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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다
- 사회교리의 실천방법론과 보조성 원리
집회48,1-4.9-11; 마태 17,10-13 /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2024.12.13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16세기 중반 그가 태어난 스페인은 전 지구에 걸쳐 세력을 넓힌 최초의 근대적 제국이었고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그 시기에 스페인은 대항해 시대를 열고 대범선으로 대서양을 누비며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총과 균과 쇠’(Jared Mason Diamond)로 아즈텍, 잉카, 마야 문명을 무너뜨리는 한편 식민지로 삼은 필리핀에도 무기로 겁박하여 강제로 개종시켰습니다. 필리핀을 정복한 후에는 멕시코로 가는 태평양 항로까지 개척함으로써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대양함대 건설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한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통합한 이베리아 제국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에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은 23개국에 이르며 그 인구는 5억 명 가까이 됩니다.
하지만 양지를 비추는 빛이 짙을수록 음지의 그늘은 어두운 법이어서, 식민지 경영으로 인한 수탈과 막대한 은의 유입으로 그 당시 왕실과 귀족들은 어마어마한 부와 사치를 누릴 수 있었으나 식민모국과 식민지의 백성들은 그만큼 비참한 가난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최초의 근세인으로 평가받는 세르반테스가 풍자소설 ‘돈 키호테’를 쓴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주인공인 기사 키호테는 평범한 시골 처녀 알돈자를 고귀한 신분의 둘시네아로 알아보고 열렬히 구애를 하는 허황되고 비현실적으로 처신하는 우스꽝스런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당시 스페인 왕실의 타락과 이를 꾸짖지 못하고 편승하는 교회의 제도 권력을 ‘풍차’로 묘사하고, 중세 봉건적 가치관에 젖어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알돈자’로 묘사하는 동시에 이 ‘알돈자’야말로 근대적 가치관으로 각성한 ‘둘시네아’라고 상상하면서, 스스로 돈 키호테가 되어 당대 가톨릭 신앙인들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요한은 ‘둘시네아’처럼 시대의 명암을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제국의 풍요로움 속에서도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했는데, 이 체험은 그가 수도 사제가 된 후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 그가 제국이 빚어내던 시대적 상황과의 모순은 물론 교회 내부적으로도 귀족 신분을 유지하며 수도생활을 하려던 세속화된 동료들의 질시와 박해 속에서 식별해 낸 사색은 그를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로 만들었고 그 작품들을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영적으로 식별하는 그 과정이 그야말로 십자가 투성이의 길이었기에 ‘십자가의 요한’으로 불리었던 그는 한 마디로, 그는 중세 스페인의 엘리야 예언자였고, 근세를 개척한 ‘둘시네아’였습니다. 시대가 화려하면서도 내적으로 공허했기에 자신이 겪어야 했던 가난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사색은 그만큼 깊어졌을 터입니다.
주어진 체험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식별하여 한 번 거르고, 다시 교회가 전해준 신앙의 해석으로 또 한 번 걸른 다음에, 몸소 자신이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그 식별된 깨달음을 정화시키는 사색이 가르멜 영성입니다. 이 마지막의 정화 과정에서 자신이 겪게 되는 십자가는 체험을 영성으로 승화시키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가르멜 영성의 이 3단계 식별과정은 근세 이후 가톨릭교회가 벌어져 가기만 하던 빈부격차 속에서 갈수록 세속화되어 하느님을 잊어버려 가던 세상을 향하여 가톨릭 사회교리를 반포하게 된 영성적 원리와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18세기에 이미 성인품에 오른 그를 20세기에 들어서 비오 11세가 다시 위대한 교회학자로 공인한 배경입니다. 이 ‘체험-식별-실천’의 영성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교회를 쇄신하는 사상적 원동력이 된 것은 물론 가톨릭 사회교리의 실천 방법론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사회 현실을 바라보되 가능한 한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이 그 첫 단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긍정적인 진보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퇴보인가를 사색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관찰된 선과 악 가운데에서 악을 물리칠 수 있는 선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교회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그 두 번째 단계입니다. 무릇 모든 악은 개별적이든 구조적이든 선의 결핍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교회의 윤리적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판단된 공동선의 과제에 대하여 누가 누구와 연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실천할 것인지를 숙고해서 사도직 활동으로 지속하는 것이 그 세 번째 단계입니다. 정확한 목표를 향해서, 연대할 수 있는 이들과 할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그러나 포기함이 없이 대를 이어서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사도직 활동입니다.
아울러 사회교리 주간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사회교리의 다섯 번째 원리인 보조성에 대해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비추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의 역사에서 말기에 속하는 기원 전 2세기 무렵에 쓰여진 집회서는 이미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다인들에게 구약성경에 담긴 유다교의 귀한 교훈을 전해주려고 그리스어로 쓰여진 성서로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활약한 재야 예언자들 가운데에서 엘리야를 대표적인 예언자로 소개합니다.
기원전 8세기 경에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약했던 엘리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은 횃불처럼 타올랐다는 것이고, 열정적으로 수행했던 예언활동을 보신 하느님께서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를 불타는 병거에 태워 승천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가르멜 산에서 바알 신의 예언자들과 대결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1열왕 18장) 그가 혼자서 450명이나 되는 그 거짓 예언자들과 당당하게 맞서서 끝내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야훼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가 옳고, 바알 신의 이데올로기는 틀렸다는 확신에 있었습니다. 당시 바알 신에 대한 우상숭배가 가져온 폐해를 잘 나타내 주는 일화가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1열왕 21,1-26)입니다.
나봇은 아합 왕이 살던 궁전 옆에 조상 대대로 물려온 포도원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였는데, 이 땅을 탐낸 아합의 욕심을 채워주려고 바알 신 숭배를 북이스라엘 왕국에 들여온 장본인이었던 이방인 출신 왕비 이제벨이 악랄한 술수를 써서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 왕에게 주었습니다. 아합에게 나봇이 그 포도원을 팔 수 없었던 이유는 구약의 희년법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희년법은 안식일과 안식년 규정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규정으로서, 희년법은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고 난 다음 해인 희년이 되면 처음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고루 토지를 분배했던 원래의 질서대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규정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안식일 법이나 안식년 법과 마찬가지로 희년법은 힘이 약해서 토지를 빼앗긴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법이었으므로, 희년이 다가오기까지는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토지를 넘겨줄 이유가 없었고, 희년이 되어도 이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왕이 팔라고 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팔 수 없었습니다. 토지는 하느님의 소유라는 사상이 희년법의 정신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알 신의 우상숭배에 눈이 먼 이제벨과 그의 수하인 거짓 예언자들이 터무니없이 백성을 속이고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었기에 엘리야가 용감하게 나서서 승리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예언자적 전통을 신약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계승하였습니다. 엘리야에서 요한으로 이어지는 구약 예언자의 정통 노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것이 곧 당신에게 베푼 것이며, 가난한 이들의 천사들이 하느님 곁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고 일깨우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천사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리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이끄시어 부여 받으신 메시아 사명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천명하신 바도 있습니다.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가난한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사회 공동선에 합당한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대우를 받아야 하느님 나라가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은 이를 무시하였기에 사회 공동선이 무너지고 말았고 그 결과로 국력이 쇠약해져서 끝내 멸망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같은 가르침을 보조성 원리로 가르칩니다. ‘보조성’이란 용어는 공동선에 대해서 정부보다는 보조적인 책임을 지고 있을 망정 가난한 이들 역시도 사회의 공동선에 대해 기여할 수 있어야 하므로, 그렇게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권력을 가진 정부를 비롯하여 재산을 가진 부자들과 지식을 가진 지식인들과 그 밖에도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교회의 신앙인들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난한 이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면 사회가 공동체적으로 변화될 수 있어서, 그 책임은 결코 보조적이지 않고 핵심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산을 주요 행복지표로 여기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흔히 부유한 이들을 쳐다보고 있어서 자신들은 가난하지 않다고 여기는 경향을 가진 중산층도 사회교리의 관점에서는 가난한 이들에 속합니다. 소수에 속하는 최상위 부유층의 총재산에 비해서는 중산층과 서민층의 재산을 다 합해도 모자랄 만큼 중산층 역시도 부유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빈부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져서 상위 10%가 나머지 90%보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9대 1의 사회에서 점점 99대 1의 사회에 재산이 극소수에게 몰리는 빈익빈부익부의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중산층도 서민층도 성경과 신앙의 관점에서는 모두 다 가난한 이들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포도원만 보유하고 있었던 나봇처럼 겨우 자기자신과 가족들이 생활을 영위할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도 사회 공동선에 기여해야 할 몫이 크고 중대하며 따라서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는 사회교리가 말하는 가난한 이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부 공권력의 역할은 가난한 이들이 수행해야 할 이 핵심적인 공동선 기여 역할을 도우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보조성은 교회의 사회교리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특징적인 지침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정, 단체, 연합체, 지역 단체 등 요컨대 사람들이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명을 불어 넣는 경제, 사회, 문화, 체육, 여가, 직업, 정치 단체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고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신장될 수 없습니다. … 이러한 관계망을 통하여 더 고차원적 형태의 사회 활동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사회 조직이 강화되고 진정한 인간 공동체의 기초가 형성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85항)
그러므로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사회에 맡길 수 없는 것처럼, 한층 더 작은 하위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단으로 옮기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해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모든 상위 질서의 사회는 하위 질서의 사회들에 대하여 도움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186항)
“보조성의 원리는 사회의 상위 권력의 남용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고, 개인들과 중간 단체들이 자신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상위 권력들이 도와주기를 요구합니다. 모든 사람과 가족과 중간 단체들은 공동체에 나름대로 기여해야 하므로 이 원리는 필수적입니다. 보조성의 원리는 특정 형태의 중앙 집권화와 관료화와 복지 지원을 반대하고 또 공적 기능에 대한 국가의 부당하고도 과도한 개입을 반대합니다.”(187항)
이렇듯 보조성 원리는 서민층과 중산층 등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구성원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사회적 공동선에 기여하도록 돕고 가르치며 협조할 수 있는 관계망을 구성함으로써 사회를 건전한 공동체로 이룩하라는 요청입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가 치열한 사색의 십자가 길을 걸으며 전해준 ‘체험과 식별과 실천’의 영성은 가톨릭 사회교리를 실천하는 방법론으로서 정착되었으며,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온전하게 예수님을 알아보고 닮아갈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러한 영성으로 실천되어야 할 사도직 활동은 반드시 보조성 원리에 따라 사회 공동선에 기여하도록 실천되어야 하며 이로써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작은 공동체들을 이룩하는 것, 이것이 사회 복음화의 지혜입니다. 이상으로, 대림 제2주일 이후 맞이한 사회교리 주간에 인간의 존엄성, 사회의 공동선, 재화의 보편성, 연대성 그리고 보조성으로 간추려질 수 잇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주요 원리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헌법과 법률에 위반된 비상 계엄령 선포로 내란죄를 저지른 윤석열을 대통령 직무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탄핵 소추안 표결이 예정되어 있는 12월 13일, 국회 소통관에서 더불어 민주당 김영호 의원 주관으로 천주교인들과 천주교 단체들이 지난 7일 탄핵 소추안 1차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국민의 힘 소속 천주교 신자 국회의원 23명을 향한 긴급 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내란 우두머리 탄핵의 길을 막고 서 있는 그대들에게 천둥소리로 묻는다. 너, 어디 있느냐?
김소영 마리아, 김승규 대건 안드레아, 권영세 스테파노, 김상은 베드로, 김소희 클라우디아, 김승수 아마토, 김은혜 로사리아, 나경원 아셀라, 박상원 필립보, 박수민 사도 요한, 정영옥 마리아, 안상운 마티아, 엄태웅 토마스 아퀴나스, 유상범 바오로, 유영훈 요한 바오로, 이말희 에밀리아나, 이상희 스테파노, 정의용 스테파노, 진종오 베드로, 최부용 아네스, 최형두 다니엘, 황기오 바르톨로메오, 한지아 베로니카.
12월 7일 윤석열 암브로시오 대통령 탄핵안 표결에 숨어 버린 천주교인 국회의원들에게 묻는다. 아뿔싸! 모두 국민의 힘 소속이로다. 그대들은 왜 국회의원이 되려 했던가? 무엇이 그대들을 지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 서게 했는가? 국회가 개원하던 날, 오른손을 치켜 들고 선서를 하던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였던가? 무엇을 위해 일을 하며, 그 일이 무슨 일인가? 이미 그대들이 알몸인 것이 드러났는데, 번듯한 금뱃지 뒤에 숨으려 하지 말고 나와서 말해 보라. 거듭 묻는다. 세례 때 거룩한 성수가 머리 위에 떨어지던 날, 그대들은 무엇을 청했던가? 무슨 생각으로 천주교인의 이름을 달고 있는가? 다가오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즐거운가? 아니면 헤로데 마냥 예수님의 다가옴이 거슬리는가? 천주교인이면 주님의 길을 걸어라. 지금의 꽃길이 죽음의 길이 될 것이고, 환호 소리가 들리는 가시밭길이 부활의 길이 될 것이다.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국민들의 넋을 놓게 만드는 내란 우두머리를 탄핵하려는데 그대들이 그 문을 막고 서 있다. 그대들이 하늘에 죄를 짓고 땅에 한숨을 쏟아 내고 있다. 이제 하루 속히 하늘을 바라보고 그대들의 세례명을 새겨라. 땅을 보고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2024년 12월 13일
윤석열 암브로시오 탄핵과 내란죄의 처벌을 요구하는
천주교인 7335명과 53개 천주교 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