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에 바친 제2의 삶』
이 조 자(제 3 회 졸업생)
현재 : 사단법인 인천꽃문화협회 이사장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전 옥 련(제 10 회 졸업생)
현재 : 인천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관
『기회를 놓치지 말자』
문 해 자(제 20 회 졸업생)
현재 : 삼성생명 부천지점 부성영업소 소장
『초겨울 문턱에서...』
김 동 자(제 23 회 졸업생)
현재 : 경감(중앙경찰학교 여경지도 계장)
『21세기는 여성시대』
고 은 경(제 26 회 졸업생)
현재 : 인천수산업협동조합 대리
『마음은 욕심쟁이』
박 수 경(제 45 회 졸업생)
현재 : 하아마트(주) 사당동 지점
『지난날의 추억』
이 혜 원(제 51 회 졸업생)
현재 : 새마을 금고 근무
꽃길에 바친 제2의 삶
이 조 자(제 3 회 졸업생)
현재 : 사단법인 인천꽃문화협회 이사장
"꽃길에 바친 제2의 삶"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제3회 졸업생 이조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면으로나마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교정을 떠난 지도 어언 40여년이 지났군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40여년이 지나는 동안 학교는 몰라보게 발전하여 오히려 서먹하고 낯선 곳이 되었더군요. 저는 졸업을 하자마자 모교 서무과 지금은 행정과 라고 하던가요. 그곳에서 6년간 근무를 하다가 결혼을 하여 아들만 3형제를 기르며 바쁜 전업주부로 생활하였습니다. 어느 날 친구 사무실에 놀러갔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친구는 모처에 관장이 되어 우아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어떤 친구는 정치계에서 여성국장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 -삼형제 아들들은 바르게 잘 자라 주었지만- 나는 무엇을 하였나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그때 교수를 하는 동생이 영어 공부를 10년 목표로 하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아이들을 키우면서 쉽지 않았습니다. 사내아이들만 키우다보니 집안이 삭막하고 어수선한 것 같아 꽃꽂이를 시작한 것이 꽃길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집안에 꽃을 꽂고나면 큰부자가 된 기분으로 마음이 뿌듯하고 행복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텔레비전에 무학의 여인이 바느질 솜씨 하나로 장인이 되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그때 아! 그래 한가지를 열심히 10년을 목표로 투자하자고 마음먹고 서울에 있는 꽃꽂이 본부에 수업을 열심히 다니면서 연구실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를 키우며 세미나와 전시회며 근로복지회관, 문화원에 출강을 나가며 바쁘게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삶의 활력소가 되어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갔습니다 소번회 중앙회 회장으로 열심을 다하다 보니 (사)인천꽃문화협회의 이사장직도 맡고 사단법인체로서 인천지역문화사업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며칠후면 인천꽃문화협회 제 3집의 작품집을 출간합니다.
꽃을 사랑하는 후배여러분 ! 앞으로 있을 많은 전시회에 여러분도 초대하고 싶군요 여러분 주위의 모든 것을 사랑해 보십시오 졸업을 앞에 두고 희망에 부푼 여러분들의 얼굴을
상상만 하여도 행복한 웃음이 절로 납니다.
지금까지는 온상의 교정에서 삶의 근본을 닦고 배운 여러분 이 있겠지만 이젠 어느 방향을 삶의 목표로 삼을까 여러 가지로 행복한 고민이 많으실 듯 합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삶을 살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십년의 시간을 열심히 투자하다보면 전문인이 되어 프로다운 프로로 아름다운 여성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꽃꽂이의 길에 제2의 삶을 걸었듯이 여러분들도 어느 길에 내 삶은 걸 것인지 이제부터 찾아보십시오 반드시 그 길은 찾는 자에게 열린다 는걸 먼저 산 선배가 전하고 싶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현명하고 알차게 변신하는 지혜로운 인천여상인이 되시기를 기원하면서 선배로서의 조그만 삶을 소개하였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전 옥 련(제 10 회 졸업생)
현재 : 인천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고교를 졸업한지 34년이 지난 요즈음도 교복은 그 옛날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가슴에 젖어오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단정한 옷차림의 학생을 만나면 그 자체만으로도 고맙다는 한 마디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30여년 전 우리는 청초함과 순수함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기며 교복을 손질하곤 했었는데, 그 때는 인위적인 멋을 부리지 않는 것이 학생다운 멋으로 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 따라 모든 것이 변하듯 요즈음에는 학생들의 교복도 상업주의가 만들어서 제공하는 소비 위주, 향락 위주의 문화와 많이 닮아 가고 있어 그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합니다.
나는 오늘, 오래 전에 생활관에서 옷차림에 대한 예절을 지도하면서 비너스 벨트 이야기를 들려주던 생각을 떠올려 보며 학생들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몇 가지 당부하고자 합니다.
"옛날 신들이 모여 살던 곳에서 미의 여신을 뽑는 행사가 치러지던 날이었습니다. 여신들은 하나같이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하늘한 얇은 옷을 걸치고, 화려한 화장으로 한껏 몸치장을 한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게 되었는데,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그날 미의 여신으로 뽑힌 것은 별다르게 치장 한 점이 없는 비너스였답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여신들은 그날의 심사 위원장인 신들의 아버지 주피터에게 거칠게 항의하며, 자신들이 비너스만 못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피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너무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비너스만이 가느다란 끈으로 치렁치렁한 옷자락을 감쌌더군요. 이것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여성답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사기 등등하던 여신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부끄러워했답니다.
꽃들이 제각기 모양과 향기가 다르듯이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그러한 각각의 개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르네상스라는 말을 잘 아실 겁니다. 인간을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그가 지닌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는 것이 근본정신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성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상업주의에 의한 획일화된 문화에 젖어 있습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게 개성을 발휘하여 좀더 다양하고도 적극적인 표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옷을 깨끗하게 입어야 하는데, 겉옷보다는 속옷을, 속옷보다는 피부를 피부보다는 그 속에 흐르는 피와 영혼을 맑게 해야 합니다. 겉옷과 속옷은 세탁을 하면 되고, 피부는 목욕을 하면서 가꾸면 되지만 피와 영혼은 독서를 통해서 마음의 양식을 쌓아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진정한 아름다움은 획일화되어 표현되는 외면적 가치에 있지 않으며, 각자의 내면으로부터 자아성장이 이루어져 지성과 개성을 겸비했을 때에야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억만금을 주고라도 살 수 있지만 자신이 가진 개성과 교양은 아무리 비싼 돈을 준다할지라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답다' 라는 말은 최상의 칭찬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답다'라는 말은 자기의 분수를 알고, 자기의 분수에 맞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생은 학생답게 자신의 내면을 가꾸고, 여성은 여성답게 사고하고 행동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꽃은 진흙 속에서 고고히 피어나 아름다움을 보여주듯이 학생답게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른 습관을 갖도록 노력하면 인격자가 된다는 것을, 그리되면 인격자의 운명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자
문 해 자(제 20 회 졸업생)
현재 : 삼성생명 부천지점 부성영업소 소장
"기회를 놓치지 말자"
나에겐 자랑거리가 세 가지 있다.
남평문씨의 여자로 태어난 것과 大인천여상을 졸업한 것, 그리고 삼성생명에 입사한 것이다. 삼성생명 설계사로 입사하여 4년의 영업을 하고 소장경력 8년째 일하고 있다. 현재 근무중인 곳은 부천지점 부성영업소 네 번째의 기관으로 부지런하고 알뜰한 40명의 사원과 일하고 있다.
인천여상과 나와의 인연은 중학교 때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남인천여중 1학년 그때, 나의 목표는 인천여상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그 해에 미군철수로 인해 미군부대에 다니시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실직하여 5남매의 맏딸인 나는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을 때 채한석(음악)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고 그때부터 내가 갈곳은 인천여상 이라고 결정했다. 빨리 졸업하여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집안형편이 좋아졌지만 중1때의 목표대로 인천여상에 입학하였다.
여고생활은 평범하게 한 것 같다.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것 안하고 말 잘 듣는 학생 이였으며 성적은 중간 이였다.
평범한 고등학교 시절이었지만,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내 친구의 남자친구가 송도고등학교 방송부에 있어서 점심시간이면 구름다리 쪽으로 스피커를 달고 "이사도라"를 틀어주던 일, 학교 뒤편에 생활관 옆에서 네잎크로바를 찾으며 행운을 기다렸던 일, 그리고 학교 앞 튀김 집에서 떡뎀부라 26개를 혼자서 사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주산1단 부기2급 한타3급 영타3급의 자격증을 땄다.
아주 평범하게 생활하다가 3학년 7월 19일에 경리과로 취업을 나가면서 사회에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던 중 22세 10월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으로 6개월간의 지옥 같은 집에서의 시절을 보내고 아버지의 재혼과 함께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을 보면 얼굴에 청승과 가련함이 많이 묻어있다. 결혼할 때까지 직장생활은 했는데, 20살에 만나 사귄 동갑의 남편 군대 3년을 기다린 끝에 25살 결혼을 했다.
철없을 때 만나 조건보지 않고 결혼하여 나이 어린 남편과 시댁식구들과 같이 생활을 하다보니 첫아이 임신까지 겹쳐서 항상 우울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서러워 울면서 보낸 날이 참 많았다. 첫아이가 6개월이 되었을 때 분가를 하고 8개월 때 시댁에 아이를 맡기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나 1년쯤 지난 후에 둘째 아이 출산으로 인하여 직장을 포기해야만 했다.
주부로서 살림살이 3년만에 더 이상의 퇴보는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직장생활을 하려했는데 아이 둘을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은 보험설계사가 제일이라고 소개하는 분을 따라 삼성생명에 입사를 하였다. 그 당시 나의 나이는 32세였고 5세, 7세의 두 딸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남들이 별로 부러워하지 않은 보험영업이라는 일을 나의 남편은 앞으로의 비전은 좋을 것 같다며 열심히 격려를 해주어 지금도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부부란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반자의 관계라 생각한다.
상대가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부부가 진정한 부부라 생각한다. 가끔 힘들어 할 때 "넌 할 수 있어"하며 격려해주고. "21세기에 성공하려면 영업을 잘해야 하는데 나는 영업에 자신이 없고 당신은 영업을 잘하니까 당신은 성공할 수 있을 꺼야" 라며 쳐져있는 내 어깨를 두들겨 주는 격려에 항상 에너지가 넘쳤다.
나를 지켜보는 친구와 주위사람은 내가 보험영업에 체질인 것 같다라고 말하며 하나 둘 나의 협력자가 되어갔다.
1년에 한번씩 "연도상"이라는 회사의 설계사행사가 영업4년 연속 수상을 하며 남편과 아이들이 존경한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때 삼성생명의 정식사원인 소장의 직책을 부여받았다.
1년에 6,000명중에서 한두 명밖에 발탁되지 않는 설계사로서의 최고의 영광의 자리이다. 소장으로서의 첫 기관은 소속 직원이 8명 밖에 없는 아주 작고 부진한 기관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모든 사람이 축하해주며 "넌 잘할 수 있어"라는 격려 때문에 힘들어도 씩씩하게 최선을 다하여 1년만에 그 기관을 최고의 영업소로 만들고 "관리자 대상 장려상"을 수상 받았다.
상사들이 역시 인천여상 출신이라 똑똑하고 야무지다는 평가를 할 때, 둘째 셋째 기관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고 네 번째인 부성영업소에 지난해 12월에 발령 받아 6개월 동안은 평가율 최고점수인 A를 나 혼자 받는 영광을 차지했을 때 삶의 희열을 느꼈다.
며칠 전에 읽은 "겅호"(켄 블랜차드 저)라는 책이 생각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람쥐의 정신과 비버의 방식 기러기의 선물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다람쥐의 정신은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이 하는 일이 대한 긍지, 가치를 생각하여야 일을 함에 있어 당당함과 멋스러움이 생긴다는 것이며, 비버의 방식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스스로 하는 자신의 일을 할 때 능력이 배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러기의 선물은 상사는 부하를 칭찬하고 부하는 상사를 존경할 때 신바람 나는 일을 하기에 어려운 일도 성공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 직장에서 긍지와 보람을 갖고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 가지를 실천한 것 같다.
보험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하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출근을 항상 다른 사람보다 한시간 일찍 하며 일을 즐기고 모든 사람의 칭찬 그리고 특히 남편이 인정해 주는 격려가 가장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실패를 하는 사람은 항상 핑계를 댄다.
내가 돈이 많았으면, 부모를 잘 만났으면, 남편을 잘 만났으면, 나도 성공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하지만 내가 열심일 때 모든 사람은 협력자가 된다는 사실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지금까지 직장생활 22년 항상 인정받으며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던 나만의 노하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 내 자신을 액체로 만들어라.
어느 그릇에 들어가더라도 액체는 그 그릇에 맞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직장도 나한테 맞추어지는 직장은 없다.
내가 그곳에 적을 빨리 해야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해야 한다."
둘째 : 항상 부지런 해야한다.
출근시간이 9시라면 1시간 전에 출근해서 내 주위를 깨끗하게 치우고 일을 준비한다면 어느 누구도 예뻐하지 않을 수 없다.
늘 한결같이 빨리 출근하고 남이 싫어하는 청소 등을 하면 평가는 A+ 일 것이다.
"능력의 차이는 백짓장 한의 차이지만 인간성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셋째 : 항상 웃는 얼굴을 보인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다. 웃는 얼굴은 상대를 즐겁게 해주며 늘 웃는 사람은 주의에 친구가 많다.
"사람은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진다."
넷째 : 윗사람 상사한테는 항상 공손해야 한다.
아부와 예의는 다르다 윗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를 때 오해가 있을 때는 말로 하지 말고 글로 써서 보일 때는 감정적이 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된다.
"자기 사랑은 자기가 할 탓이다."
다섯째 : 칭찬은 빠르게 야단은 느리게.
모든 생각 느낌은 망각이라는 것에 있다.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지기 때문에 칭찬은 빠르게 그 느낌이 살아있을 때하고 야단치는 소리는 며칠 지난 다음에 다 좋은데 그것하나만 고치면 된 것 같아 하고 말해준다.
"좋은 소리는 가슴깊이 새기고 미운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여섯째 : 앞으로 10년후의 내 모습 20년후의 내 모습을 만들어가라
누구에게나 미래에는 잘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미래는 지금의 아픔이 만들어내는 열매이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생각하며 하는 일을 사랑해야한다.
"꿈이 없으면 죽은목숨과도 같다."
일곱 번째 : 웃어른, 상사의 말에 경청하고 따라야 한다.
나보다 더 많은 세상을 산 사람은 지혜가 있다.
살아가면서 느낀 것이나 지혜가 있으니 따르다보면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실수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본인이 직접경험을 하면 더 잘 알겠지만 직접경험을 하며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파란색 안경으로 보면 모든 것이 파랗게 보이고 빨간색 안경으로 보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인다."
이런 몇 가지의 생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의 나를 만들 것이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다. 단지 그 기회를 잡는 사람과 놓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기회를 잡는 사람은 항상 하는 일에 충실한 사람이다.
공부할 때는 공부, 일할 때는 일, 더구나, 공부는 때가 있다.
나는 공부의 때를 놓쳤지만 일은 즐기며 놓치지 않은 것 같다.
나의 딸들, 나의 후배들은 공부 일 모두 기회를 놓치기 않기를 바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성공이란 자기가 하고있는 일에 만족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22세 때부터 지금까지의 가족사진 40장을 벽걸이로 만들어 거실에 걸어두었는데 사진 속의 모습이 옛날 처녀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나은 나의 모습을 보며 40대의 얼굴은 본인 이 책임을 지어야한다는말을 실감했다.
요즘은 예쁘다는 말보다는 섹시하고 매력 있다는 말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매력은 능력 있는 사람한테서 풍기는 것인 것 같다.
이제 2001년도 지나가고 있다. 2002년도에는 올해보다 더 매력 있는 여자로 되기 위하여 오늘하루도 충실히 보내련다.
초겨울 문턱에서...
김 동 자(제 23 회 졸업생)
현재 : 경감(중앙경찰학교 여경지도 계장)
"초겨울 문턱에서..."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난 겨울이 너무도 좋았었다.
화창한 봄날보다도, 화려하고 뜨거운 여름보다도, 그리고 낭만을 찾는 가을보다 겨울을 나는 가장 좋아했었다.
이유는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움츠려들며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려는 어두움과 잠듦을 연상케하는 그런 분위기를 난 겨울에서 찾았고, 나와의 공통 분모를 갖고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남들은 감상적으로 소복이 내리는 하얀 눈에서 겨울의 아름다움을 좋아했겠지만...
그러나 이제는 지극히 본능적인 차원에서 겨울을 힘들어하고 있다.
나이를 먹다보니 추위에 너무나 약해져 끔찍할 정도로 겨울이 싫어진 것이다.
학교선배로부터 원고부탁을 받았을 때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내가 무슨 말을 하나하고 막막해 하다가 차일피일 미뤘는데 드디어 독촉전화를 받고 나서 뭔가 써야겠다는 생각에 컴퓨터를 켰다.
난 내자신에 대하여 병적일 정도로 열등감을 갖고 있다.
열등감은 자만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누군가 얘기했지만 난 그 말이 얼마나 몰인정한말인가를 잘 알고 있다.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에게 "힘들어하지마" 하는 말이 최악의 충고라고 했듯이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는 나에게 자만심이라니...
그러나 이제는 그 열등감마저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로 한 것이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어 비정규학교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인천여상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시절 남들은 중학교 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 난 한쪽귀퉁이에 찌그러져있어야만 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 난 운 좋게도 제일은행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은행원이라면 사회에서 뒤쳐지는 직업이 아닐 진데 난 그 특유의 열등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내 자신을 들볶고 있었다. 대학진학을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 남들보다 머리가 나쁘다는 열등감 등등...
내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니 매사가 즐겁지가 않았고 자신감마저도 없던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지금으로 얘기하면 아마 구조조정을 하고 있었나보다
교환원 같은 임시직 여직원을 감원하면서 창구안내자가 없어져 여자행원들이 돌아가면서 객장을 순회하며 손님을 안내하는 근무가 새로 생겼었다.
그 안내근무를 하면서 제대로 안 하니까 차장이라는 사람이 아마도 나한테 잔소리를 했던 것 같다. 그 잔소리가 치사하다는 생각에 난 그 자리에서 바로 사표를 내던지고 미련 없이 은행 밖으로 나왔다. 뼈아픈 후회를 바로 하게 되는 줄도 모른채... <그만큼 어떤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너무도 경망스러웠던 것이다>은행을 다닌지 2년하고 3개월쯤 됐을 때 일이다.
막상 집으로 돌아가 실업자가 되고 보니 어려운 집안형편이 또 눈에 들어왔다.
그 길로 재취업을 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여자경찰관채용이 있다는 걸 알고 학원을 2개월쯤 다니다가 공채시험을 보고 합격하여 오늘까지 봉직한 것이 19년째이다.
19년을 다니는 동안 내 성격을 어디 직장생활이 편했겠냐만 은행을 그만둔 직후부터 3개여월 동안의 실업자신세를 겪었던 것이 약이 되었던 것 같다.
그 끔찍했던 실업자시절을 떠올리며 어려운 경찰생활을 넘기고 넘겼던 것 같다.
직장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대인관계일 것이다.
경찰관은 대국민 봉사직이기도하지만 직장 내에서는 여느 직장과 마찬가지로 동료경찰관과의 인과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내성격은 누가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하여 고통을 받는다.
그런 고통을 극복하는 길은 남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계급을 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지런히 승진공부에 매달리다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된 것이다.
순경부터 시작해서 경감까지 진급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지금은 시험과목이 바뀌어 순경부터 시작한 비간부직원들도 쉽게 응시하나 내가 경감시험을 볼 때에는 대부분은 경위에서 포기하거나 시험이 아닌 심사승진을 하려고 했었다.
경감시험에 응시할 때 대부분의 나의 동료들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20대초반의 경찰대학 출신들과 , 4년제 정규대학을 나온 간부후보생 출신의 경위들과 어찌 겨루겠냐는 비웃음과 함께..
그러나 나보다 10여년 젊은 그들과 똑같이 시험치르면서 그들보다 월등한 성적으로 수석 합격하였다. 이것은 내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기로 똘똘 뭉쳐 내안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나와의 싸움이 어떠했겠냐를 상상케 하기 위한 것이다.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에서도 배울 것이 있지만 실패한 사람에서도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결코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추한 나의 환부를 드러내는 것이 혹여 나 같은 어두운 성격의 소유자가 있다면 하루빨리 밝게 고쳐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하느님의 도우심이라면 이러한 내열등감을 해결 할 수 있는 직업을 나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경찰관이라는 직업은 자기가 하기 따라서 맘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이 있는 직업이다. 나와 같은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도 노력하니까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된 것 아니겠는가.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가슴깊이 새기라는 말을하고싶은 것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결코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딜 후배들을 기억하며 한마디하라면<어쩌면 상투적이라서 식상할지도 모르는 말이겠지만> 부디 자신을 사랑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겁을 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실패를 너무 두려워 하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소심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봄으로서 우리 후배들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나보다도 훨씬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들 일 테니....
21세기는 여성시대
고 은 경(제 26 회 졸업생)
현재 : 인천수산업협동조합 대리
"21세기는 여성시대"
수협이라는 곳과 인연을 맺은 지 어언 18년. 지독히도 오래 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무렵 학교 추천으로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은 곳은 식기를 만드는 꽤 유명한 회사였었는데 처음 사회를 맞는 내게는 이런 저런 만족을 주진 못하였다.
9개월 정도의 첫 회사를 정리하며 그간의 잘해주었던 모든 분들과 헤어지면서 한참을 눈물을 흘렸었다.
수협이라는 곳에서 시험을 거쳐 사람을 뽑는다하여 회사를 그만 둔 것이었는데 시험을 보고 간 곳은 수협이긴 하나 직접 어민들과 상대를 하는 초라하고 자그마한 어촌계 사무실이었다. 수협의 하위조직이었던 것이다.
괜히 먼저 직장을 그만 두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밤을 지새우면서 일을 해야하는 고단함도 있었고, 시끌벅적 시끄럽고 노상 싸우는 분위기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어떻게 3년을 지났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정식 수협 직원이 된 것은 86년 공판장을 신축하고 공판업무를개시하면서였다. 판매업무가 거의 저녁에 이루어졌으므로 나의 생활은 거의 포기하면서 또 3년이 지났다. 그후로 은행업무도 하고, 또 수산물 판매하는 직매장 업무도 하고, 현재는 수협에서 운영하는 횟집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다양한 일을 접할 수 있고, 부서 이동을 해서 새롭게 사람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나를 오래도록 붙들어 둘 수 있었던 수협의 매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속해 있는 곳이 나의 일 인양, 내가 맡은 바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나의소임인양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그저 묵묵히 일을 하다보니 이렇게 세월이 흐른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너무 직장일만 열심히 했구나 싶다. 딴전을 많이 피운 친구들은 공부도 하고, 선생님도 되고, 하고픈 일을 많이 한 듯한데...
어린 나이에 난 너무 일에 빠져 있었었다. 시간을 효율적이게 나를 위해 쓰진 못했다.
그렇게 꾸준히 애정을 가지고 지내온 내 직장에서도 난 여자로서 겪는 차별감을 느낀다.
일의 분류를 나눠 놓고 할 수 없는 일이라 제쳐놓은 일들도 많으며, 부서이동시나 승진 문제에서도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이제 직장도 많이 바뀌고 있다.
21세기는 여자의 시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다.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열성적인 여자들이 참 많아졌음을 느낀다.
후배들이여!
직장을 다니면서도 충분히 원하는 분야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일찍 파악하고 선택하여 꾸준히, 부지런히 살아간다면 여자라서 할 수 없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우린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바쁘게 움직이며 씩씩하게 살아가자.
할 일이 많으니까 너무 신나지 않은가!
마음은 욕심쟁이
박 수 경(제 45 회 졸업생)
현재 : 하아마트(주) 사당동 지점
"마음은 욕심쟁이"
26살 나의 삶에 있어 나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이 시점에 나는 후배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은 여느 다른 친구들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성실히 다녔던 것 같다. 지금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 몇 번의 갈림길 선택이 나에게도 있었지만 그 선택에 대해서는 지금껏 후회한 적이 없다. 내 자신의 결정을 존중했으며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통해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기도 하다. 난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는다. 더 높이 더 자신있게 확실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오늘도 힘든 출근길에 CDP를 들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출발한다. 내 마음속에는 욕심쟁이 하나가 매일매일 움직이며 활동한다. 머리에서는 "이 정도면 돼." 라고 말하지만, 마음에서는 "너! 더 욕심 안나니? 더 할 수 있는데, 좀 더 해 봐." 서슴없이 난 더 욕심을 부린다.
자신을 믿어라.
항상 어떤 일을 결정하기 앞서 누구나 고민하고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결정"이라는 이후에 있는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정"의 주체는 항상 자기 자신이다. 결국에는 자신 하나밖에 믿을 것이 없다. 중학교 3학년 초, 인문계와 상업계선택이 맨 처음 겪은 갈림길이었다. 학교 전산부에 있었고 공부도 조금 잘하는 상위권이었다. 당연히 부모님과 선생님은 내가 인문계에 가는 걸로 믿고 계셨다. 문득 대학교를 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부터 앞으로 어떤 직종을 하고 싶고, 적성에 맞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모든 궁금증들이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없었다. 그 때 내가 선택한 길이 상업계였다. "인천여상" 하면 그래도 썩 잘 알아주는 학교였고, 인문계 못지 않게 공부를 잘하는 수준급 학교였다. 진학반도 있어서 나에게는 두 개의 기회가 존재했기 때문에 부담감도 없었다. 3년동안 공부도 자격증도 열심히 했다. 3학년 10월 가을, 친구들은 본격적인 취업을 하나둘씩 나가게 되었고, 우리 반 교실에는 20여명 정도가 오기종기 모여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처럼 나도 삼성생명, 영남건설에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떨어졌다.
세 번째 대우전자(주)에서 면접의뢰가 왔다는 담임의 부름으로 다급히 취업실로 가서 준비서류와 면접준비사항들을 들었다. 다음날 합격통보가 왔고, 다음날 바로 첫출근을 하게 된 나는 그냥 어리둥절해서 멍하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첫출근의 설레임이 7년동안이라는 긴 시간을 지냈는데도 생생히 느껴진다.
1997년말 갑작스런 IMF 사태로 회사 동기들도 하나둘씩 조직합병 때문에 사표를 내고 나가게 되었고, 대우전자도 빅딜의 상황에 있었다. 반대시위도 하고 비상대책위원회도 자체적으로 만들어 어떻게든 회사가 살기 위해 다들 발버둥 쳤다. 그때는 내 자신의 존속 여부도 희박했으며, 회사 또한 그랬다. 12월에 직원들간에 대우전자와 그 계열사인 다른 회사, 즉 지금의 하이마트간에 사간전보가 이루어졌다. 대우전자에 남을 것인지 하이마트로 갈 것인지...
결국 현재의 하이마트를 택했지만 대우전자보다 더 성장해 있는 회사를 보면 그 때의 내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웃을 수 있다. 7년간에 부서 이동도 많고 조직체제변경도 많았지만 결국에 지금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건 항상 내 자신을 믿고, 신중히 결정하고 선택한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자부한다.
야무진 욕심과 철판얼굴
입사한지 한 달도 안돼 입에서 "회사 나가기 싫어." 라는 말이 나오자, 부모님은 당황해 하시며 타이르시기 바쁘셨다.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와는 너무나도 그 현실이 차이가 많았다. 컴퓨터 활용능력에서부터 업무파악까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 있었다. 사회 풋내기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손놓고 있는 격이었다. 출근해서 시키는 일 말고는 인형처럼 똑바로 앉아만 있었다. 한 달이 지나서 두달 가까이 되자, 팀장님이 업무전담을 해 주셨다. 기쁘기도 했지만 생소한 언어와 업무진행절차등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전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나 혼자 배우고 익히고 해야 하는 상황이라 더욱더 힘들고 긴장했다. 아직까지 생생한 기억이 있다. 결재를 팀장님께 올리러 갔는데. 갑자기 결재판을 던지시면서 "너 돌머리야, 이런거 하나 똑바로 못 해?" 정말 그 앞에서 울 뻔했지만 참고 밖으로 나와 화장실에서 울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고 할까! 집에 와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인천에서 제일 좋다는 여상까지 나왔는데, 이렇게 무너지긴 정말 싫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 제일 먼저 담당업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판매기획팀 담당에게 전화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 팀의 신입사원 ○○○입니다. " 회사의 기본제도부터 규정사항, 기타 등등 업무의 전반적인 사항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하루에 보통 50통 이상의 문의전화를 관련 부서 담당에게 했으며, 심지어는 퇴근 후 약속을 하고 커피숍에 서류를 들고 나가 배웠다. 그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저 배워야 한다는 욕심밖에 없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전 Staff 에서는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전화해서 이름을 얘기하면 친절히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오기였다. 아니면 얼굴에 철판 깔고 끝까지 해보자는 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붙들고 사정하고 싶었으니깐...
정말 얼굴을 보이며 인사를 하러 갔을 때는 "어머, ○○씨 맞아요? 신입사원이라고 전화한..." 다들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난 업무파악을 빠르게 한 편이다. 남들 2∼3년 걸리는 회사제도부터 업무전결까지 1년동안 열심히 파고들어 확실히 이해했기 때문에 다른 동기들이 오히려 전화해서 물어볼 정도였다. 지금은 베테랑의 수준을 넘어 다른 업무들도 배우고 싶어 기회를 엿보고 있다. 어디를 가서든 야무진 욕심과 오기, 창피함이나 부끄러움이 없는 철판얼굴만 가지고 있다면 조직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자기계발과 자기변화
입사 3년차가 지나면서 너무나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직장생활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생각해 온 공부에 대한 미련이 문득문득 생각났다. 업무에는 더 이상 지장이 없었고, 능숙했기 때문에 더욱더 공부가 하고 싶었다. 인천시립전문대에 97학번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고 부서에 양해를 구해 야간 전자계산학과에 다니게 되었다. 2년 넘게 책을 안 봐서 인지 강의시간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5시 15분부터 10시 20분까지는 빡빡한 강의시간 때문에 직장일을 끝내고 학교를 오는 나는 거의 파김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슨 레포트 제출은 그리도 많은지, 집에 돌아오거나 쉬는 주말에는 레포트 작성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무엇보다도 제일 힘들었던 건 회사다. 7시가 퇴근시간이지만 우리 팀은 거의 8시 가까이에 퇴근하는 부서였다. 남들보다 먼저 퇴근한다는 미안함도 많았고, 회의자료나 업무보고가 있으면 9시, 10시 넘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더욱더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재학 2년동안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도 힘들었다. 그 당시 학교 다닌다고 해서 시간외수당을 공제했기 때문에 2년동안 55만원만 받고 다녔고, 토요일이나 일요일 당직은 반강제적으로 내가 서는 일이 많았다. 결국 일주일에 자유로이 쉴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몸도 많이 아팠고, 회사에서 눈치보이는 일도 많았지만 결국 99년 2월달에 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자격증도 취득하고, 실기교사 자격증도 생겼지만 욕심이라는게 끝이 없는지 지금은 3학년 편입을 준비중이다. 중학교 전산부를 시작으로 컴퓨터를 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그 방향으로 공부하고 싶은 것이 나의 계획이다. 처음에는 선생님 되는 것이 꿈이었고, 중학교 때부터는 전문 프로그래머 되는 것이 꿈이었다. 지금 조금씩 그 꿈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회사에서는 전산지원팀 개발팀 프로그래머로 오라는 좋은 제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다른 좋은 기회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좀 더 신중히 기다려 보기로 했다. 조직에서도 항상 강조하는 부분이 자기계발이다. '과연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어느 하나 대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자리에 만족하고 유지하기만을 바라며, 평탄하기만을 기도하는 직장인에게 자기계발은 정말 힘든 과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계획이나 생각은 많아도 실제 그것을 이루기란 많은 노력과 고생이 동반된다. 계발과 변화는 비슷한 느낌의 동의어 같기도 하다. "계발을 통해 변화한다." 와 "변화를 통해 계발한다." 진정한 조직의 일원인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만의 투철한 생활관과 믿음을 통해 더 나아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마일 미소
백만불짜리 미소는 어떤 미소일까? 많이 듣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한 말이었다. 회사에서 스마일 미소나 직장예절에 대해 교육을 참 많이 받았다.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안 되는 것이 웃는 얼굴이다. 전화를 받다보면 짜증나는 일이 다분하다. 그 기분을 억누르고 다시 친절한 목소리로 받기란 프로가 아닌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스마일 미소에서는 이쁜 말밖에 안 나온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말은 상스러운 말이 나오기란 어렵다. 보통 하루에 전화를 100통 정도는 통화하는 것 같다. 나도 당일 아침 기분에 따라 그 날 목소리 톤이 달라지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안 되는 것이 속상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거울! 책상 위 전화기 옆에 큰 거울을 놓았다. 전화 통화를 할 때 항상 거울에 내 모습을 보면서 얘기한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인상을 써는지 웃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면서 통화하기 때문에 입 모양을 이쁘게 하면서 얘기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통해 그 사람과 더욱더 친분과 신뢰감을 쌓아갈 수도 있다. 얼굴에 띈 스마일 미소는 백만불보다 그 값어치가 수치로서 표현되기 힘든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관리로써 필히 몸에 베어야 할 습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날의 추억
이 혜 원(제 51 회 졸업생)
현재 : 새마을 금고 근무
"지난날의 추억"
안녕하십니까?
저는 2001년도 졸업생 이혜현 입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고 있어요.
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우편물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졸업한지가 별로 안 되어서 그런지 학교소식이 들릴 때마다 귀 기울려지고 많이 그립습니다.
음..글세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 해 보았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어떤 것이 가장 필요했고, 지금 졸업해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우선 제가 학교 다닐 때..
모든 것이 다 암기로 되어있었어요.
시험을 보거나 수업방식도 암기를 위주로 한 것 같아요.
사실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것이 사실상 많이 필요로 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니깐 신문을 통해서 친구들과 얘기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과의 자유로운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2학년, 3학년 때의 선생님과의 10분 정도의 상담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짧은 시간 안에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느낌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는 또 선생님의 말씀과 선배님들의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되고 다시 한번 생각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후배들에게 선택 할 수 있는 여행이 주어졌으면 합니다.
수학여행이나 소풍..학교의 정해진 곳으로 항상 가곤 했습니다.
만약 후배들에게 가고 싶은 곳이나 추억이 될만한 곳으로 간다면..정말 잊지 못할 여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필요한 것...
아무래도 학교에서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회사에서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상사분이시나 어른분이 많이 계십니다.
그만큼 조심성이 있어야 되고 또한 그런 생활에서의 적응력이 필요합니다.
아주 쉬운 적응력은..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인사를 하다보면 나름대로의 붙임성과 그 조직에서의 생활이 어느정도 쉽게 적응이 될 것이고, 상대편 눈을 보면서 밝게 인사를 하면 주위 분들도 그 사람의 대한 느낌이 좋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회사생활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 조직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정말 힘들고 지칠 때 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울겠지요..
근데 제 생각은 웬만하면 회사에서 울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땐 그냥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을 다시 하면 윗 분들도 함부로 생각하진 않으실 겁니다.
눈물은 많이 있어봤자 왠지 자신의 나약함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남겨두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 잠시의 여유와 취미활동은 답답한 회사생활을 조금이라도 털어놓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저도 아직 사회생활을 많이 해 보지를 못해서 후배들에게 도움이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더구나 글을 쓸려니깐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구요...
아무튼 후배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축제 때문에 한참 바쁘실 텐데 성공적으로 하시길 바라고요 ..그때 제가 늦더라도 꼭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