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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산악인 엄홍길 세계에서
8번째로 8000m급 14좌 모두 등정
‘작은 탱크’로 불리는 산악인 엄홍길씨가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2001년
5월16일 히말라야 로체봉 (8516m)등
정에 성공, 세계 8번째이자 동양인 최초
로 8000m급 14좌를 모두 등정하는 대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다른8,000m급 위성봉인 얄룽캉
과 로체샤르를 등정하여 세계 최초로 16
좌 등정에 성공한 대한민국 산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 다만 엄홍길의 시샤팡마 등정
은1993년에 이루어졌으나 등정 실패의혹
으로 인정 받지 못한 탓에 논란을 불러왔으
나,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의 국제 공인
기록인 2001년의 재등정을 인정받으면서
마무리되었다.
엄씨는 이날 새벽 3시30분 7500m 최종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5시간 45분 만인
9시 15분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2015년단독 ‘3무(無) 요트’
세계일주 성공한 프리랜서 PD 김승진씨
프리랜서 PD 겸 모험가인 김승진(53) 선장이 세계에서 6번째로 단독 3무(無) 요트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고 해양수산부가 밝혔다. ‘3무’는 무동력(動力), 무기항(寄港), 무원조(援助)를 말한다. 오직 바람의 힘으로,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 식량 보급 등 아무 지원 없이 홀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인정되는 대기록이다. 1969년 영국의 로빈 녹스 존스톤에 이어 반세기 가까이 일본·호주·중국·인도 등 5개국 출신만 성공했다.
무동력·무기항 요트 세계일주에 성공한 김승진(53)씨는 출항 때 실어둔 2L들이 생수 450병과 쌀, 육포, 건조 과일 및 야채 등을 조리해 먹고 빗물에 목욕하며 210일간 항해했다. / 김승진 선장 페이스북
김 선장은 작년 10월 19일 충남 당진 왜목항을 출발, 적도를 건너 ‘바다의 에베레스트’라는 남미 최남단 케이프 혼과 남아공 희망봉, 인도네시아 순다 해협을 거쳐 4만1900㎞를 항해했다. 지난 13일 오후 9시 20분 출발점인 당진 앞바다에 도착해, 16일 210일간 항해를 마치고 환영 행사가 열린 왜목항으로 입항했다.
그는 “후원해준 700여분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항해하며 ‘앞으로 더 겸손해지고, 나누는 삶을 살자’고 늘 다짐했다”고 말했다. 한국크루저요트협회 박주용(60) 부회장 등 ‘육상 지원팀’ 6명이 24시간 교대하며 기상 정보를 실시간 제공했고, 당진시 부녀회가 고추장·된장·고구마·호박·호두·들기름 등을 미리 마련해줬다. 고등학생인 딸 가은(18)양의 응원이 무엇보다 힘이 됐다고도 했다.
김 선장은 KBS ‘도전 지구탐험대’ ‘환경 스페셜’을 제작한 다큐멘터리 전문 프리랜서 PD다. TV조선의 ‘크로스미디어 WHY’와 ‘루트 사람사이’도 외주 제작했다. 청주 출신으로, 한성대와 일본 동경비주얼아트 방송예술과를 졸업하고 후지TV에서 방송 제작 경험을 쌓았다.
그는 “하루에 전진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일상의 행복을 즐기면서 항해했다”고 말했다.
▶2012년로버트 케네디 2세의 부인
메리 리처드슨 별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며느리인 메리 리처드슨 케네디(52)가 16일 뉴욕 자택에서 홀로 숨진 채 발견됐다고 CNN 등이 보도했다.
숨진 메리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며느리로, 남편은 유명 환경전문 변호사인 로버트 케네디 2세다. 메리는 로버트 케네디 2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으며, 1994년 결혼 후 자녀 4명을 뒀다.
메리는 2010년 5월부터 남편과 이혼 소송 중이었다. 그는 약물과 알코올 중독 등으로 치료를 받아 왔고, 음주운전으로 두 차례 체포된 전력도 있다. 현지 경찰은 “숨진 메리가 발견된 장소는 남편 로버트 케네디 2세 명의의 집 바깥채였으며, 정확한 사인(死因)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 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뉴욕데일리뉴스 등 현지 언론들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 메리가 자살했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메리의 죽음으로 ‘케네디가의 저주’ 역시 또다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불운한 역사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사업을 통해 큰 부(富)를 쌓은 뒤 영국 대사까지 지낸 조지프 케네디(1888~1969)의 장남 조지프 케네디 2세가 제2차 세계대전에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사(戰士)하면서 시작된다. 1948년에는 넷째딸 캐슬린이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장남에게 걸려 있던 가문의 기대를 이뤄낸 것은 둘째 존 F 케네디였다. 그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미국의 35대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그 역시 1963년 댈러스에서 총탄에 맞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1968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메리의 시아버지인 로버트 케네디가 유세 도중 암살당했다. 그는 법무장관, 뉴욕주 상원의원을 거쳐 민주당 대선 경선에 참여, 백악관 입성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세간에서는 ‘저주’ 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 존 2세가 소형 비행기를 몰다가 추락, 39세로 생을 마감했다. 2009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막냇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뇌종양으로 별세했다.
▶2011년스트로스 칸 IMF총재
‘성범죄’ 논란
▶2011년중견배우 박주아,
69세 나이로 별세
▶2010년헤비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
로니 제임스 디오 별세
▶2009년쿠웨이트, 최초 여성의원 당선
쿠웨이트 헌정 사상 첫 선출직 여성의원이 탄생했다. 쿠웨이트 선관위는 2009년 5월 16일 치러진 총선 개표 결과, 4명의 여성후보가 당선됐다고 밝혔다.
여성후보 당선인은 쿠웨이트 첫 여성 장관인 마수마 알-무바라크, 대학교수인 아실 알-아와디, 여성인권 운동가 로라 다시티, 대학교수 살와 알-자사르 등 4명이다. 특히 무바라크 당선인은 자신의 선거구에서 다른 남성후보들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쿠웨이트 총선은 5개 선거구에서 10명씩 모두 50명을 선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자신의 선거구에서 10위 안에만 들어도 의원에 당선된다. 이번 총선에는 남성 194명, 여성 16명 등 모두 210명이 출마했다.
여성의원의 당선은 1963년 쿠웨이트 의회 개원 이후 최초의 일이다. 2005년 알-무바라크가 기획ㆍ행정발전담당 장관에 임명되면서 당연직 의원으로 활동한 적은 있지만 국민투표에 의해 여성이 의원직을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쿠웨이트 의회는 직선제 의원 50명과 당연직 각료 15명으로 구성된다.
쿠웨이트 여성에게 참정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2005년이며 이후 2006년, 2008년 총선에 모두 54명의 여성 후보가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2008년 ~18일 나성 영락 교회,
북한 선교 세미나(서울 영락 교회와 함께).
▶2007년에베레스트 박영석팀
등반대 대원 2명 사망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등반에 나섰던 박영석 대장팀의 오희준(吳熙俊·36·제주 영천산악회), 이현조(李鉉祚·33·전남대산악부 OB) 대원이 16일 등반사고로 숨졌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는 실버원정대가 이날 위성전화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두 대원은 제5캠프 박스텐트(가파른 벽에 로프로 고정 설치하는 텐트) 안에 있다가 눈사태로 추정되는 충격에 의해 텐트가 해발 8100m에서 6500m의 제2캠프까지 1600m를 굴러떨어지면서 사망했다.
밤중에 눈이 쌓이자 이날 밤 1시쯤 불안감을 느낀 오희준 대원이 베이스캠프의 박영석 대장에게 “어떻게든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 며 무전 교신을 하다가 갑자기 교신이 끊어졌다. 이에 곧바로 수색에 나선 한국 산악인들은 이날 오후 3시쯤 제2캠프 근처에서 두 대원의 시신을 발견했다.
사망한 두 대원은 박영석 대장과 트리오를 이루었다고 할 만큼 항상 등반에 동행했던 베테랑 산악인. 오희준 대원은 박 대장과 더불어 이미 8천 미터 거봉 9개를 등정했고, 이현조 대원 역시 8천 미터 봉의 난벽 중 하나인 낭가파르바트 루팔 벽을 비롯해 8천 미터급 4개 봉 등정, 남극점 도보 탐험 등 풍부한 경력의 소유자다.
▶2007년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취임식
프랑스가 ‘시라크 시대’를 접고 ‘사르코지 시대’를 열었다.
16일 오전 11시(한국시각 오후 6시·이하 현지시각) 니콜라 사르코지(Sarkozy ·52)가 프랑스 역사상 23번째, 프랑스 제5공화국의 6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자크 시라크(Chirac·74) 대통령은 12년간의 재임 기간을 접고 ‘시민 시라크’로 돌아갔다.
프랑스 정계의 거목(巨木)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12년간 살던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 궁)을 떠나는 데는 30여분밖에 안 걸렸다. 16일 오전 10시 57분 파리 시내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검은 리무진이 엘리제궁 뜰로 들어섰다. 시라크 대통령이 현관까지 나와, 붉은 카펫 위로 내려서는 사르코지를 맞았다. 두 사람은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핵무기 코드를 넘겨주는 것이 대통령 권한 인수인계의 핵심이다. 30여분 걸렸다.
오전 11시 36분, 두 사람이 다시 궁 현관에 나타났다. ‘전직’ 대통령이 된 시라크와 새 대통령 사르코지는 함께 우파 대중운동연합(UMP) 소속이었지만 ‘2007 대선’ 고지를 놓고 오랫동안 경쟁한 사이였다. 시라크는 임기 말 지지율이 급락해 3선의 꿈을 접었다.
‘시민 시라크’를 태운 자동차가 엘리제궁을 빠져나와 거리에 나타나자 시민들이 따뜻한 환호를 보냈다. 시라크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천천히 흔들었다. 2분 뒤, 시라크를 태운 승용차는 엘리제궁의 시야에서 영영 사라졌다.
오전 11시 40분, 시라크를 떠나보낸 사르코지가 100여명의 귀빈이 기다리는 엘리제궁 홀에 나타났다. 장 루이 드브레(Debre) 헌법위원회 의장이 “사르코지가 프랑스 대통령으로 취임했다”고 선포하는 순간, 멀리 나폴레옹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에서 21발의 예포가 울려퍼졌다.
사르코지 새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도 ‘변화’를 강조했다. “변화에 대한 요구가 있다. 전 세계가 더 빨리 변화하려고 애쓴다. 지체하는 건 치명적”이라는 말로 개혁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이날 새 퍼스트 레이디 세실리아(Cecilia)는 진주빛 원피스 차림으로, 세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각각 재혼한 사이로, 다섯 자녀 중 막내 아들 루이(10)만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간 불화설도 무성했지만 세실리아는 루이의 손을 꼭 잡고 시종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날 사르코지는 ‘생애 최고의 날’을 만끽했다. 오후 2시 무개차(無蓋車)를 타고 샹젤리제 대로를 지나 개선문까지 카 퍼레이드를 했다. 개선문의 무명 용사 묘에 헌화한 뒤에는 잰 걸음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가 악수도 했다. 시민들과 사진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사르코지를 경호하느라 경호원들이 진땀을 흘렸다.
취임 행사를 마치고는 곧바로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앙겔라 메르켈(Merkel) 독일 총리를 만나 유럽헌법을 논의하면서 분주한 임기 첫 날을 보냈다.
이날 테러 협박도 있었다. 알카에다의 하부조직을 자처하는 단체가 이슬람어 웹사이트에 “프랑스인들이 시오니즘을 내세우는 사르코지를 선택했으니 유혈 성전(聖戰)에 나서겠다”고 했다. 긴장이 높아졌지만 별다른 사태는 없었다.
▶2006년 1 세대 맥북이 갑자기 공개됐다
▶2005년남북 차관급 회담
(2005.5.16-19 개성)
▶2005년 우즈베키스탄 시위 유혈 진압
시민’군경 수 백 명 사망.
▶2003년 대한적십자사 이라크 바그다
드서 긴 급 의료활동본격 전개
▶2003년이라크 긴급 의료지원단 발대식,
요르단 암만으로 출발
▶2001 년 총신대학교 개교 100주년기념
예배를 드리 다
▶2001년산악인 엄홍길 세계에서 8번째로
8000m급 14좌 모두 등정
작은 탱크’로 불리는 산악인 엄홍길씨가 2001년 5월 16일 히말라야 로체봉 (8516m) 등정에 성공, 세계 8번째이자 동양인 최초로 8000m급 14좌를 모두 등정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엄씨는 이날 새벽 3시30분 7500m 최종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5시간 45분 만인 9시 15분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엄씨는 2000년 7월 31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 정상에 올라 세계에서 7번째로 14좌 모두를 정복했으나 그동안 국제산악연맹으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해왔다. 1995년 로체봉 등정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1986년 오스트리아의 라인홀트 매스너가 처음으로 성공한 뒤, 이제까지 7명밖에 이루지 못했던 전세계 등반인의 꿈이었다.
1960년 경기도 의정부시 도봉산 골짜기에서 태어난 엄홍길은 어려서부터 도봉산을 오르내리며 산악인의 꿈을 키웠다. 1m68cm, 60kg의 작은 체구지만 최정예 부대인 해군 수중파괴대(UDT)에서도 잠수실력을 인정받을 정도로 엄청난 폐활량과 지구력의 소유자였다. 25세때인 1985년 에베레스트 첫 원정과 1986년 두번째 원정에서 정상정복에 실패했으나, 1988년 비로소 세계 최고봉에 오르면서 그의 히말라야 도전 성공사가 시작됐다. 1998년 안나푸르나 등정 때는 추락하는 셸파를 구하려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고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는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라내기도 했다.
▶2000년40년동안 백악관을 출입한
UPI통신 헬렌 토머스 女기자 사직
▶ 1997년 한석봉 친필서첩 발견
조선시대 명필인 한석봉과 그의 아들 민정이 쓴 글을 합본한 서첩이 발견됐다. 일본 긴키대학의 이원식교수에 의해 1997년 5월 16일 한석봉과 그의 아들 민정의 작품이 담긴 한씨양세묵묘서첩이 공개됐다.
석봉 한호는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열심이어서 집밖에서는 다리 난간에 글씨연습을 하고 산속에 들어가서는 나뭇잎에 글씨를 썼다는 기록도 있다. 석봉은 왕희지로부터 직접 글씨를 받은 꿈을 두번이나 꾸었을 정도로 그의 정묘한 필법을 익히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다. 석봉은 15세 때 향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25세에 진사에 합격할 때까지 이곳에서 공부했다. 진사 합격 후 곧 승문원 사자관에 임명됐다. 조선시대 최초의 공식 사자관이었다. 그 후 57세가 돼 가평군수를 맡을 때까지 내직을 돌면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공신교서 등 수많은 국가문서를 써냈다. 선조는 늘 그를 곁에 두고 붓과 벼루는 물론 때때로 좋은 술과 비단을 하사해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석봉은 당시 대표급 문인인 차천로·최립·허균 등과 교류할만큼 문학적 소양도 상당했다. 특히 도연명과 이백의 시를 좋아했다. 흡곡 현령을 끝으로 고향에 돌아간 석봉은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 1605년 세상을 떠났다.
▶1995년옴 진리교 주교 아사하라 쇼코 체포
일본 경찰은 1995년 5월 16일 오전 12명의 사망자와 5천여명의 피해자를 낸 동경 지하철 사린 독가스살인사건의 주범으로,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교주를 체포 구속했다. 경찰은 이날 새벽 5시30분쯤부터 전국 옴진리교 시설에 대한 일제 수색을 벌여, 약 4시간만인 오전 9시45분쯤 야마나시 가미쿠이시키 본부 제6사티안 건물에 은신 중이던 아사하라를 발견, 체포했다.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는 옴 진리교에 비판적인 인물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교단에서 탈퇴하려는 신자들을 납치, 살해한 뒤 흔적도 없이 사체를 처리하는 등 악질적인 범죄를 자행하다 경찰의 손길이 뻗쳐오자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독극물 사린에 의한 무차별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5년한국-카자흐스탄,
과학기술협력협정-문화협력협정 체결
▶1993년1967년 중동전 승리로 이끈
스파이 로츠 사망
▶1993년술레이만 데미렐,
터키 대통령으로 선출
▶1989년정명훈,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총감독 겸 상임 지휘자 취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가 1989년 5월 16일 파리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 총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정씨는 같은 해 2월부터 이 오페라단의 음악감독 취임 교섭을 받고 그동안 관계자들과의 협의를 거쳐 이날 5년 임기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것이다.
프랑스정부가 혁명 2백주년 기념 문화사업의 본보기로 추진한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은 프랑스는 물론 세계최고수준의 오페라극장을 목표로 총4억3천만달러를 들여 건립됐다.
세계 음악계에서 한국출신 음악가로는 가장 중요한 직책에 임명된 정씨는 정명화 정경화 등 두 누나와 함께 세계무대에 알려진 음악가족의 막내로, 1974년 세계최고의 권위를 지닌 소련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피아노 부문 2위를 차지함으로써 화제가 된 바 있다. 최근까지 이탈리아 플로렌스 오페라단 수석 객원지휘자이며 서독 자르브뤼켄방송 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아 왔다.
▶1985년노신영 제18대 국무총리 취임
▶1983년대규모 신석기 유적지
울진서 발굴 발표
▶1982년밀카 프라니노 유고
첫 여자수상에 피선
▶1980년일본 중의원
대평내각 불신임안 가결
▶1977년최규하 총리 지스카르
프랑스 대통령과 회담, 양국 경협강화 논의
▶1975년일본 여자등반대
여성으로 첫 에베레스트 등정
▶1975년한국-미얀마, 국교수립
▶1973년점보기 미주노선 첫 취항
(대한항공 KAL)
▶1973년대한일보 폐간
▶1972년국내 첫 1만t급 이상 대형 상선
'팬코리아호' 진수식
▶1970년서울대교 개통
한강과 여의도를 가로질러 마포와 영등포를 직결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서울대교가 착공 2년2개월16일 만인 1970년 5월 16일 개통됐다.
총공사비 15억9천8백만원과 연인원 23만5천명이 동원된 이 다리의 길이는 1천3백90m, 폭 25m의 6차선으로 다리양가에는 각 2m의 보도를 갖췄으며 4백W짜리 수은등 72개가 가설됐다. 이로써 한강엔 광진교, 제 1ㆍ2ㆍ3 한강교에 이어 다섯 번째 다리가 놓였다.
이 다리가 개통됨에 따라 서대문-당인리-용산방면을 거쳤던 약1만5천대의 차량이 매일 이 다리를 통해 지나갔으며 도심지에서 강남까지 30분 걸리던 것이 10분 단축됐다. 또, 서울대교의 마포쪽 입구엔 7억원을 들인 입체교차로가 세워져 서대문, 당인리, 용산방면의 교통량을 논스톱시스템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1967년한국-일본 항공협정 조인
▶1967년처음으로 한국법정에서
외국인 공판
▶1966년문화대혁명 시작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66년 5월 4일부터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북경확대회의에서 모택동 주석의 승인을 받은 `5ㆍ16 통지(通知)`를 발표했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게 됐다.
베이징시의 홍위병들이 자신들의
신문이라는 `홍위병보`를 팔고 있다.
이 통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깃발 아래 학술, 교육, 보도, 문화, 예술, 출판계의 브루조아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해 지도권을 탈취하며 당과 정부, 군대내의 브루조아계급 대표자를 비판해 일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65년 11월10일 4인방중 한명인 요문원이 일간지 `문회보`에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를 발표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것이 그후 10년을 진동시키는 문화대혁명의 봉화였다.
▶1966년국세청 녹색신고제 실시
▶1965년월남의 미군기지 비엔호아에서
폭발사고, 94명사상, 비행기 41대 손실
▶1965년박정희 대통령 미국 공식방문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1965년 5월 16일 존슨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존슨 대통령의 특별전용기인 보잉708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 미국을 공식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2박3일간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존슨대통령과 두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박대통령과 존슨대통령은 17일 오후 5시5분부터 1시간40분 동안 제1차 회담을 한데 이어 18일 오후 5시부터 40분동안 제2차회담을 한 후, 합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공동성명에서 월남 공화국 지원과 관련해 긴밀한 협조체제를 갖추는 한편, 미국이 한국내에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과 제휴,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할 것을 밝혔다. 이밖에도 한국군 월남파병에 대한 보상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대통령 내외 일행은 10일간의 방미일정을 마치고 27일 존슨대통령의 전용기편으로 귀국했다.
▶1961년그린 미국 대리대사,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 합헌정부지대 공동성명
▶1961년5ㆍ16 군사정변
5ㆍ16 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ㆍ사회적 문제와 군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ㆍ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군 내부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명 및 사병 3,500여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중앙청과 국방부, 중앙방송국, 중앙전신국 등 주요기관을 점령했다. 이것이 그 뒤 32년 간에 걸쳐 군인이 지배하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혁명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이 군부 정권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육군 참모총장인 장도영을 앉히고 박정희는 부의장으로 머물렀다. 3일 뒤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했다. 7월 3일에는 장도영을 중심으로 한 44명의 군인들이 반혁명의 죄목으로 제거되고, 박정희 부의장이 의장에 취임했다. 이로써 3년 간의 군정통치가 시작됐다.
이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쳤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해 성공했다.
▶1960년파리 동서수뇌회담 개최
▶1956년영국 몬테베로섬서 원폭실험
▶1954년스위스의 포토 저널리스트
비쇼프 사망 - 인간에 대한 이해, 강한
디자인 감각, 감각적인 빛의 사용으로 유명
▶1951년볼리비아 군부쿠데타 발생
▶1951년국회,
제2대 부통령에 김성수 선출
▶1950년독일의 물리학자 베드노르츠
출생 - 198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947년영국의 생화학자 홉킨스 사망
- 필수영양소 비타민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ㆍ의학상을 수상
▶1942년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 사망
▶1931년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
‘신간회’ 해산
신간회(新幹會)는 일제 강점기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힘을 합쳐 공개적으로 일제에 대항한 국내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였다.
1928년의 신간회 1주년 기념식장.
1927년 2월 15일에 열린 창립식에서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 초대 회장에 선출되고, 간부·발기인 51명 가운데 신석우·안재홍 등 조선일보 출신이 12명이나 이름을 올려 총독부는 조선일보를 사실상 신간회 기관지로 생각할 정도였다.
한때 전국 140여곳에 지회가 설치되고 회원수도 4만여명에 달할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신간회가 내리막을 걸은 것은 1929년 12월의 민중대회 사건 때부터였다.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민중대회를 강행하려다 일제의 탄압으로 관련자 수십명이 연행·구속된 것이다. 민족주의 진영에 비해 열세였던 좌익 진영도 내분을 부추겼다. 신간회를 계급적 투쟁목표가 선명한 조직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해소론(解消論)’을 내세우며 전체대회를 요구한 것이다. 1931년 5월 15∼16일, 이틀간 신간회 전체대회가 열렸다. 창립 4년4개월 만에 처음 열린 대회였다.
민족주의 진영은 ‘해소론’을 비판하고 신간회를 계속 존속시킬 생각으로 대회에 임했고 결과도 낙관했다. 하지만 16일의 투표결과는 찬성 43, 반대 3, 기권 30. 해소안이 가결된 것이다. 일제는 “해소는 해체와 같다”며 신간회 활동을 금지시켰다.
▶1929년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1929년 5월16일,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헐리우드 내 루스벨트호텔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250명. 5분간 진행된 대회 입장료로 10달러를 받았다. 1927년∼1928년의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여우주연상은 재닛 게이너가, 남우주연상은 에밀 야닝스가 수상했고 감독상은 루이스 마일스톤과 프랭크 보제이즈가 공동수상했다. 작품상은 2개 부문으로 나뉘었는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상은 윌리엄 웰만 감독의 ‘날개’가, 예술적인 작품상은 무르나우 감독의 ‘선라이즈’가 수상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있는 재닛 게이너.
순정파 재닛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특별상을 수상한 채플린은 “소수의 인간이 결정한 것이므로 명예는 아니다”는 태도를 보였다.
주최측인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는 당시의 영화 추세가 토키영화(발성영화)로 이행되는 전환기였지만 무성영화 만을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첫 해에는 자막상(字幕賞)도 있었다. 최초의 토키영화 ‘재즈 싱어’는 특별상을 수상했다.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트로피를 ‘오스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카데미 사무국 직원이 그 상(像)을 보고 마치 자신의 삼촌 ‘오스카’를 닮았다고 한데서 연유한다. 6회 시상식에서 한 영화평론가가 캐서린 햅번의 첫 여우주연상 수상을 거론하면서 ‘오스카’를 언급한 후부터 ‘오스카’로 불린 것으로 전해진다.
▶1922년조선일보,
신활자를 주조하여 신문활자를 개선
▶1920년제1회 전조선 체육대회 개최
▶1920년함경선 개통
▶1909년서예가 원곡 김기승 출생 -
원곡서체 개발
▶ 1896년 미조구치 겐지 일본 영화감독 출생
▶ 1858년 청-러시아간에 애혼(愛琿)조약. 흑룡강을 국경으로하고 연해주를 공유
▶ 1831년 탄소 마이크로폰을 발명한 미국의 휴스 출생
▶ 1429년 정초(鄭招), 농사직설(農事直說) 찬진
https://youtu.be/Z4YEoT__3V0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