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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가 행해야할 기적>
예수님께서 활발하게 복음 선포 사업에 매진하시던 공생활 시절,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목숨까지 바쳐가며 말씀을 선포하던 초대교회 시대 당시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랄 표징들, 기적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귀를 쫒아낸다든지, 죽어가던 병자들을 치유시킨다든지, 독을 마셔도 쌩쌩하다든지 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술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어와 관련된 기적에서 참 부러웠습니다. 수십 년간 죽도록 공부해왔지만 아직도 걸음마 수준인데, 전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술술 딴 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표징의 강도가 그만큼 강렬하다는 반증이겠지요.
사도행전 28장 3절에 보면 바오로 사도가 탄 배가 난파되어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한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섬은 이탈리아 반도 아래에 위치한 몰타라는 섬이었습니다. 비가 내리는데다 날씨까지 추워 불을 피우게 되었는데 바오로 사도는 땔감 한 다발을 모아 불속에 넣자, 독사 한 마리가 열기 때문에 튀어나와 바오로의 손에 달라붙습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저 사람은 이제 끝장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바오로 사도는 태연한 표정으로 독사를 손에서 떼어내어 타는 불속으로 떨어트렸습니다.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몸이 곧 부어오르거나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계속해서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는 초대교회 시절 부지기수였습니다.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공생활 기간, 초대교회 시대는 ‘기적의 시대’ ‘표징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과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키며 하느님의 권능을 만방에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적의 원동력,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정답은 명확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그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표징, 확신 없는 기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한 것이 사라진다, 우리 인간은 약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강건하다는 강한 믿음과 확신이 그 숱한 표징과 기적, 치유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표징과 기적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이어져왔습니다.
다만 믿음이 형편없이 약해진 시대, 우리의 시선이 너무나 탁해져서 그러한 기적과 표징들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믿음, 완고한 불신으로 인해 우리 곁은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기적과 표징들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 우리는 사랑의 기적을 펼쳐가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내 작은 선행, 내 작은 헌신, 내 작은 봉헌과 나눔을 통한 사랑의 기적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행해야 할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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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25 목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1베드5,5ㄴ-14 마르16,15-20
복음 선포의 사명
복음 선포의 사명을 띠고 세상에 온 우리들입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 삶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자체입니다.
말 그대로 믿는 이들의 삶은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하여 복음 선포는 우리 교회의 존재이유이며 정체성임을 깨닫습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이 실종되면
종교적 친목단체일 수는 있어도 결코 믿는 이들의 교회는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온 세상,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복음 선포의 대상입니다.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 분도수도승들에게
바로 세상의 중심인 여기 수도원이 복음 선포의 장입니다.
복음 선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부활시기를 맞아 만개한 수도원 경내의 온갖 꽃들
그대로 주님 부활을 경축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으니
그대로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모습입니다.
아침 화답송 시편 중 다음 구절이 은혜로웠습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
(시편9,16-17).
그대로 부활시기, 미사 축제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를 향한 축복의 말씀이요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축제를 통한 복음 선포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오늘은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주님 부활의 위업을 이루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삶 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의 삶은 없습니다.
특히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 분도수도공동체는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찬미와 감사로 공동체적 복음 선포에 항구합니다.
무수히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환대하여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에 참석케 함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들입니다.
둘째, 겸손과 온유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은총이
우리를 예수성심의 겸손과 온유로 변화시켜줌으로
존재론적 복음 선포는 효과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1독서에서 겸손을 극구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지만
자신을 낮춘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겸손에 이어 깨어있음을 강조합니다.
겸손할 때 깨어있게 되고 깨어있을 때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겸손할 때 저절로 따르는 온유와 깨어있음입니다.
이런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셋째, 평화와 기쁨의 삶입니다.
겸손과 온유의 인품을 통해서
저절로 이웃에 발산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런 평화와 기쁨이 복음 선포를 완성합니다.
불안과 상처의 슬픔을 안고 사는 많은 이들이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찾아 수도원을 찾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하고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가왕이라 일컫는 조용필님의
‘나는 음악의 깊이보다는 편안한 것을 찾아왔다.’라는 고백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깊이와 평화는 별개의 것이 아닌 진정한 평화가 깊이임을 깨닫습니다.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은 세 세트로 요약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
겸손과 온유의 내적변화,
이웃에 전하는 평화와 기쁨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겸손과 온유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어
평화와 기쁨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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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역경’, ‘내 힘들다’라는 말을 잘 보십시오. 이 단어들이 나의 입에서 나올 때 어떨까요? 사실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이러한 단어들이 내 입에서 제발 나오지 않기를, 또 나의 단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을 거꾸로 읽어보세요.
‘살자’, ‘경력’, ‘다들 힘 내’
이렇게 긍정적인 말, 힘이 되는 말이 됩니다. 단지 거꾸로 읽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내 삶이 온통 부정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통과 시련으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순간에 내 삶을 거꾸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새로운 나의 삶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모습만이 내게 주어지고, 또 고통과 시련이 없는 행복한 삶만 내게 주어지는 똑바른 삶이 좋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똑바른 삶만이 계속된다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은 더욱더 피폐해질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지구가 23.5도 기울어지지 않고 똑바로 있다면 어떨까요? 태양은 적도 위에만 비칠 테고 따라서 생명이 살 수 있는 면적이 절반으로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도 반대쪽은 항상 겨울이여서 쓸모없는 땅이 될 테니까요.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많은 생명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삶이 어렵다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꿔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주님께서 가장 좋은 시간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기술하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그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출판과 인쇄업이 발전한 시대도 아니었지요. 더군다나 박해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마르코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만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기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또한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꿋꿋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참된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을까요? 혹시 ‘나는 할 수 없다’만을 외치면서 남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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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2013. 4. 25. 목)(마르 16,15-20)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모든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 소식이 나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이기 때문이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선교활동에서 중요한 것>
1) 기쁨 - 복음을 전하는 사람 안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흔히 보는데,
자기 안에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를 고민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전해 주는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2) 삶 - 복음의 기쁨은 '기뻐하는 생활'로 나타납니다.
그 기쁨이 생각 속에만 있고 '삶' 속에 없다면 그건 진짜 기쁨이 아닙니다.
온 삶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선교활동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3) 믿음 -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 소식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안 믿는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전할 수는 없습니다.
선교활동은 이론이 아니라 '믿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4) 사랑 -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자비, 구원은 전하지 않고,
신자 수가 늘어나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속세의 영업 활동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활동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선교활동은 상대방의 몸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5) 희망 - 복음을 전하는 일은 희망을 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희망은 막연한 먼 훗날의 희망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지금의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믿는 것이 신앙인의 '믿음'이고,
그 희망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믿지 못하고, 희망이 없으면 기뻐하지 않고,
희망이 없으면 사랑이 힘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희망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은 믿음을 잃은 사람입니다.)
선교활동은 희망을 잃고 절망과 좌절과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6) 생명 -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의 생명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나중에 죽은 다음에야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한 미래의 생명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생명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그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 모습은 생기가 가득 차 있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생기 없는 모습으로, 어둡고 쓸쓸한 표정으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기쁨, 사랑, 생명력은 그 자체로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도 저절로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7) 평화 -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의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선교활동은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한 봉사입니다.
공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일부 종파를 보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분열과 갈등이 생기고 평화가 깨집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무서운 소식만 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을 사랑으로만 전할 수 있는 것처럼 평화도 평화로만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더라도 평화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실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일이니 예수님 방식으로 해야 하고,
예수님의 일이니 예수님께서 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도와드릴 뿐입니다.
그러니 결과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과만 강조하는 것은 복음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겨자씨의 비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그 씨를 심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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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
강연 100도씨에 아이돌 가수에서 유명 토익 강사가 된 권영준씨 이야기가 나옵니다.
10여 년 전 아이돌 그룹 ‘맨사‘의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돌이라는 화려함 속에 가려진 실제 그의 생활은 초라하고 궁핍했습니다. 소속사의 횡포로 수입은 거의 없었고 팬들이 선물로 주는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연예계 이면에 환멸을 느끼고 그룹을 탈퇴하여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군 입대를 했습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던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을 했고 마침 군대 내에서 토익 시험 700점이 넘으면 외박을 보내준다는 말에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첫 토익 시험 점수는 395점이었지만 한 시간 늦게 자고 한 시간 일찍 일어나며 시간을 쪼개 공부에 매진한 결과 차츰 점수가 올랐고 제대를 앞두고 925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의 놀림감이었지만 아이돌 연습생 때 먹지도 못하고 고생하던 것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했던 것입니다.
서른이 되어 종로 영어 학원 강사로 지원을 했고 합격을 했고 연수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40명이 들어오는 강의실에 한 명밖에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끊임없는 질문공세를 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엔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미리 대답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것에다가 가끔 노래도 불러주고 팝송도 불러주고 자신이 아이돌 그룹이었을 때의 영상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명이 다섯 명이 되었고 다섯 명이 사십 명이 되었으며 지금은 한 번에 삼백 명을 앞에 앉혀놓고 강의를 하는 유명강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국 유학을 다녀오지도 영어를 전공 하지도 않았지만 현재 유명 어학원 인기 토익 강사가 된 권영준씨는 아이돌 때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특히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무대 위에서 대중들 앞에서 노래고 춤추던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을 관객으로 생각하고 강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났을 때 학생들이 만족한 표정을 지을 때 느끼는 감정은 노래를 하고 관객이 박수를 쳐 줄 때의 희열과 감동과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절대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 마르코 복음사가와 같은 분을 보면서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한거지?’라는 질문도 제 스스로 던져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분은 베드로를 쫓아다니며 그를 돕고 또 그가 들은 것을 적은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복음이라 전해지는 것은 성경으로 채택이 안 되고 그의 말을 듣고 적은 마르코복음은 성경으로 정해졌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어부였기 때문에 글 솜씨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베드로복음을 조금 읽어본 적이 있지만 매우 간결하여 말씀의 깊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지는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마르코는 그러나 글 솜씨가 있었던 것입니다. 남이 하는 말도 잘 받아 적어서 그 뜻을 손상하지 않고 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베드로를 알기 이전에 이미 여러 경험을 통해 갖추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당신을 증거하는 사도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말씀은 그가 어부생활하며 배운 모든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겠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도 경영학을 좀 공부했지만 사제생활을 하면서도 그 때 배웠던 것들을 많이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경영학도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고, 본당사제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지도밖으로 행진하라’라는 책으로 유명한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1958~)씨는 본래 여행사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40세에 모든 것을 접고 오지여행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떠나게 한 것은 먼저 그녀가 근무했던 여행사에서의 경험들이었습니다.
지금 힘들고 실패하며 어려움을 겪고 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그것들은 내 안에서 무한한 잠재능력이 됩니다. 하느님은 그것들을 결코 썩혀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들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면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내가 가진 경험 안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읍시다. 그리고 그것을 끈기 있기 발전시켜 나가고 복음전파에 사용한다면 주님은 뜻은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겪은 모든 일들과 만난 모든 사람들, 하느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이유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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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선포하여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어 놀랬습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서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지길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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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를 명령하시며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많은 이가 기적이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그러한 것이라면 과학이 발달할수록 점점 사라져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에는 제주에서 서울까지 한 시간 만에 하늘 위로 날아가는 것이 기적이 아니지만, 백 년 전만 해도 그것은 기적입니다. 오늘날 휴대 전화로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옛날에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이란 과학의 발전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기적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적’이라는 말과 함께 ‘표징’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입니다. 곧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에 가능했다고 믿는 일을 두고 기적 또는 표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는 일,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른 자가 죄를 뉘우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처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건을 두고 그리스도교에서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복음에서 믿는 이들에게 놀라운 표징들이 따를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은, ‘믿는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이 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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