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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에게 책은 이야기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시즌 2 '전문가&책'에서는 전문 영역에서 활동하는 직업인을 만나 그들의 삶과 직업 그리고 직업과 관련된 추천 책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매일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겨운 오프닝 곡과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친근하다. 양희은. 언제부턴가 사람들에게 있어 그녀는 단순히 노래 잘하는 가수나 목소리 좋은 DJ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그녀가 그저 무대 위에서만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었기에, 시대를 불문하고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인 이야기를 풀어내준 좋은 이야기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올해로 48년 차 가수이자 라디오 DJ가 된다는 양희은에게 있어 책은 이야기다. 삶도, 노래도, 책도 모두 발라드 즉 시대를 담은 이야기라고 말하는 그녀를 만나 가수의 길을 걷게 된 사연과 그 과정에서 도움이 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LP 1971 아침이슬(1971), 서울로 가는 길(1972), 1973 가난한 마음(1973), 행복의 나라로(1974), 한 사람, 들길 따라서(1975), 네 꿈을 펼쳐라(1976), 크리스마스 캐롤 모음(1977), 부모(흘러간 노래)(1977), 상록수(1978), 노병(1978), 하얀 목련(1983), 한계령(1985), 숲, 이별그후(1987), 1991(사랑-그 쓸쓸함에 대하여)
앨범 <양희은 1995>, <양희은 1997>, <양희은 1998>, <양희은 1999>, <양희은·30>, <양희은·35>, <2014 양희은>
디지털 싱글 컬래버래이션 프로젝트 <뜻밖의 만남 1-8>
아버지께서 월남을 하셨고 저는 딸 셋 중에 맏이로 태어났어요. 아버지 속에도 아들에 대한 선망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딸아이였으니까. 재미있는 건 제가 굉장히 말괄량이였다는 거예요. 그냥 소꿉놀이하고 놀았던 적이 없어요. 동네 남자아이들을 다 몰고 산으로 들로 막 뛰어다니면서 나무를 타고 신나게 놀았어요. 그러다가 수가 틀리면 남자아이들을 막 패고 다니기도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런 저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셨어요. (웃음)
노래는 특별히 좋아하고 말 것이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늘 우리 자매들에게 노래를 시키셨거든요. 특히 집에 손님이라도 오시는 날이면 수정과나 식혜, 약과 같은 걸 내놓으시고는 그렇게 노래를 시키셨죠. 케 세라 세라나 동요 이런 걸 희경이랑 둘이서 레퍼토리까지 열심히 연습했어요. 일단 제가 노래를 하면 희경이가 이중창을 했는데 좋고 싫고도 없고, 아버지가 하라면 하고 그만 두라 하실 때까지 했어요.
그러다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몰락하던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선견지명으로 아셨던 건가. 살아생전에 그렇게 노래를 시키셨거든요. 사람들만 모이면 얘가 우리 딸인데 얘 노래 한번 들어보라고. 자기가 일찍 갈 줄 알고 우리한테 연습시킨 건 스스로 먹고 살 길을 마련해주려던 일종의 내공 닦기는 아니었나 싶은 그런 생각이요. 그냥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날 때가 있었어요.
사실 목소리는 어머니께 물려받은 거예요. 어머니가 절대음감이었거든요. 엄마는 아버지가 성악 공부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시집왔대요. 우리 엄마가 1930년생이니까. 그땐 여자는 여고 나왔으면 공부 다 했다 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아버지 꼬임에 넘어가 시집온 뒤엔 제가 생긴 거예요. 아버지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 어머니처럼 목소리가 좋거나 노래 잘하는 사람에 대한 선망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1964년 제 나이 열 세 살, 아버지 나이 서른아홉에 돌아가셨으니 저는 여태껏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화하고 알 기회가 없었어요.
가수가 된 건 어떤 결심보다는 상황에 의해서였어요. 참 뻔한 스토리지만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가 보증을 잘못 서서 온 집안 곳곳에 빨간 딱지가 붙었거든요. 의지가지없이 집안에 쌀 한 톨 살 돈이 없었을 때 기타를 매고 명동으로 나와 오디션을 봤어요. 제 나이 만 열아홉이 되기도 전이었죠. 집에 먹을 것도 없고 연탄도 없고 상황이 굉장히 심각했는데, 오히려 그땐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서 그 상황이 썩 슬프지 않았어요. 오히려 코믹하더라고요. ‘엇? 집에 돈이 없다네?’, ‘쌀이 없어?’하며 다같이 웃고 그랬죠.
고등학교 2학년 때 되지도 않는 기타 혼자서 배워 몇 곡 치는 걸 가지고 정말 용기 있게 오디션을 봤어요. 사실 기타 연주라고 할 줄 아는 곡이 대 여섯 곡뿐이었는데 그걸로 오션를 했으니 생각해보면 저도 진짜 당돌한 애였죠. 그러다 송창식 선배가 자기 스테이지 시간을 10분 내주면서 이종환 선배한테 “형 얘 노래 좀 들어보라”고 했는데 그때 부른 노래가 따오기였어요. (웃음) 보일 듯이~ 보일 듯이~ 그 노래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로 붙었어요. 다음 날부터 업소에서 일했죠. 그런데 업소 분위기가 저와 잘 맞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일하고 싶은 업소는 따로 있었거든요. 오비스캐빈. 그곳이 당시 통기타 음악의 메카였거든요. 다시 오디션을 봤어요. 그곳 상무님이 제 노래를 듣더니 일을 시켜주더라고요. 그렇게 그곳에서 대학 졸업할 때까지, 1978년 디스코 붐이 일기 전까지 일을 했어요. 제가 1971년에 데뷔를 했으니 데뷔도 하기 전에 취직을 한 셈이죠. 그러다 업소를 자주 찾던 방송사 PD들이 “너는 음반을 내야 한다”며 저한테 한 음반 업자를 소개하셨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 씁쓸한 일을 겪었지만 그 덕에 앨범도 낼 수 있었죠.
1971년 여름에 앨범 작업을 했고, 그 해 9월 1일에 음반이 나왔어요. 그중 아침이슬이라는 곡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어요.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그때가 1972~3년경이었을 거예요. 학교에 있는데 애들이 우르르 뛰어나가더라고요. 저도 따라나갔는데 데모 현장이었어요. 저를 본 교수님께서 “너 왜 여기 있냐”며 “빨리 저리로 가라!”고 소리치셨는데 그때 애들이 아침이슬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부른 그 노래가 아니더라고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잊히지 않아요. 당시엔 잘 몰랐지만 크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그게 바로 노래의 사회성이었어요.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한 저작권자 또 노래를 부른 저작인접권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노래가 어떻게 불리느냐는 별개의 일이었던 거죠. 11년 정도의 시간 동안 제 노래는 금지곡으로 묶여있었지만 저는 그 사실을 크게 실감 못했어요. 간혹 대학 축제 현장에서 누군가 제게 노래를 하지 말라고 적힌 쪽지를 건네는 일도 있었지만 객석에서 어떤 노래를 청하면 저는 불렀어요. 방송 출연을 금지 당했을 뿐 현장에서는 금한 적이 없었던 거죠. 참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배우고 불렀어요.
제가 처음 통기타 음악에 관심을 가진 건 아마 초등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아요. 당시 대중음악은 트로트가 주였는데 어느 날 포클로버스라고 굉장히 참신한 그룹이 등장한 거예요. 최희준, 위키 리, 유주용, 박형준 이렇게 네 분의 대학생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모두 미 8군 출신이었어요. 옷 태부터 달랐던 데다 미 8군에서 다져진 발성과 매너도 참 멋있었죠. 물론 가장 좋았던 건 통기타를 베이스로 한 음악이었어요. 1절은 번역한 우리 말로 2절은 영어로 불러주던 그 노래는 우리가 주로 듣던 트로트와 완전히 달랐으니까요.
그러다 고등학교에 가서 트윈폴리오를 만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바람이 불었어요. 음악 프로그램에서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Joan Baez),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나 피트 시가(Pete Seeger) 이런 사람들이 나올 때면 ‘와, 이게 정말 우리의 음악이 아닌가!’, ‘젊은 사람들의 음악이 아닌가!’ 생각했죠. 그때 당시가 1960년대 후반이었으니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였어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제가 좋아했던 음악은 크게 보면 모두 통기타 음악이었던 거고요.
통기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트로트의 비브라토 발성을 싫어하는데 저도 그랬던 게 아닌가 싶어요. 또 우리는 기성세대와 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트로트와 달리 통기타 가수들 노랫말엔 사랑 타령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운동권 노래로 불리기도 했고요. 저 역시 학창시절에 브라더스 포 (Brothers Four)나 킹스톤 트리오(Kingston Trio) 노래를 항상 들었고, 그런 부분들이 제 음반 활동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어요.
실은 노래보다 라디오를 더 좋아했어요. 어릴 때 꼭 재봉틀처럼 생긴 진공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배웠지요. TV가 없던 시절 우리가 상상으로 즐길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라디오로부터 배운 셈이죠. 고등학교 때 민속춤경연대회라고 전교생이 모두 참가하는 대회가 있었는데, 필리핀 음악이 꼭 필요해서 무작정 방송국을 찾은 적이 있어요. 교복 입은 학생들이 필리핀 음악이 필요해서 왔다고 하니 한 방송 관계자가 릴 테이프에 우리가 찾던 음악을 녹음해주었는데요. 그때 라디오 편성국 분위기를 느끼며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 이런 곳에서 일하며 살고 싶다’.
그러니까 사실상 가수보다는 라디오에 대한 꿈이 더 컸던 건데, 1971년 가을학기에 처음 라디오 DJ를 맡았으니 실은 가수 데뷔 시점과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죠. 라디오를 하러 가는 길은 늘 발걸음이 가벼웠어요. 물론 라디오 DJ는 어떻게 하는 건지 배운 적이 없는 만큼 첫 프로그램을 방송한 첫날 해고가 되는 굴욕도 겪었지만 그런 사건을 계기로 더욱 열심히 프로그램 모니터링을 하며 라디오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덕분에 청소년들이 많이 듣는 시간대나 심야 방송 프로그램 DJ로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고요.
방송국 입장에서 보면 제가 통기타 노래를 하는 가수였던 데다 말주변도 괜찮다고 느꼈기에 방송국에서도 저를 DJ로 키웠던 것 같아요. 데뷔 앨범부터 금지곡 판정을 받았던 만큼 한 90년대까지도 한 해에 몇 번 TV에 나갈까 말까 한 가수였지만 그럼에도 잊히지 않았던 건 다 라디오라는 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 라디오를 듣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날을 생각할 때 제 목소리를 떠올리고 당시에 제가 배달한 숱한 서양 노래와 아름다운 통기타 음악들을 함께 떠올리게 된 거죠.
제가 생각하는 노래는 발라드 즉 이야기예요. 그 시절을 풀어가는 이야기. 그런 의미에서 가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고인 얘기를 노래로 풀어내는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해요. 고여 있는 얘기에 마음을 실어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듯 잘 풀어낼 수 있다면 좋은 가수라고 볼 수 있죠. 노래에 마음이 실리면 기교는 필요 없어요. 가령 지독히 말주변이 없는 어떤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버벅거리고 더듬으며 말을 한다 해도 그 이야기가 진실되면 더욱 우리 마음에 잘 와닿는 걸 느낄 때가 있잖아요.
오랜 시간 라디오 DJ로 활동하며 얻은 특권이 있어요. 그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인 이야기를 누구보다 먼저 들을 수 있다는 거죠. 그 시간들이 제가 음반 활동을 하며 가사를 쓰는 데도 참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건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가수가 무대 위에서만 살다 보면 현실과 동떨어지기 십상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기독교 방송에서 라디오를 할 때면 늘 가까운 동대문 시장을 쏘다녔고, 심야 프로그램을 할 때면 방송국에서 나와 찬 공기를 맞으며 걸었어요. 일용직 노동자들이 군불을 때고 서 있는 모습이라든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무대 밖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슬럼프도 있었어요. 라디오를 하면서 지난 20년 동안 무겁고 진지한 책을 잘 안 읽었던 것 같아요. 매일 300여 통에 달하는 편지 속에 담긴 온갖 우울한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우리가 받는 편지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거든요. 아무런 꾸밈도 의도도 없죠. 한 번은 여성시대 코너 중 ‘가슴으로 쓰는 편지’의 사연을 읽다 제대로 슬럼프가 왔어요. 고작 10분, 15분 사연을 읽어주는 일이 이 사람들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지. 더 이상 폭력에 시달리지 않을까. 갑자기 취직이 돼서 돈이 생기나. 대체 뭐가 달라지지. 당시엔 저도 갱년기를 앓고 있던 터라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세상엔 이런 편지조차 못 쓰는 사람들도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요. 그 길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쉼터를 찾거나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어요. 잠자코 앉아있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랬더니 그곳에서 저를 만난 분들이 또다시 편지를 보내왔어요. 아, 이런 반향이 울리고 퍼져서 세상의 거대한 어깨동무가 되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최근에는 악동뮤지션과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했어요. 넉넉한 시간을 갖진 못했지만 참 재미있었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사실 저는 옛날 사람이니까, 추억에 파묻혀서 70년대 초반 노래만 부르게 돼요. 제 공연에 온 사람들이 그런 노래만 원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느 날 스스로에게 굉장히 싫증이 나더라고요. 나는 왜 맨날 똑같이 이 노래만 부르나 싶었죠. 그 상황에서 탈피하고 싶어 대안을 찾을 때 제 음악을 도와주는 친구들이 디지털 싱글이나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추천했어요. 또 막상 해보니 괜찮은 대안이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다양한 가수들과 컬래버레이션 앨범을 발표해 왔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마음도 있어요. 대게 많은 사람들이 저를 가수 양희은으로 봐주시지만 누군가는 저를 라디오 DJ라든지, 가끔 어린이들은 개그를 하는데 노래도 잘하는 아줌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런데, 어찌 됐건 제 본업은 가수잖아요. 그러니 가수로서 마무리를 짓는 이 시점에 내가 뭔가 했다 스스로 인정해야 기분 좋게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그래 좋아! 대포알 장전해서 신나게 쏘아보고 장렬히 전사하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도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무섭게 노는 거예요. 저는 너무 어린 날부터 일을 해서 놀지를 못했으니까요. 더 늦기 전에 여행도 가고 친한 사람도 자주 만나 놀 생각이에요.
간혹 주변에 가수하겠다는 친구들에게 묻곤 해요. “가수는 왜 되려고 하니?”. 세상이 참 불공평한 게 저는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잖아요. 그런 제가 감히 조언을 한다는 게 마땅치 않은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우리 때는 하고 싶지 않은 걸 안 할 자유라도 있었는데 요즘은 시스템이 다르잖아요. 대형 기획사에서 콘셉트에 따라 사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들어내죠. 즉 자신의 의견을 고집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그렇게 해서라도 가수가 되고 싶은지, 누군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면 순순히 살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그럼에도 꼭 가수가 되고 싶다면 모든 면에서 열어놓고 활동하길 바라요. 어떤 상황에서든 마침표 찍지 말고. 혹시나 가수가 된 후에 무대를 떠나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해도 그 시간을 오롯이 즐겼으면 좋겠어요. 가수가 무대에 설 수 없는 상황에 된다는 건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길게 보면 훨씬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시간이 될 거예요. 의사도 본인이 수술을 받아본 경우에 더욱 환자 마음을 어루만지는 능력이 생기듯 가수도 똑같아요. 그러니 당장 꿈이 꺾인 것 같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열네 번의 인생 수업>
미치 앨봄, 모리 슈워츠 저
공경희 역
살림출판사
2017년 0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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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노교수와 그의 제자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에요. 저는 이 책을 처음 읽고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정도로 한참을 울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그런 생각하잖아요. 매일 하루를 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너 이건 참 잘했다, 잘못했다 얘기해줄 인생의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사회생활은 학교 다니는 것과 다르니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이렇듯 세상에는 학교에서 배운 적 없지만 마주하게 되는 것들이 있죠. 살아가면서 내가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야 할 일과 하고픈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이 책은 제게 너무나도 큰 감동과 여운을 줬어요. 책장을 덮은 뒤에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멋진 작품이에요.
<일곱 마리 고양이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
조 쿠더트 저
김선형 역
프리미엄북스
1997년 0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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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전공한 뒤 상담을 업으로 삼고 살던 한 여성이 우연한 계기로 길 고양이들을 계속 기르며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에요. 흥미로운 점은 고양이들의 성격이나 특징을 관찰하다 보면 그 속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는 사람의 유형을 찾을 수 있다는 거예요. ‘아, 나는 저 고양이와 비슷한 사람’이고 ‘쟤는 이 고양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구나’하면서 말이죠. 저는 이 책이 그 어떤 자기 계발서나 심리상담서보다 훌륭한 힐링서 역할을 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겐 확실히 그랬으니까요.
<임꺽정 세트>
홍명희 저
사계절
2008년 0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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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가 쓴 <임꺽정 세트>는 마치 뒤통수를 맞듯 살면서 처음으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에요. 제가 소장한 책은 아주 오래된 고서인데요. 책을 소장하게 된 사연부터가 드라마틱해요. 언젠가 한 인사동 오래된 책방 주인이 너무 급해서 그런데 책 6권만 팔아달라며 급하게 이 책을 가지고 왔어요. 사정이 하도 딱해 보여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샀는데 특별히 읽을 기회가 없어 책장에 꽂아두고 살았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저 책엔 대체 뭔 얘기가 적혔대? 궁금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책장을 펼쳤는데 그 길로 작품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요. 가수로서 대중 앞에서 노래를 할 때 엉터리 발음으로 노랫말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절감했고요. 작품 속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낭만과 풍속을 그리는 데 사용된 다양한 어휘와 표현력을 살펴보면 우리 말이 가진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돼요. 뭐라고 수식할 말을 찾지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답니다.
<개가있는 따뜻한 골목>
김기찬 저
중학당
2000년 0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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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카메라맨 출신이자 사진작가인 김기찬 작가의 사진집이에요. 평생 ‘골목’을 주제로 사진을 찍어오신 분이데요. 우리나라 60년대 골목의 풍경과 지나간 삶의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죠. 그중에서도 이 사진집은 제게 애틋하고 더욱 의미가 있는데요. 개는 인간의 삶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잖아요. 골목을 돌면 집집마다 개가 있었던 정겨운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작품집에 수록된 사진 중 가장 아끼는 몇 개 작품은 직접 사서 소장하고 있을 만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2001년도에 공연을 하던 때 제 노래 <백구>를 부르면서 이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들을 무대 뒤 배경으로 사용했는데 사진이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객석에서 ‘어머’, ‘우와’하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지금은 절판이 됐지만 이따금씩 헌 책방에서 이 책을 만난다면 한 권쯤 소장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파브르 곤충기>
장 앙리 파브르 저
붉은여우 역
지식의숲
2013년 06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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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살아있는 것들을 썩 겁내지 않았어요. 올챙이 키워서 개구리도 만들어봤고, 장구벌레도 열심히 키워서 모기가 될 때까지 키우고 그랬어요. (웃음) 그때 <파브르 곤충기>도 아주 열심히 읽었는데, 프랑스의 과학자고 시인이면서 철학자였던 파브르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곤충을 관찰하고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어요. 다양한 곤충이 가진 행동이나 습성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죠. 더불어 그 속에서 사람의 유형도 관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솝우화: 재미와 교훈이 있는 113가지 지혜>
이솝 저
김설아 역
단한권의책
2013년 08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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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솝우화>라고 하면 그런 건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거 아니냐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세상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의 유형을 본 것 같아요. 세상에는 늦잠을 자다가 거북이에게 지는 토끼 같은 사람도 있고, 태풍은 갖지 못한 따스함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태양도 있죠. 살다 보면 일어나지 못할 일이 없는 것 같아요. 때로 삶이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그 어떤 소설보다 드라마틱하고 잔인하죠.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시간만큼이라도 다시금 어린 날 아주 말갛던 눈으로 이 책을 처음 읽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어린 왕자>
생 텍쥐페리 저
황현산 역
열린책들
2015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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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역시 살면서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역시나 ‘정말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는 거죠. 이 책을 여러분께 추천하는 이유는 요즘 세상이 또 사람들이 너무나 모든 걸 현물적으로 계산하고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세상에는 손에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지만 실은 존재하고 있는 것들도 많아요. 우정이나 믿음이 눈에 보이나요? 하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잖아요.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