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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 11 무덤 밖에 서서 - 요 20: 15 어찌하여 울며
2. 부활하신 예수 ( 20: 11 – 18 )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 20: 11 무덤 밖에 서서 -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
제자들은 돌아간 상태에서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
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두 제자는 떠나고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 남아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요한은 마리아가 언제 무덤에 다시 돌아왔는지 혹은 두 제자가 돌아갈 때 마리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마리아가 통곡하는 장면으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마음이 아픈데 그의 시신까지 분실되니 마음이 몹시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불신앙의 눈물이었다. 그는 주께서 자신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믿지 않고 있었다.
2]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울면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이오'(*)는 조용히 눈물을 횰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이런 대성 통곡은 예수에 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생각 외에 다른 가능성(부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구부려'에 대해서는 5절을 참조하라.
요 20: 12 흰옷 입은 두 천사 -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
흰 옷 입은 두 천사인 사람이 있었다. 성경에서 천사가 나타날 때 후광을 가지고 날개를 달고(사 6장) 나타나는 경우보다는 보통 사람으로 나오는 예가 더 많다.
1]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빈 무덤과 관련된 천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이런 광경을 처음 목격했을 마리아에게는 충격이었고 어리둥절한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게 기록한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일치된 기록을 전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가령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로 묘사하고 천사의 숫자는 하나인 것처럼 기록했다.
* 마 28: 2 -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마가는 흰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다.
* 막 16: 5 -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 눅 24: 4 -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이와 같은 천사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천사가 횐색깔의 옷과 관련되어 있고 광채가 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숫자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천상적 존재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천상적 존재를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관찰하여 묘사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별 무리 없이 이해된다.
복음서 기자들은 동일한 사건을 묘사하면서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가와 요한은 무덤 주위의 사실에 대한 설명에 성실했던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실 설명에 몰두한 나머지 천사의 숫자 같은 부대 사항들을 묘사하는 것은 소흘히 했다.
아무튼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출현은 무덤에서 무언가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2]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마리아는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요 20: 13 천사들이 이르되 -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삼일 전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 그 처참함과 슬픔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장래와 장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무덤에 둔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은 또 한번의 기막힌 일이었다.
예수를 사랑하고 따라다닌 그의 슬픔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도 그의 슬픔에 제일 먼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는 천사들의 말에 그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했다.
1]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한 것이었던지 천사들조차 그것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는 것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장례와 장사를 매우 중하게 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증오하였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을 것이다.
* 눅 24: 5-6 –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본서에서는 천사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어찌하여 우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으며 더 이상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천사가 주님의 부활 사실을 고지(告知)하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다.
* 마 28: 5-7 –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 막 16: 6-7 –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2]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서 2절에서와 달리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임을 가리킨다.
이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요 20: 14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의 어떤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천사가 가리켜 일러주었는지 모르지만 돌아보았으나 예수의 서신 것을 보고도 예수신줄 몰랐다.
1]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마리아는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천사들은 안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 보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어 왔다.
Ⓐ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다.
Ⓑ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래 많은 주석가들이 제시한 것으로 천사들이 질문올 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계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 서 계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를 가려서일까? 그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바울이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고전 15: 51-54 –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이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본 것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이 아니라 엠마오 도상(道上)의 두 제자도 그랬다.
* 눅 24: 13-16 –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해변에서의 제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 요 21: 4 -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여기에 덧붙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요 20: 15 어찌하여 울며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
예수께서도 13절 천사가 마리아에게 질문한 것과 같은 내용으로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이때까지도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있었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무덤 주위에 있을 사람은 '동산지기'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말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부활하신 주님의 첫 번째 물음은 천사의 물음과 동일하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침착한 마음으로 생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두 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이 뜻하는 바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은 걱정과 조급함 그리고 당황과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자 곧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렸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은, 믿음이 부족한 성도들이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무의미한 눈물율 흘리며 찾지 않아야 할 곳에서 주님을 찾을 때 들려주어야 할 물음이다.
2]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막달라 마리아는 얼떨결에 뒤에 서 있는 주님을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에 동산 주위에 서성이는 사람으로서 동산지기를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께서 그를 부르실 때도 그를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연약한 믿음과 마음으로라도 그를 사모하며 따랐던 마리아를 찾아주셨다.
3]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기서 사용된 '주여'(*, 퀴리에)는 13, 18절의 '주'(*, 퀴리오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존칭어로 사용되었으므로 '선생님' 또는 '여보세요'(공동번역)가 옳은 번역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누구의 시신이 없어졌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만일 옮겨 놓았다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단신(單身)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주님의 시신을 찾아 자신이 다시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실수를 어느 정도는 덮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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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인생을 걸고, 움직일 시기는 지금 뿐입니다,
과거는 잊으세요, 결국은 현실이 가장 소중하고, 미래는 꿈이 랍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마음으로 좋은 꿈 그리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