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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을 기억하라
딤후 2:8-13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8-13 /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다윗의 가문에서 나셨다는 사실과 또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언제나 잊어버리지 마시오. 9) 지금 내가 여기서 이러한 고난을 당하며 죄인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바로 그 위대한 진리를 설교한 때문입니다. 비록 나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 10) 내가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나는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받을 것입니다. 11) 나는 다음과 같은 진리에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죽을 때가 곧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때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12) 만일 지금 주님을 섬기는 일이 힘에 겹거든 언젠가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왕좌에 앉아서 다스리게 될 일을 위안삼아 더욱 힘쓰시오. 만일 우리가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13) 비록 우리가 믿음이 다 없어진 것처럼 연약해질 때도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신실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주님의 한 부분인 우리를 주께서 떼어버리실리 없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와 맺은 약속을 언제나 지켜 주실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나님 우편에 왕으로 계십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따르면 예수와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8-10) 열두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장된 원동력은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든든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마다 부활에 관한 논쟁이 격화되었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자 제 3자의 증언이나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기에 의심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둘째는 당시에 유행했던 영혼불멸은 믿으면서도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는 헬라 철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바울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외쳤습니다(고전 15:3-7).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라(11-13) 독일의 뇌과학자 한나 모니어는 그가 저술한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에서 "기억이 1차적으로 과거를 담당한다는 견해는 틀렸으며 기억의 임무는 미래를 계획하고 우리의 나중 행동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8절에서 미래를 넘어서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철학자이며 목사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격을 낳고, 성격은 운명을 바꾼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을 많이 한 것들은 행동하게 되고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히 3:1). 부활하신 예수를 깊이 생각할수록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11). 더 나아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12).
적용: 부활하신 예수를 선포한 적이 있나요? 오늘 꼭 주변 사람에게 선포하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꿈을 지녀라. 그리하면 때 묻은 오늘의 현실이 순화되고 정화될 수 있다. 먼 꿈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그 마음에 때를 씻어 나가는 것이 곧 생활이다. 아니, 그것이 생활을 헤쳐 나가는 힘이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싸움이며 기쁨이다.-릴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부활의 주님으로 살아가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부인한 채로 자신의 안위와 부 그리고 세상에서의 한시적 유익을 택한다면, 예수께서도 마지막 때에 저들을 모른다 부인하실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설 교 >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딤후 2:7-13 / 김광일 목사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말년에 성경을 가까이 두고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호프 여사가 다윈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성경책이 펼쳐있는 것을 보고 “어디를 읽고 계셔요?”라고 물었고 다윈은 “히브리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날, 호프 여사는 다윈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기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괴로운 듯이 손가락을 꼬면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당시 나는 미숙한 젊은이였습니다.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의심을 품었는데 놀랍게도 나의 진화론이 산불처럼 번져 나갔고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종교처럼 믿게 되었습니다.” 다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성경을 들여다보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성경의 웅대함에 관한 구절을 읽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집 정원에 30명이 앉을 만한 자리가 있습니다. 저기지요.” 그는 창밖을 가리켰습니다. “당신도 성경 읽기를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일 저곳에서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내일 오후 하인들과 입주자들, 이웃들을 부르겠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호프 여사는 당황하며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에 대해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윈은 분명한 어조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서요. 그것보다 더 훌륭한 주제가 또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충성된 복음 사역자의 자세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역자들이 본받아야 할 인내의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였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여기의 ‘기억하라’는 원어로 ‘므네모뉴에’인데 ‘마음에 간직하다’라는 뜻입니다. 현재 명령형 시제로서 ‘계속해서 기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 자체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성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능히 신앙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한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총명을 주시리라
낮은 울타리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어느 부인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과 두 아이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그녀를 떠나버렸고 그녀는 쓰러져 누운 채 누구도 만나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몇 달이 지난 뒤 눈물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고, 그녀는 친척들의 권유로 홀로 기차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불행을 내보이고 싶었고 함께 슬퍼해 주기를 원했던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여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하소연했습니다.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여자가 있을까요?” 자기의 슬픔을 다 털어놓은 뒤 그녀는 애원하듯 여인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처음부터 묵묵히 듣고만 있던 여인은 쓸쓸히 웃으며, “저는 그토록 아이를 원했으나 낳지 못했답니다. 그 때문에 남편과 시댁 식구로부터 내침받아 혼자 살고 있지요. 저는 아직 엄마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엄마라는 말을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여인이 자기에게 이렇게 다그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남편의 사랑도 받았고 아이도 낳았어요. 엄마라는 말도 들어봤고요.”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에게 세상은 새롭게 열렸습니다. 그녀는 비로소 슬픔의 늪에서 벗어나 햇살을 만지는 삶을 새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톡히 그리스도인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총명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여기의 ‘총명’은 ‘쉬네신’인데 ‘이해력,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모든 일에 예수께서 이해력이나 분별력을 제공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예수를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원칙을 실천해야 합니다. 역경과 고난 가운데도 가져야 할 태도는 예수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분별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불이익이 돌아오는 상황이 전개된다고 해도 신앙의 원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신앙의 원칙이 바로 예수가 주시는 총명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총명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김을 얻으리라
조선시대에 의료 선교사로 봉사한 닥터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자서전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셔우드 홀은 아내와 함께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서 16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98세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했는데 그의 열정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결핵 요양소가 세워졌습니다. 아버지 제임즈 홀은 조선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평양에서 환자를 치료하다 발진티푸스에 걸려 34세 젊은 나이에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어머니 로제타 홀(Rosetta Hall)은 남편을 천국에 보낸 후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평양에 병원을 세우기 위해 모금 활동을 하고, 조선의 시각 장애인을 돕기 위해 점자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 에스더를 유학시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다시 조선에 돌아왔지만 6개월 만에 세 살 된 딸 에스더를 천국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간 남편의 이름을 붙여 ‘홀 기념 병원’을 세웠고, 어린 딸을 생각하며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에디스 마거리트 어린이 병동’을 세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대 부속병원이 된 ‘동대문 부인 병원’을 세워 조선의 부인들을 치료했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인 ‘경성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워 의사들을 배출시켰습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려던 조선 땅인데 어떻게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남편과 딸을 잃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믿는 신앙이 이를 가능케 했습니다. 그녀는 비록 많은 고난을 받았으나 예수를 기억하는 신앙으로 어떠한 고난에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여기의 ‘매이지 아니하니라’는 원어로 ‘우 데데타이’인데 ‘묶이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복음 자체는 어떠한 외부 조건에도 불구하고 결코 속박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매이지 않는 이김을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단의 공격과 올무로 매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복음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가둘 수 있어도 복음 자체는 막지 못합니다. 말씀은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핍박과 훼방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복음을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영광을 받으리라
무디 (Dwight L. Moody)가 죽음의 날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고 친구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신문에서 무디가 죽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거든 그 사실을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지금의 나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있을 것입니다. 흙으로 지은 옛집에서 나와서 더 높고 영원한 집, 죄악이 접근하지 못하고 더럽힐 수 없는 영광스런 몸을 입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육신은 1837년에 태어났고 영혼은 1856년에 태어났습니다. 육신은 죽을 것이나 성령으로 난 것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무디는 죽기 전에 천국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깨어나며 말하기를 “세상은 떠나가지만 내 앞에 천국이 열립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 옆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말을 하자 자녀들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꿈을 꾸고 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무디는 “아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 문에 들어서고 있다”고 말한 뒤에 “이것이 나의 승리요, 오늘이 나의 대관식의 날이다. 아! 얼마나 영광스러운지!”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함께 영광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여기의 ‘영광과 함께’는 원어로 ‘메타 독세스’인데 구원의 목표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예수를 영접한 순간부터 시작되어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즉 구원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시작되고 완성은 마지막 날 영원한 영광을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당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받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통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을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인내는 앞으로 받게 될 영광을 확실히 보장하는 보증서와 같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긴 방황 끝에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소설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입니다. 톨스토이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10대 시절에 신앙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55세가 되었을 때 신앙론이란 글을 쓰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 최초의 15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안식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18세 되던 나이, 친구가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종교, 가족의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종교는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톨스토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를 잊어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예수를 놓치고 형식적 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디 삶의 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김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마지막 때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으로 매인 사도
시편 18:16-18 / 디모데후서 2:8-9 / 이성희 목사
서 론
한 남자가 고속도로에서 난폭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속하는 순간 경찰 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갔습니다. 순찰차가 따라오자 이 남자는 더 빨리 도망갔습니다. 얼마 쯤 경찰차와 추격전을 벌인 다음 이 남자는 차를 멈추었습니다. 경찰은 “당신이 경찰의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도망간 이유가 뭐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제 아내가 경찰과 눈이 맞아서 도망을 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찰은 다시 “그게 당신이 도망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남자는 “저는 경찰관이 제 마누라를 돌려주려고 따라 오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돌려주면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잘 매여 사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아내를 막아도 안 되고 돌아오는 아내를 받지 않겠다고 도망가도 안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호세아를 통하여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이 ‘어디에 매여 사는가’ 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삶의 질입니다. 잘 매여 살면 평안합니다. 사실은 함께 있으면 남편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아내가 불편하다고 합니다. 서로가 잘 매여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매임병’(stuckititis)이란 아주 흔한 질병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엔가 매여 있게 되어 있습니다. 또 사람은 매여 있기를 원하는 충동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속감’이라 하고 이 소속감을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 중의 하나는 어디엔가 속하고 싶고 누구에겐가 초대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사람은 어디엔가 매여 있기를 기대합니다. 매인 데가 없으면 사람은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속감이 곧 정체성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는 소속되어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체성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의 문제이고, 어디에 매여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프릿츠 기데나워는 ‘종교에 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How to be a Christian without Being Religious’)라는 책을 썼습니다. 종교인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을 쓴 책입니다. 유신론자라고 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신론자와 그리스도인의 거리는 상당히 멉니다. 그리스도인이 종교나 율법에 매여 있으면 됩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매여 있어야 하며, 복음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자유함의 종교이며, 해방의 종교입니다. 복음은 어디에 매이지 않게 합니까? 죄에 매이지 않게 하고, 율법에 매이지 않게 하고, 세상에 매이지 않게 하고, 인간에게 매이지 않게 합니다. 이런 것에서 풀려나 오히려 복음에만 매이게 합니다. 복음에 매이면 매이지만 자유합니다. 매이지만 평안합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상대방 안에서 평안하고,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8:20에는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20에는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여러 번 감옥에 갇히고 쇠사슬에 매였지만 자신은 죄인으로 쇠사슬에 매인 것이 아니라 복음에 매인 사도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 죄인 같다고 합니다. 죄인이 아니지만 그러나 매였다고 합니다. 그가 매인 것은 쇠사슬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복음에 매인 사도가 된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바울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러 번 갇히고, 쇠사슬에 매이고, 매를 맞고, 마지막에는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도 복음 때문에 매인 자가 됩시다. 복음에 매인 자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음 때문에 죄인과 같이 매입니다.
디모데후서 2:9 상반절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믿지 않는 사회에서 복음은 그릇된 사상에 불과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부정한 사회, 건강치 못한 사회에서는 옳은 것이 그릇된 것으로 둔갑합니다. 진리가 왜곡됩니다. 정의가 불의로 나타납니다. 반면에 그릇된 것을 옳은 것이라고 합니다. 비진리가 진리로 외쳐집니다. 불의가 정의로운 것으로 판단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 이런 오해와 비난을 수없이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다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신성모독은 유대인에게 가장 큰 죄였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힐 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로마에 반역한다는 누명을 썼습니다. 로마황제를 모독하였다는 죄목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신성한 율법을 파괴한다고 중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오해와 시기와 질투 가운데 율법주의자들, 관원들은 죽이려고 하였고,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왜 돌로 치려고 하였는지 아십니까? 더러운 죄인을 그들의 손으로 친다는 것은 자신들이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돌로 쳤습니다. 또한 돌은 가장 사용하기 손쉬운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바울이 복음 때문에 당한 고난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 파선 당하고, 강의 위험이 있었고, 강도의 위험이 있었고, 동족의 위험이 있었고, 이방인의 위험이 있었고, 시내의 위험이 있었고, 광야의 위험이 있었고, 바다의 위험이 있었고, 거짓 형제의 위험이 있었고, 자지 못하였고, 주렸고, 목말랐고, 여러 번 굶었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바울이 복음만 아니면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죄인과 같이 매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했던 바울은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직무를 다하라”고 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정도가 아니라 투옥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투옥되었고,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고, 디모데후서를 쓸 때는 석방 되었다가 다시 두 번째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입니다.
사도행전 24:5에는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바울은 유대 종교사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교는 절대적입니다. 유대교에서 파문되었다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것은 도저히 살 수 없는 초죽음이나 마찬가지인데 바울은 복음 때문에 이런 고통도 당했습니다.
바울은 복음만 아니면 죄인일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관원들이 매로 때릴 때 바울이 “로마인이요”라는 한마디에 그들이 떨었고, 상관에게 보고했을 때 상관들도 두려워하였습니다.
부정한 사회에서는 정직한 자와 옳은 일을 한 자가 죄인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죄입니다. 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를 믿는 것이 죄입니다.
일제강점시대에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이 죄였습니다. 무신론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죄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소리치는 것이 죄입니다.
존 번연은 베드포드 감옥에서 12년 6개월을 옥살이를 했습니다. 번연목사님은 왕명을 어기고 복음을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 외에도 바른 복음을 말하다가 갇히고, 매를 맞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일일이 이름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설교자, 전도자, 선교사 그리고 그리스도인 가운데 복음 때문에 죄인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주기철목사님, 손양원목사님 그외 많은 순교자들 그리고 우리가 멀리 볼 것 없이 우리교회 기은실장로님 부친이신 기주복목사님 이런 모든 순교자들이 다 복음으로 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순교는 아니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공산당을 거부하여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성도들이 만히 있습니다. 그들을 후에 출옥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의 선친을 비롯하여 북한에 계시다가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월남한 성도들, 이런 모든 분들이 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현재 세계인구 약 70억 명 가운데 26%인 19억 명이 기독교인입니다. 세계인구 가운데 22%인 15억 명이 이슬람신자인 무슬림입니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약 10억 명이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약 6억 명입니다. 19억 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2억 5천만 명이 육체적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약 4억 명은 마음 놓고 예배를 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죄인이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해마다 약 15만 9천명의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고, 매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13에는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는 ‘매임’이란 단어가 4번이나 나옵니다. 복음 때문에 매인 바울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 복음에 올인하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2:9 하반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매이지 않으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말씀과 모든 것은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으며, 만방에 전파될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자유로웠습니다. 감옥 밖에 있던 자들이 더 불안하였고, 부자유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런 자유가 어디서 왔겠습니까? 복음인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기에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자유를 누렸습니다.
바울이 갇혔다고 전해진 빌립보 감옥을 두어 번 가 봤습니다. 그 안에는 발에 차는 차꼬가 있고, 감방은 어둡고 침침한 작은 방이었고, 외부와 차단된 밀폐된 공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이런 부자유한 공간에서 복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렘브란트의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라는 유화가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빌라도가 재판관이 아니라 재판을 받는 것 같이 더 불안하고 더 초조하게 그려놓았습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은 결코 재판을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 법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 20:9에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아무리 선지자에게 복음을 말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막을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훼손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하였고, 선지자를 톱으로 켜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박해 가운데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고 전파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18에는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합니다. 관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예’ 그랬습니까? 20절에는 오히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의 말을 들은 관리들이 21절에는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인간에게 제한받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자유입니다.
순교자 폴리캅이 화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복음전파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복음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원형극장으로 끌려가 사자의 밥이 되었지만 그들은 팔짱을 끼고 서로 권면하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잠시 후면 사자의 밥이 되지만 그들은 복음을 버리지 않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하면서 순교했습니다. 복음이 매이지 않은 증거입니다. 우리나라의 최봉석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길거리에서 “예수천당”을 외치고 복음을 전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갔는데 매로 때리면 때릴 때마다 “예수천당”을 외쳤다고 합니다. 일본 순사가 때리다가 물어보았습니다. “왜 때릴 때마다 ‘예수천당’을 외치는가?” “내 속에 예수님이 꽉 차 있어서 건드리면 튀어나오니 그렇게 아시오.” 일본 순사가 때리다가 지쳐서 더 이상 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복음은 절대로 멈추지 않고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나, 이념이나, 사상에 매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인간의 사고나, 지식이나,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머리로 해석하려는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신학에서 해석학이라는 주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의 철학적 해석, 신비적 해석 등 인간의 학문적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특히 루돌프 불트만이란 학자의 비신화화는 상당히 주목을 받고 동시에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특히 하나님의 나라 등 모든 개념을 신화론적이라고 하는 해석입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인간의 사고에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사고나 학문에 매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인간의 논리로 해석된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최근에 이단들이 아주 극성입니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자꾸 강해져 슈퍼 박테리아가 발생하듯이 이단도 이제는 슈퍼 이단으로 진화한 것 같습니다.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하기도 하고, ‘QT’(성경묵상)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이단들은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성경을 꽁꽁 묶어 두고 남을 비판합니다. 지난 주간에도 이단들이 우리교회 앞에 모여서 시위를 하면서 제가 목사라고 하니까 “목사님 교회 수천 명을 지옥으로 보내실 겁니까?”라고 하길래 “당신들을 지옥으로 보낼거요. 너나 잘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존 뮤즈필드의 희곡에 “예수님의 시련”(The Trial of Jesus)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 프로큘라가 부활의 소식을 듣고 로마 군인 롱기누스에게 “당신은 그분이 죽으셨다고 생각합니까?”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그 분은 어디 계실까요?” “그분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그 다른 어느 누구도 그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복음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24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까?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이시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매여 있지 않으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시기에 안식일의 규례를 초월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전승에는 밥을 먹을 때에 손을 씻는 관행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것도 초월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경원시했던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당시로는 상당히 엄격한 부정법을 파괴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완전 선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정을 타지 않으시니 부정법을 파괴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 예수님을 인간의 한계에 제한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은 사람의 힘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2인3각’ 경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발을 묶어 달리는 경기입니다. 이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혼자 빨리 뛴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자세히 보면 하나님과 2인3각 경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매여 있는 삶을 삽니다.
‘나는 어디 매여 있는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돈에 매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예에 매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심에 매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체면에 매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것들과 2인3각을 이루고 산다면 절대 보조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의 것들은 우리가 바르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참 좋은 찬양입니다. 복음에 매여 있으면 우리 영이 기뻐합니다. 영혼이 즐거워합니다.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기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영혼은 귀신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포악한지 육체는 쇠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이 사람은 매임에서 풀려났습니다. 이런 귀신의 매임에서 풀려 복음에 매여야 삽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매여 있습니까? 어디에 목매달고 삽니까? 육신의 매임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고, 그리스도에게 매이고, 복음에 매여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딤후 2:11-13 / 김태환 목사
오늘 아침에는 디모데후서 2장 말씀을 읽었습니다. 바울이 그의 평생 제자였고, 신실한 동역자였던 디모데에게 편지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그 때 에베소에서 신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자신이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성격이 그리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슨 한가지 일이 터지면 그 일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위장에 병이 생겼습니다. 성경에 그런 디모데에게 “네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라(디모데전서 5:23)”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때 디모데는 바울이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디모데전서 2:22)”고 할 만큼 한창 때 청년이었습니다.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마 30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디모데전서, 후서는 이렇게 디모데에게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로 편지를 쓴 것도 있지만, 오늘 읽은 말씀처럼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가르친 것도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 이에 굳게 서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진리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으면,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와 함께 죽는다”는 말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가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No cross, no crown.” 이런 말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더라면 죽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죽는 일이 없었더라면 다시 사시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었기에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주어진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NLT 성경에는 “This is a trustworthy saying”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을만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특히 우리 크리스천의 삶 속에서는 믿을만한 진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십자가 없이도, 희생과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얻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운(fortune)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철저하게 “주님과 함께 죽으면 주님과 함께 산다”는 성경 말씀의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도 절대로 예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들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는데, 우리의 삶이 예외일 수가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3:16 말씀,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종이 주인보다 클 수 없습니다. 주인이 십자가를 지는데 종들이 십자가를 안 질 수 있나요? 주인이 섬기는 삶을 사는데 종이 섬김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나요? 주인이 고난을 받는 삶을 사는데, 종이 고난을 거부하고 영광만 받는 삶을 살 수 있나요? 주인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받으셨다면, 종도 십자가를 져야 하고 주인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servants),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는 사람들(messengers)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인보다 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실하지 못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신실하게 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거짓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13절) 이 성경 말씀은 잘 번역된 것 같지 않습니다. NLT 성경에는 “If we are unfaithful, he remains faithful, or he cannot deny who he is”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나와 있는 개역성경이나,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한 표준 새번역 성경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그분이 말씀하신 것,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그분 스스로 부인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참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고, 그분이 약속하신 것에는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오류가 많습니다. 이렇게 말했다가도 잘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런 때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사과하면 되는데, 사과하지 않고, 절대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잘 하지요? 이렇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는 절대로 한 입 가지고 두 말을 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약속하셨으면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아무리 세월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었어도 말씀한 그대로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겨의 4,0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을 지금도 여전히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믿음생활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변함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어디에 나오는 말씀입니까? 예. 베드로전서 1:23-25에 기록된 말씀 아닙니까? 그 말씀도 보세요. 베드로는 이 말씀을 신앙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신앙의 박해를 피해서 그렇게 숨어 산다고 하지만, 얼마나 신앙이 흔들렸겠습니까?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런 회의가 들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편지를 쓴 것입니다. “절대로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변함 없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을 격려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읽은 디모데후서 2:13절 말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성실하심)에 대한 말씀을 우리 기도생활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한번 하신 말씀을 스스로 부인하실 수 없다는 이 성경 말씀을 우리 기도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대한 말씀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기도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을 하는 것은 기도가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새벽 기도가 그냥 좋아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혹시 새벽 기도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분은 성경 말씀에서 새벽 기도가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도 새벽에 기도하셨고, 다윗도 새벽에 기도했다고 했으니까 나도 해보자 이렇게 해 보니까 새벽 기도의 맛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벽 기도가 자신의 영성을 지켜 나가는데 참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새벽 기도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기도가 좋아서 시작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니까 기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보니까 기도에 대한 많은 약속의 말씀들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8)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이 기도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너희가 구하는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이니까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얻게 되고, 찾게 되고, 문이 열린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면 얻습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제 대답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하십니까? 제 대답이 “Yes”라고 나올까요 “No”라고 나올까요?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다 얻는다면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 대답은 “Yes”입니다. “예. 무엇이든지 이 말씀을 믿고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면 얻습니다” 이것이 제 대답입니다. 목사로서 저의 삶을 돌아보면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기도해도 모두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기도를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회의 경험이 좀 생기고, 그만큼 더 성숙하게 기도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하세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러분, 기도는 길 지나가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모두 자기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마실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마태복음 20:22)”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이 구하고 있는 것은 “제일 높은 자리”였습니다. 이런 제자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삼 년 간이나 따라 다니고 배운 제자들이 그 모양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지 아직도 모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어느 집을 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만 안 되는 사람들인데, 보스턴에 오자마자 금방 타주로 간다고 하던가 했던 사람들입니다. Malden에 사는 젊은 부부였습니다. 이런 집들은 심방은 가지만 참 마음의 부담이 많습니다. 우선 이런 가정은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가서 읽어 줄 성경 말씀도 마땅치 않습니다. 고민고민 하다가 “이 집은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믿음도 없는 집이니까 이런 말씀을 좋아 할거야” 하면서 찾은 말씀이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심방을 갔는데, 분위기가 그렇지요. 뭐. 이사 짐을 싸느라고 정신이 없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목사가 심방을 왔으니 심방을 받을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저는 요한복음 15:7 말씀을 읽어줬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 말씀을 하면서도 주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앞에 말씀은 말해 줘도 모를 것이니까.
정말 이 부부가 이 말씀을 좋아하더라고요. 아니, 목사가 와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다 이루어준다는데 말이라도 고맙지 손해 볼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제 마음 속에 자꾸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이 사람들이 저렇게 좋아하지만,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이 말씀의 뜻은 모를 거야. 이 말씀의 뜻을 알면 저렇게 좋아하지 않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술궂게 그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가 구하는 것이 어떻게 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편이 “아무 것이나 함부로 구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남편의 말을 들으면서 철퇴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제 생각과는 달리 그는 그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능치 못하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면 그렇게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 사람이 성경 말씀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로 그 성경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요.
얼만 전에 이곳에 연합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 때 강사로 오신 송병기 목사님이란 분이 그래요. 그 목사님이 한번은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한가지만 말을 해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무엇을 달라고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에서 무엇을 달라는 말이 안 나오고 “주님, 저는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더랍니다. 그랬더니 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려 오더랍니다. “한 가지만 말 하라니까? 무엇이든지 내가 다 들어 주겠다.” 이번에도 이 목사님은 “주님, 괜찮습니다. 저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세 번째 음성이 또 들려 오더랍니다. “참 고집도 쎄구나. 한 가지만 말해라. 내가 들어 주겠다.” 이번에도 이 목사님은 “정말입니다. 저는 주님 한 분만 있으면 됩니다.” 이렇게 말씀 드렸더니, 주님이 이렇게 말씀 하더랍니다. “아들아, 너는 참 좋은 것을 구했구나!”
그래서 오늘 제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얻게 된다고 자신 있게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단, 여러분의 믿음이 제자리 걸음을 하지 않고 성장한다는 조건 아래서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아직 믿음이 약하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잘 모르는 단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세요. 이제 여러분의 기도는 조만간 바꿔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여러분이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하면서, 여러분의 기도는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저 “높은 자리”나 하나 얻으려고 했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신 말씀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분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믿고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문을 두드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