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야고보 사도”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
우리의 순례 여정의 복된 결과를 보여주는 시편 화답송 후렴이 위로와 힘을 줍니다.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하면 떠오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이요 이에 대해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산티아고Santiago’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입니다. 2014년 꼭 다녀온지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산티아고 길에 있는 듯 하며 죽을 때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 프랑스 땅인 ‘생잔피에드포르’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최종 목적지인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이르기까지 800km 2000리에 이르는 길이었고 미사도구와 아이패드가 든 14kg 정도의 배낭을 메고 33일 동안 매일 평균 20-32km를 걸었고 우직할 정도로 새벽마다 매일 강론을 쓴후 미사를 봉헌하고 아이패드를 통해 강론을 홈페이지에 올리고 도반과 함께 걸었던 순례길이었습니다.
콤포스텔라라는 뜻은 ‘별들이 쏟아지는 들판’이란 뜻으로 별의 인도로 사도의 유해를 발견했기 때문이란 전설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날마다 새롭게 전개되는 풍경에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처럼 생각되었고, 순례중 가장 행복하고 기뻤던 때는 미사후 간단한 아침식사후 이마에 헤드랜턴을 하고 새벽길을 떠날 때였습니다.
순례 여정중 떠남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래서 자주 ‘떠남의 여정’이란 제목의 강론도 나눴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도 하루요 곧 싫증이 나고 떠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곳에 도착하든 우선 물색한 것이 미사드릴 장소였습니다. 마지막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을 때 감동적인 ‘산티아고 입성’이란 제하의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2014년 9월27일 오전 10:30분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뻣노라’ 시편말씀 그대로, 기쁨에 나는 듯, 발걸음도 가볍게 단숨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망待望의 산티아고 대 성전, 주님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산티아고 입성!’, 마치 승전보를 알리듯 한국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카톡으로 소식을 전했고, 진정성 가득 담긴 축하인사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 사도인 베드로, 요한과 달리 왜 최측근 사도인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순교후, 왜 그 멀리 땅끝같은 스페인 산티아고 대 성전에 유해가 모셔졌고, 이베리아 반도의 수호성인이 됐는지 궁금할 것이고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전설같은 일화에 의하면 사도는 생전에 스페인지역에서 선교를 했고 순교후 그쪽 제자들이 사도의 유해를 모셔갔다는 것이며 그 유해를 발견한 자리가 현재의 산티아고 라는 것입니다.
산티아고에 대한 풍부한 자료는 인클레멘스 신부의 <나는 산티아고 신부다>라는 책에 있습니다. 산티아고에 관한 기존의 책중 가장 풍부하고 중요한 자료가 포함된 책일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분으로부터 작은 이정표 표지석과 더불어 여러 “Camino de Santiago(성 야고보의 길)”이란 글자와 더불어 무수한 화살표가 표시된 양말을 선물받고 이 또한 섭리로 깨달아 어제부터 오늘 지금까지 신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 이정표 표지석과 무수한 화살표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바로 “참 좋은 삶의 이정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주님을 가리키는 삶의 이정표, 어찌 성 야고보 사도뿐이겠습니까? 모든 성인들이 삶의 이정표가 되고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주님을 가리키는 삶의 이정표들입니다. 잠시 삶의 여정중 옛 어른이 주신 귀한 가르침도 나눕니다.
“내 앞에 스승이 있었듯이 나 또한 누구의 스승이 된다. 그래서 어른은 발자국을 함부로 내지 않는다.”<다산> “아이들 앞에서는 속이지 않으며, 바른 방향을 향해 서며, 비스듬한 자세로 듣지 않는다.”<예기>
삶의 순례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뒤 따라오는 동료들을 배려하여 제대로의 이정표 따라, 반듯하게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더불어 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정말 참 좋은 삶의 이정표 따라 제 방향으로 제대로 좋은 도반과 함께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정표를 잃으면 길을 잃습니다. 산티아고 길은 평생 순례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산티아고는 30일 전후로 끝나지만 우리 삶의 순례 여정은 죽어야 끝나니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도상途上의, 즉 길위의 존재들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하의 제 좌우명 시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하루하루 우보천리의 자세로 궁극의 목적지인 아버지의 집을 향해가는 ‘귀가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사부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했고 오늘 복음과 일치합니다. 우리의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일 뿐입니다.
단번에 이뤄지는 섬김이 아니라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할 섬김이기에 섬김을 배워가는 섬김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모든 수행이 주님을 섬기는 방편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은 사랑에, 형제자매들과 나누고 싶은 사랑에, 날마다 목숨을 걸고 쓰는 제 강론이요 살아 있는 마지막 날까지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강론 후반부 말씀은, 아직은 철부지같은 사도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유언같은 말씀이고, 제 사제서품 상본 성구도 이와 똑같은 내용의 ‘마르코 복음 10장 45절’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여기에 근거해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황을 ‘종들의 종’이라 명명했고 저는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라 강조하곤 합니다. 주님은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담아두신 보물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 섬김의 사랑이라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에바그리우스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이자 수도영성의 대가인 가브리엘 붕게가 쓴 개인기도의 수행에 관한 “질그릇” 책을 금요강론 때 나눈 기억이 생생합니다.
다음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질그릇 같이 허약한 우리 안에 부어지는 주님의 생명이, 섬김의 열정이, 섬김의 사랑이, 섬김의 힘이 우리를 지칠줄 모르는 용기백배, 종신불퇴, 백절불굴, 불사조不死鳥의 정신으로,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예수님의 생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선사되는 예수님의 생명이, 예수님의 사랑이, 섬김의 열정이 우리 모두 순교적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루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좋은 여정되시기 바랍니다.
“뿌릴 씨를 가지고 울며 가던 그들은,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돌아오리이다.”(시편125,6).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