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의 단풍 - 종묘와 창경궁
1. 종묘 [宗廟]
유네스코 세계유산(199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가(王家)의 신위(神位)를 봉안한 사당.
사적 제125호.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종묘 정전,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과 공신당(功臣堂)·칠사당(七祀堂)·재궁(齋宮)·
전사청(典祀廳)·향관청(享官廳)·제문(諸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AUTUMN LEAVES - PAUL MAURIAT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가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유산적 가치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또한 2001년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등록기준 :세계문화유산기준 (Ⅳ)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우리나라 종묘의 기원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392년(고구려 고국양왕 9)에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최초로 보인다.
그밖에 시조묘·동명묘·국모묘도 모두 종묘에 해당하는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그러한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종묘의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비되었다.
고려의 종묘는 9실(室)로 되어 있었으나 때로는 5실로 하고
동서에 협실을 두기도 했으며 종묘 정전 이외에 별묘를 설치하기도 했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고려의 종묘를 철거하고 새로 지었는데
새 종묘가 완성되기까지는 태조의 4대 조상 신위를 임시로 효사관에 봉안했다.
종묘가 낙성된 것은 공사에 착수한 지 1년 만인 1395년(태조 4) 9월이며,
그 위치는 한성부 동부 연화방으로 지금 종묘가 있는 곳이다.
이때 종묘의 규모는 태실(太室 : 정전) 7칸, 좌우 익실(翼室)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으로 모두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향을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
이며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담 밖에는 행랑과 재궁을 비롯한 건물들이 자리잡았다.
종묘가 준공된 이후에도 각종 보완공사가 행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고
1593년(선조 26) 10월에 환도해서는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 5월에 종묘가 중건되었는데
그 규모는 병화로 소실되기 직전의 그것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뒤 병자호란으로 종묘의 신위를 강화도로 옮겨갔으나
다시 서울의 시민당(時敏堂)으로 옮기고 29신위를 모두 개조,
태묘와 영녕전에 봉안하고 파손된 신위는 종묘 뒤에 묻어 봉안했다.
1870년(고종 7) 1월에 종묘와 영녕전의 신위를 창덕궁으로 옮겨 봉안하고,
개수공사에 착수해 그해 3월 공사를 완료한 다음 신위를 본처에 봉안했다.
지금의 종묘 태실 19칸은 이때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종묘 안의 부속건물로는 태실 서쪽에 지어진 영녕전과
역대 왕의 공신을 배향한 공신당, 그밖에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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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경궁 [昌慶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사적 제123호.
이 궁궐에서 장조(莊祖)·정조(正祖)·순조(純祖)·헌종(憲宗) 등 여러 왕들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하고 있으나
이 궁궐만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하여 있다.
본래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壽康宮)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1484년(성종 15) 이 수강궁 자리에 새로이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다시 세웠다.
이때 동향으로 세워졌던 명정전(明政殿)을 남향으로 고쳐야 한다는
김일손의 상소가 있었으나 도감(都監)에서는 만약 남향으로 할 경우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의 내청룡으로 이어지는 맥이
함춘원(含春苑)의 남쪽 지맥을 끊게 된다면서 그대로 둘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효종 7)에 요화당(瑤華堂)·난향각(蘭香閣)·취요헌(翠耀軒)·계월각(桂月閣) 등
4개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들을 머물게 했다.
1909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다음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문정전(文政殿)과 월랑(月廊)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이라고 했다.
동향한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면 금천(禁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이 개천 위에는 금천교(禁川橋)인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옥천교를 건너면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에 이르고,
이 문을 들어서면 높은 월대(月臺) 위에 서 있는 정전인 명정전과 마주하게 된다.
동서로 길게 뻗은 월랑은 홍화문과 명정문의 남북 양쪽에서 뻗어나온 월랑과 합쳐져
'ㅂ'자 모양을 이루면서 정전의 좌우 앞쪽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의 남서쪽에는 편전인 문정전과 그 월랑이,
북서쪽에는 많은 내전과 행각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나머지 수천 간의 전각과 행각 등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 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 박물관)를 통하여
1830년대의 창경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집에서 가까워 자주 가곤 합니다
속상한게 창경원으로 격을 낮추워 화가 납니다
그러시군요
지금은 다시 창경궁으로 복원됐으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