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슬강좌/ 레위기 23 장
레 23장.wma
먹기는 파발, 뛰기는 역마 (레 23:1-44)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져 나오는 말이 “노예계약”입니다. 연예인과 기획사간의 흥행 계약이 기획사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 계약이니 개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곰이 재주는 자기가 부리는데 엄청난 흥행수익은 주인이 다 챙기는 것 같아 더 이상 재주를 못 부리겠다고 버티는 꼴입니다. 비슷한 말로 ‘발장식지 이마해치’(撥長食之 爾馬奚馳)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기는 파발(조선 때 공문을 각 역참에 나르던 사람)이 먹고 뛰기는 역마가 뛴다”는 말인데 정작 애 쓴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이 배를 채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가 “노동소외”(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주는 인간적인 방식의 노동이 상실되었다는 주장. 그래서 노동에 종사하는 자들이 전반적으로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상황에 놓여있다고 지적)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착취당하는 노동자편에 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노예계약” “노동소외”는 이 땅에서 근절될 수 없는 필요악임을 누가 알겠습니까? 기가 막힌 사실은 이런 노예계약이나 노동소외가 일반적인 모든 종교의 근간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로 수고는 힘없는 인간이 하고 모든 수익은 신이 누리는 형상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부당한 계약과 소외를 파기하려는 시도가 3500년 전에 그것도 주도권을 쥐고 있는 신으로부터 발제되었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의 칠(七)대 절기가 언급 되어있습니다. 종교적 축제형식을 띤 여섯 명절과 함께 일곱 성회의 날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각각 “성회”(聖會)로 지칭된 이 날들은 24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일곱째 날 “안식일”(3절-삽바트)과는 구별되는 “안식일”(삽바톤)로서 “절기 안식일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일곱째 날 안식일 이외에 일곱 개의 절기 안식일들(무교절 첫날과 마지막 날,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첫날과 마지막 날)이 있었던 셈입니다. 흔히 십자가에서 폐해졌다고 믿는 안식일(골 2:16~17-여기에 나오는 ‘안식일’은 헬라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있음, 즉 ‘안식일들’이라고 번역해야 함 - 많은 영어 번역본들도 sabbaths로 번역함)은 엄밀한 의미에서 일곱 개의 절기 안식일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이 현대 기독교의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부언하자면 골로새서 2:16~17에서 바울이 십자가에서 폐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그림자는 제사제도를 지적한 것입니다. 16절에 “먹고 마시는 것”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은 그 날에 드려지는 번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그 날들에 드려지는 번제를 가리키기 위해 관용적으로 양식화되어 쓰였던 표현(대상 23:31; 대하 2:4; 8:13; 31:3; 느 10:32; 겔 45:17)을 구약에 능통한 바울이 구약식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폐일언하고, 더 이상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표상했던 구약의 제사를 안 드려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사실은 모든 절기마다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절이기에 아무 일도 안하고 잔치를 즐기는 것은 당연한 것일 텐데 왜 유독 이 말을 강조하듯 매번 반복하여 부언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강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강조하는 주체자의 강력한 의지가 무엇에 결집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자는 제스처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제 4계명인 안식일 계명에서 유독 강경하게 누구든지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쉼을 주시기를 갈망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엿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안식일과 모든 명절에 노동을 하지 말라하시는 말씀의 참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먼저 노동이 인간 내부의 정신 및 육체의 능력을 사용하여 외부의 자연계로부터 생존을 위한 필요물들을 얻는 것이라고 볼 때 노동을 하지 않음은 이 외부세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은 이 땅 위의 노동을 멈추므로 땅에 쏟던 관심을 끊고 오직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기 때 일을 하지 않음은 인간의 노동이 중단 된 상태에서도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광야 사십년 때와 같이 하나님의 활동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공급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각종 절기와 노동금지의 이러한 상관관계가 완전히 성취된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함을 통해 바울 사도의 말처럼(갈6:14) 내가 외부 세계인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이 또한 “나”에 대해 죽게 됩니다. 즉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세상에서의 소고가 끝이 나는 상황입니다. 내 삶의 자리가 구약식 절기 혹은 명절의 상황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십자가로 날마다 죽으면(고전 15:31) 매일 매일이 명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갈2:20) 일이 벌어집니다. 아빠 엄마 교사 의사 경찰 사업가 등등 모든 이들의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빌 2:13)는 것입니다. 삶을 위한 수고를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서 대신 행하시므로 자기의 일을 멈추고 당신께 나온 자들에게는 참된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마 11:28)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동안 하나님과 선민사이에 부당한 노예계약이나 맺어진 것처럼 선민과 세상에 인식되어 온 오해의 진실이며, 신비로운 축복의 현장으로 초청하는 안식일속의 십자가 복음(Cross in Sabbath Gospel)인 것입니다.
존경하는 청취자 여러분
더 이상 십자가로 매일 죽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러한 복음의 요청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히 2:15)이요 우리가 매일을 기쁨의 명절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다함없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십자가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은 나를 등에 태우시고 하나님께서 힘차게 달리고 계시는 동안 내 인생은 날마다 바람을 가르며 하나님 소원의 목적지마다 당도해 먹고 즐기는 잔치를 만끽할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인간의 죄 된 본성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땅위에 공평과 자유, 그리고 안식과 행복은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십자가로 나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노예처럼 살지 않기를 원하여 이 아침 당신께 나왔사오니 내 안에 임하사 오늘도 축제의 잔칫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고맙습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하시고 이곳에서의 시간이 행복한 시간 되시길 기도 합니다
네 감사드립니다
좋은글로 창골산 봉서방 카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