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르코복음 9,38-40
가끔 뉴스를 보면서 정치를 하시는 분들이 개인의 인기나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익만을 계산하여 제일 중요한 국민들의 공익은 등한시하는 모습을 볼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38)
요한이 그가 하는 좋은일들에 대해서 막으려는 이유는 "저희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막지 마라..."(39)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이 제자들의 무리 밖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주 우리는 내편, 네편으로 가르는 것 같습니다. 내가 선호하는 쪽과 반대쪽으로 나누어 보는 이분법적인 생각이 자리합니다.
교회역시도 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는 교회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폐쇄적인 사고방식은 버려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40)
성령께서는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십니다.
우리편이 하는 일이나 제안, 혹은 내세우는 사람을 지지하고 상대편이 제시하는 것은 무조건 폄하, 폄훼하고 반대하는 우리는 아닌지 자문해 볼일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정직해지는 일입니다.
기도는 왜곡된 시각을 걷어내고 진실을 보게 하고 분리가 아니라 일치에로 나아가게 합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2월26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마르코 9,38-40
왜 요즘 우리나라엔 존경받는 ‘어른’이 나오지 않을까?
며칠 전에 어떤 어르신 한 분이 저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따지기 위해 찾아왔었습니다.
저를 알아서가 아니라 가톨릭 전체를 좌파 편향으로 보고 따지러 온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넓어지는 게 아니라 더 좁은 시각으로 편을 가르는 시각이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이나 혹은 넬슨 만델라처럼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소위 ‘어른’이 요즘에 없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속 좁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막아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마귀를 쫓든 마귀가 쫓겨나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마음이 매우 넓으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포용력이 있는 어른이 될까요? 이는 유명한 예화가 떠오르게 합니다.
두 하인이 자기가 옳다고 싸우다 한 하인이 화가 나서 주인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말이 옳구나!”라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인이 와서 또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가 옳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부인은 “그럼 누가 옳단 말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양반은 “당신의 말도 옳구려, 허허!”라고 웃었습니다.
이 주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대의’(큰 뜻)에 손해를 끼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이를 포용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컴퓨터에 깔린 안 좋은 프로그램을 제거하면 좋은 것들까지 함께 제거되어 결국엔 윈도우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안 좋은 것은 뽑아내지 말고 함께 두는 게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대의를 위해서.
19세기 초, 미국 예로우스톤 국립공원에서 늑대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대대적인 사냥이
이루어졌습니다.
목축업자들은 늑대가 가축을 해치는 주범이라 생각하여 늑대를 몰살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늑대가 사라지자, 오히려 사슴과 엘크의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초원이 황폐해지었습니다.
초목이 사라지자 가축들도 먹이를 구하지 못했고, 강물의 흐름까지 변하는 등 생태계 전체가 붕괴하였습니다.
큰 뜻을 보지 못하고 옳고 그름만 따지다가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모두가 대의를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포용력이 전혀 없는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때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대의를 가진 어른이 꼭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천년 된 산삼을 더덕인 줄 알고 우연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셔서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더니 어머니가 다시 건강해지고 몇 년은 더 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피가 아픈 사람도 낫고 몸도 젊어지게 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드릴 피를 조금 받아서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이때 중간 관리가 “내가 당신의 피를 좀 마셔보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별생각 없이 “그러시지요”라고 하며 병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피를 조금 마셨습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하며 “임금의 것을 탐한 저자를 당장 처형하여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이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옳으신 분이시다면 임금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저에게 준 저 사람도 함께 처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그의 현명한 말에 그를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임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건강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훔쳐먹은 신하도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당에도 그렇게 나라에도 그렇습니다.
웬만하면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영혼 구원이라는 뜻에 집중할 때만 그런 능력을 갖춘 포용력 있는 어른이 되어갈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6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9,38-40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계속 봉독되고 있는 집회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지혜로움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여기며
지혜를 찬미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 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 없이 맑습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수요일 강론>
(2025. 2. 26. 수)(마르 9,38-40)
<마귀들을 쫓아내는 싸움에 중립이란 없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8-40)”
1)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신자)라는 것을
사도들이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빌려 드린 사람(마르 11,5-6), 최후의 만찬 때에 방을 내준 사람(마르 14,15) 등이 그 예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만,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또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 같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요한 19,38-39).”
아마도 사도들은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함께 다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박해 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숨기는 일이 훨씬 더 많았고, 신자들끼리도 누가 신자인지 아닌지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자에게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을 때 암호 같은 것을 사용했는데, 그 암호들 가운데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 바로 물고기 그림입니다.
물고기 그림을 사용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라는 말의 머리글자를 모으면,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2)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요한 사도가 그것을 막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에 무슨 마법 같은 힘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함부로 사용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도 19,13-16).
또 요한 사도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기억하고서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은, 우상숭배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을 금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우상숭배자들이 성사를 모독하는 것을 막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권한이 없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성사 집전을 한다면, 그것은 성사 모독죄가 됩니다.
요한 사도의 행동을 편협하고 옹졸한 집단 이기주의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십계명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라는 계명은 ‘예수님의 이름’에도 적용되는 계명입니다.>
3) 요한 사도는 ‘좋은 의도’로 행동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라는 말씀은,
그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켰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주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신자라는 것을, 당신의 권한으로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과 같은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귀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쫓겨나기는커녕 그 사람에게 덤벼들 것입니다(사도 19,15).
그런데 그냥 순순히 쫓겨났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을 나쁘게 말한다.’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부인한다.’, 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부정한다.’, 또는 ‘자기는 예수를 안 믿는다고 공언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에는 중립이 없다.”, 또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싸움에는 중립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편이 아니면 마귀들 편입니다.
이 말씀을, 세례를 받지 않아도, 신앙을 고백하지 않아도, 반대하지만 않으면 다 신앙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그렇지만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또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어서 신앙인이 되지 못했더라도,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착하게 살고,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하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