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의 도시 외 1편
성은주
창가에 놓인 화분처럼 앉아서 우린 구부러진 골목을 바라봤지요.
이삿짐 트럭 옆으로 배달 오토바이 옆으로 가로등이 켜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우리 여기서 살 수 있을까요
살아남은 책장 한 모퉁이에 널어놓은 빨래가 다 마를 때까지
거기 누구 없나요
외쳐도
열리지 않는 이웃집 대문이 있어요
꾹 눌러놓은 빨래집게 같은 사람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보이는 열쇠를 쥐고
고층으로 올라가 구멍 찾는 흉내라도 내야죠
한쪽으로 휩쓸려 가더라도 겁내지 말고 옆에 앉아요
사과는 없었다
길게 늘어진 가지에 구멍을 내는 벌레들
여백이 기댄 자리가 궁금해 밑줄을 친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꿀을 맛보더니
무성한 잎 달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그늘을 만든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불 꺼진 말이 출처를 모른 채
주렁주렁 열린다
점점 붉게 물드는 말에
흉측한 이빨 자국이 생겼다
상처 입은 채 굴러떨어진 말
방금 미로를 빠져나온 표정으로
공원 의자에 앉아 있다
끝말잇기를 좋아하는
벌레들의 구부러진 목소리가
귓속을 헤매는 동안
미안이라는 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붉은 단어가
서로의 등을 타고 흘러내릴 때
그들은 무릎 붙이고
휜 다리를 조금씩 세워나갔다
가끔 방지 턱에 덜컹거리다가
툭, 끊어지기도 하고
감출 수 없는 언덕을 오르내리다가
겨우 한 조각의 말을 삼킬 뿐
모자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고개 푹 숙인 채
회전문을 열고 나온다
겹겹 바람이 쌓이자,
나무에서 새들이 빈 가지를 털고 일어선다
끝까지 제대로 된 사과는 열리지 않았다
― 《아토포스》 (2022 / 창간호) 2022.12.10.
발행인 문근식 / 편집인 조정 / 편집주간 박남희 / 편집장 권성은 / 편집위원 고광식 김효숙 전영관 김옥전 김경린
성은주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창』. 한남대학교 강의전담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