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없는 팬데믹을 겪고 있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이지만, 올 겨울나기가 가장 힘든 것 같네요. 코로나19 3차 대유행에 혹독한 한파까지 덮치니, 어느때보다 연탄 한 장의 온기가 더 절실한 위기가정이 많아요. 그런데 ‘5인 이상 집합금지’로 자원봉사자도 모일 수가 없어 연탄 배달을 못하고 있으니 걱정이 크네요.”2004년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의 주창자이자 17년 만에 이사장을 맡은 이동섭 희망래일 부이사장은 7일 전화 인터뷰에서 한숨 섞인 첫 마디로 새해 인사를 했다. 마침 방송에서는 북극발 최강한파로 다음날 서울의 아침 체감기온이 영하 25도 이하로 더 내려갈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당장 발등의 불부터 끄려면, 자원봉사자 대신 전문 배달업체에 맡겨서라도 연탄을 전달해야 하니까, 직접적인 후원금이 가장 도움이 됩니다.”
‘5인 이상 집합금지’로 봉사도 중단 전문 배달업체 의뢰할 후원금 절실 “최강한파 닥치니 위기가정 더 걱정”
2004년 석탄공사노조에 첫 동참 제안 북녘 1천만장·남쪽 5천만장 지원 “남북 평화·통일 향해 길 뚫어야”
“연탄나눔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크게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풍찬노숙만 해오다 2004년초 대한석탄공사 감사가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북한 돕기 운동을 먼저 시작한 친구의 한 마디였어요.”이 이사장이 말한 ‘첫번째 계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남다른 이력부터 되짚어봐야 한다. 1972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이른바 ‘긴급조치 세대’이다. 유신독재에 맞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가 1975년 퇴학당한 뒤 80년 서울의 봄 때 재입학했지만 계엄령 위반으로 두달만에 다시 쫓겨났다. 1년간 옥살이도 했다. 풀려난 뒤 풀무원에서 3년 가량 두부 제조와 판매를 맡아 ‘포장 두부’를 최초로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다 1984년 강원도 태백에서 3개월간 광원으로 일했다. 그뒤 서울에서 3년간 택시운전 기사로 일한 뒤 택시노조에서 노동운동을 펼쳤다. 1993년까지 쟁의부장 맡아 택시 총파업으로 또 한번 구속되기도 했다.“풀무원 시절 ‘운동권 동지들’을 돕다가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과 연결되면서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어요. 인권단체인 새사회연대 활동을 함께 하다가 1998년에는 15대 국회의원이 된 김 의장의 보좌관이 됐죠. 2001년 한반도재단 설립과 2002년 대선 경선캠프에도 참여했어요. 그 덕분에 ‘팔자에 없는 낙하산’을 타게 된 것 같은데, 짧은 광원 경험을 ‘고리’로 석탄공사에 착지한 거죠.” ‘두번째 계기’를 제공한 친구는 약사 출신으로 1996년부터 북한 어린이돕기운동에 앞장 선 임종철 전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이사장이었다. “겨울 무렵 북에 다녀온 직후 그 친구를 만난 적이 있는데 ‘평양의 병원들이 난방을 못해서 겨울철엔 제대로 운영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어요. 내내 그 말이 마음에 남았어요.”그는 강원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는 석탄을 이용해 남쪽의 어려운 이웃과 북녘 동포들을 모두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석탄공사 노조에 ‘연탄나눔 운동’을 제안해 동참을 끌어냈다. 노조원을 비롯해 3천명 가까운 임직원 전원이 연간 3만원씩 기부를 약정해 약 7000만원의 종자돈으로 ‘사랑의 연탄나눔’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4년 6월 창립대회에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을 비롯 김길남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 공동의장, 손장래 ‘민족21’ 상임고문, 최연희·이광재 국회의원,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손경호 석탄협회장, 김지엽 대한석탄공사 사장, 차중근 유한양행 대표이사, 영화배우 문소리, 탤런트 이성룡·정종준 등 200여명이 참석했고 언론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그해 9월에는 김지하 시인, 김근태 의장, 작가 신경숙ㆍ박민규, 배우 오지혜, 방송인 임백천 등 각계 인사 24명이 쓴 연탄에 관한 글을 모은 에세이집 <연탄>(문학동네)도 펴내 그 수익금을 전액 연탄나눔에 기부하기도 했다.“그해 가을 금강산 온정리 마을을 첫 방문한 이래 2010년 5·24조치 이전까지 연탄 1000만장 가량 지원했어요. 한 번에 트럭으로 5만장씩 싣고 갔으니 200차례쯤 오르내린 셈이죠. 직접 배달한 것도 금강산 30여차례, 개성 50여차례이고 협의차 갔던 평양까지 더하면 100차례도 넘지 싶네요.”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그는 북쪽 관리들의 태도 변화를 꼽았다. “연탄을 싣고 가면 그날로 바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수백명 주민들이 나서서 하역작업을 했어요. 그래서 나를 비롯해 트럭 기사까지 남쪽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니 초기엔 바라만 보고 있던 양복 차림의 관리들도 하나 둘 동참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연탄나눔은 ‘에너지복지·인도적 대북지원·자원봉사운동’ 3대 원칙을 설립 이래 고수하고 있다. 남쪽 이웃들에 대한 지원은 꾸준히 이어져 지난해까지 약 5천만장의 연탄을 배달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초대 이사장으로 모신 변형윤 서울대 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님이시죠. 2017년께 구순을 계기로 여러 사회 활동 직함을 내려놓았지만 ‘사랑의 연탄나눔’은 지난해말까지 16년간 가장 열성과 애착을 기울여오셨어요. 더불어 연인원 60만여명의 자원봉사자와 6천여개 단체가 동참해준 덕분에 가능했고요.”어느때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연탄나눔의 살림을 도맡게 된 그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데 부심하고 있다.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 교류가 막혀 고비를 맞았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도 했어요. 중국 조선족들에게 눈을 돌려 옌벤지역 동포들에게 갈탄 구입비를 지원하기 시작했죠. 또한 ‘섬나라보다도 더한 섬나라’인 한반도 남녘에서 아시아 대륙으로 시야를 넓혀 ‘희망래일’을 설립했어요.”실제로 그는 희망래일을 통해 대륙학교와 시베리아 인문여행을 진행하고 있고 2018년 ‘4·27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철도연결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겨레> ‘길을 찾아서-평화에 미치다’ 연재를 보고 박한식 조지아대 석좌교수가 제안한 ‘개성평화대학’ 설립운동도 함께 벌이고 있다.“남들은 ‘무슨 돈 안되는 직함’이 그리 많냐고 놀리기도 하지만 내겐 모두 하나로 연결된 활동이죠. ‘연탄나눔 덕분에 더 이상 땔감 벌목을 하지 않아 금강산을 푸르게 지킬 수 있게 됐다’고 했던 북녘 동포들의 얘기를 잊을 수 없어요. ‘남북 평화 공존과 통일’로 향하는 일이면 뭐든 길을 뚫어야 하지 않겠어요?”
사랑의 연탄나눔운동 후원은 누리집(www.lovecoal.org)에서 참여하거나 후원계좌(우리은행 1005-601-125935)로 보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