 무덤은 여염 집 무덤과 별반 다
를 게 없었다.
궁촌리에,
전승되는 이야기로는 살해재에서 교살당한 공양왕(恭讓王) 을 자객이 증거 삼기 위해서 목만
베어 한양으로 자져갔고 몸통만 남겨있어 묘를 쓴 것인데 역사(歷史)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
해 온 세력은 언제나 기득집권 층이었고 오히려 민간의 구비전승 (口碑傳承)속에서 역사(歷史)
적인 진실이 잘 남아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국어시간에 배운 정비석의 산정무한(山情無限) 마지막 한 대목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
(南柯一夢) 이었고 태자가신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던
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 (喜怒哀樂) 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신라 마지막 마의태자를 그린
것이지만 고려 마지막 공양왕(恭讓王)과 왕세자 석이 누워있는 쓸쓸한 무덤을 바라보니 인생
무상(人生無常) 허망하기만하다.
(석물(石物)하나 상석하나 없는 궁촌리 고돌치 언덕위에 공양왕(恭讓王)이 쓸쓸하게 누워있고)
(공양왕(恭讓王) 옆 뒷쪽에 있는 묘는 왕세자 석의 무덤인데 일설에는 순비 노씨의 묘라고도
하는데 안내판에는 왕과 두 왕자가 뭍혔다고 적혀 있으니 왕자의 묘로 봐야 할 것입니다)
(공양왕릉 (恭讓王陵) 옆에 왕세자 석의 무덤이 반쯤 보이고, 밑에 멀리보이는 묘가 둘째 왕자
우의 무덤이다 두 왕자 무덤 사이 중앙에 멀리 보이는 납작한 봉분은 시녀(侍女) 의 무덤이고)
(삼척 (三陟) 에,
공양왕릉(恭讓王陵) 이 있고 월미도가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는데 사진에 보이는 월
미도는 아주 유명하다 이곳 월미도는 남파간첩과 고정간첩의 최대 접선지다 옛날 부터 유배지
(流配地) 로 반골기질이 강하게 남아있는 삼척은 해방되고 나서 외지에서 군수로 부임하면 지
방 토착 세력 등쌀에 출근도 못하고 보따리 싼 예가 허다하다 삼척은 고정간첩이 많아 이북에
서 남파하는 간첩은 대부분 삼척(三陟) 으로 침투했지요)
첫댓글
21세기 최첨단시대인 지금도 죄인을 숨겨주면
범죄 은익 죄로 처벌받는데 당시 역적(逆賊)으로
몰려 처형된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분명하지요.
마을 유생(儒生)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
지내려다가 숨어 지키고 있던 관군(官軍)에게
몰살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지요
공양왕릉 입구에 조그마한 안내판에 왕과 두 왕자
그리고 시녀(侍女)가 묻혔다고 기록되어
그 중 제일 큰 봉분이 공양왕(恭讓王) 바로 옆이
왕세자, 약간 아래가 둘째 왕자, 떨어져 있는..
나지막한 봉분이 시녀(侍女)라고 싸나이 마초킴
나름대로 정의한 것입니다
어디에도 공양왕, 왕세자, 왕자의 무덤이라고
구분하여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웠지요.
공양왕에 대해서
몰랐는데 덕분에 자알
배우고 갑니다
역사에 대해서 진짜루
마니 아시네요
가끔은 부끄러울 때가~
감사해요
오월 한달도 수고하셨슴다
역사(歷史)에 대하여 많이 안다
칭찬이 너무 과하시군요 지금은 작고作故했지만 문교부장관을
지내신 국사학계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두계 이병도 박사를 꼽을 수가 있는데
젊은 학자들이 이병도의 역사관에 이견이 있어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후 식민사관을 가진 국사학자라고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중학교 국사를 이병도가 지은책으로 배웠던 것이
기억나는구요
글 마중 고맙습니다
역사에서 말하는 공양왕과는
실지로는 마니 틀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 우리 나라는 좀더 틀렸을 것입니다.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당시의 명나라는
고려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갓 개국한 나라 원나라와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결국은 한 사람의 권력욕으로 인하여
명나라 눈치를 보는 소국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선배 님의 글을 읽으며 지금도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정치인들을 보며 혀를 차 봅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좋은 글 감사한 마음으로 담고 갑니다^^
그래요 역사 (歷史)는 사학자(史學者)의
여론이 비등한 쪽으로 기울고 승리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편견(偏見)이 많은 것이지요
사초(史草)를 기록하는 사관(史觀)들이
똑같은 사건을 기술할 때 서인과 동인은 각각
처한 입장에 따라 기술이 다를 수가 있지요
오래전 덴마크에 있는 크론베르크성(城)에
갔을 때 처음에는 그저 그 흔한 석조건축물로
알고 둘러보았습니다.그런데 누군가가 쉑스 피어의
햄릿이 이 성에서 살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성이
달라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햄릿은 13세기 어느
문헌에 잠깐 언급되는 이름이지 실존인물임은
단정할 수없습니다. 그러나 쉑스피어가 햄릿에게
사느냐 죽느냐 그게문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
함으로써 구체적 인물로 우리 두뇌에 올려진 겁니다
별 거 아닌 크론베르크성이 전혀 다른 성으로
여겨져 부지런히 둘러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인간의 경험이 추상적 (抽象的) 공간으로
구체화시킨다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거 같습니다
글 감사혀요
건강하시고
그래서
이성계도
자식들한테 밀려나서
아들들의 왕자의난도 겪었지요
인생은 꿈이라오 ㅎ
노래가 생각납니다 ㅎ
이성계는 활을 잘 쏘았다고 하는데 요즘도 야구방망이나
골프채 하나만 젊을 때 잘 휘둘러도 세계적 재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는데 이성계도 그때 대단하였던 것 같아요 이건 마초생각 ㅎㅎ
압록강 이북의 오랑캐는 물론 왜구들도 이성계의 활 앞에는
추풍낙엽(秋風落葉)이 되어 말만 들어도 도망을 갔다고 하여
왜구나 오랑캐 군대가 출몰할 때마다 이성계를 보내니 백전백승(百戰百勝)이었지요
이러다 보니 이성계의 힘이 중앙무대에서도 젊은 추종자가
많아지고 커지자 정적(政敵)들은 이를 제거코자 도저히 이길 수도 없는
명나라와의 전쟁에 나가게 하니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당시
서울인 개성으로 와 정적들을 모조리 쳐 부수고 말았다.
이성계에 대한 피력(披瀝)을 잠깐 아느채 해 보았답니다
푸하하하
내공 있는 멘트 고맙습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 마초님의 메끄롭게
전개된 감정표현이 참 놀랍습니다.
왕릉치고는 너무 초라한 무덤 앞에서
멸망한 고려를 떠올리고 힘 있는 자에
의해 목메임 당한 왕에 대하여 동정적인 게 느껴집니다
많지 않은 세월을 흘렀는데 이 정도라도
보존이 되었는 걸 보면 조선의
창건자들이 마음이 넓은 것 같습니다
증거 자체를 없애어야 되는 것이 정석인데
민초들을 통해서 이어 왔다 기는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시녀 무덤이 있다는 게
새로운 감동을 줍니다
역사적 고찰에 대한 좋은 글입니다 몰랐던
역사를 덕분에 하나하나 배워나가니
재미있네요 은근히 기다려집니다
정성스러운 글 감사합니다
마초님 건강하세요~^^*
대한민국 역사(歷史)는 대부분 바르게 기술되지 못하고 시절의
위장자 정권에 입맛에 맛게 날조되어 비 정상적으로 흐르는데.
여기에 일제 36년 사가 대한민국 역사를 정말 망치는데.
그 위력을 발휘하였지요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는
언제나 피가 흐르고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슬픔을
당하는 집단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잡은
권력으로 대다수의 국민과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부하게 하는 참된 정치를 했는가 수탈(收奪)하는
정치를 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歷史)를 보면 고려말에 부패한 정치보다는
그래도 조선 초기 정치와 문화가 융성하고 나라의
면모가 서는 일이었다고 나름 생각합니다
유구한 한반도에 깔려있는 역사(歷史)의 흔적을 다시
한번 상기(想起) 해 봅니다
부티나는 글 마중 고마움을 표합니다
공양왕의 이야기~
몰랐던 역사를 많이
배우고 갑니다 인생무상을
다시금 느낍니다 배움이
있는 글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지금 돌아가는 정치판을 한번 보시죠
죽는 줄도 모르고 권력[權力에 덤비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칼날이 예리한 취모검(吹毛劍)에 묻은 꿀이 달콤하여 조금씩 핥아먹다가
결국 혀를 잘리고 마는 여우 같지 않는가?
역사(歷史)는 돌고 돌지요
흔적 고맙습니다
파주에 모신 아버님 추모공원에
들렀다가 귀가할때 보면
공양왕릉 표지판이 있어서
한번 시간나면 들러보까 하곤 했죠
삼척 공양왕릉 다녀온걸 쓰셔서
검색을 해보니 쌍릉 이로군요
경기도 고양에도 있고
강원도 삼척에도 있다고 나옵니다
왕은 한 명인데 왕릉(王陵)은 두 곳이라?
참 신기하기는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 인물(人物)에 두 무덤은 전쟁 와중에는 더러 있는 일이지요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도 묘가 두 곳이라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신승겸도 무덤도 쌍봉이지요
두 무덤이 부자연스러운지는 몰라도 때에 따라 3곳도 있는 곳도
있는 줄 아옵니다
언젠간 시간 내어 파주에 수색정찰 한번 나가볼까 합니다
관심 주심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좋은날 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