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나 조선때 고조선 연구는 왜 하지 않았을까?)
고려나 조선때 고조선 이전을 왜 연구하지 않았을까? 고려나 조선때 고조선과 그 이전에 대한 연구는 왜 없는가?
고려의 일연이나 이승휴는 단군이나 그 이전의 기록을 볼 수 없었다는 말인가?
일연의 삼국유사나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보면 그당시 현재 우리가 볼수 있는 사서 밖에 볼수 없었던 것 아닌가 하고 추측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남긴 사서에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군이 1028년을 통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단기고사, 단군세기 등에 기록된 단군의 역대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러한 기록들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고조선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았거나 그러한 서적이 없었다 라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생각해 볼수 있다
그런데 일제시대 고조선에 대한 여러 기록들
즉 제왕년대력, 신지비사, 해동비록, 신지비사역술, 조대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므로
일연이나 이승휴가 발견하지를 못한 사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사 삼국지 위서를 인용하여 삼국유사를 찬술했다면 당연히 단군 1028년이란 세월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이를 해소하는 사서를 찾아보고 기록했어야 할 것이다
왜 고조선 이전 기록을 연구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상당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삼국사기나 중국25사만 보아도 고조선 이전이 밝혀지고 있는데
그당시 고조선 이전을 밝히지 않은 이유를 알수가 없다.
삼국사기에 고조선 단군은 없어도 단군 즉 요임금 이전 인물로 "소호금천씨와 고신씨"가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신라의 선조로 "소호금천씨", 고구려의 선조로 "고신씨"를 기록하고 있는데
왜 고조선 이전 기록을 연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장안중심의 한나라 후예의 기록에서도 고조선 이전이 기록된 "사기(사마천)"가 있다. 더욱이 삼국지 위서를 보았다면 당연 "사기"도 보았을 것이다.
사기에 "소호금천씨나 고신씨"의 기록이 있고 소전이란 제후의 아들 "헌원"의 기록도 볼수 있었을 것이고
그와 대치했던 구려 치우임금을 "천자"라고 하는 기록도 보았을 것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만들 때 "사기"를 보았다면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서희건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라는 책 권1에서는 민족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는 모조리 탈취 소각하고 단군을 부정한 사서만 남겨 놓았다고 보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삼국 이전의 상고사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단군 기록은 없어도 단군 이전 고신씨나 소호금천씨 그리고 묘(苗 : 九黎의 백성)의 후예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쳤는데 사실은 석유환국(昔有桓國)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제왕운기에서는 환인(桓因)이 등장하고 있다. 만약 환국(桓國)이었다면 당연히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는 같아야 할것이고 고쳤다면 같이 고쳤을 것이 아닌가
분명히 고려때에도 고조선과 그 이전을 연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것이 아닌가? 정사에 기록된 고조선 이전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최초의 국가를 고조선으로 하고 단군의 역대나 그 이전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동국통감이후 고조선 이전을 언급한 사서를 발행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세종때 세종18년 12월 전 판한성부사 유사눌이 상서한 내용에서도 단군역대는 나타나지 않고 1048년이라는 연대만 등장하고 있다.
단군 역대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역대도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고조선 이전을 연구했다고 볼수는 없다
만약 소호금천씨나 고신씨 그리고 묘민(苗民)에 대하여 한족역사 인물이라서 포기 했다면 기자에 대해서는 연구를 왜 외면 하였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분명 전체 역사에서의 단군이나 그 이전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반도사관에 의한 맞춤역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버릴수가 없다.
조선이나 고려때 고조선 이전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나 기자를 버린 것이나 무엇이 다를까
모두 우리역사의 한 폐이지 임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면 전체를 정리하는 자세로 연구해 보아야 한다
단기를 거론한 것도 고려사 열전 백문보가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에 기록된 것이 처음이다.
이 때도 고조선 이전은 거론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많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오재성)
▒ 참고자료 : 기존 게시자료
< "구리(九黎)"국의 백성 "묘민(苗民)"에 대하여 ! >
중국사서에서는 동이 최초의 나라 "구리"의 백성을 "묘민"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사서에서는 삼국 및 변한이 "묘"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묘족(苗族)에 대한 사서(史書)의 기록
{삼국사기} - 당서를 인용하여 "변한(弁韓)은 묘(苗)의 후예(後裔)다." {신, 구당서} - 신라 및 변한은 묘족(苗族)의 후예(後裔)다. {삼국사기} - 삼국(三國)은 묘족(苗族)의 후예(後裔)이다.
< 원문소개 >
1. 사기
- 리동이국명야(黎東夷國名也) - 구리군호치우시야(九黎君號蚩尤是也) - 치우고천자(蚩尤古天子) - 삼묘재강회형주(三苗在江淮荊州)
삼묘가 강회형주에 살았다는 말입니다
(강회형주 지도표시)
강회(江淮)지역이란 양자강과 회수(淮水)가 있는 두 강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 이 지역에는 기자가 살던 서화(하남성)와 묘가 있는 몽성(안휘성)이 있고, - 김유신의 조상 소호금천(少昊金天)씨가 거(居)하던 청양(靑陽)(안휘성)이 있습니다
2. 예기
- 묘구리지후(苗九黎之後) - 구리위묘민선조(九黎爲苗民先祖)
구리의 후예가 "묘"이고 구리는 "묘민"의 선조라 하였습니다
동이의 구리국의 백성이 "묘민"입니다
3. 구당서동이전
- 신라변한지묘예야(新羅弁韓之苗裔也)
신라변한이 묘의 후예라는 뜻입니다
4. 당서동이전
- 신라변한묘예야(新羅弁韓苗裔也) 신라변한은 묘의 후예
5. 삼국사기
- 삼국조선개고성인지묘예야(三國祖先豈古聖人之苗裔耶)
삼국은 묘의 후예
6. 삼국유사
- 변한묘예(弁韓苗裔)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구리의 백성인 "묘민"에 대하여는 우리의 정사에서도 언급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동이의 역사는 동이의 최초 국호인 "구리"의 후예 "묘민" → 후예 삼국, 변한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묘족이 살던 곳은 "강회형주"영역입니다
우리가 "3도"라고 표시하듯 지역을 대표하는 표시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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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출처 구이넷(coo2.net)
제 생각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 햇기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신라도 삼국통일 세력이 철저한 사대주의 자 들입니다. 삼국통일 세력의 대표인물이 김춘추이데 김춘추가 개인의 원한 때문에 이민족의 국가인 당나라를 끌여 들였으니 당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신라는 신라대로 고조선과 그 이전의 역사기록을 없애버렸거나 아니면 연구를 하지 않았거나 있는기록마저 기록을열람 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수 있읍니다. 그리고 고구려에 있는 사서들은 당나라 놈들이 80~90%는 갖어갔을것이구요. 그런후에 고려 도한 학자들이 사대주의 신라출신 학자들이 더 많다보니까 고조선 연구에 소홀 햇을거라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