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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러너업의 추억 | |||
2007-05-06 | |||
언제부터, 또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우리 언론에서는 독일 대표팀을 지칭할 때 흔히 '전차군단'이라는 애칭을 즐겨쓴다. 물론 독일 현지에서 자국 대표팀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다. 영어권이나 독어권 국가에서 쓰여지는 기사에도 '전차군단'이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음도 마찬가지다.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그렇게 관용적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애칭이 쓰였는지도 역시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제 2차 대전 당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히틀러 치하 독일의 강력한 기갑 전력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게 비교적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측에서는 기갑 전력을 보병 지원 중심으로 운용, 전 전선에 걸쳐 넓게 포진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그러나 독일은 '전격전'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념을 도입, 선택과 집중을 통해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의 종심을 깊이 돌파하는 전술로 승승장구했다.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에 의해 도입되고 정립된 이 전략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에 의해 실현되며 위용을 떨치게 된다. 이러한 전략을 세운 인물들의 후예여서 그럴까? 생각해보면 독일 대표팀의 전술도 사실 이러한 2차 대전의 전격전 개념과 닮아있다. 아마도 독일 대표팀에 '전차군단'이라는 애칭을 붙인 사람도 이러한 모습에 착안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전성기의 독일 대표팀은 일사분란한 조직력과 화끈한 화력, 선수 전원의 탁월한 체력과 기동력, 일대일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집요한 정면 승부로 무장한 팀이었다. 마치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세대교체에 실패한 이후 수비적인 전술로 '단조롭고 재미없는 축구'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그것이 독일 대표팀의 진면목이 아님은 긴 축구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표팀의 근간을 이루는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독일다운 축구를 하는 팀은 어딜까? 분분한 의견이 있겠지만 필자는 바이어 레버쿠젠을 가장 첫 번째로 연상한다. 특히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까지 크리스토프 다움과 함께한 그 시절이야 말로 70~80년대 전성기 독일 축구의 스타일과 그 궤를 같이 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다득점에 대한 매력은 차치하더라도 당시 레버쿠젠은 일사분란한 조직력 속에서 우러나오는 강력한 공격 축구로 시대를 풍미했었다. 그리고 그 절정의 기간은 바로 01/02 시즌,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레버쿠젠의 '트리플 러너업'이 있었던 그 때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인구 25만의 중소도시 레버쿠젠을 근거지로 하는 바이어 레버쿠젠은 '전통의 강호'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조금은 애매한 클럽이다. 분명 레버쿠젠은 오랜 기간 분데스리가에서 경쟁해 왔으며 바이에른 뮌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함께 'G-14'에 가입되어 있는 독일의 세 클럽 중 하나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클럽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팀의 오랜 역사와는 다르게 그들의 트로피 보관함에는 이렇다할 보관품이 없다. 그들의 우승 경력은 88년 UEFA컵 우승(차범근이 있던 바로 그 시절이다)과 93년 DFB 포칼 우승이 전부다. 그런데 레버쿠젠은 2002년 그들의 클럽 역사 100년 동안 모은 트로피보다 더 많은 세 개의 우승 트로피를 한꺼번에 쓸어담을 뻔 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레버쿠젠의 성공을 이끈 크리스토프 다움은 '코카인 파동'으로 인해 팀을 떠났고 이에 따라 시즌 시작 전 팀 분위기는 그야말로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기에다가 레버쿠젠은 바이에른이나 도르트문트처럼 거물급 선수들을 긁어모을 만한 자금력도 없었기에 선수 보강도 여의치 못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전년도 우승팀 바이에른 뮌헨과 준우승팀 샬케 04, 그리고 막대한 자금을 풀며 영광의 재현에 나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정도를 우승 후보로 꼽았다. 레버쿠젠은 위 세 팀의 대항마로 여겨졌지만 어디까지나 세 팀의 부진할 경우에 한정된 예상이었다. 그러나 98년에 3위, 99년과 2000년에서는 연속 준우승을 차지하며 분데스리가의 강자로 자리매김한 레버쿠젠의 내공은 전문가들의 상상을 능가했다. 다움이 쌓아놓은 전술적 틀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한 용장 클라우스 토프묄러의 레버쿠젠은 리그 우승에 대해 그 어떤 팀보다도 동기부여가 되어 있었으며 여전히 매력적인 공격 축구를 구사했다. 특히 레버쿠젠은 시즌 초반 벌어졌던 바이에른 뮌헨, 샬케 04,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등 소위 'Big 3'로 평가됐던 팀들과의 대전에서 모두 대등한 경기끝에 무승부를 기록하며 자신들도 강력한 우승 후보임을 과시했다. 결국 레버쿠젠은 13라운드에서 첫 단독 선두에 나섰고, 10승 3무를 기록한 그들은 당시 리그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모르는 팀이었다. 이러한 리그에서의 상승세는 자연스럽게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이어졌다. 32강 조별 예선에서 바르셀로나, 올림피크 리옹, 페네르바체와 F조에 속한 레버쿠젠은 초반 세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일찌감치 16강 진출 티켓을 확보했고 도합 4승 2패의 성적으로 만만치않은 전력을 과시, 대외컵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전력임을 증명했다.
승리와 추락의 사이 레버쿠젠의 상승세는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야말로 센세이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는 것이 당시 상황에 대한 가장 근접한 표현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힘이 떨어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여전한 평가 절하에도 불구하고 레버쿠젠은 리그에서 선두권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쫓는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 그리고 샬케의 힘이 레버쿠젠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단 네 경기를 남겨둔 30라운드까지 레버쿠젠은 선두를 질주했고 2위 도르트문트와의 승점차를 4점으로 유지하며 첫 분데스리가 우승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전년도 우승팀 바이에른 뮌헨과의 거리는 무려 9점이었다. 단판 승부라 유난히 이변이 많은 DFB 포칼에서도 레버쿠젠은 순조롭게 항해했다. 2부 리그팀들이 1부의 팀들을 누르는 이변이 자주 발생했던 가운데서도 레버쿠젠은 16강전에서 하노버를, 8강에서 1860 뮌헨을, 4강에서는 쾰른을 차례로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레버쿠젠의 놀라운 기세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더욱 더 빛을 발했다. 32강 조별 예선을 예상보다 쉽게 통과한 레버쿠젠을 기다린 상대는 아스날, 유벤투스, 데포르티보였다.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의 최정상급팀과 한 조를 이루게 된 레버쿠젠의 당시 반응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그러나 토프묄러는 "우리는 잃을 것이 없다"라는 여유로 출사표를 던졌다. 당시 레버쿠젠의 16강 조별 예선 통과를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레버쿠젠의 팬들조차 말이다. 이러한 예상은 레버쿠젠이 유벤투스 원정에서 0:4로 참패하며 적중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레버쿠젠은 데포르티보를 홈으로 불러들여 거둔 3:0 승리를 통해 이를 곧바로 만회하며 겨울 휴식기 전에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다. 레버쿠젠의 분전 덕분에 3라운드까지 네 팀이 모두 1승 1무 1패로 동률이 된 상황에서 8강 진출팀의 행보는 안개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레버쿠젠은 고추가루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유벤투스와 데포르티보와의 마지막 2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유벤투스와 아스날을 탈락이라는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야말로 이변이었다. 레버쿠젠의 8강전 상대는 전통의 강호 리버풀이었다. 레버쿠젠은 앤필드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전반 종료 직전 허용한 새미 히피아의 선제골을 만회하지 못하고 1:0으로 패배했다. 극적인 승부가 펼쳐졌던 2차전에서도 불안한 상황은 계속됐다. 레버쿠젠은 전반 16분 발락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아벨 사비에르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1:1 무승부로 전반을 마쳤다. 후반 중반 발락과 디미타르 베르바토프가 연달아 골을 성공시키며 4강 진출의 꿈을 꾸는 찰나, 종료 10분전 야리 리트마넨에게 추격골을 허용하며 탈락의 위기에 몰리기도 하는 극과 극을 오갔다. 그러나 레버쿠젠은 예전과 다른 침착함을 과시했고 결국 종료 5분전 공격에 깊숙이 가담한 루시우가 강력한 왼발 슛팅을 리버풀의 골문에 꽃아넣으며 극적인 4강 진출을 이루게 된다. 4강전 상대는 또 다른 잉글랜드의 명문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어느 팀을 상대로든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레버쿠젠은 이미 다크호스의 수준을 넘어선 어엿한 우승후보로 대접을 받고 있었고 이는 올드 트래포드에서도 확인된다. 레버쿠젠은 숄샤르와 반 니스텔로이(PK)에 연달아 실점하며 패색이 짙었으나 맨체스터의 골문을 그야말로 '육탄'으로 끈질기게 두드렸고 결국 발락과 올리버 뇌빌이 동점을 만들어내며 결승 진출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2차전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로이 킨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레버쿠젠은 전반 종료 직전 뇌빌의 그림같은 터닝슛이 맨체스터의 골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클럽 역사를 다시쓰게 된다. 이제 레버쿠젠은 전 유럽의 주목을 받는 팀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클럽 역사상 첫 '트레블'도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놀라운 성공을 이끌어 낸 토프묄러 감독을 비롯, 발락과 루시우 같은 핵심 선수들은 이미 유럽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은 내부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버쿠젠라는 클럽의 한계이기도 했으며 결과적으로 트레블과 트리플 러너업을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정병주의의 한계 레버쿠젠의 베스트 11은 시즌 내내 일관적이었다. 비록 상대팀에 따라 쓰리백과 포백을 자유자재로 사용한 토프묄러의 스타일상 전술에 따라 다른 얼굴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크게 틀려지지는 않았다. 혹자가 '정병주의'라고 표현한 레버쿠젠의 라인업은 기본적으로 루시우와 노보트니를 수비에 두고, 라멜로프와 발락 그리고 바스튀르크를 미드필더에, 공격진에는 베르바토프와 뇌빌, 키어스텐을 로테이션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전술은 매 경기마다 틀렸으나 등장하는 인물은 똑같았다. 레버쿠젠은 중소클럽의 한계상 값비싼 선수들을 벤치에 앉혀놓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유럽에서도 경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들의 베스트 11과는 달리 벤치는 달리 답이 없어보일 정도였다. 베테랑들인 보리스 지브코비치와 울프 키어스텐이 공격과 수비에서 대체 자원 역할을 해주기는 했지만 그 이상을 벤치에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특히 토프묄러가 다양한 전술을 선보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미드필드는 새로운 얼굴이 전무했다. 이는 주전급 선수들의 '과부하'로 직결됐다. 시즌 종반, 주전 선수들은 이미 40경기 이상을 격렬하게 싸운 상태였고 자연스럽게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많은 선수들이 잔부상을 안고 경기에 임하는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레버쿠젠은 임시방편조차도 제시할 수 없었다. 적어도 1-2개의 트로피를 획득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뭉친 스쿼드였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레버쿠젠의 종반 페이스는 이미 분데스리가를 호령하던 시즌 초중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나긴 레이스에서 최후에 웃은 경험이 없었고 이는 선수단의 불필요한 긴장을 조장했다. 30라운드까지 당시 그들의 페이스로는 다소 여유까지 있어보였던 4점이라는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레버쿠젠은 31라운드 함부르크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한 이후 연이은 두 경기에서 모두 패배했다. 브레멘과 뉘른베르크는 당시 전력으로는 레버쿠젠보다 한 수 아래의 팀으로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던 팀이기에 충격은 더했다. 레버쿠젠은 이렇게 휘청거리는 동안 도르트문트는 착실히 승점을 쌓으며 레버쿠젠을 1점차로 추월했고, 저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바이에른은 연승 휘파람을 불며 3위 자리에서 레버쿠젠을 1점차로 추격했다. 결정적으로 2002년 4월 30일, 팀의 주장이자 수비 라인의 든든한 보루였던 옌스 노보트니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쓰러지며 레버쿠젠은 위기를 맞는다. 노보트니는 반 니스텔로이와 충돌한 직후 무릎을 움켜잡으며 쓰러졌고 레버쿠젠 팬들에게 돌아온 소식은 주장의 '시즌 아웃'이었다. 노보트니는 수비의 핵심임과 동시에 팀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였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팀을 간신히 지탱해 온 하나의 축이 송두리채 뽑혀져나간 레버쿠젠에게 '트리플 러너업'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제시된 것도 이맘때 쯤이다. 운명의 34라운드에서 레버쿠젠은 헤르타 베를린에게 2:1 승리를 거두고 도르트문트의 경기 결과를 기다렸으나, 승기를 잡은 도르트문트는 여세를 몰아 브레멘을 역시 2:1로 누르고 5년만에 분데스리가 황금방패를 탈환했다. 또 다시 2위에 머무르는 순간이었다. 일주일뒤 샬케와 맞붙었던 DFB 포칼에서는 허무하게 수비선이 무너지며 2:4의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5월 15일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도 지단의 그림같은 발리슛에 무너지며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진통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출전한 발락의 투혼도, 마지막까지 레알의 골문을 두드린 슈나이더의 분전도, 레버쿠젠의 트로피 갈등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트레블보다 더 전례를 찾기 힘들다는 트리플 러너업이었다. 또 다시 기회는 올 것인가? 최근 사커라인이 실시한 "2000년대 가장 기억에 남는 분데스리가 팀은?"이라는 설문 조사에서 01/02 시즌의 레버쿠젠은 34%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나머지 팀들은 모두 적어도 하나씩의 우승 트로피를 가진 팀들이었고 특히 2001년 바이에른은 명실상부한 유럽 챔피언이었다는 점에서 결과는 다소 의아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당시 레버쿠젠의 축구는 전문가들과 팬들을 모두 만족시켜줬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유럽 축구판에서 '다관왕'은 점점 힘들어지는 추세다. 올 시즌만 해도 트레블과 쿼드러블을 노리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가 시즌 종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진 예에서 잘 알수 있다. 많은 명문팀들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며 좋은 선수들을 긁어모음으로서 극상위권의 다툼은 해가 갈수록 더 치열해 지고 있으며, 챔피언스리그 같은 무대의 8강팀들은 어쩌면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유주얼 서스팩트'로 짜여질 가능성마저 보인다. 어쩌면 약자가 강자를 물리침으로서 팬들에게 선사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는 그리스의 유로 2004 우승같이 국가대항전에서 좀 더 자주 제공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자금력 측면에서 '공룡'이 되지 못하는 레버쿠젠이 2002년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 당분간은 힘들 것이며 좀 더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 시기는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도 2002년의 '트리플 러너업'은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나 유럽 무대에서 적어도 1-2개의 트로피를 획득할 때까지는 지겹도록 그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선수들이 흘린 땀과 정상에 대한 열정까지 간과되서는 곤란하다. 2002년의 레버쿠젠은 분명 오늘날의 클럽들에게, 혹은 미래의 축구 클럽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최근 레버쿠젠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개편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는 힘들겠지만 2-3년 정도 뒤를 내다보면 괜찮은 행보를 여기저기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바이 아레나에 스며든 클럽의 한을 깨끗히 지워낼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붉은 사자들이 앞으로도 계속 진군해야 하는 명확한 지향점을 제공해 줄련지도 모르겠다. 또 한 번의 반란을 꿈꾸며 말이다. - 사커라인 김태우 - <‘국내 최고 축구전문 뉴스 & 커뮤니티’ 사커라인(www.soccerline.co.kr) 저작권자 ⓒ 사커라인.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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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베르바토프...........................ㅜㅜ
이때 맨유 참 아쉽게 떨어졌던걸로 기억;
자금력만 받춰졌다면
글잘읽었습니다~
그냥 퍼온것 뿐입니다.ㅎㅎ 감사합니다.^^
발락, 루시우, 라멜로프, 슈나이더, 베르바토프, 부트, 노보트니, 제 호베르투, 뇌빌... 지금은 최고의 선수들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다들 어색했던 이름들.
카시야신의 캐사기급 선방과 지단의 마지막 역전 발리킥.....ㅜㅜ
캬~~ 멋지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