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다해)
제1독서(창세 18,1-10ㄴ)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좋은 몫을 확인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자기 앞에 주님과 두 천사(19,1.15)가 찾아왔습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믿음과 안목이 있던 아브라함은 마치 친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즉시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하면서 자기와 함께 머무를 것을 청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께 최고의 음식으로 대접하면서 극진히 섬기깁니다. 당시 무장하지 않은 이방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변 세계의 동정을 알아보기에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히브 13,2).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적 섬김과 사랑으로 충만한 대접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이 되리라던 약속(12,1-3; 15,5)이 실현될 것을 확인해주십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18,14) 세 번째로 당신께서 하신 약속에 충실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복음(루카 10,38-42)은 예수님을 맞이한다면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베타니아에 들어가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어린이들과 여자들은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를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십니다. 마르타의 집이야말로 하나의 성당으로 이해되는 순간입니다. 집주인인 마르타는 늘 그랬듯이(요한 12,2) 말씀의 식탁에 봉사하러 오신 예수님(12,37)께 극진한 대접을 하려고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합니다. 마르타는 관습대로 손님을 대접하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예언자로 맞아들인(13,33) 마리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집중해서 들으면서 가르침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마리아 역시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집중하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서 실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서도 다른 관점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느라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던(περισπῶμαι: “분심이 들다”, “불안해하다”) 마르타는 자기를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를 나무랄 수도 없고, 참다못해 예수님께 마리아가 자기를 돕도록 타일러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왜 동생 마리아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직접 말하지(대화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한탄을 했는지 복음사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마르타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나머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가 야속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타의 탄식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먹을 것을 준비해서 손님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려는 “갖가지 일로” 염려와 걱정에 빠지기보다 당신의 말씀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충실한 종에게 말씀의 식탁을 차려놓고 섬기러 오신(22,27)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이 더 좋은 몫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신명 8,3).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인데”, 마리아처럼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모든 길을 기억하는 것입니다(신명 8,2).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자매가 상황에 따라서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중요함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에 외면하는 마리아를 탓하는 마르타에게 “많은 일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지만, 마르타를 비난하신 것은 아닙니다.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하신 것은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주님께서는 의인이 흔들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시편 55,23)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하면서”(1코린 7,34) 당신의 말씀에 집중하는 마리아에게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일에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함을 가르치시고, 또 스스로 다짐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극진한 대접을 하고 싶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에 집중해야 함을 마르타는 놓쳤던 것입니다. 마르타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내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한다는 인간적 생각이 앞서는 나머지, 말씀의 식탁에 봉사하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되새기면서 그분의 뜻을 찾을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2독서(콜로 1,24-28)는 말씀의 식탁에 봉사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바오로가 선포하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 감추어져 있던 신비였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처럼 말씀의 식탁을 준비하고 콜로새인들을 섬기면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을 맞아들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콜로새 신자들의 영광의 희망이시고, 세상에 드러난 하느님의 신비이므로, 그분의 말씀을 잘 듣기만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바오로의 간절한 소망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지혜를 다하여 말씀을 선포하면서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말씀을 가르치면서 겪게 되는 어떤 고통일지라도, 마치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듯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에게 찾아오신 옛 계약의 주님께 자기들과 함께 머무를 것(말씀을 들려주실 것)을 청했고,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서 극진한 대접을 했기에 후손을 주시겠다는 확답(좋은 몫)을 받았습니다. 마르타의 집에 말씀의 식탁을 준비하고 섬기러 오신 새 계약의 주님께서는 많은 일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당신께 맡기라고(1베드 5,7) 재촉하십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루카 8,14)처럼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을 제켜놓고 혼자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말씀의 식탁을 차려놓으신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면서 극진한 대접을 받아들였지만, 마르타는 인간적 친교라는 명목으로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으면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의 식탁을 준비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르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으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인 마리아가 마치 백배의 열매를 맺으려고 좋은 땅에 씨가 떨어지는 것(루카 8,8)과 같은 “좋은 몫”을 차지했다고 하십니다. 좋은 몫을 차지한 사람은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고, 혀로 비방하러 쏘다니지 않고 제 친구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제 이웃에게 모욕을 주지 않습니다(시편 15,2-3). 인간적 친교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마르타의 몫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우선인 신앙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마리아의 몫이 더 강조되어야 합니다. 죽음의 길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마르 10,45) 우리를 식탁에 앉히고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오히려 우리를 섬기러 오신 분이십니다(22,27). 예수님을 맞아들였다면 마리아처럼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는 몫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