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하순에 발표한 타산지석 “미국을 위협하는 베이더우와 룽신”(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8112)에서 거들지 않았으나 중국 CPU 룽신(龙芯용심)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66살에 룽신 팀에 합류해 물리설계부분을 책임진 황링이(黄令仪황령의, 1936~) 중국과학원 원사이다. ▲ 황링이(黄令仪황령의, 1936~) 중국과학원 원사 © 자주시보, 중국시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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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신 팀의 인솔자 후워이우(胡伟武호위무, 1968~) 박사는 근년에 텔레비전방송국의 프로에서 황링이 원사와의 대화를 회억했다. 어느 해엔가 받은 임무는 연설 당시까지도 비밀해제되지 않아 그런 걸 만들었다는 정도로밖에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후워이우 박사는 황링이 원사와의 대화에서 그건 예전의 “양탄일성(两弹一星, 중국이 1970년대 초반까지 확보한 핵탄, 미사일, 위성을 아울러 이르는 말)”과 맞먹는 중요한 것이니 각별히 신경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황링이 원사가 대뜸 대답하기를 “후 선생, 내 평생 최대소원은 땅에 엎드려 조국의 치욕을 말끔히 닦아내는 것이요. 나는 일본놈들의 폭격에 동포가 죽는 걸 직접 본 사람이요.(这辈子最大的心愿就是匍匐在地,擦净祖国身上的耻辱。我是亲眼看到过同胞被日本鬼子的飞机炸死的。)” 본명이 랴오원티(廖文蒂료문체)인 황링이는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할 때 고작 9살이었다. 9살 이전에 겪은 치욕이 평생 기억에 남아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동력으로 된 것이다. 1958년에 화중공학원(华中工学院, 지금의 화중과기대학华中科技大学)을 졸업하고 이공과의 최고학부인 칭화대학(清华大学청화대학)에서 2년 동안 소련 전문가 수하에서 연수한 그녀는 모교에서 2년 교편을 잡았다가 1962년에 중국과학원 계산소에 배치 받아 미니 전자계산기 연구제작에 가담했다. 중국의 첫 컴퓨터로부터 많은 연구에 참가했던 그녀는 1980년대에 이르러 체제변화에 따른 일거리부족, 경비부족 등 난관에 부딪쳤다. “50년을 돌이켜보면서(回望50年)”이라는 황링이 원사의 글에 의하면 그러다가 일본과 합자한 세탁기공장의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을 바랐다. 일본인들이 물건들은 다 주면서도 세탁기용 칩설계도만은 주지 않고 칩을 엄청난 가격으로 팔았기 때문이었다. 황링이가 대담하게 그 임무를 받고 밤에 낮을 이어가면서 전심전력 CAD 방법으로 칩을 설계해냈다. 공장의 생산처가 이미 연간 생산 수십 만 개 계획을 세웠을 때, 일본인들이 칩 가격을 인민폐 4위안 이하로 떨어뜨려 생산하면 밑지게 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황링이는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 우리가 일하는 가치는 남이 가격을 인하하도록 핍박하는 것인가(难道我们工作的价值就是逼别人降价)? 그 후 과학원 지도자의 배치로 홍콩에 가서 3개월 동안 고생하여 어떤 칩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1989년 11월에 일생 최대의 자극을 받았다. 과학원의 파견을 받고 미국 모 회사에 가서 합작항목을 추진하다가 라스베이거스에서 국제 칩 전람회가 진행되기에 일주일 참관하였는데, 수천 개 전람부스를 거의 다 돌아보았어도 중국 부스가 없었다. 어쩌다가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창청(长城장성)회사의 비닐백을 든 동포 몇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가 “당신들은 전람에 참가하러 왔겠지요(你们是来参展的吧)?”고 친근하게 물었더니, “아니, 참관하러 왔습니다(不,是来参观的).”라는 대답을 들을 줄이야. 황링이는 속이 철렁했다. 중국 부스를 찾아낼 가망이 없구나. 1963년에 중국의 집적회로 연구수준은 국외와 같았는데 왜서 지금은 차이가 이처럼 벌어졌는가? “맘속의 고통으로 나는 눈물을 떨궜다. ‘즐비한 비국산품들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속으로 결심을 내렸다. 반드시 고수준 칩을 설계해 전람에 참가하여 치욕을 씻겠다고.(内心的痛苦使我掉下了眼泪,“琳琅满目非国货泪眼涟涟”。我暗自下决心,一定要设计一块高水平的芯片来参展,洗刷耻辱。)” 1990년에 귀국한 후 각종 집적회로의 설계방법을 고심히 연구했던 황링이의 성과는 화웨이(华为회위, 지금 휴대폰으로 유명한 회사) 프로그램통제칩 등에 사용되었고 2개의 발명특허권을 얻었으며 2000년에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진행된 국제발명특허박람회에 가서 자그마하지만 “0”을 돌파한 중국 부스에 섰다. 허나 흥분이 식은 다음 자세히 생각해보니 칩을 만들었어도 쓰이지 않고 상을 받았어도 생산되지 못한 경우들이 많았다. 하기에 2001년 12월에 중국칩을 만들자는 결정을 알게 된 그녀는 이듬해 초에 열성스레 팀에 참가했던 것이다. 후워이 박사가 황링이 원사를 존경한다면 황링이 원사 또한 후워이우 박사를 자기와 함께 일한 동료와 지도자들 가운데서 제일 탄복하는 인물로 꼽았다. 숭고한 이상을 위해 갖은 고난을 이겨나가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텔레비전 프로에서 후워이우 박사의 커다란 자랑거리는 룽신팀이 결성되어 10여 년 동안 핵심성원들이 하나도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팀에서는 연간 수입이 고작 10여 만 위안에 그치고 외부 회사들이 연봉 100만 위안(한화 1억 7천 만 원 상당) 이상으로 꼬이는데도 유혹에 넘어간 팀원이 없다고 말이다. 그 이유를 후워이우 박사는 견정한 신앙과 국가, 민족을 위한 높은 목표에서 찾았다. 후워이우 박사는 팀원들에게 지금 우리가 홍군, 팔로군을 존경하듯이, 양탄일성의 공로자들을 존경하듯이 이제 후대들이 우리를 존경하게 되리라고 이야기한단다. 룽신팀의 발전계획은 이미 공개된 것만 해도 2030년까지인바, 이미 베이더우(北斗북두)시스템을 비롯한 국가차원의 수요들을 만족시키는 토대 위에서 먼저 업종, 기업시장을 차지하고 그 다음 개인시장도 정복하겠다고 내다본다. 2001년 말에 연구경비 100만 위안(당시 환율로 한화 1억 원)으로 CPU를 연구하기 시작했던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란 말이 어울린다. 황링이의 애국헌신열정은 어렸을 때의 일본군 폭격에 뿌리를 두고 50대의 중국칩이 없는 전람회에서 한결 강화되었다. 그런데 꼭 같은 일을 겪고도 정반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항일전쟁기간에 일본군의 폭격과 학살에 질겁하여 이러다가는 중국인들이 멸종된다는 논리를 펴고 한간(汉奸, 중국 친일파)으로 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또한 늦어서 1960년대부터 외국의 선진물품들에 질겁하여 “만드는 게 사는 것보다 못하고 사는 게 세내는 것보다 못하다(造不如买, 买不如租)”면서 자체제조가 아닌 사오기나 세내기를 주장해온 중국인들 그것도 고위층의 간부들이 가득하다. 변변한 총도 없이 날창과 칼을 지니고 항일전쟁에 나선 사람들이나 외국회사에 들어가 쉽게 돈을 벌지 않고 몇 년, 십 몇년 적은 보수를 받으면서 국산화연구에 매진하는 사람들은 모두 영리하지 못한 바보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바보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힘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터이다. 1945년에 끝난 항일전쟁이 황링이 원사에게 수십 년 영향을 끼치고 지금도 중국의 뜻있는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데 비춰보면, 1950년대 초반 전쟁을 겪은 반도 북반부의 전쟁세대들의 체험이 국력과 군사력 강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다. 많은 일을 했고 또 해나가고 있는 후워이우 박사는 언젠가 자신들이 양탄일성을 만든 선배들보다 훨씬 못하다면서, 세대마다 사명이 있다고 자신의 지도 교수 세대들이 봉쇄된 상황에서 봉쇄를 깨뜨렸다면, 자신들은 개방한 상황에서 독점(중국어로 垄断)을 깨뜨린다고 말했다. ▲ 북의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국방과학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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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북한)이 지금까지 얼굴을 공개한 핵무기, 미사일, 위성 관계 공로자들 중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있지만, 앳되보일 지경으로 젊은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그들은 봉쇄된 상황에서 봉쇄를 깨뜨리고 개방된 상황에서 독점을 무너뜨리는 두 가지 사명을 한 세대에 완수해야 되지 않을까? 세상에는 개방된 상황에서 독점을 무너뜨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인데, 봉쇄를 깨뜨린 DNA가 부족해서가 아니겠냐는 생각도 든다. 남북의 교류가 활성화되어 과학자, 기술자들이 손잡고 서방세계의 독점을 깨는 상상을 해본다. 허황한 기대는 아닐 것이다.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8422§ion=sc21§ion2= |
첫댓글 이분은 조선족이라서 말에 거침이 없지요?
"중국시민"이분의 [타산지석]은 모두 참 좋은 글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