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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복음 9,30-3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의 두 번째 예고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뿐더러 알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새롭게 힘있는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시면 그들도 한 몫을 차지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윗자리를 차지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세상의 권력과 힘의 논리에 따른 생각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제시하시고 걸어가신 길은 정작 구약에서도 이미 예고된 바있는
<야훼의 종>의 사명을 사는 길이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제자들 가운데서 <섬기는 이>로 와 계시는 분(루가22,27)이십니다.
권위를 잘 행사하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지배욕에 사로잡혀, 영예를 얻으려는 허영을 위해 권위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의 선익을 위해 권위를 봉사직으로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논리, 지배와 섬김은 우리 안에서도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제자들(우리를)을 섬김, 사랑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당신이 먼저 이 사랑의 길을 걸어가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생명까지 내어놓는, 절정에 이르런 사랑입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으로 살려면 다른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는 것,
모든 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37절 참조)입니다.
그분의 이름에 힘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기(로마10,13참조) 때문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2월25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마르코 .9,30-37
악마가 되는 법: 마중물의 법칙을 어기면 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 사람이 심는 대로 거둔다”(갈라 6,7)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세상 모든 일에는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콩을 거두려면 손에 쥔 콩을 땅에 심어야 하고,
재물을 얻으려면 먼저 투자와 희생이 따르는 법이죠.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포기하거나 심지 않고, 단번에 열매만 얻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오늘은 이를 무시하고 파멸에 빠진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하면 ‘악마가 될 수 있는지’”를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는 ‘무한한 쾌락, 지식, 권력’을 얻고자 악마(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합니다.
그는 정당한 씨앗이나 희생 없이 손쉽게 열매를 따려 했습니다.
예컨대, 육체적 욕망을 버리지 않은 채 그레첸(마르가레테)의 마음을 얻으려 했고,
헬레나를 차지하고 아들까지 가지려 들었습니다.
게다가 재물마저도 악령의 힘으로 한 번에 얻으려는 욕심에 눈이 멀었죠.
그 결과 자기 방종과 탐욕에 빠져 주변인들을 파멸로 몰고, 스스로도 영혼을 악마에게 넘기는 처지에 이릅니다.
사실 파우스트에게는 ‘자신을 뿌리는’ 기회가 늘 있었습니다.
그레첸을 진정으로 책임지려 하거나, 헬레나를 갈망하기 전에 헛된 욕심을 비우고 청빈과 성실을 지켰다면, 탐욕 대신 다른 결실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마중물을 붓지 않고, 단지 결과만 얻으려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듯, “아무도 심지 않고는 거둘 수 없다”는 하느님의 정의 시스템을 어긴 것이죠.
그것이 곧 ‘사탄이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악령과 결탁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가진 씨앗은 지키고, 남의 결실만 취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닙니다.
오늘 복음(마르 9,30-37)에서도 제자들은 누가 첫째가 될지 다투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며 스스로 가장 낮은 길을 택하십니다.
첫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내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희생 없이 자리를 차지하려 했고,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가장 낮은 자가 되어 모든 이의 종이 되라”(마르 9,35 참조)며 다시금 일깨우십니다.
반면,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는 아슬란이 배신한 아이 에드먼드의 죄를 대신
떠안고 돌탁자에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나니아 세계를 구원하고 “진정한 왕”이 됩니다.
자발적인 희생을 ‘마중물’로 써서, 더 큰 자유와 존경을 이끌어 낸 것이지요.
실제 역사에서도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에 맞서 27년간 감옥에 갇힘으로써 물리적 자유를 내놓았고, 그 덕에 백인·흑인 모두의 신뢰를 얻어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던 희생이, 오히려 더 큰 평화와 존중을 낳은 셈입니다.
결국, 콩을 심지 않고 콩을 얻으려 하면 그것이 곧 ‘악마가 되는 법’입니다.
그토록 원하던 성취를 악령과의 계약이나 부정한 방식으로 단숨에 얻으려 하면, 파우스트처럼
죄책감과 파멸만 손에 쥐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마중물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어 인류를 구하신 그분의 길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정의 시스템을 제대로 지킨 사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영광이나 열매를 바란다면 먼저 그에 합당한 ‘뿌림’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씨 뿌린 이에게 열매를 배로 더해 주신다”(마르 10,30 참조)는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내 자유, 내 시간, 내 자리를 과감히 마중물로써 내놓는 사람이, 결국엔 더 큰 수확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잊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5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9,30-3
영웅적인 순교의 비결!
돈보스코는 꿈의 성인(聖人)으로 불릴 만큼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꿈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곤 했습니다.
그는 100년도 훨씬 전에 자신의 제자들인 살레시안들이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활동하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런 돈보스코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변 사람들은 그를 향해 ‘약간 맛이 간 사람’ ‘지나친 몽상가’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120%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살레시오회는 160여 개국에 진출해서 그가 못다 이룬 꿈을 지속해나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돈보스코가 두 명의 살레시오 회원이 금으로 된 큰 성 잔을 들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 안에는 피가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황하가 흐르는 중국이었습니다.
돈보스코가 꾸었던 그 꿈은 50여년 뒤에 정확하게 이루어졌는데, 1930년 당시 중국에서 활발히 사목활동 중이던 베르실리아 주교, 카라바리오 신부, 두 살레시안이 공소 사목 방문 중에 악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으며, 시성되셨습니다.
베르실리아 성인 같은 경우 수도회의 꽃인 수련자들을 교육시키는 수련장 신부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제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큰 스승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겸손했던 그는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슬슬 뒤로 물러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2대 총장인 루아 신부님께서 당시 베르실리아 신부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미 그의 출중한 자질과 성덕을 파악하고 뭔가 부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그 부탁이 뭔가 했더니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마카오에, 홍콩에, 중국 본토에 수많은 가난한 청소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선교단을 좀 이끌고 가주셨으면...”
짧은 순간이었지만 주교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중국이라...거의 지구 반대쪽 나라인데...경제, 정치, 종교, 교육 등등 모든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던데...
가면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된다던데...사랑스러운 수련자들은 어떡하고...사랑하는 내 가족들은 또 어떡하지...
그러나 베르실리아 신부는 즉시 생각을 바꿉니다.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즉시 접습니다.
환하고 기쁜 얼굴로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루아 총장님, 그럼 제가 언제 떠나면 될까요?”
중국에 도착한 베르실리아, 카라바리오 두 분의 선교사는 홍콩,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 깊숙이 들어가 영웅적인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던 교리교사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려다가
안타깝게도 화적들의 총에 맞아 순교하십니다.
순교자들이 그 혹독한 현실을 기꺼이 견뎌낸 배경,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배경에 어떤 힘이 있었을까 묵상해봅니다.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임마누엘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신앙, 그것이 순교의 비결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화요일 강론>
(2025. 2. 25. 화)(마르 9,30-37)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0-37)”
1) 35절-37절의 말씀은, ‘높아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높아지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길에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될 뿐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충실하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가?”, 바로 그것 하나뿐입니다.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면, 하늘나라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역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를 묻는 것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높아지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라.
그리고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낮춤’과 ‘섬김’은 바로 ‘사랑’입니다.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
이 말씀에 대해서 “그냥 사랑하면 안 되나? 꼭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만 사랑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랑’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사랑하는 이를 섬기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려가 주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기는 내려가지 않고 상대방에게 올라오라는 요구만 한다면, 또 자기는 상대방을 섬기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섬기라는 요구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고, 그 경우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고, ‘빈말’을 하는 것입니다.
3) 자기를 낮추어서 내려가 주고 섬기는 사랑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0-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낮추신 일이고, 우리를 섬기신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라는 말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라는 뜻입니다.
“꼭 그렇게 낮춤과 섬김과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나? 그냥 신앙생활 잘하고 착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못 들어갑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리고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4)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보잘것없는 이를(‘작은 이’를) 진심으로 섬겨야 한다.
그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나를 섬긴다면 누구든지 보잘것없는 이를(‘작은 이’를) 섬겨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바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신다.”입니다.
5)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낮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진심으로 낮추어야 하고, 섬긴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진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만일에 자신이 낮춤과 섬김을 실천한다는 것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다면, 그 행위는 곧바로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낮춘다는 것, 섬긴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려야 하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루카 17,10).>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