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가 몸 안에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잘 말해야 할지 늘 많이 망설여집니다. 이 사실은 동서고금의 모든 지혜와 깨달음의 핵심이며, 인간 정신에 나타난 가장 소중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이 보물은 현대인에게 너무도 낯설게 느껴져 도무지 보물로는 보이지 않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즉 의식 혹은 정신이 몸(두뇌) 안에 갇혀있다는 믿음이 몹시도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선대로부터 그런 믿음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으로 거대한 하나의 연극 내지 꿈 안으로 들어오도록 인도되었습니다.
우리가 몸 안에 들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나) 안에 몸과 사물과 시공간이 들어있다는 것이 진실이므로 딱히 어디에 있다고 지정할 수는 없으며 우리는 모든 장소와 시간에 다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은 보통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 수 있음을 잘 알지만, 이것은 어떤 생각이나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므로 지금으로서는 그래도 최선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과학과 문화가 무척 발달하여 이런 이상한 말을 하지 않고도 즉각 이런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종일관 몸과 사물과 시공간을 경험하지만, 경험되는 모든 것은 물질뿐이고, 그 어디에서도 ‘의식’ 내지 ‘정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것 즉 세상 만물이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시공간으로 알려진 모든 것의 정체는 의식입니다. 의식은 주관이고 물질은 객관이라지만, 그 둘 사이에 경계선은 없습니다. 기억, 상상, 꿈속 사건, 현실(지금은 보이지 않는) 중 아무거나 떠올려보기 바랍니다. 떠올리는 ‘의식’ 안에 떠올려지는 ‘몸-사물-시공간’이 마치 한 장의 그림처럼 들어있을 것이며, 이때 몸-사물-시공간-의식은 아무런 구분 선 없이 한 덩어리로 있을 것입니다. 기억, 상상, 꿈속 사건, 현실은 단일의식 안에서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투명한 의식 안에 세상 만물(몸-사물-공간)이 다 들어있고, 의식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은 의식일 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식의 개수는 온 우주를 통틀어 하나입니다. 세계가 곧 의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서 의식을 찾을 수 없었고 지금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이것인 것을 우리가 어찌 다시 이것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이것인 것을 어찌 다시 이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고 아는 주체는 몸이 아닙니다. 몸은 보거나 아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은 망원경이나 스피커가 무엇을 보거나 말하거나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보고 말하고 아는 것은 사람이지 망원경이나 스피커가 아닙니다. 사람이 망원경이나 스피커를 사용해서 보고 말하듯이, 의식은 몸을 수단으로 보고 말하고 압니다. 그래서 몸은 의식이 사용하는 아바타 혹은 대리인입니다.
경험과 행동의 주체는 의식이지 자아(몸-생각)가 아닙니다.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아는 것은 의식입니다. 의식의 개수는 복수가 아닙니다. 의식의 개수는 하나이고 같습니다(one and the same). 단일한 의식이 동시에 모든 몸을 통해서 일시에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압니다. 이 몸의 의식과 저 몸의 의식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실인데도, 이 몸이 보고 생각하는 것과 저 몸이 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같은 하나의 풍경 혹은 음악일지라도, 각기 다른 제작사, 품질, 성능, 특질을 가진 망원경이나 스피커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단일한 의식이 각기 다른 성품의 모든 몸을 통해서 동시에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압니다. 이 몸이 이 생각을 하고 저 몸이 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일한 의식이 동시에 모든 생각을 생각합니다. 이 몸이 이것을 보고 저 몸이 저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단일한 의식이 동시에 모든 것을 봅니다. 이것은 단일한 의식이 꿈을 꾸면서 꿈속의 이 몸과 저 몸을 통해서 동시에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과 같습니다.
잠자는 몸이 꿈을 꾸고 꿈속 세계를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꿈꾸는 주체는 언제나 의식입니다. 현실에서든 꿈에서든, 몸은 의식 안에 등장하는 작은 내용물입니다. 우리는 현실 세계와 꿈속 세계를 펼쳐내는 단일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식, 세계, 나, 이들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입니다.
사람은 망원경과 스피커를 사용해서 경치를 보고 생각을 말하지만, 망원경과 스피커가 고장 나거나 사라져도 사람과 그 사람의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아는 능력은 고장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몸은 아프고 병들고 늙고 죽는 능력이 있지만, 우리(의식)는 그런 능력이 없으므로 병들지도 늙지도 죽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멸입니다.
단일한 의식은, 무형의 투명한 의식과 그 투명한 의식이 변신한 몸과 세상 만물의 융합입니다. 투명한 의식은 내용물이 없는 ‘순수한 앎’이며 ‘나는 나라는 느낌’이므로 마치 없는 듯이 여겨집니다. 세상 만물은 투명한 의식 안에 ‘몸-사물-시공간’ 이미지로 나타나고 이 이미지는 ‘나는 누구라는 느낌’을 불러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투명한 의식이 몸과 세상 만물로 변신해도 투명한 의식 자체는 그 양과 질에 있어서 변함없이 이전 그대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황금으로 거북이나 행운의 열쇠를 만들더라도 황금의 질과 양은 전혀 불변인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아는 자(투명한 의식)는 알려지는 대상(세상 만물)이 있든 없든 한 치의 변동도 없이 본래 그대로 영원히 존재합니다.
다른 한편, 의식은 두 가지 능력 혹은 성품을 가집니다. 첫째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능력이고 둘째는 ‘아는’ 능력입니다. 의식이 스스로 세상 만물로 변신한 것이 심상(心相)(Picture)이고, 변신과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지각하는 것이 심지(心知)(Knower)입니다. 심상과 심지는 두 개가 아니며 하나로 융합하여 동시에 작용합니다. 심상은 자아의식이고 심지는 투명한 의식인데 이들은 단일의식의 양 측면입니다. 심상은 테두리와 모양이 있으므로 의식에 뚜렷이 드러나지만, 심지는 투명한 채로 늘 심상을 지각하는 중이므로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의식의 두 가지 성품은 상반되는 특성을 나타냅니다. 심상은 태어나고 죽지만 심지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심상은 운명을 속박으로 맛보지만 심지는 운명을 자유로 맛봅니다. 심상은 입자 구조지만 심지는 장(場) 구조입니다. 심상은 생각(想)이지만 심지는 투명한 의식입니다. 심상은 고통을 피할 수 없지만 심지는 고통을 멸합니다. 심상은 선악 나무지만 심지는 생명 나무입니다. 심상은 몸을 기준으로 삼지만 심지는 몸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상반되는 두 성품에 힘입어 모든 자아와 세계가 창조되어 앞에 드러납니다. 우리(의식)는 자기 안에서 일인다역의 거대한 연극을 펼칩니다. 이것은 신비하고 아름다운 기적입니다.
출처 :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이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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