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형들과 같이 비록 배다른 형제들이기는 하나 어쨌든 한 가족, 한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생을 결국 실제로는 물론 돌아올 길이 없어 보이는 노예로 팔기는 했지만 어쨌든 아래의 본문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이듯이 함께 모의하며 진심으로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실상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줄 수 없는 온갖 하늘의 힘과 역사들, 응답과 이적들을 보이셨고, 게다가 절대 진리이자 의의 근본이며 하나님의 법인 말씀을 맡게 하시며, 심지어는 온 세상과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도구와 통로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근간인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다수를 이루는 핵심 조상들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심히 이상하며 상식적으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진정 그에 있어서의 이유와 해답과 가능은 오직 한 가지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바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의 은혜와 이치와 실제가, 근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역사가 우리들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고 실질적인 것이며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시고 온 우주보다도 더 크시며 영원보다도 더 작으실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생들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이신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이 상식 위에 있고 상상을 뛰어넘는 실질적이고 초월적인 은혜와 능력과 역사인 것이며, 그 속에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인간으로서도, 안 믿는 자들이라도 결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악행들을 범했던 요셉의 배다른 형제들까지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구약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 여러 모양의 피 제사와 희생 제물들, 노아의 방주, 원초적인 대제사장의 역할을 했던 살렘 왕 멜기세덱, 믿음의 본을 보이며 선지자 역할을 했던 믿음의 선조들 등과 같이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함으로 인해 구원에 참예케 된 것일 뿐 아니라 죄악들과 싸울 수 있었고 범하게 죄악들에서는 자복하고 돌이킬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하면서 말씀의 신앙으로 살아 있는 믿음도 될 수 있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이치와 원리들은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우리 인생들이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대략 2000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나라들, 시간과 공간들을 넘어 이미 오신 메시야이신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됨에 있어서도, 게다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의 모든 하나님의 법 앞에서 꼭 원죄를 거론하지는 않더라도 따지고 보면 머리털보다도 더 죄악들이 많고 일만 달란트 빚진 종과 다르지 않으며 억만 죄인이 아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되며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고 본질적으로는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되는 이신칭의의 구원과도 결코 다를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이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살면서 범하게 되는 크고 작은 죄악들, 때로는 심각하고 중대한 죄악들에 있어서의 자복과 돌이킴들이 가능하고 그로 인해 정말 사함과 나음들, 회복과 역전들까지 가능하게 됨에 있어서도, 게다가 살아 있는 말씀의 신앙과 함께 삶의 자리와 사역의 현장과 인류 역사의 상황들 속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온갖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 특히 여러 모양의 응답과 이적들, 승리와 복들 등을 생생히 누리게 됨에 있어서도, 심지어는 부족함과 부끄러움들, 실수와 악행들 투성이인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도 앞서 간 믿음의 선배들과 같이 당대 뿐 아니라 오랜 세월들에 걸쳐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과 놀라운 일들을 보이시고 믿음의 본과 도전들, 실제와 영향력들이 되게 하시며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과 축복들, 부활과 열매들의 도구와 통로가 가능하게 됨에 있어서도, 더 나아가 세상 끝 날의 신령한 몸으로의 부흥과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을 실제로 누리게 됨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동일하고 생각 이상으로 직결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조금만 통찰해 봐도 모든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서는 그와 같은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마다 결코 구주 예수님 단독이실 수는 없는 것으로 단 하나, 단 한 번, 단 한 순간도 예외 없이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 전부터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약속하시고 예정하시며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심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고 애초부터 시작될 수 있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다 실행하시고, 특히 그 한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정말 하나하나 모두 다 누리고 경험하며 나타나고 성취되어 지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바로 그러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자체가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 있어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특히 크고 작은 모양의 온갖 응답과 승리와 복들 등을 날마다 순간마다 생생하게 누리고 강렬하게 경험하며 사느냐, 아니면 자신의 힘이나 의, 세상적 능력이나 방법들을 여전히 의지하면서 마치 옛 사람과 같이 죄악과 세속과 정욕과 자기 소견과 우상과 불신앙들 등으로 마치 병들고 죽은듯한 신앙이 되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들과 같은 징계들에 허덕이고 적지 않은 시간을 광야 40년과 같이 방황케 되느냐에 있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순간순간마다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을, 특히 사도 바울과 같이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얼마나 죄악들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서는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어느 정도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믿음, 곧 어느 정도까지의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 치열하고 뜨거우며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말씀의 열정이 될 수 있느냐가 깊이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생각 이상의 기준과 관건, 방법과 통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세기37:18~20)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3월 21일(목)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