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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으로 재구성 하는 모심의 삶
('천도교 인내천 강좌' 강의록 6.27.)
1. 마음의 거처
어떠한 종교적 교의가 되었건 그것은 삶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기독교에서 하느님도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세상 구원의 가교를 놓았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구원을 완성한다. 어떤 신념체계가 삶으로 구체화 되는 과정에서 풍향을 좌우하는 가장 큰 가늠자는 마음이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 마음먹기에 따라 존재의 실상이 달라지는 것인데 이때 마음이라 하는 실체에 대해서는 이해가 사뭇 다양하다.
가. 기분
그때그때의 느낌이나 감정의 굴곡을 마음이라고도 한다. 대응되는 상대의 태도나 상태에 따라 이 마음이 좌우되고 때로는 옛 기억에 종속되기도 한다. “마음이 상했다.”고 할 때가 이럴 때다. 이때의 마음은 상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며 고양되기도 한다. 같은 상황이라 해도 마음은 딴판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상할 때는 대개 기대치에서 벗어난 결과가 나왔을 때인데 기대치를 상회하는 결과라고 해서 안심 할 수는 없다. 마음이 부리는 변덕이 요란하기 때문이다. 과자 다섯 개를 갖고 싶었지만 다른 동무들이 다 일곱 개나 열 개씩을 갖는 걸 보면 다섯 개를 거머쥐고도 마음이 상한다.
기분(氣分)이라고 할 수 있다. 기(氣)가 상황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分) 지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도 기분이 여러 갈래로 나뉘다보니 안정성을 잃은 상태가 된다.
나. 생각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말이 있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마음먹은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마음이 쏠린다는 말이다. 현실은 마음이 생각을 이끌기도 하고 생각이 마음을 이끌기도 하지만 마음을 생각과 동일시하는 태도다.
마음을 잘 써 보란다거나 마음을 가다듬는 다는 것이 다 생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생각과 마음은 동일체로써 머물기도 하고 나뉘기도 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마음도 산란된다. 때로는 다양한 생각이 마음을 추스르게 하기도 한다.
다. 성정
한 인격체를 평가 할 때 마음이 좋니 나쁘니 하기도 하는데 ‘기분’에 비하자면 보다 지속력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성을 가리키는 말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 “마음이 나쁜 사람”은 순간의 환경조건에 따른 평가가 아니라 사람과 이해관계를 맺는 태도나 자세를 일컫는 말이다. 눈앞의 사회적 비참보다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한다든가 사익을 위해 타자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인간성이 못돼먹었다고 할 때 ‘마음이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 성정은 잘 바뀌지 않는다. 한 평생을 갖고 가기도 한다.
라. 본성
개인의 기질과 성격을 넘어서 사람 누구나 꼭 같이 갖고 있는 지고지순한 선의 경지를 마음이라 하고 공부의 최고 지향으로 삼는다. 어떤 삿됨에도 물들지 않고 번잡한 저자거리에서 고요할 수 있고 적막강산에서 희열 할 수도 있다. 본성을 직면하는 것을 견성이라 하여 공부의 일정한 진척을 가늠하는 척도로 삼기도 한다. ‘합일’이라고 하여 견성이 지속성을 띄는 상태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반본’은 완전한 마음의 자리에 든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때 ‘생각’은 훨씬 아랫단계의 이지적 사고작용에 불과하다.
2. 화악산수도원 2006년 마지막 날
가. 운명적 만남
맞이하게 된 인연의 내력을 규명 할 수 없을 때 ‘운명’이라는 말을 쓴다. 수운대신사께서 여시바위골에서 을묘천서를 받은 것은 운명인가 우연인가. 수운 대신사의 목숨을 건 수련이 시작 된 때는 천성산 내원암에서인가. 아니면 이듬해 49일 기도를 시작 한 적멸굴에서인가. 아니, 용담정에서 부터인가.
스무 살 때 시작해서 십 년 동안 계속한 장사꾼 생활로 전국을 주유하며 파탄에 이른 민중들의 삶을 목도하고, 아편전쟁과 텐진조약 등 국제정세를 일별하게 된 시기는 수련생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또는 무관한가.
2006년 마지막 달 12월.
그 달의 마지막 날을 나는 화악산수도원에서 보냈다. 자정을 기해 신년 타종식에도 참여했다. 보름을 며칠 앞두고 있었나보다. 타종식을 하는 동안 옅은 구름을 면사포처럼 얼굴에 두른 둥근 달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천도교 화악산수도원.
동학이 아닌 천도교와의 첫 만남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일주일간의 수련이 끝나는 날이었다. 2007년 새해 첫날 배낭을 짊어지고 하산하는 나는 새로운 임지로 떠나는 관원인 듯 했다. 3년을 벼르고 벼른 어머니 모시기 마지막 준비가 천도교 수련이 되었던 것이다.
운명이었다.
시천주(侍天主)의 ‘시(侍)’자는 모른 채 갑오년 사건이 동학혁명이냐 농민전쟁이냐는 논쟁으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따지기만 했던 내가 21자 주문을 접하고 영부도 받고 강령을 경험했던 것은 일대 운명이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박맹수선생이 김춘성선생과 나눈 대담록 복사본을 보고 이것이다 싶어 수련에 참여했었다.
나. 강령과 입도식
나흘 째 되던 날이었던가. 강령을 체험하게 되었다. 절에서 화두공부를 할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오열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기술적인 준비들이 모두 끝나가고 있던 때였으므로 천도교수련이야말로 수심정기(修心正氣)의 과정이 되었다. 강령은 법열이다. 사물의 이치를 설명 할 수는 없으되 훤히 그 속이 들여다보이는 순간이었다. 환희심.
깊숙한 산골에 빈 오두막을 구해 맨 손으로 고치면서 오가던 인연들과 사연들이 한 줄기로 가지런히 정돈이 되었다.
노인전문병원에 도우미로 생활하면서 치매 노인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익히고 목욕시키는 실습도 하면서 어머니 모시는 준비작업의 마지막 수순으로 천도교 수련을 했으니 비할 데 없는 화룡점정이었다.
수도원에서 입도식도 했다. 네 번째 갖는 종교였다. 개신교 세례, 천주교 영세, 불교 수계를 이은 천도교 입도였다. 종교에 신도 되기를 포기하고 살았는데 15년여 만이었다. 강령은 <동경대전> ‘논학문’에 나오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발현으로 한울을 모셔드리는 현상이다.
시천주(侍天主)가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양상은 그 사람의 살아 온 내력에 따를 것이고 그 사람의 기질에 따를 것이다.
다. 본래본성
마음의 근원자리가 본래본성이다. 마음이 제 자리에 놓인 것. 원래부터 있었던 자리에 비로소 다시 들어가게 된 것. 수련은 본래본성자리에 들기 위한 시도. 강령은 그 성취.
마음은 내가 먹기 나름인가.
생각은 내가 하기 나름인가.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맞는가. 마음은 내가 먹는 것인가. 마음은 내 것인가. 아니면 그 마음이 나인가. 본래본성의 자리는 이런 논란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사고작용을 넘어선다. 치열하고 조밀한 사색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이 아니라 체험이다. 체험.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마음을 내가 쓰는가. 마음이 나를 부리는가.
천도교 수련에서 얕지만 또 하나의 체험을 한 것이다. 내 마음이 제 자리를 잡는 체험이었고 이 체험은 이후 벌어지는 어머니와의 생활을 잘 영위하게 하는 토양이 되어 준다.
입도식 선물로 임운길 선도사님이 쓰시던 경전도 받고 청수그릇 세트도 받는다. 동학이 아닌 천도교를 만난 것이다. 경전을 읽는 맛은 색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수운 대신사께서 강렬한 강령체험을 하실 때 두려워말라는 한울님 목소리는 시내산에서 십계를 받는 모세를 닮았다. 눈이 부셔 제대로 뜨지도 못하며 우레와 광채에 벌벌 떠는 유대백성들을 향해 두려워말라고 외치는 출애굽기의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수심을 얘기하는 해월신사님의 만진불염 욕념불생(萬塵不汚 慾念不生)에서는 맹자의 양심막선어과욕(養心莫善於寡欲)이 생각났다. 공자의 옹야편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가 떠오른 것은 논학문에서 수운대신사가 제자의 물음에 답할 때였다.
제자가 “왔다가 가는 사람을 왜 거론도 하지 말란 말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대신사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경이원지(敬而遠之)”
본래본성 자리에서는 수심정기(守心正氣) 할 따름이다. 수심정기의 방법이 따로 있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랑 잘 사는 것이었다.
라. 효제온공(孝悌溫恭), 그리고 시부모(侍父母)
수심에서 효도하라는 것이 그 방법의 첫째였다. 화악산수련원을 나와서 건성건성 읽게 된 경전의 모든 구절들이 나를 향해 있었다. 닦을 수(修)만 수자인 줄 알고 있었는데 지킬 수(守)가 등장하여 깜짝 놀랐다. 정말 의외였다. 닦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이미 한울을 모셨으니 잘 지키라는 이 말은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그런데 수심정기의 구체적인 방법의 첫째가 효도라니 내 어찌 놀랍고 반갑지 않았겠는가. 이때부터 모심(侍)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김용휘선생의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에서 모심의 세 줄기는 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內有神靈外有氣化各知不移)임을 본다.
모신다는 것이 제대로 보였다.
박맹수선생이 설립·운영하던 <모심과살림연구소>의 ‘모심’과 ‘살림’에 새삼 눈에 띄었다. 생명평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도법스님과 사단법인생명평화결사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생명’에 비해서 ‘살림’이 적극적인 실천의지를 담지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평화’보다 ‘모심’이 평화의 구체적 실현방도임을 자각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때부터 생명운동은 살림운동으로, 평화운동은 모심운동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동안의 민중운동이 자유를 넘어 평등으로, 민족과 민주를 넘어 생명과 평화에 도달했다면 이제는 살림과 모심의 운동이 후천개벽의 열쇳말이 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모신다는 말이 그동안에는 상대를 불편 없이 잘 보살피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나를 희생하거나 억누르는 것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고 때로는 주종관계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 분 잘 모셔라.”고 할 때 절대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다. 모심을 받는 사람과 모시는 사람이 분리된다. 한쪽은 수모도 감내 해야 하고 한쪽은 패악을 저지르기도 한다.
21자 주문을 한 자 한 자 풀이하신 수운 대신사님은 모시는 것이야말로 내유신령,외유기화,일세지인,각지불이라고 했다. 모심의 혁명적 풀이라고 여겼다.
‘내가 네가 되는 것’이 모시는 것이다. 대상도 주체도 없다. 본래 하나였음을 완성하는 것. 이것이 모시는 것이다. 분리되어 있었음을 깨닫고 혼연히 하나가 되는 것. 하나 되었음을 함부로 흩트리지 않는 것이 진정 제대로 된 모시는 삶이다.
저절로 나온다.
효도가 무엇인지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부처님의 <부모은중경>이나 공자의 <효경>에서 말하는 효도와는 전혀 다른 말을 천도교에서 듣게 된다. ‘부모님을 양쪽 어깨에 한 분씩 짊어지고 어깨뼈가 드러나도록 수미산을 수 백 번씩 수 천 번을 오르내리며 유람을 시켜 드려도 갚지 못하는 부모님의 은혜’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그냥 내 안에 모시는 것이다. 부모님을 온전히 내 속에 모셔서 내가 곧 부모의 마음, 부모의 못 쓰는 수족, 어눌한 말투 이 모든 것을 내 것으로 하는 것이 부모를 모시는 것이 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후천개벽은 이렇게 온다. 산이 무너지고 하늘이 내려앉는 것이 후천개벽이 아니다. 이미 시작된 후천개벽은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다. 귀 막고 눈멀어 몰랐을 뿐이다.
3. 아뢰기 - 심고(心告)
모든 성현들은 말한다. 듣기만 해서는 안 된다. 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글만 읽어서도 안 된다. 행하라. 모든 성현들은 행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만만치가 않다. 행하라는 말이 기억 될 뿐 행해지지가 않는 자신을 발견하는 낙담이 있다. 이게 현실이다. 수운 대신사는 닦으라고 했다. 묵묵히 닦는 사람은 얼핏 보기에 헛된 것 같지만 속이 차 있다고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말했다. 닦지 않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뭔가 있는 듯 보이지만 헛되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닦게 될까?
야수와도 같은 자본주의의 끝자락에서 돈벌이에 나선 많은 영성 자(字)를 붙인 수련프로그램들에 보면 화려한 방편들이 즐비하다. 구구셈 외듯 하는 수련방편들도 등장한다. 도식화 된 상품들이다. 그렇게 통속화 된 방편들이 내 삶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 될 때 비로소 ‘닦음’이 시작된다 하겠다.
가. “오대가노?”
어머니의 이 한마디. “오대가노?”라는 한 마디에 내 헛 심고(心告)가 그 앙상한 실체를 드러냈다.
이후로 어머니 시야를 벗어날 때는 늘 알려드렸다. 청수봉전을 하면서는 그토록 잘 하는 심고를 곁에 계신 가족에게는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 더구나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아들이 안 보이면 당장 밥상에 숟가락 하나 놓아 줄 사람 없는 어머니인지라 아들이 어디 가면 걱정이다. 걱정 정도가 아니라 생존에 대한 공포일 수가 있다. 이런 사람에게 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고는 시일이나 기도 때 하는 의례가 아니다. 내가 한울임을 늘 선포하는 행위다. 나를 당당하게 만 천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행위다. 입속말로 하기보다 소리 내어 하는 것이 좋다.
“어머니. 논에 물 보러 갈게요.”
심고는 또 다른 커다란 혁명적 뜻을 지닌다.
내 삶을 내 의지로 이끈다는 것이다. 틈입하는 이물질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산다는 것이다. 삶의 주체가 되는 지름길이 바로 심고다. “부엌에 가서 군불 땔게요.”라고 한 나는 내가 선언 한 대로 아궁이에 군불을 땐다. 그 순간 나는 내 삶의 온전한 주인이다. 내가 하기로 마음먹은 대로 산 것이다.
‘지금여기’에는 건성이고 마음은 허랑한 방황을 계속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심고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뜻은 보다 가지런해진다. 생각은 이물질이 제거되고 정갈하다. 내 심고에 관련되는 다른 존재들이 평화롭다. 나를 잘 보이게 드러내는 것이 심고이므로 나를 보는 사람들은 의심이 없다. 불안이 없다. 평화가 바로 이것이다.
나. “언제 올끼고?”
꼬박꼬박 심고를 잘 하게 된 나에게 때가 되어 어머니는 심고를 더욱 심화시키는 과제를 주셨다. 서당에 갔다 오겠다고 하자 내게 물으신 것이다.
“그라믄 언제쌔나 올끼고?”
그렇구나.
가기만 하고 오는 시간은 고무줄이었구나. 기다리는 어머니 마음이 걱정과 염려, 불안으로 채워지는 시간이 내 고무줄 시간 때문이었구나.
이때부터 나는 거의 육하원칙에 맞춰 심고를 하기 시작했다.
“논에 물 보러 갈낀데요. 호박이 열렸는지 한 번 보고 논두렁 풀도 길었으면 좀 베고요. 열 두 시쯤에 돌아올게요."
최대한 심고는 자세히 하는 것이 좋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아주 구체적으로 심고를 하면 빈틈없이 알 찬 삶을 살게 된다. 억지로 구체화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투명하거나 분명하지 않으면 실제 그대로 심고하면 된다.
“.... 열 두 시쯤 올라카는데요 자시 모르겠어요. 가 봐야 알것어요.”
“그럼 그럼. 가봐야 알지. 농사꾼이 들에 나가믄 한 가지 일만 하게 되나. 발에 걸리적거리는 게 다 일거린데.”
내 심고가 실속 있는 발전을 거듭 할수록 어머니의 가르침이 선연하다. 천도교 어떤 선배도 그런 가르침을 준 적이 없었다. 심고가 왜 오관에 안 들어갔는지 유감스러울 정도였다. 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에 심고도 넣어서 육관으로 하면 안 될까? 기도와 심고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 괜히 혹 붙인다?
주워 담지 못하는 것이 말이다. 괜히 육하원칙까지 찾아가며 심고했다가 감당 할 수 없게 되면 어떡할 거냐고 걱정 할 필요는 없다. 무리한 심고는 저절로 안 하게 된다. 무위이화(無爲而化)가 된다.
말부터 했다가 나중에 못하게 되면 어떡할 거냐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미리 말 했다가 저지 당하면 어쩔거냐고 할 필요도 없다. 어머니에게 심고를 하면 어머니는 귀를 잡수셔서 잘 알아듣지 못하시는데도 뭐든 “오냐 오냐” 하신다.
어딜 가든 너를 믿는다는 신호다.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는 표시다. 네 일이 아무리 많고 바빠도 나를 돌보러 곧 돌아 올 거라는 믿음을 어머니는 그냥 “오냐 오냐”로 표현하시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안 된다고 하면서 저지 한 적이 없다. 정 걱정스런 일이면 “조심하라.”는 말로 허락을 대신하신다.
구두를 닦고 새 옷을 갈아입은 스무 살 딸이 “오늘 남자친구 만나서 시외로 데이트 가는데요. 저녁은 밖에서 먹을 거 같고요. 어쩌면 오늘 밤 못 들어올지도 몰라요.”라고 심고를 했다고 하자.
대뜸 “안돼!”라고 할 부모는 없다. 심고는 자신 뿐 아니라 상대까지 시천주 하는 과정이기에 그렇다.
“왜? 안 들어오면 어디서 자는데?”라고 묻게 된다.
그러면 딸의 대답은 저녁 늦게 학교 언니 생일파티에 남자친구랑 같이 가는데 거기서 자게 될 것 같다는 대답을 할 것이고 부모는 그 말을 듣고 안도하게 된다.
이런 원리다. 심고의 신비스런 원리다.
4. 큰 절하기 - 향아배례(向我拜禮)
몇 시간 이상 걸리는 외출 때는 어머니께 늘 큰절을 드리게 되었다. 심고에 약간의 격식을 갖추게 된 것인데 “찌랄하고로 만날 봄시로 절은 무신 절이고?”하시지만 어머니는 기분이 좋다. 절을 받을 때는 늘 일어나 앉으신다. 누운 사람에게 절을 하는 것은 죽은 사람 외에는 하지 않는 법이다. (이것도 어머니에게서 배워 알게 되었다.)
사실은 나를 향해 절을 하는 것이다. 어머니한울님 잘 모시라고. 어머니한울님 모시느라 지치거나 다치지 말라고 나를 격려하는 절이다. 나아가서 네가 한울이라고 나한테 일러주는 절이다.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일러주었다. “절을 드린다.”는 “저를 드린다.”가 어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울님 모시는 예도로써 절이 그만이지 않는가.
우리 집에 오는 외부 손님들에게도 절을 하시라고 했더니 다들 잘 하신다. 첨보는 낯선 손님일망정 두 손 모아 절을 하는 담에야 어머니도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고 손을 짚고 같이 고개를 숙이는 식의 맞절을 하시게 된다. 풀어 헤치고 너저분하게 지내기 쉬운 치매 노인 생활에 청량제가 된다.
언젠가 김지하선생은 강의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를 한울인 나 자신을 향해 제상을 차리는 것이라면서 위패가 있는 벽 쪽에 둔 밥그릇을 절을 하는 내 쪽으로 옮겨 놓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향아설위에 대한 오독이다.
향아설위는 제상은 늘 하던 대로 차리되 모든 조상의 이어짐이 내게로 와 맺혀 있음을 알고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제상 차린다는 것임을 동일시하라는 가르침이다.
제자가 해월신사께 물었었다. 제상을 차리다가 음식이 떨어져 주워 먹어버렸다면 제상을 다시 차려야 하느냐고.
해월신사께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조상이 곧 나라고 하신 것이다. 향아설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하는 향아배례도 같은 이치다. 어머니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인 어머니. 어머니인 나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절을 해서 얻는 이득은 더 있다. 어머니가 절값이라고 지갑을 여는 때가 있다. 손님들이나 내가 채워드린 지갑이지만 자식에게 용돈 건네는 노인네나 용돈 얻게 되는 오순이 넘은 아들이나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5. 활짝 웃기
가. 즐거워해야 감응한다
본래본성을 지키고 기운을 가지런히 하는 것은 공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주변을 공경하며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시천주하기 위해서다. 천도교 도인들의 모든 신앙행위는 시천주를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해월신사께서는 주요한 지적을 했다. 늘 기쁘고 즐거워야 된다고 했다. 마음이 기쁘고 즐겁지 않다면 하늘인들 감응할쏘냐. (心不喜樂 天不感應)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면 하늘이 감응한다.(心常喜樂 天常感應)고 했다.
공손한 태도도, 온화한 미소도 다 내가 즐겁고 기뻐야 한다.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상대와 공감을 이뤄야 가능 한 일이다. 속으로는 괴롭지만 겉으로만 꾸며 짓는 웃음과 친절은 하늘이 감응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짜증을 내도, 한탄을 해도 나는 활짝 웃는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감정을 소홀히 한다는 느낌을 줘서는 안 된다. 상대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위로하면서도 활짝 웃을 수 있다.
“성을 안 내는 기 고마워. 늘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아.”
어머니가 손님들이나 친지 가족들에게 나를 칭찬하시는 말이다.
“여자도 들에서 일하고 어둑해서 집이락꼬 와서는 정지에 들어 갈락카믄 썽이 나는 법인데 우리 아들은 썽 낼 줄을 몰라.”
“늘 웃는기 기특해서 내가 죽어서도 너를 도와 줄끼다. 뭣이라도 너를 거들라 줄끼다.”
돈 안 드는 내 웃음 하나로 나 자신도 어두운 기운에 빠져들지 않아 좋고 어머니도 나쁜 기분이 더 깊어지지 않고 훌쩍 빠져 나와서 좋다. 칭찬까지 들으니 좋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보다 칭찬하면 칭찬을 받는 사람도 그렇거니와 칭찬을 하는 사람은 더 큰 공덕을 쌓는게 된다. 우리 어머니 공덕 쌓게 해 드리니 겹으로 좋은 일이다.
나. 웃음의 전염성
웃음은 슬며시 웃을 때와 활짝 웃을 때가 다르다. 상대방이 언짢아 할 때는 슬며시 웃으면 안 된다. 온통 활짝 웃으면서 분위기를 확실하게 압도하는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 좋다.
주로 옛날 고된 기억이나 꿈속에서 기분을 상해 오신 어머니도 내 지속성 있는 웃음 앞에서 아침이슬처럼 슬금슬금 상한 기분을 교체하신다.
짜증과 분노는 돌이켜보면 모두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의 발로다. 웃음은 이것을 발견하게 해 준다.
6. 여쭙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옛 속담을 단지 매사에 신중하라는 격언으로만 새기지 않는 게 좋다. 아는 길도 묻다보면 이웃과 사귀게 된다. 아는 것을 물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참 고마운 일이다. 상대로 하여금 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하는 신비한 사교법이 ‘아는 것도 묻는 것’이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넌다는 말도 같은 취지다.
아뢴다는 차원의 ‘심고’를 한 차원 높이는 것이 질문형 어법이다. 여쭙는 것이다. 아는 것도 물어보면 내 지식이 더욱 견고해진다.
가. 꼭 대답하는 한울님
긴가 민가 싶은 것이 있다고 하자. 주변 두 세 사람에게 물어보면 정확한 해답이 나온다. 누구에게 드러내고 물을 수 없는 개인적인 사항이라고 하자. 그래도 물어보라. 누구에게? 한울님에게 물어보라. 마음속으로 내 한울님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라. 두세 번을 넘기지 않고 해답이 나온다. 가만히 귀 기울이고 물어보면 한울님은 꼭 응대하신다. 몇 번을 해도 답이 없다면? 그것은 답이 없는 것이다. 한울님도 답이 없을 때가 있다. “답이 없다.”는 대답을 잘 들어야한다.
답은 있어야만 한다고 고집 부려서는 안된다. 여쭙는 사람은 답 없음에 당황 할 일이 아니다.
어머니에게 늘 여쭙는다.
마늘 까는 것도 여쭙고 청국장 띄우는 것도 여쭙는다. 콩을 삶을 때 얼마나 물에 불려야 하는지도 묻는다. 귀찮을 정도로 묻는다.
어머니는 신이 나신다. 그것도 모르냐며 나를 타박까지 해 가며 신바람이 나신다. 가만히 누워 지내기 쉬운 치매 할머니가 그러다보면 손수 일거리를 삼아 집안일도 하게 된다. 마늘도 찧고 가죽 자반도 만든다. 수제비도 만들고 떡국도 썬다.
나. 밥상공동체
단정적인 선언식 발언보다 묻는 말투가 좋다. 사람 사이를 잘 맺어주는 화법이다. 지시하듯 말하지 말고 의견을 듣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온화하다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부드러운 미소가 말에 스민다면 묻는 말이 될 것이다.
여러 공동체가 있지만 같이 나눠 일하고 같이 나눠 먹는 밥상공동체가 가장 든든한 공동체다. 밥상을 같이 하지 않는 이념의 공동체, 사상의 공동체는 허공에 매단 풍선이다.
여쭙는 것은 밥상공동체로 접근하는 입구가 된다.
7. “예”
어머니 하시는 말씀에 뭐든 “예”한다.
어머니의 요구는 기상천외(?) 한 경우가 많다. 한 여름에 두릅 꺾으러 가자고도 하시고 한 밤중에 보따리 싸 가지고 집을 나서기도 한다. 이럴 때는 ‘가볍게 여기기’를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한다.
‘가볍게 여기기’는 어머니의 엉뚱한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예”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요구 속에는 뭔가 내가 알지 못할 뿐 싶은 사연과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20여 년 전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수련을 할 때 충격 속에서 배운 삶의 이치기도 하다. 주제가 “예. 하고 합니다.”라는 것이었다. 최근에 ‘예스맨’이라는 책도 나오고 영화까지 나온 것으로 안다. 무비판적인 줏대 없는 인간형으로서의 ‘예스맨’이 아니라 뭐든 긍정적으로 보고 정성을 기울인다는 취지다.
어머니한울님은 무조건 “예”하는 나에게 길어야 30분이 되지 않아서 요구를 접으신다. 무조건 휠체어에 앉혀서 가자는 대로 가다보면 당신께서 스스로 상황을 읽으시고 선회하신다는 것이다.
8. 사물여천(事物如天)
쌀뜨물을 따로 담아 국 끓일 때 넣거나 미생물 발효액을 넣어 미생물제제를 만들어 쓴다. 계곡물을 끌어 내려서 만든 동네 간이상수도라 물 값을 안 내지만 설거지통에 물을 받아 사용한다.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설거지 하는 법이 없다.
음식물 남은 찌꺼기는 닭장으로 가고 다시 거름이 되어 밭으로 간다. 드럼통을 잘라 만든 소각장에는 비닐 한 조각이 안 들어가게 한다. 어머니 잘 드시는 두유 빨대마저 따로 모아 분리수거를 한다.
돈 주고 산 쓰레기봉투에 쓰레기를 넣어 마을 종점에 요일에 맞춰 갖다 두면 동네 할머니들이 슬그머니 일러준다. 삶의 지혜를 일러준다. 안 볼 때 태워버리라고 왜 비싼 돈 주고 쓰레기봉투를 사냐고.
어머니가 쓰시는 밥주발은 찬장에 따로 둔다. 아무리 설거지가 많아 쌓을 데가 없어도 어머니 밥주발 위에는 절대 아무것도 얹지 않는다. 어머니 수저도 따로 둔다. 섞이지 않게 하고 밥을 펄 때나 국을 펄 때도 살짝 퍼서 그릇을 따뜻하게 데운 다음에 음식을 담는다. 물론 가장 먼저 담는다.
어머니 소중하다고 다른 것을 소홀히 하면 다른 것들이 어찌 어머니를 소중히 여기겠는가. 사인여천(事人如天)에서 사물여천(事物如天)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그래야 진정한 사인여천이 이뤄 질 것이다. 모든 사람 대하기를 한울님 대하듯 하라고 했는데 사람보다 수가 훨씬 많은 사물들이 사람 대하기를 한울님처럼 안 하고 물건 다루듯 해버리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이 먼저 세상 모든 사물 대하기를 한울님 대하듯 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는가.
9. 마음의 행로
마음길이 있다면 그 길을 내는 힘은 수련에 있다. 근원자리에 가 닿게 하는 마음 길은 사람마다 제 각기 다를 것이다. 그것은 수련에 이르는 과정과 수련의 체험이 사람마다 제 각기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르는 곳은 하나다. 한울을 모시는 것이다.
천도교 교리를 잘 알고 그렇게 살아가므로 해서 한울님을 모시게 된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럴 수도 있겠다. 잘 살다보니 그것이 한울님 모시는 일이었고 그것이 천도교 교리였을 수도 있다. 이렇듯 마음 길이 나 있는 경로는 여럿이다.
오직 수심정기하고 시천주 할 따름이다.(끝)
첫댓글 체험.사실적으로.극진으로 대하기...자신에게 솔직함.글잘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