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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뱃길, 19세기 철길로 전 세계 이어져
‘80일간의 세계일주’ 20년 후 실제 ‘60일 일주’ 기록
20세기 항공 가세하며 ‘일반인 여행’ 대 유행
탐험< 정복< 교역< 정신적 공유 … 시야 넓어져
런던~수에즈 (철도+기선) 7일
수에즈~ 봄베이 (기선) 13일
봄베이~ 캘커타 (철도) 3일
캘커타~ 홍콩 (기선) 13일
홍콩~ 요코하마 (기선) 6일
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기선) 22일
샌프란시스코~ 뉴욕 (철도) 7일
뉴욕~ 런던 (기선+철도) 9일
도합 80일
프랑스 작가 쥘 베른(Jules Gabriel Verne, 1828~1905)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런던에 살고 있는 가상인물 필리어스 포그의 우발적인 결심으로 시작된다. 그가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사교클럽(혁신클럽)에서 신문을 읽다가 ‘이런 일정이 정말 가능할까?’라는 대화 끝에 회원들과 내기를 걸고 그 즉시 여행을 출발한다는 설정이다.
<과학기술과 상상소설, 서로 아이디어 주고받아>
소설 속의 여행은 1872년 10월 2일 오후 8시45분부터 12월 21일 같은 시각까지 돌아와야 하는 일정으로 돼 있다. 소설은 주인공이 출발했다는 날짜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6일부터 파리의 ‘르 땅’(Le Temps=Time이라는 뜻)에 연재되기 시작했는데, 독자들은 마치 주인공의 여정을 실제 사실처럼 느끼며 손에 땀을 쥐고 다음날 신문을 기다렸다.
주인공이 런던 혁신클럽에 나타나 승리를 거두는 마지막 장면은 소설 속의 날짜 하루 뒤에(12월23일자) 게재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독자들에겐 그 느낌이 얼마나 생생했을까. 이 여행소설 하나가 그동안 혁명이니 전쟁이니 하는 정치적 구호에 지친 파리지엔들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았다. 시민들은 거의 누구나 이 소설을 읽었으며, 식당이나 카페에 모이면 으레 미지의 세계를 여행 중인 필리어스 포그의 상황이나 그가 머문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늘자에서 벌어진 위기상황을 과연 잘 극복했을까, 어떻게 돌파했을까를 상상하며 토론을 벌이거나 내기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Jules Gabriel Verne, 1828~1905)과 그가 1872년에 쓴 상상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 초간본
주인공이 출발하던 날 벌어진 은행강도사건, 주인공에게 혐의를 두고 신분을 감춘 채 뒤따르는 런던경시청의 형사, 좌충우돌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우직한 하인 파스파르투, 인도에서 서티(순장)의 풍습에 따라 죽은 남편과 함께 불태워질 뻔한 젊고 현숙한 여인 아우다…. 난데없이 닥치는 폭풍과 인디언의 습격 등 긴장 포인트는 (연재소설답게) 매회 이어졌다. 사건의 배경이나 행간의 묘사로 소개되는 외국의 기이한 풍습과 문물 이야기는 아직 다른 대륙을 가본 적이 없는 대다수 독자들에게 요긴한 흥밋거리였다.
TV커녕 라디오 드라마도 없던 시절이다(라디오 자체가 없었다). 일간 신문 연재소설의 위력은 그러니까 TV 일일 드라마 이상으로 대단했다.
쥘 베른이 소설을 성공시키자 그동안 썼던 그의 많은 과학상상소설(SF) 작품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땅속 여행’ ‘지구에서 달까지’ ‘해저 2만리’ ‘기구를 타고 5주간’ 등 모두 ‘경이로운 세계’라는 테마로 연속 발표했던 작품들이다. 이후에 쓰는 작품들도 쓰는 족족 화제를 모았다. ‘신비의 섬’과 ‘챈슬러호’ ‘황제의 밀사’ ‘녹색광선’ ‘15소년 표류기’ ‘서기 2889년’ 등등이다.
하늘 바다 땅속 해저 우주 무인도 … 쥘 베른이 그린 모험여행의 세계는 그로부터 1백년이 안 되어 그 절반 이상을 현실에서 볼 수 있었다. 과학자도 아닌 작가로서 어떻게 이렇게 미래를 잘 예측했을까 놀라울 정도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이후 많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사실 쥘 베른 자신은 그때까지 나온 여러 가지 과학기술의 정보와 예측들을 채용하여 쓴 것이었다. 과학은 작가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작가는 다시 과학에게 영감을 준다. 특히 어린 시절 신화나 노래, 과학상상 소설들을 통하여 먼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기 시작한 아이들이 자라나 과학자가 되기도 한다. 과학과 문학은 서로에게 큰 빚을 지우며 상생의 공조를 해나가는 것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도 여행을 좋아했던 쥘 베른은 이 소설의 성공으로 작품 속 필리어스 포그처럼 비용걱정 없이 마음껏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자가용 요트를 세 번이나 바꿀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행과 독서를 통하여 얻은 정보와 지식들을 토대로 또 다른 상상소설을 썼다. 그가 1863년에 썼다는 ‘20세기 파리’는 1백년 뒤 문명세계의 이면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출판되지 못하고 분실되었다가 1백년도 더 지나서야 증손자에게 발견되었다. 당시 편집자는 그것이 너무 비현실적인 예측이라며 20년 뒤에나 검토해보자고 게재를 유보했다고 하는데, 150년 뒤인 지금 시점에서 보면 너무나 놀라운 예측이다. 예를 들면 ‘고전문학을 전공한 청년이 기계문명이 압도하는 미래사회에서 취업조차 못하고 방황하다가 빈곤 가운데 죽어간다는’ 등의 예언들.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의 문명비판 소설들도 그로부터 70년이나 뒤에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쥘 베른의 통찰력은 매우 놀랍다. 역시 여행은 인간의 혜안을 열어주는 마력이 있음이 분명하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초판의 삽화들. Edvard Forsström 작 (퍼블릭 도메인)
<“쥘 베른의 기록을 깨라” 두 여기자의 도전>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세계인을 설레게 한 지 17년이 지난 1889년. 미국의 한 야심만만한 20대 여성이 소설 속의 여행일정을 따라 현실검증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뉴욕월드’라는 신문사의 기자였던 넬리 블라이는 당시 25세. 여행 도중 파리에 들러 <80일간의 세계일주> 저자인 쥘 베른을 인터뷰하는 일정을 포함하여 필리어스 포그의 성과보다 사흘 짧은 76일 이내에 뉴욕으로 돌아오겠다는 단독 취재여행 목표를 세웠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소설 주인공의 기록에 도전하여, 1889년 같은 코스로 세계일주에 도전한 '뉴욕월드'지 기자 넬리 블라이와 실제 여행차림. (1889년)
이 신문사의 사주는 후일 ‘퓰리처상’의 설립자인 조셉 퓰리처로 꽤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 계획서를 선뜻 승낙하지 못했다. 비용은 둘째 치고 아직 19세기. 이 세계는 아직 여성에게 충분히 안전하지도 관대하지도 못한 시절이었다.
유럽에서도 아직 여성들은 참정권이 없었고 대학입학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다(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최초 사례는 1893년 뉴질랜드라고 한다). 후일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프랑스의 화학자 마리 퀴리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수 임용이 안 돼 교수남편의 조수 자격으로 겨우 연구에 참여하고 있을 때다. ‘넬리 블라이’라는 이름만 해도 그랬다. 당시 신문에서는 여기자들 개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실명 대신 필명을 만들어 쓰게 했다. ‘넬리 블라이’는 여기자 엘리자베스 코크란이 당시 인기있던 스티븐 포스터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필명이다.
퓰리처 사장은 이 도전적이고 멋진 취재를, 아쉽지만 남자 기자에게 맡기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넬리 블라이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신은 경쟁사로 옮겨가서 그 남자를 꺾어 보일 것이라며 반발했다. 결국 넬리 블라이는 1889년 11월14일 뉴욕항에서 기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블라이는 파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62세의 쥘 베른을 방문하여 인터뷰 기사를 신문사에 송고 했다.
넬리블라이와 반대방향으로 향해 태평양 기선에 오른 '코스모폴리탄' 기자 엘리자베드 비슬랜드.
한편, 단독으로 시간기록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이벤트는 경쟁이 있을 때 더 흥미로워지는 법이다. 뉴욕의 신생 매체인 ‘코스모폴리탄’이 그 소식을 듣고는 ‘뉴욕월드’와 똑같이 여기자 한 사람을 준비시켜 지구 한 바퀴를 돌게 했다. 코스는 비슷하지만 코스모폴리탄의 엘리자베드 비슬랜드는 넬리 블라이와 반대 방향인 서쪽으로 출발하여 대륙횡단열차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태평양부터 건넜다.
‘두 뉴요커의 세계일주 기록경쟁- 그것도 20대의 여기자들’
흥미를 끌만했다. 게다가 이야깃거리를 제대로 요리할 줄 아는 퓰리처 사장은 무료여행권 같은 상품을 내걸고 ‘넬리 블라이 귀환시간 맞추기’ 퀴즈와 같은 이벤트를 병행해 독자들의 흥미를 부채질했다. 두 매체는 이벤트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여행 중 기자들은 여건이 허락할 때마다 전보나 전신으로, 그리고 더듬더듬 이어지는 전화선으로, 자신들의 위치와 간단한 근황을 알렸다. 이를 토대로 편집자들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만한 포맷으로 기사를 작성해 내보냈다. 뉴욕사람들은 17년 전 파리 사람들이 쥘 베른의 소설을 읽으며 그랬던 것처럼, 모이기만 하면 이 경쟁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고 내기를 걸었다. 이번에는 그 결과가 작가의 의지에 달린 소설이 아니라 누구도 감히 예단할 수 없는 실전이라는 게 차이였다.
외국의 주요 국제도시에서 발행하는 신문들도 두 뉴욕 매체들의 이벤트를 해외화제 형식으로 사진과 함께 다루었다. 덕분에 블라이는 통과 중인 외국도시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쥘 베른이 <80일간의 세계일주>가 가능하다고 본 것은 그 무렵 유럽 지중해에서 인도양으로 곧바로 나갈 수 있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1869) 미 대륙에는 동서횡단 철도가 개통(1868)되었기 때문이다. 인도 대륙에도 전체가 통일된 형태는 아니지만 주요구간을 잇는 여러개의 철로들이 운행되고 있었다. 주요 국가들 사이에는 증기선 정기항로가 운항되고 있었다.
1866년 대서양을 가로질러 놓인 해저케이블은 주요 사항을 모르스 신호로(전보) 주고받을 수도 있게 했다. 영국의 식민정책으로 동인도회사가 나가 있는 인도-싱가폴-상해, 그리고 근대화된 일본(도쿄)와 미국이 진출한 태평양 거점 하와이 등은 민간 여객자들에게 안전한 중간 거점을 제공할 수 있는 물리적 시스템이 될 수 있었다.
17년 뒤 넬리 블라이가 뉴욕을 출발할 때에는 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시험적인 전기자동차와 다임러 벤츠의 엔진자동차가 시판되어 육상 이동이 훨씬 간편해졌고, 기선이나 열차의 속도도 빨라졌다. 세균학의 급속한 발달로 질병의 위협은 크게 낮아졌으며, 에디슨의 백열전구는 80년대부터 대부분 도시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아직 충분히 편리하지는 못하지만 도시와 도시 사이에선 전화 연락도 가능했다. 벨의 전화기가 발명된 것이 1876년이다. 여행자들이 훨씬 간편함을 느낄 수 있는 청바지나 인조견 등으로, 더구나 미국의 신여성들은 더 이상 드레스에 갇혀 지내지 않았다. 두 기자가 중간 중간 써서 보내는 취재보고서는 그 때마다 지면에 소개되었다. 70년대에는 없던 파리의 에펠탑, 새로 개업한 물랑루즈를 비롯하여 무언가 불안해보이지만 활기차게 변모하고 있는 유럽 도시들의 풍경이 이들 여기자들의 리포트를 통하여 뉴욕에 전해졌다.
1872년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주인공이 여행한 세계일주 경로.
1889년 뉴욕의 두 여기자도 이 경로를 따라 여행했다. 한 사람은 같은 방향, 한 사람은 역방향으로.
<단축되는 시간기록… “세계가 한 마을”>
블라이가 일본에서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널 때는 이미 1890년 새해였다. 악천후로 인해 바다위에서 예정보다 이틀이 더 소요됐지만 자유의 여신상을 돌아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하자 그녀를 위한 특별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블라이의 기록 단축을 돕고, 매체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퓰리처 사장이 특별히 전세 낸 ‘미스 넬리 블라이 스페셜’ 열차의 외부에는 넬리 블라이를 응원하는 현수막도 달려 있었다.
세 구간으로 나누어진 횡단철도를 세 대의 열차를 바꿔 타며 달리는 동안 기관사들도 특별한 사명감을 느꼈던지 속력을 다했다. 순간 최대 시속 100km 정도의 신기록을 포함하여 전체 구간 평균시속은 60km 정도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4천km가 넘는 구간을 이틀 스물한시간(69시간) 만에 주파했다. 중간 환승역에 1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기도 했다. 17년 전 쥘 베른의 필리어스 포그의 계산으로는 7일이 걸리는 거리였고 철로 길이도 6천Km로 절반이나 더 길었으며, 실제 스토리에서는 들소떼가 느릿느릿 철로를 건너고 인디언의 습격을 받는 등으로 8.5일이나 걸렸던 구간이다.
1891년 1월, 세계여행을 마친 넬리 블라이가 뉴욕에 도착하자 신문사와 도시 관계자들, 그리고 기사를 보고 몰려든 관중들에게 둘러싸여 환영을 받고 있다. 당시 보도된 스케치. 넬리 블라이의 일주 기록은 72일이다.
1890년 1월 21일. 넬리 블라이는 4만70km 여정을 끝내고 72일 6시간 7분 만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경쟁자인 엘리자베드 비슬랜드는 런던에서 돌아오는 배를 놓치는 바람에 도착이 한층 늦었지만, 그래도 필리어스 포그의 기록보다는 빠르게 돌아왔다. 76일하고도 절반의 기록이다.
두 사람은 각각 여행기를 출판했고, 이때 얻은 지명도에 힘입어 순조롭게 작가로 변신했다. 이때 여행기에서 비슬랜드는 스스로 여행을 자청했던 넬리 블라이와 달리 사주의 갑작스런 명령으로 생각지도 않은 여행을 떠나야 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넬리 블라이의 일주기간 72일은 분명히 신기록이었지만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자들에 의해 곧 기간이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가장 두드러진 도전자는 바로 조지 프랜시스 트레인이라는 이름의 사업가였다. 그는 1870년에 이미 세계를 일주를 했는데, 당시 기록이 80일 정도였다. 때문에 쥘 베른의 소설이 그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트레인은 남미 증기선 항로의 개설자이자 대륙철도의 동부 쪽을 건설한 유니온 퍼시픽철도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좀 괴짜에 속했던 그는 넬리 블라이가 여행을 마친 바로 그 해에 세계일주 기록을 67일로 단축시켰고, 1892년에 다시 도전하여 60일 만에 여행을 마쳤다.
16세기 마젤란의 세계일주 이후 바다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탐험가들과 신대륙을 찾아내려는 정복자들, 그리고 새로운 보물을 찾아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사업가들로 북적였다. 대다수 정복자들은 자기 나라의 왕이나 부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새로운 영토에 왕조의 깃발을 꽂으려 했다. 한번 떠나면 몇 년이나 몇십년의 유랑을 해야 했고, 당연히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했다. 스페인의 마젤란이나 영국인 드레이크 당시 세계일주 도전자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확률은 통상 20%를 넘지 못했다. 떠난 뒤에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도 있고, 아예 중간에 기지를 두고 낯선 항해를 하는 초보자나 상인들을 갈취하는 해적으로 변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무렵의 바다는 더 이상 ‘죽음의 여행길’이 아니었다. 적어도 정기선이 다니는 항로라면 중간 중간 기착하여 물과 식량, 그리고 기선의 연료인 석탄을 새로 채울 수 있는 항구들을 일정 간격 이내에 만날 수 있었고, 그 때마다 땅을 밟고 휴식을 취함으로써 망연한 항해에서 얻는 노스탤지어(향수병)을 얼마간은 떨쳐낼 수도 있었다. 경험 많은 선원들은 수십 일의 항해 기간에 선객들이 무료하지 않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문화강좌나 스포츠 프로그램, 강연회, 연주회도 있었지만, 매일 밤 빼놓지 않고 열리는 단골 프로그램은 선상무도회였다.
1912년 4월 대서양 항로에 도전했던 (비록 실패했지만) 배수량 5만2천톤, 승객정원 3,327명의 초대형 크루즈선 ‘타이타닉(RMS Titanic)’호는 20세기 초반 바다여행이 얼마나 일반화되고 점차 고급스러운 일상이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2편에 이어짐)
쥘 베른 <80일간의 세계일주> 초간본의 삽화 中 태평양을 건너는 증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