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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강해라
딤후 2:1-7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딤후 2:1-7 /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된 군인] 오, 내 아들 디모데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로 더욱 튼튼해지시오. 2) 그대는 내게서 들은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게서 들은 이 위대한 진리를 그 스스로 믿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할 수 있는 그런 충실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오. 3)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인답게 내가 당하는 이 고난에 참여하시오. 4) 그리스도의 군인이 된 이상 이 세상 일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군대에 입대시켜 주신 그리스도를 실망시켜 드릴 것입니다. 5) 주님의 일을 맡은 사람은 주님의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경기를 하는 사람이 규칙을 어기면 실격을 하게 되어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6) 힘들여 일한 농부만이 많은 수확을 거두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일하시오. 7) 이 세 가지 예를 마음에 잘 새겨 두시오. 주께서 그대를 도와 그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중에도 의연하고 담대했습니다. 옥 중에서도 늘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걱정하는 신앙의 아들 디모데에게 예수의 좋은 병사답게 주 안에서 강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의 좋은 병사(1-3)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기록한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네로황제의 박해로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사슬에 묶여서 지냈습니다(딤후 1:16). 이때는 기독교 대박해의 시기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디모데에게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 강하라"라고 권면합니다(1). 이어서 예수의 좋은 병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병사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다가 부르심을 받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3년 이상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영적훈련을 받은 후에 비로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강한 사람 곧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갈 2:20).
예수의 좋은 병사가 되려면(4-7) 위에서 언급한대로 훈련을 많이 한 병사들이 강한 군대를 만듭니다. 바울은 고난의 때에 의연하고 형통할 때에 겸손한 신앙인, 곧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아래와 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첫째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합니다. 영국의 역사철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경험이 위대한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특히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많이 해봐야 합니다. 따라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3). 둘째,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4). 우리를 모집한 분, 곧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히 11:6). 셋째, 법대로 경기를 해야 합니다(5). 선수가 법과 규칙대로 하지 아니하면 우승은커녕 퇴장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습니다. 최고의 법, 곧 모든 것의 잣대는 성경입니다. 세상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농부가 곡식을 먼저 먹는 것처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6). 더 나아가 총명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7).
적용: 당신은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합니까? 자신을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길 바랍니다.
물고기는 물에 빠져 죽지 않는다. 새는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신의 창조물들은 각기 자신의 참된 본성대로 살아가야 한다. -마그데부르그의 성녀 메히틸드. 물고기나 새 모두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주신 진정한 본성을 발견해야하는 것은 인간에게 축복이며 도전입니다. 병사나 운동선수나 농부는 주어진 삶의 목표를 위해 자신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주어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명을 잘 감당하며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 나라 세우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죽으면 살고 참으면 왕 노릇 하리라
디모데후서 2:1-13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쓴 주목적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딤후1:2)가 자기에게 맡겨진 복음의 사역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고난을 무릅쓰고 수행하도록 용기를 주며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도 다시 그를 “내 아들”(본문 1절)이라 부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디모데가 바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때문이기도 하고 누구보다도 그를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하는 일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딤후1:1). 특히 이방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부르심과 세우심을 받은 사도였던 것입니다. 그런 바울을 도와 함께 사역하도록 안수를 받은 디모데였기 때문에 디모데를 사도 바울의 영적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흔히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영적 아들이 그의 사역을 잘 감당하게 하도록 영적 아버지가 주는 목회적 권면인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보듯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강할 것을 주문합니다. 젊은 디모데가 교회 안팎에서의 반대와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 안에서 고조되는 박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고 위축되기 쉬운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그에게 강해져야 하고 강해질 수 있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어떻게 강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호의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전지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권능으로 구원받은 우리이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강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절대 강자에 의해 사랑받고 보호받는 사람이 강할 수 없다면 누가 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강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일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것을 알라고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강할 것을 주문한 사도 바울은 강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본문 2절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영지주의를 비롯한 비성경적인 사고가 교회에 퍼져 교인들을 미혹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해준 순수한 복음과 건전한 교리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좋은 복음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면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는지를 좋은 병사의 비유를 들어 가르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좋은 병사는 자기를 병사로 모집한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병사가 병사로 복무하면서 자기 개인생활에 얽매이거나 고된 훈련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훈련이 힘들다고 기피하거나 개인생활을 자유롭게 즐길 수 없다고 불평하는 자는 군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가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사생활이 주님의 사역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을 항상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그렇게 했으니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면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는지를 디모데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좋은 병사에 이어서 좋은 경기선수의 비유도 사용합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하는 것입니다. 병사에게는 고된 훈련을 달게 받으며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를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하는 법이 있다면, 경기하는 사람에게도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법대로 해야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기자의 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고된 훈련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규칙을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경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경기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사역도 바르게 해야 하고 끝까지 수행해야 하며 그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고난을 이겨내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중간에 사역을 포기하거나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불법, 편법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는지를 디모데에게 가르치는 데 사도 바울이 세 번째로 사용하는 비유는 좋은 농부의 비유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열심히 일한 농부일수록 당연히 먼저 많이 수확할 수 있듯이 복음의 사역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농부의 수고는 그야말로 피땀을 흘리는 수고입니다. 그런데 땅은 정직해서 피땀을 많이 흘리는 농부에게 그만큼 많은 곡식을 내놓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복음의 사역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면 그만큼 큰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을 마친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한 모든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말들에 대한 이해를 주실 것이고 그 말을 따라 행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실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에베소 교회를 지키며 복음을 전하고 있던 디모데에 대한 사도 바울의 염려의 주된 원인은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거짓 가르침의 핵심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기는 하나 사람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히 사람이시라는 것이 정통교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8절에서 쓰기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씨”라는 것은 그가 온전히 사람으로 태어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우리 가운데 오셨으며 당신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로 살려내셨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더 이상 바랄 다른 것이 없으며 두려워할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죄인 취급을 당하며 고난을 받는 일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그 어떤 고난도 무릅쓰고 이 놀라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자기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며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감옥에 갇혀 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그를 격려하려 한 것입니다. 본문 9-10절을 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9절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갇힐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둘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들의 고난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이 자유롭게 널리 퍼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의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울 자신처럼 디모데도 용기를 잃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그로 인한 고난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하여 자신의 복음 사역에 힘을 주는 원천으로 제시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곧 그의 미쁘심입니다. 본문 11-13절을 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신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반드시 지키실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11절에서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그가 다시 사셨듯이 우리도 반드시 살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죽었다가 부활하게 되는 약속도 물론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다가 죽더라도 우리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으므로 고난도 두려워하지 말고 충성을 다하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는 말은 보다 영적인 의미로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6:3-11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주님과 함께 죽는 우리에게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시는 약속이 주어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히 복된 삶을 얻기 위해 먼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미쁘신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반드시 지키실 것이 또 무엇입니까? 12절을 봅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왕 노릇 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과 함께 받을 영원한 영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cf. 눅12:9)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합니다. 우리가 믿을 이는 오직 언제나 신실하신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믿고 복음의 사역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3:3에서도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합니다. 고전1:9에서도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합니다. 고전10:13에서도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합니다. 살전5:24에서도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합니다. 살후3:3에서도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이 주님을 믿고 복음의 삶에 충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쁘신 주님의 약속,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그와 함께 왕 노릇 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굳게 믿고 그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는 자의 행복
딤후 2장 / 김남수 목사
어느나라 민족이나 인사가 있습니다.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우리나라 인사와 성서의 인사의 차이점은 우리는 인사를 할때 꼭 과거의 일을 가지고 인사를 합니다. “먹었느냐, 잘 잤느냐” 등등 그러나 성서의 인사는 미래입니다. 앞날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샬롬” 앞날에 평화가 있기를 원한다. 앞으로 큰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성경의 인사는 영적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인사를 육적인 것에 인사의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의 인사는 먹는것과 자는것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그 외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와서도 돈 벌어서 자는 집, 먹는 것, 또 국내에서도 늘어나는 것은 식당이 즐비합니다. 우리도 성경대로 이제 우리 인사도 미래의 인사, 영적인 인사, 축복을 비는 인사, 평화를 비는 인사,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미래의 샬롬이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받은 교회는 샬롬의 교회요, 축복받은 가정은 샬롬의 가정입니다. 샬롬이 깨어지면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질서도 깨어집니다. 정치 문화도 깨어집니다. 평화가 없으면 다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샬롬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참 평화를 얻은 줄로 믿습니다. 평화는 대체로 두가지가 있습니다. 피스라고 하는 이 평화는 어원이 팍스에서 왔습니다. 이 팍스라는 말은 힘으로 얻는 평화를 말합니다. 잘 살 때 평화가 온다. 소원이 이루어질 때 평화가 온다. 성공할 때 평화가 온다. 출세해야 평화가 온다. 이겨야 평화가 온다. 무기를 가져야 평화가 온다. 세계를 정복해야 평화가 온다는 등등 이런 평화가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평화입니다. 차도 더 좋은 차를 타야 평화가 온다. 제일 좋은 집에 가야 평화가 온다. 제일 좋은데, 점점 올라가야 평화가 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샬롬은 그렇지 않습니다. 피스와 다릅니다. 이 샬롬이라는 히브리어의 어원은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흘려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우리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더 있어서 더 가져서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신 평화는 있든지 없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잘살아도 평화요, 못살아요 평화요, 집에서도 평화요, 들에서도 평화요,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평화를 누렸습니다. 악한 죄 파도가 많아도 평안이 있습니다. 나 어느 곳에 있어도 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주님이 주시는 위로부터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참 평화이고, 이 평화는 안의 평화이기 때문에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영원히 내 것입니다. 일생동안 이 평화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살면 평화가 오는 줄 아는데 아닙니다. 잘 살아 보면 오히려 더 평안이 없습니다. 자동차도 더 좋은 차를 타면 평안이 있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참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침과 저녁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항상 평안한 것, 영원히 평안한 것입니다. 샬롬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오면 왜 좋습니까? 샬롬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의 만가지 일이 태산같이 밀려오고 한없이 어려움이 있지만은 한번도 그런 일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잠잘 때 주님께 다 맡깁니다. 기독교는 맡기는 종교라고 합니다. 죄까지도 다 맡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맡길려고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못 쓰는 것을 주님께 갖다 맡기고 주님으로부터 하늘 문을 여셔서 새것을 가지고 가는 영적인 쇼핑센타가 교회입니다. 이것은 공짜로, 공짜로 못쓰는 것을 버리고 새것을 가지고 갑니다. 알콜중독자 폐인 되면 못씁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이 얼마나 타락한 사람입니까? 보통 타락한 사람이 아니지만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 주님을 만날 때 인류역사의 제일 쓸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최고의 가치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쓰지 못하는 것, 교회에 가면 금그릇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창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없는데서도 있게도 하시는데 리모델링 하시는 것은 땅집고 헤엄치기입니다. 부시 대통령도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나면서 쓸만한 사람이 되고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샬롬이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샬롬, 예수 잘 믿을 수 있을수록 샬롬을 누리고, 은혜 받을수록 샬롬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뉴욕은 얼마나 좋습니까. 세계의 센타요, 금융의 중심지요, 얼마나 좋습니까? 힘있게 능력있게 얼마나 좋습니까? 최고의 도시, 세계의 최고의 자리에 왔지만 여러분이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는 것은 여러분이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샬롬이 없기 때문입니다. 팍스로 살려고 하니까 힘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평안을 누리려고 하니 영원히 평안이 없습니다. 항상 부족하고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샬롬은 어디가도 평화입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고 시험 많고 어려움이 많지만은 늘 평안이 넘칠줄로 믿습니다.
이곳에 9.11 풍랑도 일어나고, 불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은들 그런 일이 없습니까?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는 샬롬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샬롬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교회를 잘 지어도 샬롬이 없어지면 마귀는 샬롬을 깨트립니다. 마음의 샬롬을 깨트립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3개의 천국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마음의 천국이요, 교회의 천국이요, 가정의 천국인데 이 3곳의 천국을 우리가 다니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천국 때문에 다른 생활의 천국이 언제나 이어지게 되고 이 천국생활로 말미암아 이 모든 세상의 삶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삶인줄 믿습니다. “샬롬” 미래의 샬롬, 영원한 샬롬, 샬롬은 번영을 가져다 줍니다. 샬롬은 발전을 가져다 줍니다. 이 교회도 시험안들고 10년만 지나가면 세계적인 일을 합니다. 샬롬이 있으면 놀라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도 샬롬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전쟁과 어려움이 있으면 이런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샬롬은 주님이 주시는 샬롬,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령충만한 성도는 위로부터 주시는 샬롬이 항상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주는 자의 행복”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흔들어 주리라” 세상은 얻으려고 하고 받을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전부 역설적입니다. 이 논리도 반대입니다. “주라” 어디든지 주는 자가 되라. 교회는 기프트 샾, 선물센타, 은혜의 종교,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기독교는 주는 종교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아들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시고, 날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길러주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오셔서 생명까지 버려주시고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아 부어 주시고, 한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고 성령은 날마다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권고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도 계속 주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잘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인류역사의 파괴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충만하여 우리 주님을 본받아 주님이 주시는 한없는 은혜를 받아 주는 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주는 교회가 복이 있습니다. 주는 성도들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주는 데에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목사도 잘 모르지만 저 분이 어느정도 복 받겠느냐 간단하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디든지 자기 만족하려고, 자기 이기적인 욕심이 앞서는 사람이냐? 마인드가 주는 마인드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주기 위해 보내셨지만 처음에는 먼저 신앙은 2/4박자입니다. 먼저는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받은 은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연법칙도 그렇고, 이 세상의 법칙도 그렇습니다. 공부도 처음에는 다 배우고, 그 다음부터는 주는 것입니다. 배운 것을 주는 것입니다. 머리는 계속 배우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30-40대 되면 기억력이 없어집니다. 머리에 전달이 잘 되지 없습니다. 때는 줄 때이기 때문입니다. 전부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만드는 과정이 있고, 주는 과정이 있습니다. 받는 과정이 있고. 주는 과정이 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그 다음 결혼해서는 받은 사랑을 그대로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좋은 가정이 됩니다.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고, 남편을 위해 희생하고,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 항상 주는 자가 되고 사랑하고 헌신할 때 가정에도 축복이 있고, 사회에도 축복이 있고, 국가에도 축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주는 자로 살아야 됩니다. 주는 자가 잘 됩니다. 주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이만큼 은혜를 주셨는데 이제는 더 많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면 더 잘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서 받은 은혜를 어떻게 주느냐? 두 곳입니다. 한곳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는 이웃을 향하여 입니다. 이것도 조화가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은혜를 향하여 주신 분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감사와 사랑을, 보이는 우리 이웃을 향하여 인류를 향하여 사랑과 봉사를 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어야 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는 구체적으로 교회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두고 교회만 잘 지으면 되느냐고 합니다. 한 국가가 달려들어도 한 사람의 가난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들이 물려주지 않아도 자기들 복 받아서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따로 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복을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물려준 것으로 우리가 잘 살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나도 살고 민족도 살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오면 교도소는 줄어듭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 많아지면 술집도 줄어듭니다. 경찰서가 많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는 자가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잘되기를 위해서 헌신할 때 내 가정도 잘되고, 교민사회도 잘되고, 미국도 잘되고 우리도 잘 될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칭찬하며 살아야 되고, 주는 자가 되어야 할 줄로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는 교회, 주는 성도, 사업을 해도 왜 사업합니까? 줄려고 사업합니다. 사람이 받았다가 주고 이 땅 떠나는 것입니다. 지식도 주고 나면 끝나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행복합니다. 주는 것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주는 자가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는 교회는 시험들지 않습니다. 이 교회도 1년에 수백만불의 선교사역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축복 때문에 놀라운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는 자가 복 받습니다. 주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주는 자의 행복
딤후 2:1-4 / 김남수 목사
어느나라 민족이나 인사가 있습니다.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우리나라 인사와 성서의 인사의 차이점은 우리는 인사를 할때 꼭 과거의 일을 가지고 인사를 합니다. “먹었느냐, 잘 잤느냐” 등등 그러나 성서의 인사는 미래입니다. 앞날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샬롬” 앞날에 평화가 있기를 원한다. 앞으로 큰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성경의 인사는 영적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인사를 육적인 것에 인사의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의 인사는 먹는 것과 자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그 외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와서도 돈 벌어서 자는 집, 먹는 것, 또 국내에서도 늘어나는 것은 식당이 즐비합니다. 우리도 성경대로 이제 우리 인사도 미래의 인사, 영적인 인사, 축복을 비는 인사, 평화를 비는 인사,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미래의 샬롬이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받은 교회는 샬롬의 교회요, 축복받은 가정은 샬롬의 가정입니다. 샬롬이 깨어지면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질서도 깨어집니다. 정치 문화도 깨어집니다. 평화가 없으면 다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샬롬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참 평화를 얻은 줄로 믿습니다. 평화는 대체로 두가지가 있습니다. 피스라고 하는 이 평화는 어원이 팍스에서 왔습니다. 이 팍스라는 말은 힘으로 얻는 평화를 말합니다. 잘 살 때 평화가 온다. 소원이 이루어질 때 평화가 온다. 성공할 때 평화가 온다. 출세해야 평화가 온다. 이겨야 평화가 온다. 무기를 가져야 평화가 온다. 세계를 정복해야 평화가 온다는 등등 이런 평화가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평화입니다. 차도 더 좋은 차를 타야 평화가 온다. 제일 좋은 집에 가야 평화가 온다. 제일 좋은데, 점점 올라가야 평화가 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샬롬은 그렇지 않습니다. 피스와 다릅니다. 이 샬롬이라는 히브리어의 어원은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흘려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우리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더 있어서 더 가져서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신 평화는 있든지 없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잘살아도 평화요, 못살아요 평화요, 집에서도 평화요, 들에서도 평화요,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평화를 누렸습니다. 악한 죄 파도가 많아도 평안이 있습니다. 나 어느 곳에 있어도 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주님이 주시는 위로부터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참 평화이고, 이 평화는 안의 평화이기 때문에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영원히 내 것입니다. 일생동안 이 평화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살면 평화가 오는 줄 아는데 아닙니다. 잘 살아 보면 오히려 더 평안이 없습니다. 자동차도 더 좋은 차를 타면 평안이 있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참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침과 저녁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항상 평안한 것, 영원히 평안한 것입니다. 샬롬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오면 왜 좋습니까? 샬롬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의 만가지 일이 태산같이 밀려오고 한없이 어려움이 있지만은 한번도 그런 일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잠잘 때 주님께 다 맡깁니다. 기독교는 맡기는 종교라고 합니다. 죄까지도 다 맡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맡길려고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못 쓰는 것을 주님께 갖다 맡기고 주님으로부터 하늘 문을 여셔서 새것을 가지고 가는 영적인 쇼핑센타가 교회입니다. 이것은 공짜로, 공짜로 못쓰는 것을 버리고 새것을 가지고 갑니다. 알콜중독자 폐인 되면 못씁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이 얼마나 타락한 사람입니까? 보통 타락한 사람이 아니지만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 주님을 만날 때 인류역사의 제일 쓸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최고의 가치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쓰지 못하는 것, 교회에 가면 금그릇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창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없는데서도 있게도 하시는데 리모델링 하시는 것은 땅집고 헤엄치기입니다. 부시 대통령도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나면서 쓸만한 사람이 되고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샬롬이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샬롬, 예수 잘 믿을 수 있을수록 샬롬을 누리고, 은혜 받을수록 샬롬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뉴욕은 얼마나 좋습니까. 세계의 센타요, 금융의 중심지요, 얼마나 좋습니까? 힘있게 능력있게 얼마나 좋습니까? 최고의 도시, 세계의 최고의 자리에 왔지만 여러분이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는 것은 여러분이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샬롬이 없기 때문입니다. 팍스로 살려고 하니까 힘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평안을 누리려고 하니 영원히 평안이 없습니다. 항상 부족하고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샬롬은 어디가도 평화입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고 시험 많고 어려움이 많지만은 늘 평안이 넘칠줄로 믿습니다.
이곳에 9.11 풍랑도 일어나고, 불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은들 그런 일이 없습니까?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는 샬롬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샬롬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교회를 잘 지어도 샬롬이 없어지면 마귀는 샬롬을 깨트립니다. 마음의 샬롬을 깨트립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3개의 천국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마음의 천국이요, 교회의 천국이요, 가정의 천국인데 이 3곳의 천국을 우리가 다니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천국 때문에 다른 생활의 천국이 언제나 이어지게 되고 이 천국생활로 말미암아 이 모든 세상의 삶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삶인줄 믿습니다. “샬롬” 미래의 샬롬, 영원한 샬롬, 샬롬은 번영을 가져다 줍니다. 샬롬은 발전을 가져다 줍니다. 이 교회도 시험안들고 10년만 지나가면 세계적인 일을 합니다. 샬롬이 있으면 놀라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도 샬롬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전쟁과 어려움이 있으면 이런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샬롬은 주님이 주시는 샬롬,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령충만한 성도는 위로부터 주시는 샬롬이 항상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주는 자의 행복”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흔들어 주리라” 세상은 얻으려고 하고 받을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전부 역설적입니다. 이 논리도 반대입니다. “주라” 어디든지 주는 자가 되라. 교회는 기프트 샾, 선물센타, 은혜의 종교,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기독교는 주는 종교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아들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시고, 날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길러주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오셔서 생명까지 버려주시고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아 부어 주시고, 한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고 성령은 날마다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권고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도 계속 주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잘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인류역사의 파괴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충만하여 우리 주님을 본받아 주님이 주시는 한없는 은혜를 받아 주는 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주는 교회가 복이 있습니다. 주는 성도들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주는 데에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목사도 잘 모르지만 저 분이 어느정도 복 받겠느냐 간단하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디든지 자기 만족하려고, 자기 이기적인 욕심이 앞서는 사람이냐? 마인드가 주는 마인드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주기 위해 보내셨지만 처음에는 먼저 신앙은 2/4박자입니다. 먼저는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받은 은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연법칙도 그렇고, 이 세상의 법칙도 그렇습니다. 공부도 처음에는 다 배우고, 그 다음부터는 주는 것입니다. 배운 것을 주는 것입니다. 머리는 계속 배우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30-40대 되면 기억력이 없어집니다. 머리에 전달이 잘 되지 없습니다. 때는 줄 때이기 때문입니다. 전부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만드는 과정이 있고, 주는 과정이 있습니다. 받는 과정이 있고. 주는 과정이 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그 다음 결혼해서는 받은 사랑을 그대로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좋은 가정이 됩니다.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고, 남편을 위해 희생하고,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 항상 주는 자가 되고 사랑하고 헌신할 때 가정에도 축복이 있고, 사회에도 축복이 있고, 국가에도 축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주는 자로 살아야 됩니다. 주는 자가 잘 됩니다. 주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이만큼 은혜를 주셨는데 이제는 더 많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면 더 잘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서 받은 은혜를 어떻게 주느냐? 두 곳입니다. 한곳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는 이웃을 향하여 입니다. 이것도 조화가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은혜를 향하여 주신 분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감사와 사랑을, 보이는 우리 이웃을 향하여 인류를 향하여 사랑과 봉사를 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어야 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는 구체적으로 교회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두고 교회만 잘 지으면 되느냐고 합니다. 한 국가가 달려들어도 한 사람의 가난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들이 물려주지 않아도 자기들 복 받아서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따로 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복을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물려준 것으로 우리가 잘 살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나도 살고 민족도 살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오면 교도소는 줄어듭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 많아지면 술집도 줄어듭니다. 경찰서가 많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는 자가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잘되기를 위해서 헌신할 때 내 가정도 잘되고, 교민사회도 잘되고, 미국도 잘되고 우리도 잘 될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칭찬하며 살아야 되고, 주는 자가 되어야 할 줄로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는 교회, 주는 성도, 사업을 해도 왜 사업합니까? 줄려고 사업합니다. 사람이 받았다가 주고 이 땅 떠나는 것입니다. 지식도 주고 나면 끝나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행복합니다. 주는 것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주는 자가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는 교회는 시험들지 않습니다. 이 교회도 1년에 수백만불의 선교사역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축복 때문에 놀라운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는 자가 복 받습니다. 주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계속 성장하는 그리스도인
딤후 2:1-2 / 정필도 목사
저의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직장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오랫동안 외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까지 장수하시며 예수를 잘 믿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이처럼 살림을 도맡아 해주시던 할머니이셨지만 제가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거의 집안 일을 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처럼 노인이 되면 몸이 점점 쇠약해지십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잘 자라납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상태가 마치 노인과 같아서 신앙이 자라지 않고 점점 신앙생활이 퇴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건강한 사람은 계속해서 잘 성장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균형있게 계속해서 성장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계속해서 성장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의 자세부터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예배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예배가 살면 신앙이 살고예배가 죽으면 신앙도 죽으며, 우리가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리느냐에 따라 신앙의 성장도 달라집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찬양의 자세도 다릅니다.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자세도 다르고, 말씀을 듣는 자세도 다릅니다.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었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큰 은혜를 받게 되고 계속해서 성장하게 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섬김의 자세가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자원하여 기쁨으로 섬김니다. 마치 주님을 섬기듯이 겸손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이웃을 섬기므로 은혜 가운데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전도의 자세가 다릅니다.
과거에는 마지못해 전도했으나, 신앙이 성장할수록 자세가 달라집니다. 자원하여 기쁨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참으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전도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없음을 알고 간절히 기도하며 전심으로 전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전도의 귀한 열매가 많이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쥵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성도들과의 교제도 다릅니다.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의 한가족으로 생각합니다. 한 번 보고 헤어질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히 하늘나라에 가서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사람들인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자세로 진실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성도들과 교제합니다.
영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시골에 살던 두 명의 젊은이가 도시로 나와 어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시골 교회의 가족과 같이 따뜻한 분위기 대신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삭막한 도시 교회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거의 일 년 가까이 교회를 다녔지만 아무도 아는 척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이들의 인내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음 주에 결판을 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심이 서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도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다음 주일에 교회에 가면 누구에게든지 다가가 말을 걸어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주일에 한 친구는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교회생활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작은 결심을 실천하여 먼저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사람은 그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고 여러 사람들과 교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갔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유명한 리차드 백스터 목사입니다.
여러분도 누가 찾아와 인사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다가가 인사하고, 먼저 친절을 베푸는 능동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느낄 수 있고,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떡을 떼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성도들은 성장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서로의 힘이 되어 함께 짐을 지고 함께 기도함으로써 잘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의 세퀘어 나무는 300피트 정도의 높이까지 무성하게 잘 자랍니다. 특이한 것은 이 거목의 뿌리가 얕고 사방으로 길게 뻗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군집을 이룬 이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뒤엉켜 거센 비바람에도 잘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지해주기 때문에 거대한 나무로 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스퀘어 나무들처럼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아픔을 나누고 중보기도로 도우며 상부상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쥶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점점 그리스도인을 닮아가므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인격이나 성품이나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주님을 닮아갑니다.
많은 선교사 중의 교과서적인 인물로 알려진 윌리엄 케리는 인도의 선교사로 크게 성공한 분입니다. 그는 자그마치 34개 국어로 성경을 번역해냈습니다. 이분이 나이 많이 들어 다시 인도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어느 못된 사람이 윌리엄 케리에게 망신을 주고자 하는 의도로, “선생님, 선생님은 선교사가 되기 전에는 구두 만드는 일을 했다면서요?”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케리는 빙그레 웃으며 “아니요. 선생님이 잘 모르시는군요. 나는 구두를 만드는 재주는 없고 다만 구두를 기웠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형편 없는 질문에도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답하는 모습을 보면 이분이 얼마나 겸손한 인격을 가진 훌륭한 신앙의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균형있게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1. 소그룹 사람들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몇만 명씩 모이는 큰 교회일수록 사랑방과 같은 소그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는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듯 교회 안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혼자서는 외롭습니다.
우리교회 성도 중에 한 분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 오래되었으나 도무지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재미도 없고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마지못해 신앙생활을 하던 차에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랑방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지난 주에 받은 은혜를 나누며, 어려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간증하는 모습을 보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분의 신앙생활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친밀해졌고 무엇보다도 교회생활이 즐거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사랑방 소그룹을 통해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2. 영적인 정기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확신이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건강진단을 받아보듯이, 우리도 영적 건강을 위해서 스스로를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예배 자세는 어떠한가. 과연 예배 속에 은혜와 감격이 있는가. 나의 섬김은 어떠한가. 전도의 열매는 있는가. 성도와의 교제는 잘 되고 있는가. 나의 인격은 성장하고 있는가.”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외쳤습니다(애 3:39~40).
존 플리처는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는 9개의 좌우명을 만들어 이것을 거울 삼아 자기 속사람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스스로를 깊이 훈계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더 한층 하나님께 가까워졌는가? 나의 신앙은 방심 때문에 약해졌는가? 다른 사람이 나를 높일 때 기뻐하지는 않았는가? 귀한 시간을 가장 잘 사용했는가? 나는 하나님을 위해 절약해야 할 경우 절약했는가? 나의 혀를 잘 지배했는가? 나의 생활과 말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3. 신앙일기를 쓰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자신의 발전 과정을 일기에 적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적기보다는 그때그때 깨달은 교훈과 받은 은혜를 적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장에 매우 유익합니다. 모세는 민수기 33:2에서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은 이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 기록을 읽으며 너무나 중요한 삶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저는 국내외 집회를 다닐 때마다 중요한 것을 기록합니다. 특히 그때 만난 사람에 대한 믿음의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받은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에 관하여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일기를 쓰면 그때 그때마다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우리의 성장에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좋은 것만 기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이 의심했던 것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며 몸부림쳤던 시간들을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문제를 통해 우리를 어떻게 만지시며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알게 됩니다.
시편 102:18을 보면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그 간증을 기록하여 남김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질 때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얻고 신앙에 유익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정교사로 중학교 3학년이던 학생을 가르칠 때, 기초부터 중학교 전 과정을 총정리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 공부를 해가며 이 일을 하다보니 힘들었지만 가르치는 가운데 저 자신에게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 2:1~2과 디모데전서 4:6을 보면 을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자신이 배운 것을 혼자만 아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치다보면 그 지식이 더 확실해지고 자신의 성장에 많은 유익을 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균형있게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원하시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도록 돕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각자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오늘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남은 여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므로 하루하루가 생애 최고의 날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적 자폐증을 극복하라
딤후 2:1-4 / 양인순 목사
오늘은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0주년이 되는 뜻 깊은 주일입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이 일본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과 자주민임을 온 세상에 선포한 역사적일 날입니다.
1905년 일본의 외무대신 이등박문이 이완용을 매수합니다. 그리고 국왕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을사보호조약을 맺습니다. 우리나라를 보호해 준다는 명분아래 외교와 모든 행정을 장악합니다. 마침내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이 나라를 완전히 식민지화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고, 주권도, 언어도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 결과 이 민족은 엄청난 인권유린과 경제적 약탈, 그리고 종교적 탄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오후2시, 33인의 민족대표는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부릅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여 자진 체포됩니다. 한편 파고다 공원에서는 5천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가두시위에 나섭니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 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됩니다.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들풀처럼 타오릅니다.
이에 총독부는 비무장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고, 부상을 당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독립운동은 집회수가 1,542회, 참가인원 202만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자 5만 2,770명, 불탄 교회가 47개, 학교 2곳, 민가 715채가 불탔습니다. 비록 독립운동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의 기상을 온 세상에 선포했다는 점에서 큰 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위대한 민족의 대행진에 한국교회가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독립협회라는 단체가 결성됩니다. 그 단체는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같은 크리스챤들에 의해서 결성되었습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중에 16명이 기독교인입니다. 또한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곳이 바로 기독교인이요 기독교 학교입니다. 그 결과 3.1운동 이후 기소된 6,417명의 피고인중 기독교이 1,561명으로 24.3%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의 수가 22만 명이었는데 이는 전체 인국 중 1.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3.1 독립운동 90주년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 우리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1.3%밖에 되지 않는 소수였지만 민족의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산파역할을 했습니다. 민족정신의 지주가 되었고, 횃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 땅에 적어도 860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6만 여개의 교회가 있고, 10만 여명의 목회자가 있습니다. 장로님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요,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가 요직에 있는 기독교인이 약 60%나 됩니다.
한국 교회는 90년 전의 상황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덩치는 커졌지만 사회적인 영향력은 초라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취약성을 꼬집는 말 가운데 “신앙은 있으나 신앙생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의 생활과 교회 밖의 생활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삶속에서 예수님의 향기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을 외치지만 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방법으로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피 값을 지불하시고 세우신 곳입니다. 교회는 암울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빛을 비추는 곳입니다. 슬픈 소식, 나쁜 소식, 절망적인 소식뿐인 곳에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술에 복음의 기쁜 소식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이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진 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한국교회는 심하게 표현하면 ‘자폐증(autism)’에 걸려있다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자폐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신병의 하나, 주위에 관심이 없어지고, 말을 하지 않으며, 자기 세계에 틀어박히는 병”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해야 합니다. 세상과 단절되어 벽을 쌓고 있으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사랑의 열정을 잃어버린 교회는 자폐증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교회의 내에서 소모적인 일에 빠져있다면 그것 역시 자폐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지난 주 우리는 대그룹으로서의 감격적인 예배와 소그룹의 두 날개가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을 통해서 영적 자폐증을 극복하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인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인생의 좋은 지혜를 알려주듯, 믿음의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목회를 할 것인가를 들려줍니다.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a good soldier of Christ Jesus) 가 되라는 것입니다. 개역개정 판에는 ‘병사’로 번역되었는데 개역한글판에서 썼던 ‘군사’ 라는 표현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기에 건강한 남자는 군 복무의 의무가 있습니다. 군인은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순응해야 합니다. 거부하면 감옥에 갑니다. 그리고 군에 입대하면 먼저 사회에서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지급하는 통일된 군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집에서 입던 옷을 되돌려 보냅니다. 군대 보낸 부모의 마음이 가장 찡할 때가 바로 아들이 보낸 옷을 받을 때라고 합니다. 머리 모양도 동일합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자기 맘대로 염색도 하고, 멋도 부렸지만 입소하는 순간부터는 자유가 제한됩니다. 먹는 음식도 동일합니다. 입는 복장도 같습니다. 언어사용도 동일합니다.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는 제한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강한 훈련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운동이 아닙니다. 강한 군사로 만들기 위한 훈련입니다. 정신통일을 위해 먼저 제식훈련을 합니다. 연병장에 모여 줄서는 훈련부터 시킵니다. 앞으로 나란히! 좌우 향 좌! 우향 우! 뒤로 돌아! 아니 초등학생도 아닌 적어도 대학생활을 하다 온 청년들에게 왜 이런 훈련을 시킬까요? 정신통일, 하나 되게 만들기 위한 훈련과정입니다. 이것이 끝나면 총검술을 배우고, 다양한 훈련을 합니다.
군인은 자기 생활에 매이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생활이 없습니다. 상명하복의 구조 속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국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줍니다. 요즘은 월급도 많이 줍니다. 왜 이런 엄청난 세금을 들여서 군인을 훈련할까요? 군인으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분단된 조국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세계 분쟁지역에서 평화로운 나라를 재건하는데 돕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영적인 갓난아이로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군사로 거듭나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진군하여 적을 제압하고,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강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성령의 검, 말씀으로 무장하여 단번에 제압하는 영적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자폐증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로 변화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영적 자폐증을 극복하고, 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강한 군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강인한 훈련의 결과로 만들어 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는 비결 역시 훈련입니다. 교육과 훈련은 다릅니다. 교육은 모르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교육을 받으면 지식이 늘어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많은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신학생 수준의 성경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지식이 많으면 번뇌가 많다는 지혜자의 고백처럼 지식은 머리는 커지게 하지만 가슴이 차가워집니다. 머리로 계산은 하고, 판단은 하는데 가슴의 열정으로 움직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연대 대학원 재학 시 김중기 박사님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양재동에서 새사람 선교회를 만들어서 매주 모여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매주 만나서 교육을 시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절망에 빠졌다고 합니다. 거의 10년 동안 매번 모임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여했던 분이 있는데 그분의 삶을 보니 도대체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더랍니다. 옛 사람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따졌답니다. ‘하나님! 제가 혼신을 다해 10년 동안 교육을 시켰는데 왜 저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까? 제 체면이 뭡니까?’ 그때 하나님이 큰 책망을 하셨답니다.
‘네가 교육을 잘 시켜서 사람이 변화되는 줄 아느냐? 변화될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답니다. 그 후부터 내가 잘 가르쳐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감동시켜야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가 변했더니 그토록 돌처럼 변하지 않던 그 분이 변화되더랍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육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은 이론 위에 삶의 경험을 나눕니다. 삶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같은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달려가게 합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게 합니다. 마침내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성경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내면화시키고, 삶속에 적용하는 실제적인 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교육이 아니라 제자훈련이란 용어를 씁니다. 훈련만이 강한 영적 군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강한 군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훈련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비록 훈련의 과정이 힘들고 어려워도 참여해야 합니다. 제가 군대있을 때야 특공부대 안에 있지만 훈련받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PX와 두부공장에 근무하는 방위병들입니다. 그들은 특공부대 안에서 같이 생활은 하지만 매일 과자나 팔고, 두부만 만듭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PX 병들이 부대 내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매일 심부름이나 하고, 시원찮다고 기압 받고, 매를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늬는 특공병이지만 훈련받지 않은 자이기에 부대 안에서 창피를 당합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만 훈련받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 창피를 당합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살면서도 전하지 못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피하고 도망 다닙니다. 더 이상 우리는 영적인 패잔병의 모습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이 지역을 살리고, 민족을 구원하는 강한 영적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그 비결은 훈련입니다.
첫째는, 순종의 훈련입니다.
군인의 첫 번째 덕목은 순종, 아니 복종입니다. 군인은 지휘관이 명령하면 절대적인 순종이 요구됩니다. 만약 불응하면 사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강한 영적 군사가 되려면 먼저 말씀 앞에 순종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예비하신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사울 왕을 떠올립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다보니 인간적인 욕심이 생깁니다. 어차피 살진 소나 양이나 염소를 불살라 없애느니 잡아다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전쟁이 끝난 후 사울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승전비를 세웁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사울의 순종은 선택적 순종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기초로 한 이기적인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은 100%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순종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화려한 등극을 했지만 한순간의 불순종으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의 태도는 첫째도 순종이요 둘째도 순종이요 셋째도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는 미워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명하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와 국가의 지도자들에게도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리더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권사든, 구역장이든 교사든 이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영적 권위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영적 리더십들에 대하여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합니다. 완벽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탁월함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영적 권위요 질서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리더들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순종함으로 누리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 서로 거스르고, 대항하게 되면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불평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 자유함이 사라집니다.
좀 부족하고 실수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이기에 함께 협력하고,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 속에 더 발전적인 대안이 나오고, 더 창조적인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존 비비어의 “순종” 이란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인 리더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바로 리더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영적 리더들에 대한 순종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이요, 영적 리더들에 대한 불순종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요 반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리더들의 권위를 존종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보다도 먼저 순종의 태도를 하나님 앞에 보이라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형식이요 오히려 하나님의 근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영적인 리더십과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둘째는, 절제의 훈련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적 군사가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절제입니다. 절제는 내적으로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자되는 마음속을 알지 못합니다. 내 마음을 내가 모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야 못 박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다스리실 때 기쁨이 넘치고 평강이 넘칩니다.
외적으로 절제는 다가오는 고난을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고난의 파도가 밀려올 때 마음이 약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지금까지 쌓았던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 앞에서 끝까지 절제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무리들을 향해 끝까지 절제하십니다. 예수님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줍니다. 그런 점에서 절제는 고난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3절에서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합니다. 그는 고난 없는 영광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고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유언처럼 쓴 가장 사적이고, 가장 마지막에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네가 앞으로 사역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어떤 고난과 역경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좋은 군사가 되려면 어떤 고난도 뚫고 나갈 수 있는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성수 잘 하면 좋은 교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교묘한 방법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성도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처럼 다양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알파코스나 말씀훈련, 앞으로 진행될 제자대학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영적으로 승리하는 군사가 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자신을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는 비결을 날마다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영적군사의 모습니다.
셋째는, 충성의 훈련입니다.
4절에 보면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군인은 자기생활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군인은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충성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로마제국을 위해서, 그리고 황제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정신으로 여겼습니다. 제국을 위해서, 황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부름 받은 종들입니다.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 충성은 '신실함, 믿음‘ 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충성은 royalty(충성); faithfulness;(믿음/신실함) devotion(헌신); fidelity(성실)로 표현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왕인 다윗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용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을 점령한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고향 베들레헴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삼하23:15) 누구보고 떠오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고향이 그리워서 혼자 중얼거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세 용사가 이 말을 듣고는 블레셋 군사들과 충돌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의 물을 떠가지고 옵니다. 그것은 물이 아닌 생명입니다. 목숨을 걸고 떠 온 물입니다. 다윗은 도저히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용사들의 피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세 용사들이 왜 막강한 블레셋 군대 사이를 뚫고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 우물물을 길어왔을까요? 다윗 왕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왕인 다윗이 그 물을 마시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기쁨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의 목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내 뜻, 내 소원 성취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어 복을 받고, 덕 보며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14:8)”
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온갖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온갖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된 군사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에게 어떤 군사들입니까? "좋은 군사"라는 말에는 좋지 않은 군사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포함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군사입니까? 제 고향을 가노라면 논산에서 강경을 지나갈 때 황산벌이 있습니다.
660년 백제의 의자왕 시대 계백장군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백제를 지키기 위하여 오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5만 명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과 맞서서 4차례나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으로 마침내 패하고 말았습니다. 계백장군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칭송을 받는 것은 그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그의 조국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마음을 혹 약화시키지나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전쟁에 나가기 전에 그의 손으로 아내와 자식 목을 베었습니다. 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계백장군은 쓰러져가는 왕국, 일시적인 왕국 백제를 위해서도 목숨 걸고 충성했습니다. 그는 모시고 있던 의자왕의 의자나 타며, 삼 천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있는 됨됨이가 대단하지 못하였는데도 충성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부름 받은 자로서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충성하는 헌신된 한 명의 군사를 찾고 계십니다. 그 한명의 강한 영적 군사가 영적 자폐증에 걸린 교회를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영적 자폐증에 신음하는 공동체를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3.1절 9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한번 1.3%의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민족을 일깨우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리더였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우리교회가, 한국교회가 영적 자폐증에 걸려서 허우적거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속히 영적 자폐증에서 치유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나를 넘어서 교회를, 지역을 민족을 새롭게 정화하고, 회복하는 영적 군사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제는 영적 군사로서 세상을 정복하고, 열방을 구원하는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비결은 바로 강한 훈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순종의 훈련, 절제의 훈련, 충성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강한 영적 군사가 되는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 총사령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함께 날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멋진 주의 군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딤후 2:1-4 / 피종진 목사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의 생애 마지막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내면서 복음을 위해 헌신할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복음을 위해 사는 자와 군대에 속한 군사가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사단 및 그의 악한 영들과 영적 싸움을 하며 천국을 향해 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좋은 군사로서 충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딤후 2:1) 여기 「강하다」란 헬라어로 ‘능력으로 충만해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강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힘은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이 충분하고 강력합니다. 그 힘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게 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가나안 정복의 선봉자 여호수아,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드온, …. 더 나아가서는 우리 대한민국의 6.25전쟁 때 인천 상륙 작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맥아더장군. 이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강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충성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현대 지성인들이 범하는 죄 중에 하나는 ‘아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꼭 필요하고 이익이 되는 정보는 자기만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잘 모르는 사람을 올바로 인도하려는 책임의식이 없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산물(産物)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것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복음 진리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으며, 또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입으로 시인(是認)하고 고백하며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성된 사람’을 선택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복음이 전파되기 위하여는 선포해야 합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역은 아무에게나 가볍게 맡겨서는 안됩니다. ‘충성된 사람’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충성’이란 복음을 맡은 자의 핵심적 자질이며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일을 맡기십니다.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고 했습니다. 여기 ‘충성’이란 신실함의 뜻이며,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어 신뢰할만한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셋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마 16:24).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주님께 합당치 않다고 말씀했습니다(마 10:38).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해야 됩니다(마 5:11,12).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스미스 헨리는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종이라 불리고, 또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군사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군사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난이 따르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군사의 고난은 어떠하겠습니까?
바울은 당시 로마시의 대화재의 주범(主犯)으로 몰려 투옥되어 사형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한평생 복음을 위해 온갖 고난을 당한 바울에게 씌워진 억울한 죄명(罪名)이었습니다. 마치 전쟁에서 적군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고난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직분은 명예도, 권세도 아닌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이 주어질 고난의 직분임을 명심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넷째,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할 의무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활」이란 군사로서의 공적인 직무 수행에 방해되는 모든 개인적인 생활을 의미하고, 「얽매이다」란 ‘휘말려 들어가다’ 혹은 ‘연루되다’의 의미로서 즉 성도는 군사된 자로서의 신분을 망각케 하는 개인적인 삶을 단호하게 포기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군사로 모집한 자」란 군대의 조직 서열상 상관 즉 우리의 대장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기쁘게 하려 함이라」는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의 뜻입니다. 동서고금, 시대를 불문하고 한 시민으로서 생계를 위해 살던 자라고 해도 일단 군대에 복무하게 되면 자신의 상관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생명까지도 바쳐야 함이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는 자신의 의지와 열망이 그의 상관의 의지와 열망에 부합(符合)해야 하듯이 복음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는 바로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와 열망에 부응할 때만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본분을 잘 감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강하여지고 충성된 사람이 되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일꾼
딤후 2:1-7 / 김윤기 목사
본문에는 군사, 운동선수, 농부 3가지 직업이 나와 있습니다. 니이체는 "직업은 생활의 등뼈"라고 말했고, 사무엘 존슨은 "직업은 그 성품을 채색한다" 고 말했으며, 나폴레옹1세는 "사람은 그가 입은 제복대로의 인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옛날 유대나라에는 일하지 않는 무직자는 랍비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무직자를 가장 미워하는 사회가 유대사회였습니다.
어떤 일의 성패는 그 일에 쓰임 받는 일꾼들의 질적 자세 여하에 따라 결 정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일꾼이 있는 곳에는 성공이 있고, 나쁜 일꾼만 모인 곳에는 실패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좋은 일꾼 되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올해에 인동교회에 새로운 일꾼을 세웠습니다. 그러면 좋은 일꾼이란 어떤 일꾼인가에 관해서 성경말씀에 비추어 알아보겠습니다.
1. 좋은 군사 같은 일꾼입니다.(3절)
1) 좋은 군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본문 딤후 2장 4절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절은 군사로서 부름을 받은 목적을 나타냅니다. 군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전심전력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사적이고 세상적인 일을 과감히 포기해야만 합니다.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입니다.
특별히 디모데는 목회자로 부름 받아 자신의 사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야 합니다(마6:33).
2)좋은 군사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훈련 잘 받고 의무에 충실한 군인은 절대로 군의 규율을 어기면서 함부로 외출, 휴가 등을 하지 않습니다. 탈영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제자양육훈련을 잘 받은 성도는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가면서 자기 뜻대로 편한대로 자기 기분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군인이 상관을 기쁘게 하는 것을 제일 목적으로 삼는 것처럼 직분 맡은 성도는 군사로 모집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준행하며 복음을 선포함으로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3)좋은 군사는 앞으로 진격합니다.
어느 시대나 군인정신은 정의감, 용감, 강직성, 희생정신, 충성심, 명령순종, 부하사랑, 극기생활, 연단 등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사도(武士道), 기사도(騎士道)는 군인의 상징처럼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군인 정신은 전쟁에서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으로 싸워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한 큰 전쟁에서 지휘하던 때에 그 처음 전투에 있어 전세에 매우 불리했습니다. 그 때 나폴레옹은 휘하의 장병들을 모은 뒤 그들에게 준험한 산악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불란서 장병들이여! 4천년 동안이나 인류의 거동을 보아온 저 산악들이 지금 제군들을 내려다 보고있다. 제군들은 저 산악에게 어떤 모습을 보이려는가?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려는가? 아니면 진격하는 모습을 보이려는가?" 이러한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인들은 용기를 내어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청나라 태조로 등극하는 누루하치의 침공에 시달리던 명나라에서 우리 조정에 원병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명나라는 이조가 사대하는 나라이며,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해준 빚도 있고 해서 광해군은 강홍립을 5도 도원수로 삼아 2만 병력을 원병으로 파병했습니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포위를 당하자 강홍립은 투항을 해버렸고 휘하의 부장인 김응하 장군은 중국 요동 땅에서 버드나무를 방패삼아 일당백으로 끝까지 항전하다가 온몸이 화살꽂이가 된 채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루터기만 남은 비목을 장군버들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장군이라도 투항하여 항복하는 것은 임전무퇴가 아닙니다.
전투는 최후의 5분까지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벌어진 엘 알라메인 전투는 그 지역의 열기가 가장 높은 대낮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영국군에서는 공급되는 식수가 모자라 군인들은 인내의 한계점에 달하여 싸움을 포기하려는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상대방 독일군들이 항복해 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적군은 비틀거리고 있었고, 두껍게 부어 올라 있는 입술 사이로 내민 혀는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하여 그 사실을 알아보았더니 그들도 식수의 부족으로 인내의 한계점에 달해 항복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군인은 곤난 중에도 인내하며 진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주의 명령에 복종하여 앞으로 진격해 나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운동선수와 같은 일꾼입니다. (5절)
(고전9:25-27)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운동선수는 고도의 훈련과 절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고전 9: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에서는 이스무스라는 경기가 열리는데 이 경기의 선수들은 10개월 동안 엄격한 훈련을 받은 후에야 경기장에 나가게 됩니다. 이 경기에 승리하려는 젊은이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고 절제생활을 해야합니다. 또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은 훈련의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계속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물을 쓰시었습니까? 하나님은 일꾼을 쓰실 때에 먼저 인물을 부르시고 그리고 당신의 목적에 맞게 훈련과 연단을 시키시었습니다. 그래서 인물들이 하나님의 쓰시기에 맞는 도구로 변화되었을 때 사용하시었습니다. 모세 바울 세례요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공자는 삼유계(三有戒)라고 했습니다.
① 젊었을 때는 혈기가 미정한 때라 색에 특별히 경계하고
② 커서 장년이 된 후에는 혈기가 아주 강한 때라 싸움을 경계하고
③ 나이가 들면 혈기가 쇠할 때인데 그때는 욕심이 많아지니 얻는 것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에도 2가지 경계해야 해야 합니다. 먹는 것과 정욕입니다.
①먹는 것(식욕)은 술 담배입니다. 실패자는 아담과 하와 에서이고, 성공자는 예수님입니다. ②정욕입니다. 실패자는 삼손이고, 성공자는 요셉입니다.
성도는 절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갈5:22-23)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①(벧후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②(약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③(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한국의 무적 양궁선수는『10세 때부터 선발돼 오랫동안 특수한 훈련을 쌓습니다. 그리고『은메달을 딴 선수가 부끄러워하는 곳은 한국 뿐일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 오랫동안 수도원같은 곳(태릉성수촌)에서 합숙하면서 절제를 하고 외출도 한달에 한 번씩하는 맹훈련을 거듭해서 세계의 선수를 만듭니다.
2)운동선수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합니다.
스포츠의 목적은 건강이요, 경기의 목적은 화목이요, 올림픽 목적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목적은 추상적이나 목표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①달음질해도 향방 없는자 같이 해서는 안됩니다. 달리는 자는 분명한 꼴인지점을 알아야 합니다. ②싸울 때는 허공을 쳐서는 안됩니다. 정확한 목표를 가해야 상대방을 쓰러트릴 수가 있습니다.
애틀랜타올림픽에서 호주에 첫 금메달을 바친 선수는 가게 점원 출신의 공기 소총 사수인 마이클 다이아몬드(24)입니다. 그는 남자10m 공기소총에서 1백50발중 1백 49발을 명중시켰는데, 그는 기자회견에서 아버지의 충고가 큰 힘이 되었다고 밝히면서 "과녁이 뚜렷이 보일 때까지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아라. 과녁이 보인 뒤에는 최대한 집중하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운동선수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3) 운동선수는 인내로 끝까지 참고 달려야 합니다.
운동선수는 어렵다고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장애물은 뛰어 넘으라고 있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장거리이므로 힘을 잘 안배해서 골인지점에서는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 모아쓰고 그리고 푹 쓰러져야 합니다. 북한의 탁구 선수가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남자 단식에서 유남규(전 단식 우승자)를 이기고 쓰러져서 떼메여 나갔습니다. 신앙은 긴 마라톤입니다. 장애물이 있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인내로 참고 연습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맡은자들은 훈련과 절제 생활을 하며 분명한 목표가 있고 인내로 끝까지 참고 달려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수고하는 농부와 같은 일꾼입니다. (6절)
훌륭한 농부는 부지런합니다.
밀레(J.F.Millet)의 만종(晩鐘)은 밀레가 가난했을 때 65달러를 들여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후 12만 5천 달러에 미국인이 사갔습니다. 이 그림에는 세 가지 신성이 있는데, ①노동의 신성, ②가정의 신성, ③종교의 신성입니다. 프랭크린은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말하였고, 케네디 대통령은 "최대의 행운은 자신의 전 능력을 들여서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가 된 다음에 꿀벌의 모양을 본 따서 국장(國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일을 사랑한다. 나는 잘 때에도 일에 관한 꿈을 꾼다."라고 말했습니다. 개미는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곤충입니다. 개미는 자기 몸무게의 배나 되는 짐을 운반합니다. 이것은 20kg의 소년이 35kg의 짐을 드는 경우와 맞먹습니다.
성도는 개미처럼 부지런한 일꾼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욕보십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욕(辱)자는 별진(辰)자와 마디 촌(寸)자의 합성어입니다. 진(辰)자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고 촌자는 누가 잘못 했을 때 원님이 벌을 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욕자은 어떤 의미입니까? 농사를 지을 때 농사짓지 않고 때를 놓치는 게으른 농부나 분별력이 없는 무지한 사람이나 남의 농사짓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자극을 받지 못하는 감정이 무딘 사람과 협동심이 없는 사람은 시간 곧 진(辰)에 어긋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그 고을 사람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고 지도자도 바른 정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법으로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이리하여 때를 놓치는 사람에게 내린 벌이 욕할 욕(辱)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욕(辱)을 본 사람은 그 사회에서 인간 대접을 받을 수가 없고 심지어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창피하고 욕(辱)된 일입니까? 우리 성도는 게을러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은 (1) 자기 일에 얽매이지 않는 좋은 군사와 같은 일꾼 (2) 법대로 경기하는 운동선수와 같은 일꾼 (3) 수고를 아끼지 않고 눈물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부지런 한 농부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종
딤후 2:1-7 / 박조준 목사
지난 시간까지 몇 시간에 걸쳐서 생각한바 있는 디모데후서 1장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 귀한 구원의 복음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부끄러움 없이 자랑스럽게 전파 할 뿐 아니라 이 복음에 손상을 주는 모든 세력에서 복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세속주의에서 공산주의의 무신론시창에서 이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를 도둑질 하려는 데서 지켜야 합니다.
어느 조사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 서울시내의 가정 가운데 지난 일년 동안에 4분의 1의 가정이 절도 당한 경험이 있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서울의 보안 관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집을 잘 지 켜야 손해보지 아니합니다.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이 복음을 훔치고 손해를 끼 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른 것은 복음 을 지키라고 불렀습니다. 이 복음은 정말 비길 데 없이 귀한 것입니다. 사실 질그릇과 같은 우 리가 이 보배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배를 잘 지켜야 합니다. 복음은 구원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주 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달해야만 하고 의심 없이 부끄러움 없이 고난 받을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 위에 우리가 받은 복음을 모든 부패시키려는 가능 성에서부터 지켜야 합니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복음의 순수성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힘써 야 합니다. 충성되게 이 복음을 지킵시다. 활발하고 담대하게 이 복음을 전합시다. 용감하게 이 복음 위 해 고난을 받읍시다. 이것이 우리의 복음을 위한 3중 의무입니다.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니까 오네시보로와 그의 식구들을 제외하고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를 버리고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신 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 이 아닙니까.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 자들을 향하여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너희도 가려느냐?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을 무슨 영 화 구경이나 음악 감상이나 교양 강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멀리로 도망가고 맙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너는 좀 다르게 살 라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던지 너만은 좀 다르게 살라 고 하십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우리더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고 말씀했습니다. 산 물고기는 세 찬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죽은 고기는 물결 따라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산고기는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산 물고기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 니다. 왜요? 우리는 강하게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디모데는 인 간적으로 도약했습니다. 육신만 약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부르 심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이때로 말하면 바울의 권위가 무시당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 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디모데야, 들으라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다른 사람 이 어떻게 생각하던 개의치 말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던 관계할 것 없어. 너 만을 강해라 네 가 수줍다고 염려하지 말라 네가 몸이 약하다고 걱정하지 말라. 너는 강해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강 하라 고 한 권면은 단순히 강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그저 약한 사람이 빠른 말처럼 강하고, 수줍은 사람이 용감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부른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강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의 은혜 가운데서 강해지라는 말인데 무슨 말인고하니 그리스도인의 힘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 4 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말한 것입니다. 능력 주 시는 자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디모데더러 왜 강하라고 합니까?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그 직무를 위해서 강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바울은 두 번째로 감 옥에 들어가 있는 중이고 언젠가는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 것까지 각오하고 있는 처지였 습니다. 이와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바울로서는 다음 세대에 복음 진리를 전승하는 것이 그의 소 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보면 복음 전달의 네 가지 단계를 암시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바울 자신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이 복음을 이제 디모데에게 맡깁니다. 셋째는 디모데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또한 복음을 위탁합니다. 넷째는 이렇게 복음을 위탁 박은 충성된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에 의해서 충성스럽게 그리고 정직하게 사람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바울, 바울로부터 디모데, 디모데로부터 충성된 사람들, 충성된 사람 들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면 복음은 이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또 다른 세대에서 그 이후로 마치 올림픽의 성화를 손에 손을 거쳐서 전 달 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몇가지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청지기에 비유했습니다. 주의 복음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란 말은 본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흔히 쓰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청지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깊은 의미에서 인간은 다 하나님의 청지기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인간이 이 세상에 얼마 동안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다 하나님의 것이요 나는 임시로 맡 아 사용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요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때 실상 그것은 내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때 그 대가를 기대하 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청지기는 모든 일에 주인의 뜻을 살펴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기억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맡은 자란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청지기에게 구할 것은 충성 입니다. 충성된 청지기가 되려면 우선 부지런해야 합니다. 충성된 청지기가 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졸면 안됩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유명한 달란트 비유를 기억하시지요. 어떤 주인이 먼 여행을 가면서 종들을 불러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한 사 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각각 맡기고 떠났습니다. 맡았으니 장사하라는 것 아니겠어요.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도 열심히 장사해서 갑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와서 계산 할 때 남긴 사람에게는 칭찬을 하고 땅에 맡은 것을 묻어 두었던 사 람은 책망했습니다.
맡은 사람은 부지런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비유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선한 청지기가 될 수도 있고 악한 청지기는 될 수 도 있습니다. 의로운 청지기가 될 수도 있고 불의한 청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충성된 청지기가 될 수도 있고 게으른 청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청지기가 될 수도 있고 미련한 청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청지기를 축복하십니다. 많은 것으로 맡기시겠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2. 군사에 비유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네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했습니다. 군인 생활의 특색은 전적인 헌신 생활입니다. 군인은 자기의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 수가 없습 니다. 온전히 그 몸을 나라에 바친 생활이 군인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4절에 군 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우리 몸을 온전히 하나님 께 드린 생활입니다. 이 말은 믿는 사람은 다른 사업을 하지 말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무슨 사업을 하든지 그 최고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요 주를 봉사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적인 헌신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군인의 생활은 전적인 순종의 생활입니다. 상관의 명령에는 무 조건 순종하는 것이 군인의 생활입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군인은 사령관이 어디로 가 라고 하면 무슨 이유로 가라고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군인은 오직 무조건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실 때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면 언제나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군인은 이유를 묻지 아니합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알 때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군인의 생활은 용감해야 합니다. 용기는 군인의 최고의 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실 때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거듭거듭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이렇게 담대해야 모든 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도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라 고 했습니다. 군인은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해서 그 일신을 온전히 희생할 각오를 가집니다. 그렇지 않으 면 참된 군인의 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몸을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 군인 정신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 주님을 위해서 나의 욕심과 안일과 재물과 나아가서는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것이 그리스도 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인은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 따라서 그 서약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받을 때 주님께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적은 일에도 충성해 야 합니다.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역경 중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군인 생활에는 전우의 사랑이 있습니다. 소위 전우애가 있습니다. 전우애는 생명을 걸고 싸울 때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도 힘든 봉사를 할 때 서로 서로 도와주는 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 노릇을 잘 하고 있습니까? 군인 가운데 제일 부끄러운 군인은 도망병입 니다. 도망병은 책임을 피하는 군인입니다. 군인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라마다 군인이 있는데 왜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국토를 지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 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삼으셨습니까? 첫째는 하나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을 지켜 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일생을 돌아보면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달리고 믿음을 지켰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이면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 교회 안에는 언제나 건전한 보수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변하는 것이 많 으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는 원수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악한 사상 악한 세력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상을 격멸해야 합니다. 독재주의 사상,무신론 사상, 인본주의 사상, 물질만능주의 사상, 세속주의 사상, 향락주의 사상 같은 사회악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군사된 우리 의 사명입니다. 3. 경기자에 비유했습니다. 경기하는 사람에게 몇 가지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경기자는 법대로 경기해야 합니다. 법을 따르지 아니할 때 상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축 구를 하면 축구공을 상대방의 골문 안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거기에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대로 하지 아니하면 축구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을 차지만 법대로 차야 합니다. 모든 경기에는 경기의 법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법을 잘 지키는 훈련부터 받아야 합 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법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가 섭니다. 성경은 하나 님이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는 자유 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법의 테두리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법을 떠난 자유는 방종이고 혼란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경기하는 사람은 절제해야 합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자고 싶다고 마음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놀고 싶다고 마음대로 놀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육신의 소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 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 고 했습니다. 야고보서에도 1장 19절 이하에 사람마다 듣 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했고 3장 2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다 실 수가 많으니 만일에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니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 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 에서 나느니라 했습니다. 경기자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이든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초기하고 싶은 충동까지 일 때가 있다고 합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그럽니다. 여러분, 세상에 쉬운 것은 없습 니다 강철이 강철이 되고 금이 금이 되는데는 그렇게 뜨거운 용광로를 거쳐야 합니다. 훈련을 받는 만큼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강하게 훈련시키기를 원합니다. 그의 자녀가 약하게 자라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강하게 자라려면 강하게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금생과 내생에 복이 된다 고 했습니다. 경기자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력투구의 정신으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데 무사안일 속에 권태와 하품의 지겨운 인생을 사는 이도 있고 분투 노력으로 긴 장과 향상과 보람된 인생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인생은 업적이나 실적도 중요하지만 태도와 과 정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얼마만큼 이루어 놓았느냐 하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어떤 태도와 정신 으로 인생을 살았느냐 하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자기가 맡은 일에 열과 정성을 경주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집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자세를 자기의 맡은 일을 감당한다고 하면 10년도 안 가서 우리 나라는 아시아의 모범 사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누구나 자기 일에 정성을 다 한다 면 우리는 얼마 안가서 세계에서 존경받는 최고의 민족이 될 것입니다. 경기자는 사력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쉽게 살려는 안이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피땀을 흘려야만 성공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정열과 수고 없이 쌓아올린 행복의 탑은 맥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하 는 것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맡은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을 물으십니다. 각 사 람에게 주어진 능력은 다릅니다. 문제는 내게 주어진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데 있습니다. 4. 농부에 비유했습니다. 농부는 근면합니다. 부지런합니다. 쌀 한 알이 우리 밥상에 오르려면 농부의 손길이 적어도 1 00번은 가야 한다고 합니다. 밭을 갈고 씨를 부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농약을 뿌리고 잡초 를 뽑고 추수하고 방아를 찧고 푸대에 넣어 도시로 운반합니다. 쌀 한 알 한 알이 모두 피땀의 산물이요 정성의 결과요 노력의 결정체입니다. 쌀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요 땅에서 혼자 솟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의 땅과 피의 소산입니 다. 사상사 루소는 철학자 처럼 사색하고 농부처럼 일하라 고 했습니다.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 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백번 참으면 집안에 큰 변화가 생깁니다. 항상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승리합니다.근면은 성공의 어머니요 나태는 실패의 근본입니다. 농부는 정직합니다. 농사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가 납니다. 콩을 심었는데 오이가 나고 오이를 심었는데 콩이 나는 일이 없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 이 나고 적게 심으면 적게 납니다.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지 아니합니다. 사람은 자 기가 심은 것을 거둡니다. 심지 않고 거둘 수가 없습니다. 농사는 자연을 상대로 합니다. 자연 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속이지 않습니다. 자연은 정직합니다. 거짓이 없 는 자연을 상대로 일하다보니 농부는 정직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행위에는 거짓이 있습 니다. 우리는 농부의 정직함을 배워야 합니다. 농부는 순리대로 삽니다. 밭에 씨앗을 심는다고 금방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라기를 기다리고 익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어린 묘목이 하루아침에 정정한 거목이 될 수는 없 습니다. 성장과 성숙에는 반드시 때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농부처럼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 니다. 생명은 순리대로 자랍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순리대로 해야 합니다. 역리로 하면 안됩니 다. 농부는 결코 조급하지 아니합니다. 농부는 기다릴 줄을 압니다. 우리 국민은 매사에 너무 조 급합니다. 순리와 인내로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만리장성을 하룻밤에 쌓을 수는 없습니다. 로 마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가 갑자기 중진국이 되고 선진국이 되고 복지사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점진적 발전의 길을 걷습니다. 농부는 하나님과 함께 일합니다. 밭가는 일 씨뿌리는 일, 김매는 일은 농부가 합니다. 그러나 씨에서 움이 트고,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이 되고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최선을 다 한 다음에는 조용히 하나님의 하시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농부처럼 행하면 세상에 안되는 일 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농부처럼 근면하고, 농부처럼 정직하고 농부처럼 순리대로 살 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청지기처럼, 군인처럼, 경기자처럼, 농부처럼 살아 그리스도 인의 산 모습을 이 사회에 들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꾼
딤후 2:1-7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1997년 2월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서울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신 박교수님은 충무로역에서 전철을 탔습니다. 전철은 만원이었으며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반대편 문 쪽을 보니 몇 명은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박교수님은 얼른 그쪽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금새 발걸음을 멈추고 코를 틀어막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토해놓은 오물이 바닥에 가득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박교수는 얼른 코를 틀어막고 처음 섰던 곳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신사분이 그리로 와서는 오물을 치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동차의 청소부도, 직원도 아닌 것 같은데 더러운 것을 치우고 신문에 싸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쓰레기통에 넣고 다시 차를 탔습니다. 박교수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다가가서 누구인지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는 안양시 평촌에 사는 이창우씨였습니다. 안양일심교회의 성도로서 초신자였습니다. 교회에 출석한지는 겨우 1년 남짓 되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교회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빚을 지게 되었고 아내와는 이혼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온 첫날부터 엄청난 변화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첫날 설교말씀을 듣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새처럼 가벼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예수님이 믿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교회가 너무 좋아졌습니다. 교회가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물론이고 수요일에도, 금요철야기도회에도 빠짐없이 나갔습니다. 빚이 많아도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밉던 아내가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 담배가 보기조차 싫어졌습니다. 자연히 가정문제가 해결되었고 한숨만 나오던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경제적인 문제도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상에 더러운 것이 없어졌습니다. 좋은 일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교회에서 청소도 자원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오물을 거뜬히 치웠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박교수님은 글을 써서 신문사에다 보냈습니다. 그리고 1997년 5월에는 이창우 성도가 서울 특별시장으로부터 자랑스런 시민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낸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믿음에 굳게 서서 주님의 일을 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사역자를 군사로, 경기하는 자로, 그리고 농부의 모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선한 일군>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혜받으시고 하나님의 선한 일군으로 쓰임받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모델
바울은 복음의 사역자의 첫째 모델을 군사로 소개하였습니다 3절과 4절을 함께 봉독하십시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군사모델로서 복음의 사역자가 가져야 할 삶의 양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의 사역자는 군사처럼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에수의 좋은 군사로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일군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받기를 기쁘게 여길 때 좋은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선한 일군은 군사처럼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우리를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하는 일에 우선해야 합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우선입니까? 내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내 영광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무엘 하 23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과 블레셋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베들레헴은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혼잣말처럼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오 마시게 할꼬?"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보고 떠오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의 세 병사가 이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사들과 충돌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의 물을 떠가지고 왔습니다. 생명을 걸고 떠 온 물이었습니다. 상처를 입는 것을 개의치 않고 떠 온 것입니다. 다윗은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그것은 병사들의 피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이런 병사가 참 병사입니다.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평안을 고려하지 않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적진 깊숙히 들어가 물을 떠온 다윗의 세 용사가 참 군사의 모델입니다. 어느 시대나 군사는 이런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군들도 이렇게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고난도 감수하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법대로 경기하는 경기자 모델
바울은 하나님의 선한 일군의 두 번째 모델로 법대로, 규칙대로 경기하는 경기자를 소개하였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경기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뛴다고 다 경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한 일군이 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원칙을 따라 섬겨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도 경기자를 비유로 신앙인의 길을 묘사하였습니다. 경기자가 원칙을 따라 경기할 때 면류관을 얻을 수 있듯이 성도도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 섬길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26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경기를 아무렇게나 자기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한 일군은 아무렇게나 자기 기분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칙대로 섬겨야 합니다.
미국인 작가 죤 케네스 갈브레이스씨는 그의 자서전(우리 시대의 삶)에서 자기집 가정부 에밀리 글로리아 윌슨의 헌신적인 삶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일화가 적혀 있습니다. 어느 날 오후 갈브레이스는 아주 피곤하여 잠시 자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전화를 해도 깨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백악관에서 죤슨 대통령이 한 전화였습니다. 가정부 에밀리는 "대통령 각하, 갈브레이스씨는 지금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깨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전화를 바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깨우시오. 지금 꼭 통화를 해야 합니다."라고 채근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정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대통령 각하, 안됩니다. 저는 각하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갈브레이스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갈브레이스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죤슨 대통령은 유쾌한 기분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가정부가 여기 백악관에서 일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전해 주시오." 이처럼 자신의 위치를 바로 알고, 섬겨야 할 대상을 바로 알고,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바로 아는 일군이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원칙이 있습니다. 우선 순위의 원칙도 알아야 합니다. 누구의 영광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인내로 수고하는 농부의 모델
바울이 세 번째로 소개하는 하나님의 선한 일군의 모델은 인내로 수고하는 농부입니다. 6절 말씀에 "수고하는 농부"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농부의 수고는 그 어느 수고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또 인내를 필요합니다. 농사짓는 것을 옆에서 보시기만 했더라도 저들의 수고가 얼마나 큰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8-9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농부가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인내하며 수고하듯이 성도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끝까지 주를 섬겨야 합니다. 농부의 길이 쉽지 않듯이 성도의 길도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군으로 제대로 섬기려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먹는 밥 한 그릇에는 수천개의 쌀 알이 필요합니다. 그 쌀알이 밥이 되어사람들의 입에 들어가기까지는 농민의 손이 무려 88번 거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쌀 미자를 끌어 88이라고 해석할 때 감동이 됩니다. 육군은 땅의 적을, 공군은 하늘의 적을, 해군은 바다의 적을 물리칩니다. 그러나 가난과 빈곤의 적은 농군이 물리칩니다. 그래서 김용기 장로님은 농군의 군자를 군사 군자로 썼다고 합니다. 명심보감에도 "몸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걸쳤으면 베짜는 여인을 생각하고, 반찬없는 밥이라도 먹는다면 땀 흘리는 농부의 수고를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농부의 길은 수고가 요청됩니다. 그러나 귀한 열매 하나 바라보고 인내하며 수고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군도 이래야 하겠습니다.
맺는 말 -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라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것은 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십시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라." 아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절대 필요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봉사하려면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강건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좋은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무장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군의 사명을 능력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촌감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힘,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 선을 행할 수 있는 힘, 고난을 참아낼 수 있는 힘,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는 힘, 원수조차 사랑할 수 있는 힘, 이 모든 힘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혜이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또한 우리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가기 위하여는 은혜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능력있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군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처럼, 원칙을 지키는 경주자처럼, 인내로 수고하는 농부처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안에서 강하여 짐을 사모하시고 은혜로 강하여져서 맡겨주신 사명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
딤후 2:1-7 / 김태복 목사
저는 지난 한달 동안 영락교회 문제를 해결하노라고 힘쓰다 보니 내가 홍익교회 목사인지, 영락교회 목사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영락교회 이 장로님들, 저 장로님들을 만나는 등 무려 13번이나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목요일 밤인 27일에는 ‘화해를 위한 수습안’을 가지고 영락교회 당회원 47명과 의논을 했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밤 7시부터 10시까지 장장 3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의논하면서 얼마나 진을 빼놓는지, 한편이 찬성하면 다른 편이 반대합니다. 제가 목사 된 지 34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힘든 회의는 처음입니다. 회의법대로 간단히 다수결로 결정하면 쉽지만, 이 화해안은 모두가 합의해야 의미가 깊은 것이기에 우리 위원들은 달래고 설득하고 때로 “광성교회와 같이 파국으로 가겠느냐?”라고 야단치기도 하면서 그 긴 시간을 의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화해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3년 동안 서로간의 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해안을 결정하고 모두 일어나 손을 잡고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한 자리에” 찬송가를 부를 때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영락교회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한 달 동안 내내 많은 분들을 만나고 두 번에 걸친 회의를 하면서 깊이 느낀 것은 ‘교회가 시험 들면 이렇게 병이 드는 구나’라는 생각입니다. 자기들은 다 옳다고 주장하지만, 우리 위원들이 보는 입장에서는 보면 너무나 서로 간에 분노심과 증오심 때문에 깊이 병이 들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이 들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 시험에 듭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일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좁은 길로 가야만 시험 들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은 바울은 세 가지 비유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우리 성도들은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어떠한 자입니까?
(1)좋은 군사는 강인한 자입니다.
1절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했습니다. 군사는 무엇보다도 용감하고 강인해야 합니다. 어떤 임무가 주어져도 흔들리지 않고 완수하는 자입니다. 만약에 군인라고 하면서 전쟁이 벌어져서 총알이 날라 오고 포탄이 여기저기 터질 때에 겁이 나서 참호 속에 고개도 못 들고 벌벌 떨고 있다면 좋은 군사가 아닙니다.
어떠한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용감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하는 자가 좋은 군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의 군사인 우리 성도들도 자기에게 무슨 직책을 맡기든지 담대하고 강인하게 감당할 때 좋은 군사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강인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됩니까? 1절에 나오는 ‘강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능력으로 충만해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강하여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의 능력으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책만 맡기지 않으시고 능력까지 주십니다. 저는 영락교회라는 대형교회의 문제를 맡았을 때 너무나 벅차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어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기를 영적권위와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순간순간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여러분은 금년도에 무슨 직책을 맡으셨습니까?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 이러한 직책만 맡기지 마옵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옵소서.” 그 때 하나님이 능력을 베풀어 주심으로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실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좋은 군사는 충성하는 자입니다.
2절 말씀에는 주의 복음의 증인 되는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인의 생명은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자기 생각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전투가 벌어져서 지휘관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해서 임무를 수행해야만 전투에서 이길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군인의 제일 나쁜 죄가 있다면 그것은 명령 불복종입니다. 그만큼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충성에는 기본 원칙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성도들도 마찬가집니다. 신앙생활 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성하는 일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해 나가다 보면 똑똑하고 유능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똑똑하고 유능한 것은 굉장히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똑똑하고 유능한 것만 가지고는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때는 그 똑똑하고 유능한 것을 이용하여 어려운 일은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이득이 되는 것은 앞장서서 차지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국무총리나 부총리를 선출할 때보면 학벌이나 경력이 너무나 우수하지만, 깊이 조사해보면 자기 자녀들은 용케 군대를 안 보내거나 혹은 부동산투기에 앞장서서 한 모습이 나타나 국민들에게 얼마나 비난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군사가 가장 필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3)좋은 군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3절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군대 간 청년이 항상 편안한 직책만 찾거나 고난을 이리 저리 피하려고만 하면 그의 군대생활은 마침내 지옥처럼 느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청년은 아예 군대갈 때 고난을 단단히 각오합니다. 아예 군모 옆에 ‘죽었다고 복창하자’라고 써 붙이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처럼 고난을 각오하고 시작하면 나름대로 군대생활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 군사들도 항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주님께 합당치 않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해야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스미스 헨리는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보여야 하기 때문에 종이라 불리고, 또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군사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로마시의 대화재의 주범으로 몰려 투옥되어 사형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한평생 복음을 위해 온갖 고난을 당한 바울에게 씌워진 억울한 죄명이었습니다. 마치 전쟁에서 적군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고 했습니다.
(4) 좋은 군사란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자입니다.
4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자기 생활이란 군사로서의 공적인 직무 수행에 방해되는 모든 개인적인 생활을 의미하고, 얽매이다란 말은 '휘말려 들어가다' 혹은 '연루되다'는 의미로서, 즉 성도는 군사 된 자로서의 신분을 망각케 하는 개인적인 삶을 단호하게 포기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군대에 가보면 아무리 사적으로 중요한 일이라도 마음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다든지, 그런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군대 규정에 의해서 며칠 휴가도 하고 외박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감기몸살 걸렸다고 ‘나 집에 가겠습니다’라고 한다든지, ‘우리 아버지 생신이니까 집에 가서 아버지를 좀 즐겁게 해 드리고 와야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군대에서는 안 통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보면 너무나 중요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가령, 자기가 군대온 동안에 애인이 속된 말로 신발을 바꾸어 신으려고 합니다. 자기는 군대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있는 데 애인에게서 편지가 오기를 ‘우리 그만 헤어집시다.’라는 내용이 오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될 것입니다. 여자 문제는 일생 중의 큰 중대사입니다. 그래서 상관한테 가서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니 휴가를 주어서 해결하게 해 달라‘고 하면 보내줍니까?
아닙니다. 사생활이라 안 보내줍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거기에는 관심을 쏟을 수 없고 국가 일에 완전히 쏟아야 하는 것이 군인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군사는 공과 사가 분명한 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순위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군사로 모집한 자’란 우리의 대장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기쁘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는 뜻입니다. 동서고금, 시대를 불문하고 한 시민이 자기 가정 생계를 책임지고 살던 자라 해도 일단 군대에 복무하게 되면 가정사를 잊고 자신의 상관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생명까지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우선으로 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 때에 하나님이 그의 삶도 강하게 붙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청년이 있다면, 청소년 축구의 박주영 선수입니다. 그 선수는 골을 넣을 때마다 그라운드에 엎드려 한참 동안 기도함으로 기독교인들에게 큰 기쁨이 되지만, 불신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카타르 청소년 축구대회 결승에서도 일본을 3대 0으로 이겼습니다. 그 중 박 선수가 2골을 넣음으로 득점왕과 MVP를 차지했습니다.
그 때 소감을 말하기를 “이번 대회가 끝난 뒤 하나님의 은혜가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웠습니다. 내게 조그마한 영광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또 “준결승과 결승전 전날 어머니가 전화하기를 ‘주영아, 하나님께서 이끄실 거니까 마음 편하게 경기에 임해라’고 하셔서 큰 위안을 얻었다”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 나서기 전 그는 “골 욕심이야 항상 있지만 이번에는 회교국의 심장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는 골 세리머니를 더 많이 하고 싶다”고 기도했는데 이번 결과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대단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도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기도수첩을 항상 지니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기도했다고 하면서 축구 선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경기가 시작되면 그라운드에서 그는 상대 선수를 제치면서 “주여, 주여”를 외치고 슛할 때도 주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를 하나님을 기뻐 하사 그런 강한 능력을 주시고 그 몸값도 벌써 70억 자리가 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대장되시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의 좋은 경기자가 되는 것입니다.
5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요"라 했습니다. 그러면 좋은 경기자란 어떠한 자입니까?
(1)좋은 경기자는 깨끗한 매너를 가진 자입니다.
올림픽 정신은 승패에 있지 않고 참여하는 정신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경지자들의 기초적인 태도는 열심히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히10: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한 것은 모이기를 힘쓰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도 모이는 곳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오순절 날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120문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서 성령은 역사하였습니다. 깨끗한 매너의 성도는 성도의 모임에 빠지지 않고 모여야 참다운 그리스도의 좋은 경기자가 되는 것입니다.
(2)좋은 경기자는 법대로 경기하는 자입니다.
5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지난 88올림픽대회에 캐나다 벤 존슨은 달리기에 분명코 1위를 하였으나 법대로 경기하지 않았기에 그만 실격당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쉽게 ‘거짓’을 부린다거나 자기 꾀를 쓰면 안 됩니다. 교회에는 교회법이, 교단에는 교단법이, 사회에는 사회통념과 규범이 국가에는 국법이 있으니 우리 교인들부터 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3)좋은 경기자는 공적신분 사명을 다하는 자입니다.
국가 대표 선수는 개인 신분이기 전에 온 국민을 대표하는 신분임을 명심하고 공적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여 경기를 하여야 합니다. 이렇듯 성도는 개인적인 신분이기 전에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신분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깨닫고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전임을 믿고 거룩해야 하며 깨끗해야 하고 온전해야 합니다. 훌륭한 운동선수는 항시 여유 있는 자세로 늠름합니다. 운동하면서 누가 차징하고 때려도 맞아줄 뿐 함부로 응수하지 않습니다. 차범근이나 황선홍 같은 스타들을 보십시오. 그렇게 차징을 당해도 함부로 성을 내지 않습니다.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싸우는 추한 꼴을 보이면 결국 대한민국이 욕을 먹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도는 악이 도전할 때 함부로 악으로 갚지 않고 왼뺨을 돌려댈 망정 선으로 여유 있게 담대하게 응해줍니다. 바울은 오히려 롬12장에서 강조하기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더 나가서는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당하거나 핍박을 받을 때에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을 받고 있다고 믿으십시오.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상급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강하신 도움의 역사가 나타나실 줄 믿으십시오. 일본에 있는 동지사대학을 창설한 신도양 선생님의 미담이 있습니다. 그 대학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입니다.
그런데 학장인 신도양 선생님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교수들과 학생들 간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수들은 학생들더러 틀려먹었다고 비난하고 학생들은 교수들을 불신임함으로 불교가 판을 치는 일본 사회에서 기독교학교가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많은 불교 신자들은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비웃었습니다. 잘못하면 전도의 문이 닫힐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신도양 학장은 불야 불야 귀국해서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교수들의 말을 들으니 학생의 잘못이라 하고 학생 대표의 말을 들으니 교수들의 잘못이라고 함으로 어떻게 수습할 기이 없었습니다. 그는 10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말하고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10일 지난 후 산에서 내려 와서 학생들과 교수들을 대강당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불교계의 지도자들도 기독교 학교가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모였습니다. 신 학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 왔습니다. 손에는 긴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몇 날 동안 기도하고 깨달은 것인데 우리 학교가 당한 문제는 학생들의 잘못도 아니요, 교수들의 잘못도 아니라, 나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팔을 걷고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팔을 힘껏 내려 쳤습니다. 살이 터지고 피가 흘러나옵니다. 지팡이가 부러져 나갑니다. 교수들도 뛰어 오르고 학생들도 뛰어 올라와서 “학장님, 우리의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학교문제를 수습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일본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언제나 그리스도의 좋은 경기자로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좋은 농부가 되는 것입니다(6절).
그러면 어떤 농부가 좋은 농부입니까?
(1)좋은 농부는 부지런한 자입니다.
새벽별을 보고 들녘에 나가서 저녁 늦게 별을 보면서 돌아오는 농부는 부지런한 농부입니다. 이른 봄에는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부풀게 되면 보리가 뿌리 내리지 못해 말라 죽으므로 끊임없이 보리밟기를 하여 얼어 부푼 땅을 차곡차곡 다져줍니다. 좋은 농부의 덕목은 부지런함입니다. 농부는 조금만 게을러도 농사를 망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농부들은 부지런히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좋은 농부는 인내를 가진 자입니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 밑과 뜨거운 지열 속에서 몸이 익을 정도로 화끈거리면서도, 혹은 논에서는 벼 잎사귀에 얼굴과 팔뚝이 다 찔려 상처투성이가 되면서도 인내하면서 농사를 짓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농부인 성도들은 는 어려운 난관 중에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십자가 주님 생각하면서 참고, 인내로서 일을 해야 합니다. 눅21:19절에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했고, 마24:13절에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인내를 강조하였습니다.
(3)좋은 농부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는 자입니다.
농부의 최종 목표는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좋은 씨앗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충성하고 전도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많이 거두려면 많이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추수하는 가을에는 익은 곡식을 거두기 위해 일년 내내 땀 흘리며 몸을 아끼지 않고 땀 흘릴 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무리 심고 가꾸고 애써도 열매가 잘 안 보인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피곤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 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다른 한 분에게 이렇게 탄식합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난 성도는 한 사람밖에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로버트 마펫이라는 청년이 어떻게 이 3년간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목사님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회를 가졌는데, 커다란 기대를 걸고 이 집회를 인도했지만 한 사람밖에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수 년 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한 목사님을 통해서 3년 만에 얻었던 한 명의 결신자 로버트 마펫은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적인 틀을 마련하는 선교사가 되었고, 일 주일간의 부흥 집회를 통해서 얻었던 유일한 결신자인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불을 지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은 2005년에도 우리에게 좋은 기회들을 주신 줄 알고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좋은 군사, 좋은 경기자, 좋은 농부로서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