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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지만원 조회 : 2,097 추천 : 287 |
<표지> 영상 고발장 5.18은 북한의 침략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인식돼 있는 5.18 광주사태는 1980년 전라남도 광주시민들과 국가 사이에 발생했던 10일간의 무력충돌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18일 09:30분경, 250여명의 학생집단이 전남대 정문 앞에 서있던 20명의 공수대원들에게 돌을 던져 발생한 충돌로 시작됐고, 5월 27일 새벽 0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됐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5.18광주사태는 국가를 상대로 하여 김대중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국가폭동’인 것으로 인식됐고, 당시의 법관들도 그렇게 판결했다. 우익시대의 폭동사건이 좌익시대에 민주화운동으로 둔갑 5.18에 대한 재판은 1980-81년과 1996-97년 두 번 했다. 1981년의 대법원은 우익판사들로 구성되었고, 1997년의 대법원은 좌익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전자는 5.18을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었다고 판결했고, 후자는 5.18을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고 판결했다. 검찰과 국정원이 작성한 정부문서들에는 광주의 대학생으로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특공작전’ 내용들이 '대학생 시위대 600명'이 수행한 작전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광주에서는 '연고대생 600명'으로 소문나 있던 전설 속의 이 600명이 1980년 5월 21일 오전, 이동 중인 제20사단을 습격해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기록물들에 의하면 이 600명이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가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빼앗아 타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403정의 총기와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다. 도청에 2,100개의 다이너마이트를 순식간에 폭탄으로 조립해 놓았다. 300여명의 10대 광주 소년들과 개념 없는 20대의 도시근로자들을 동원하고, 십여만 명의 광주시민들을 선동하여 폭동에 가담케 했다. 결국 광주시내에 실탄 없이 투입된 공수부대 4,000여명(3개 여단 소속 10개 대대)을 포위 압박하여 사건 4일 만인 5월 21일 오후에 광주시에서 몰아내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다. 이로써 폭동 4일만에 광주시는 완전히 북한특수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한편으로는 신출귀몰하는 자신들의 날랜 솜씨를 발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공작을 수행했다. 유언비어를 전파하고, 잔인한 시체들을 만들어 한국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고, 광주시민들을 등 뒤에서 쏘아 쓰러지게 하는 방법으로 광주시민들을 분노케 하여 폭동에 참가시키는 고도의 정치공작을 병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전내용들은 세계 최고수준의 특수부대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당시의 수사관들과 판검사들은 순진하게도 그것을 600여명의 대학생들이 수행한 전과라고 판단했다. 광주에서 촬영된 폭동현장의 얼굴들은 모두 북한의 고관들 저자는 2002년부터 12년 동안 5.18관련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18만 페이지, 북한자료, 통일부자료 등을 연구하여 3,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8권의 다큐멘터리 역사책을 썼고, 2014년 10월에 마지막으로 “5.18분석 최종보고서”라는 단행본을 통해 결론을 내렸다. “5.18은 북한의 김일성이 600명의 병력을 보내 국가를 전복시키고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일으킨 게릴라 침략작전이었고, 여기에 김대중을 추종하는 광주의 좌익세력이 동조했던 여적사건이었다” 무려 12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저자는 단호하고도 똑 부러지는 문장으로 이 결론을 냈다. 이 결론을 가장 축복해 준 존재는 하늘이었다. 2015년 5월 5일부터 위 결론을 사실로 입증하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가 이끌고 있는 단체에는 영상분석팀과 전략분석팀이 있다. 이들은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폭도들의 얼굴이 북한정권의 핵심 얼굴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모 언론사의 영상데이터베이스에서는 1980년 광주에서 쵤영된 사진들을 획득하고, 통일부 데이터베이스에서는 북한의 주요인물정보를 획득하여 이들을 대조 분석한 결과였다. 시력을 소진시키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지금까지 무려 319명의 북한의 전쟁범죄자들의 얼굴을 특정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오직 애국을 위한 신념과 극기와 감동적인 열정이 없으면 이룩할 수 없는 땀의 기적이었다. 반면 1980년의 광주 사진들 속에서는 광주사람들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5.18에 북한군이 관련돼 있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광주의 5.18단체들, 광주시장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큰 방송국 3개사가 1999년부터 공개적으로 나서서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얼굴과 닮은 사람들을 애타게 찾았지만 한국국민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광주에서 찍힌 폭도사진 속의 319명 모두가 북한사람들이고, 이 319명의 얼굴 중, "이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광주인이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북한군 600명의 지휘자는 3성장군 리을설, 총체적 대남공작 지휘자는 김중린 이 영상 분석에 의해 북한특수군 600명은 당시의 인민군 상장 리을설(1921)이 지휘한 것으로 발견되었다. 이와는 별도의 대규모 행정 엘리트, 예술인, 체육인, 소년단, 유아로 구성된 정치공작팀과 지휘부가 활동했던 사실도 영상분석 결과 발견되었다. 후자의 팀은 대남모략 공작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대한민국을 접수하기 위해 필요한 엘리트들이었다. 한국을 살인극의 나라로 모략-선전하기 위해 북한은 사진들을 쵤영하여 세계에 전파했다. 광주의 전남 도청 일대에 북한사람들로만 남녀노소를 골고루 섞어서 집합시켜놓고, 마치 그들이 광주사람들인 것처럼 위장하여 촬영을 한 것이다. 이 사진들이 이 책에 집중 분석됐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5.18광주작전은 군사작전, 모략작전, 국가접수작전으로 구성되었다. 이 통합작전은 북한판 CIA국장인 김중린(1923)이 총 지휘한 것으로 분석됐다. 위장탈북자들로 구성된 트로이목마, 그들도 광주에 왔었다 저자측의 전략팀과 영상분석팀은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319명의 광수들 중 50명은 현재 서울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탈북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현재 대한민국 최고 랭킹의 유명인들이 되어 있고, 사회 심층부에 뿌리를 내리고 정치적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한 개의 사진에 탈북자들을 빼닮은 사람이 50여 명 씩이나 들어있다는 사실은 확률의 결과가 아니라 팩트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이들 50명은 '서울광수' 또는 '위장광수'로 명명하고 있다. 이 화보의 내용은 2015년 5월 5일부터 인터넷에 공개됐고, 각종 인쇄물을 통해 대한민국 곳곳에 전달됐다. 아마도 국민의 60% 이상이 이 사실들을 알고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진실을 알게 된 많은 국민들은 그동안 속아 온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에 침묵하는 정부와 언론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한 애국단체가 공산주의로부터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 정도의 결과를 내놓았으면 당연히 국가가 나서서 규명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정부와 언론은 어째서 이토록 무관심하고 냉담할 수 있느냐?" ----------------------------------------------------------
1980년 5월, 북한은 광주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들을 북한주민들에 반복해서 중계방송했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방송시스템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있었다. “야~ 저거 광수다 광수~” 장갑차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광주시를 질주하는 모습을 본 북한병사들이 내무반에서 손뼉을 치면서 이렇게 소리를 쳤다. 이로부터 5.18의 진실을 탐구하려는 사회일각에서는 광주폭동에 참가한 북한사람들을 ‘광수’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특수군 600명은 두 개의 그룹으로 편성되었다. 하나는 일선에 투입되어 파괴와 살인을 담당한 '전투조'였고, 다른 하나는 로열패밀리와 엘리트들로 구성된 정치공작지휘부를 호위하는 '경호조'로 나뉘었다. 계엄군을 시외곽으로 추방시키는 데 성공한 '전투조'는 5월 21일 밤 광주교도소를 6차례씩이나 무모하게 공격하다 대량살상 사태를 맞이했다. 광주교도소에는 좌익수 180명을 포함해 2,700여명의 수용자들이 있었다. 북한은 리을설에게 그 수용자들을 해방시켜 폭동의 모멘텀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2014년 5월 13일부터 많은 매체들이 광주로부터 208km 거리에 있는 청주시 흥덕지구 야산에 1m 깊이로 질서있게 가매장된 단체유골 430구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서 사용된 시체포장 방법은 대한민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법이며, 오직 광주의 다급했던 상황에서 광주시체를 포장했던 그 방법과 동일했다. 칠성판’이라 불리는 나무판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두꺼운 비닐로 둘둘 말은 후 그 위에 일련번호가 쓰인 시체들이었다. 이는 오직 광주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 430구의 유골에 대해서는 그 후 보도가 안 되었고, 흥덕경찰서와 청주시청은 화장을 했다고 하지만 여러 경로로 알아본 결과 화장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냉담했다. 살아남은 군인광수 중에서 우리가 얼굴을 확인한 군인광수는 총 90명, 그중 여성이 4명이다. 군인광수는 평양에 가서 출세들을 했다. 인민군원수 1명, 차수 9명, 대장 27명, 상장 28명, 그 이하가 25명이다. 비-군인 광수는 227명, 이중 로열패밀리 7명, 여성 59명, 예술인 28명, 위장탈북자 50명 등이 포함돼 있다. 관직으로 출세한 비-군인 광수들의 출세현황을 보면, 대남사업총책(통전부장) 4, 총리 3, 부총리 5, 국회의장 1, 장관 8, 대사 7를 포함해 관 및 사회 각계 단체들의 수장들이다. 김중린, 임동욱, 김양건, 연형묵, 김용순, 김영길, 박봉주 등이 남한 사회에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들이다. 북한 권력의 핵심들 대부분이 광수였다. 위장광수의 효시는 신중철, 그는 1980년 광주에 왔다가 3년만인 1983년에 인민군 대위계급을 달고 제4땅굴을 선물로 가지고 와서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로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정보사령부에서 대령까지 승진한 다음 김대중 시절인 2001년에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북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은 김희성이다. 광주사진들에는 두건을 쓴 남자가 어린 학생을 늘 끼고 있는 모습들이 들어있다. 두건 쓴 남자는 훗날 북한 내각총리(김영일)가 됐고, 교복 입은 어린 남학생은 1997년 5월 22일 MBC가 보도한 두 가족이 동시에 귀순했다는 기자회견 사진에서 발견되었다. 어머니 가족과 이모 가족이 동시에 귀순하였다는데 그 누가 여기에 간첩이 끼어 있을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광수를 찾기 시작한 것은 2015년 5월 5일부터였다. 가장 먼저 발견된 광수는 광주에서 찍힌 3인 1개조의 전투팀원들이다. 2010년 평양 노동자회관에서 ‘5.18기념 30돌 기념’ 행사가 열렸다. 그 행사장의 로열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세 사람이 바로 광수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사진은 5.18 광주에 북한군이 왔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참으로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실이 인터넷에 떠오른 순간 많은 국민들이 환호했다. 경악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인민군상장 리을설이 여자 복장을 하고 전투조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경억했다. 황장엽과 김덕홍도 광수로 판명됐다. 이 사실이 발견됐을 때 많은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남한사회에 주체사상을 창조한 학자로만 알려져 있던 노쇠한 모습의 황장엽, 알고보니 그는 1980년 광주에 와서 광주시민을 살인했던 살인조 조장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반탐조가 남한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젊은이들을 도청으로 끌고 가 고문하다가 죽인 사실도 사진에서 발견됐다 드디어 북한의 의도를 판단할 수 있는 전체 그림을 찾아냈다. 북한이 광주에 파견한 존재는 단순한 특수군인들뿐만 아니라 폭넓은 전문가들과 로열패밀리로 구성된 대한민국 접수사령부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다. 접수사령부의 총책은 김중린, 북한판 CIA의 현역 장수가 광주에 내려왔던 것이다. 로열패밀리로는 김정일의 첫 부인 홍일천, 처형 성혜랑과 그 아들 이한영, 김일성의 여동생 김정숙, 장성택과 김경희 그리고 3살 난 딸 장금송 등 로열패밀리 7명이었다. 기본 이력 저자는 1942년 12월 강원도 산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서울 변두리에 소재한 한 야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66년 포병장교로 임관하였다. 1967년(소위)부터 1971년(대위)에 이르기까지 44개월 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전투요원으로 참전하여 공산주의자들이 펼치는 게릴라전에 대응하여 싸웠다. 귀국 후 합동참모부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고,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9년째 되는 1974년에 미해군대학원 경영학 과정에 입학하여 1975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논문을 통해 공장 재공품(Work In Proses)에 대한 가치를 통계학적으로 평가하는 수학적 접근방법을 개발하여 교수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미해군대학원 창설 (1947)이래 처음으로 경영학 석사가 응용수학 분야인 시스템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신뢰성(Reliability)과 정비성(Maintainability)을 혼합한 가동성(Availability)이라는 학문분야는 당시 비교적 새로운 학문분야였으며, 이 분야의 박사논문에서 저자는 2 개의 수학공식(Mathematical Formula)과 6개의 수학정리(Theorem) 그리고 1개의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해군함정이 90일 작전 시에 싣고 나가야 할 각 수리부품 재고량을 결정하기 위한 알고리즘(Algorithm)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당시 미해군대학원에서 이변으로 평가되었고, 지금도 그 학교에서는 하나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학위를 받은 1980년, 저자는 육군중령이었고, 귀국하면서부터 공항에서 곧장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실로 직행하는 인사발령을 받았다. 1년 동안 중앙정보부 내부의 학교과정을 이수하고, 특별보좌관으로서 국정원 내부 업무들을 파악한 후, 나는 내 희망에 따라 국방연구원(KIDA)으로 발령받았다. 1982년 필자의 연구에 따라 당시 윤성민 국방부장관은 5년 동안 재임하면서 한국군 역사상 처음으로 저자가 연구한 연구결과를 가지고 각 단위부대별 회계시스템을 설치하는 자원관리 개혁을 추진했고, 이는 '예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정부부처에도 확산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필자는 대령이자 연구소의 중견 연구관리자 자격으로 전국의 육해공군 부대들, 군수품 조달본부, 방위사업 업체를 돌아다니면서 실정을 파악해 저자를 알아주는 국방장관에 수시로 보고했다. 이로 인해 군의 고위 장군 세계에서 적이 많이 생겼고, 적이 생기는 것만큼 친구도 많이 생겼다. 1986년 군이 해외로부터 구매한 방공자동화 시스템 장비들이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날아오는 비행기들을 탐지하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방장관에게 13년 동안의 무기획득 사업의 효율성을 평가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국방장관은 이 방대한 작업을 필자에게 맡기는 일이 있었다. 필자는 2억 5천만 달러에 구입한 방공자동화 장비가 25달러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는 평가를 내렸고, 군의 무기획득사업의 효율성이 전반적으로 매우 저조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충격적인 보고서로 인해 후임 국방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불려가 심한 꾸중을 들었고, 그 후부터 필자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2월 대령으로 예편하면서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에서 3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 국방성이 요청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1989년 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군사분야 및 시스템경영에 대한 베스트셀러 책들을 쓰면서부터 저자는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군사평론을 독점적으로 전담하였고, 기업체를 상대로 시스템경영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당시 장관 연봉의 2.5배라는 비교적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프리랜서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격적으로 파괴되었다. 저자는 김대중을 북한의 총독이라 비판했고, 김대중은 그런 저자를 도청하고, 린치를 가하고, 감옥에 보내고, 또라이로 선전하는 등 맹렬하게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애국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회지배 현상들에 대해 많은 걱정들을 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악이 겉으로 드러날 때마다 산발적으로 저항해 왔다. 그러는 사이 공산세력은 점점 더 무성해졌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과는 다른 생각을 했다. 공산세력을 제압하는 근본적인 처방만이 국가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처방은 공산세력의 뿌리를 고사시키는 것이었고, 이는 곧 공산세력이 얼마나 추악한 이적집단인가를 국민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공산세력의 성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이것이 바로 공산세력의 뿌리이자, 공산세력의 정당성을 위장해주는 굳건한 명분이었다. 난공불락에의 도전 5.18과 김대중은 하나다. 5.18의 진실에 도전한다는 것은 김대중에 도전하는 것이다. 김대중은 한 자연인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큰 세계적인 인물이다. 김대중이 주도한 5.18은 군사독재를 몰아낸 성스러운 민주화운동이라고 전 세계에 선전돼 있다. 그는 군사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고도 대통령이 되어 민주화시대를 열었고, 적장을 만나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공적으로 2000년 10월 13일, 노벨평화상까지 탔다. 패러다임 측면에서 바라보면 김대중은 그 어떤 힘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격랑속의 암반과 같은 존재였다. 한낱 자연인에 불과한 저자가 이 엄청난 사실을 뒤집으려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행위이며 미친 사람 정도로 몰릴 수 있는 무모한 행위였을 것이다. 5.18 역시 전 세계에 성스러운 민주화운동으로 선전돼 있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거대한 철옹성으로 단단히 자리 잡은 공산세력의 성지 5.18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이것이 더더욱 불가능해 보였던 이유는 5.18과 김대중이 독립된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5.18의 진실을 캐서 널리 전파하는 일은 5.18을 성지로 호위하는 남북한 공산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세계적인 인물로 고착돼 있는 세계인들의 인식을 바꿔야 하는 것을 뜻했다. 이 두 가지 임무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다. 저자에게도 전쟁 에너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무모한 전쟁에 도전했다. 1%도 채 안 되는 가능성에 도전한 것이다. 저자가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에게도 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얼마간의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를 믿고 따라주는 일각의 애국국민들의 성원과 지지가 있었다. 저자가 양심과 애국의 상징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44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었다. 미해군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와 응용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지적 저력과 이것으로 이룩한 성과가 한국사회 일각에 축적돼 있었다. 김대중의 아킬레스건 한국사회 대부분에 김대중은 북한이 키운 간첩이라는 이미지가 팽배해 있다. 이것이 김대중이라는 또 하나의 성역을 허물 수 있는 아킬레스건인 것이다. 1998년 4월 1일,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국정원의 대공전문요원 581명을 일시에 강제해고하고 그 자리를 좌익들로 채웠다. 지금의 국정원은 김대중의 국정원 그대로다. 이 사실을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다. 1999년부터 김대중은 북한에 퍼주기를 하여 20억 달러 규모의 현금과 또 다른 수십억 달러어치의 현금성 물자를 공급했다. 1999년 김대중 정권이 금강산에 관광용 선박을 띄우면서 북한에 10억 달러를 몰아준 것도 사실이고, 북한의 핵개발 사실을 알면서도 국민을 속이며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서해 NLL에서 한국해군함정의 손과 발을 묶어놓는 명령을 내린 후 북한 해군함정에 의해 테러를 당하게 한 사실이 있다. 전사자들이 6명이나 발생하였지만, 김대중은 국가를 위해 희생당한 이 전자자들을 외면한 채 붉은 넥타이를 매고 일본으로 월드컵 축구경기를 구경하러 나갔다. 이 모습을 바라봤던 모든 상식인들은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며 한탄을 했다. 최근 연평해전을 주제로 한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영화감독은 김대중의 이 반국가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화면에 담았지만, 공산세력의 즉각적인 저항으로 부분삭제 한 사실이 보도된바 있다. 2005년 6월 14일, 미 국무부가 공개한 미 의회조사국(CRS) 보고서는 “김대중 대통령 당시 한국 정부가 '현대'를 내세워 1999~2003년에 제공한 대북 송금 11억달러 가운데 일정부분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우라늄 농축’(HEU) 프로그램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11억 달러는 금강산 관광비 6억달러와 국민 몰래 김정일에 비자금으로 준 5억달러를 의미한다. 2000년 6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대중은 이른바 햇볕정책을 빙자하여 쌀과 비료 등 현금화될 수 있는 물자들을 북한에 마구 보냈고, 금강산 및 개성 지역을 관광사업화하여 북한에 달러를 대주었고, 개성공단을 건설하여 북한에 달러, 전기, 식수를 공급하였다. 서부전선에 깔린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미처 성능이 증명되지 않는 지뢰제거 장비를 유럽으로부터 공수해 왔다. 간첩을 잡을 수 있는 '국가보안법'을 폐기시키고, 반미감정을 유발시키기 위해 '노근리 사건', '매향리 사건' 등을 일으키는 많은 좌익단체들을 지원하였다. 대기업들에 압력을 가해 각기 북한에 도움이 되는 지원을 하도록 하여 많은 자금이 비밀리에 북한으로 가게 했고, 1998년 한 해에 국가정보원의 대공전문요원 900명을 강제로 내쫓고 국정원을 좌경 공산주의자들로 채웠다. 이러한 물갈이는 경찰, 검찰, 군의 정보기관들에도 또 다른 3,000여명의 대공전문가들을 일거에 물갈이 함으로써, 한국의 모든 정부기관들이 좌경 공산주의자들로 채워지게 했다. 이는 명확한 사실이며 그 후 지금까지 이를 시정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김대중이 5.18폭동의 정점에 있었다는 이유로 1980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사실이 있다. 1971년 '한민통'이라는 반국가단체를 형성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실이 있다. 2000년 6월 김대중이 북한에 가서 자신의 경호팀을 따돌리고 김정일과 한 차에 타고 이동한 것도 사실이며, 북한이 늘 주장해온 '연방제통일' 방안에 합의한 것도 사실이다. 간첩행위들을 노벨평화상 수상 공적으로 둔갑한 사실 김대중이 2000년 6월 평양에 간 것은 김정일에 충성맹세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서 그해 8월 김대중은 남한의 46개 언론사 사장들을 북한에 보내 일명 '충성맹세'서(남북언론합의서)에 도장을 찍게 했다. 이어서 북한에 천문학적인 국가자산을 국민이 알게 모르게 퍼주고, 미국 등으로 다니면서 김정일의 홍보대사 역할을 했고, DMZ에서 지뢰를 제거하다가 유엔사로부터 제지당했고, 북한의 핵개발 사실을 국민이 모르게 은닉해준 사실이 있다. 간첩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적행위인 것이다. 김대중은 이런 간첩행위들을 미화하여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한 '수상공적'으로 탈바꿈 시켰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냉전지대에서 두 정상이 만나 화해의 계기를 마련한 후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한 노력이 인정됐다”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한림원의 평가내용이다.
국정원으로부터 당한 탄압 김대중의 아바타라 불리는 임동원이 국정원장을 하던 시절, 임동원은 직권을 남용하여 국정원의 제2차장과 8국장, 그리고 여러 명의 과장 및 직원들을 총 동원하여 저자에 대해 불법 도청을 실시했다. 특히 임동원은 저자를 특별관리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제2차장과 8국장에게 저자를 철저히 감시하고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누차 내렸다. 당시 국정원의 도청행위는 저자 말고도 1,800여명의 인물들에 대해 폭넓게 실시했다. 국정원의 제2차장 김은성은 대통령이 저자를 가장 미워했다고 검찰에서 밝혔다. 제2차장 김은성은 임동원으로부터 저자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조치를 취하라 는 독려를 자주 받았다는 사실을 검찰에 진술했고, 이 명령이 그의 재임기간 중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진술했다. 국방부와 협력하여 저자에게 불이익을 주었고, 정기간행물에 싣기로 했던 저자의 글을 제거시켰다고 진술했다. 이런 방해들로 인해 저자의 프리랜서 생활은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2007년 저자는 국가기관이 한 자연인에 대해 행한 이러한 탄압은 징벌돼야 한다는 뜻에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를 배상해 달라는 민사소송을 걸었지만, 법원은 국정원이 행한 모든 탄압행위는 인정하면서도 겨우 2,000만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소송가액의 4%에 해당하는 소액이었다. 광주의 공권력으로부터 당한 백주의 린치 2002년 8월16일, 저자는 동아일보에 ‘좌익세력의 최후발악이 시작된다’ 는 제목의 광고를 내 김대중을 ‘김정일에 약점 잡힌 간첩’ 정도로 묘사했다. 3,500자의 신문광고문에는 ‘5.18은 소수의 좌익과 북한 특수부대가 순수한 시민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다’ 라는 35개 문자로 구성된 문장이 있었다. 이 문장이 순수한 5.18정신을 훼손했다며, 광주의 5.18단체들이 검은 유니폼과 군화를 착용한 11명의 어깨들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서울 충무로에 소재한 자자의 사무실에 가서 집기들을 파괴하고 소란을 피우면서 이웃 주민들에 공포감을 주었다. 현장에 있던 경찰은 이들 앞에 주눅이 들어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어서 저자의 아파트로 몰려와 아파트 대문을 부수고 승용차를 파괴하고 몰려 든 주민들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며 소란을 피웠다. 식구들은 피난을 갔고, 경찰은 바라보기만 했다. 이어서 광주검사 최성필이 안양에 4명의 경찰을 보냈고, 이들은 처음부터 조폭과 같이 험악한 얼굴로 폭력부터 행사했다. 그들의 나이는 저자보다 30살 정도 낮았다. 한국문화 대로라면 이들은 아버지에 준하는 정중함을 보였어야 했다. 김대중 시대에는 김대중 추종세력이 곧 법 광주검찰청에 도착해서도 검사는 수갑을 뒤로 채운 채 2시간 동안 더 조사를 받게 했고, 때릴 듯이 덤벼들면서 고함을 질렀다. 이웃에 있는 여성 검사는 손가락으로 저자의 턱을 들어 올리면서 “이 자가 무슨 육사를 나왔고 무슨 해군대학원 박사 랑가, 사기를 친 것 같으니 조사 좀 해보라, 광주가 없었다면 이 땅에 무슨 민주화가 생겼당가, 어림도 없제이”는 식으로 한동안 조롱했다. 이어서 사전구속연장을 발령할 때까지 두 사람의 판사가 공포분위기를 연출했다.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저자를 노려보면서 고성을 질렀다. 그리고 변호를 맡은 광주출신 변호사에게 “변호인은 광주시민들로부터 무슨 욕을 먹으려고 서울사람 변호를 맡았소” 소리를 쳤다. 변호인이 변호를 시작하자 “시끄럽소, 닥치시오” 하고 고성을 질렀다. 이후 저자는 엄동설한의 101일 동안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낡은 마루방에서 광주사람 12명과 함께 모로 누워 칼잠을 자면서 수감생활을 했다. 한국의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저자는 서울 소재의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 소재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화신이라는 김대중이 정권을 잡은 이 시기에는 광주와 전라도가 대한민국 위에 군림했다. 김대중 세력이 곧 법이었다. 하나의 예만 들더라도 이것이 과장이 아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 부산 소재의 동의대학교가 있었다. 극단적 좌파학생들이 불법시위를 벌였고, 이를 진압하려고 경찰이 출동했다. 극단주의자들은 7명의 경찰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7명 모두를 즉사케 했다. 당시의 법원은 주동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2002년 김대중 정부는 그 주동자에게 6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했고, 민주화 열사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노태우 정부는 군사정권이고 그 때의 경찰은 군사정권이 고용한 폭력배이기 때문에, 그 경찰을 불태워 죽인 행위는 가장 위대한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이었다. 국가가 공산치하로 돌변했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동토를 뚫고 올라온 진실, 법원도 덮지 못했다. 저자는 이 시기부터 18만 쪽에 달하는 5.18관련사건 수사기록과 공판기록 모두를 정리하여 2008년, 1,720쪽에 이르는 4권의 책에 다큐멘터리로 담았다. 책명은 “수사기록으로 쓴 12.12와 5.18”이었다. 5.18단체들은 또 이 책에 대해 고발을 했다. 5.18에 대해 1997년의 대법원 판결과 다른 표현을 한 것이 5.18관련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시대인 이때에는 2002년처럼 광주검사가 저자를 광주로 끌고 가지 못했다. 서울근교의 안양법원에서 3년 동인 제1심 재판을 받았다. 2명의 단독판사가 이 사건을 담당했다가 모두 사건이 부담스럽다며 회피했다. 그래서 사건은 합의부로 넘어갔다. 합의부 재판장은 공판 첫날에 “피고인은 재판 도중 언제라도 구속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저자의 표현이 범죄행위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재판을 시작한 것이다. 1심 재판은 2년 정도 진행됐다. 저자가 법원에 제출한 답변서는 증거자료를 포함해 천여쪽은 되었을 것이다. 재판장이 답변서를 매우 자세히 읽고 있다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그러던 2011년 1월, 재판장은 무죄를 선고했다. 제2심도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서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드디어 5.18의 진실이 방송됐다 저자는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했다는 표현을 두 번 했다. 2002년과 2008년이다. 같은 표현에 대해 2002년에는 광주의 공권력으로부터 폭력과 린치와 감금처분을 당했지만, 2008년 이후에는 저자가 속한 관할청들에서 연속 무죄를 받았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인터넷 인구들에게 커다란 뉴스꺼리였다. 2개의 방송국에서 저자를 초청했고, 저자는 2013년 1월부터 3월까지 5회에 걸쳐 방송에 출연했다. 수많은 자료들을 방송국에 안고 나가 5.18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와서 내란폭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남녀 진행자들은 물론 이 방송들을 듣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저자의 설명에 동감했다. 여론의 뜨거운 호응을 받자 두 개의 방송국들이 서로 경쟁하듯 5.18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며 많은 논객들을 불러 대담프로를 진행했다. 2013년 5월 15일에는 실제로 5.18 광주작전에 직접 참전했던 탈북자가 소개되었다. 5.18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온 사회에 확산됐다. 2013년의 5개월은 참으로 행복했었다. 진실보도를 갑자기 탄압한 박근혜 정부 그런데, 바로 이 때 위기를 느낀 광주사람들이 광주출신 정치인들을 동원하여 박근혜 정권을 압박했다. 2013년 6월 10일. 정홍원은 국회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할 수 없는 발언을 했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에 반하는 표현은 역사왜곡이고, 역사왜곡은 반사회적 행위로, 이에 가담한 일베회원들의 글은 삭제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북한특수군 개입을 증언시킨 방송들은 방통위를 통해 제재할 것이며 역사왜곡자들은 검찰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이어서 대통령 직속 기관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권력을 남용했다. 5.18을 주제로 하여 방송을 진행한 두 방송국 관계자들을 8명에 대해 중징계 처분을 내리고, 앞으로는 5.18방송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지난 5개월 동안의 모든 5.18관련 방송 내용은 사실이 아님을 선포하고 방송진행자가 사과하도록 명하였고, 방송출연자들을 영구 출연중지 시키라는 독재적 처분을 강행하였다. 유튜브와 포털 사이트에 게시된 북한군 관련의 표현들을 모두 차단하고 삭제처리했다. 이는 저자의 연구결과를 일체 확신하지 말라는 탄압이었다. 이러한 삭제처분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저자에게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몰래 처분했다. 13년에 걸쳐 발굴한 역사의 진실 탄압하는 한국 재판부 저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반민주적 검열 및 밀실 처분에 대해 행정법원과 민사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두 개의 재판부 모두가 저자의 게시물이 1997년 4월 17일의 대법원 판결과 다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어 인터넷과 방송에 표현하는 것을 금지시킬 수 있다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행정처분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법 한 일이다. 이 두 개 사건은 현재 제2심에 계류 중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과 영상분석 과정을 문서화하여 법원에 제출하였지만, 양개 법원은 판결문에서 영상분석 결과물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상분석물들은 최소한의 기본 가치를 갖는다.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왔었다는 데 대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법원이 이 영상분석자료를 무시하려면 이러한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저자 측이 발굴한 317명에 대한 영상분석 내용들이 모두 다 사실이 아니라는 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법원이 표현자체를 금지시키는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판사들의 원시적인 독재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광주법원이 도둑재판을 감행하면서 진실확산 저지 인터넷 신문 뉴스타운이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오직 이 하나의 신문만이 5.18에 대해 새로 밝혀지는 모든 사실들을 기사화했고, 2015년 7-9월에는 4면짜리 호외신문 1,2,3호를 각 10만부씩 발간했다. 이들은 전국의 정열적인 회원들에 의해 뿌려졌고, 이로부터 5.18진실에 대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있다. 추측하건데 지금은 60% 이상의 국민들이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특수군 수백 명이 와서 저지른 국가전복 공작이었고, 광주세력을 총괄 지휘한 김대중은 간첩이라는 인식들이 널리 전파되고 있는 중이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만큼 국가를 향한 국민적 분노가 축적되고 있다. 대통령은 무얼 하고 국가정보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과 국정원은 이 새로운 진실에 함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는 동안 광주의 5.18단체들과 광주법원이 또 다른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5.18단체들이 허위사실들을 내세워 광주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뉴스타운 호외지 발간 및 배포를 중지시켜 달라는 가처분신청이었다. 광주법원은 소장을 제출한지 3일만에 소송의 당사자인 피고측에 아무런 통지도 하지 않고 공판을 열지도 않은 채, 광주의 5.18단체들이 요구하는 내용을 100% 그대로 수용했다. 이른바 전대미문의 도둑재판을 한 것이다. 위장한 탈북자들로부터의 살해 협박 마지막으로 저자는 1980년 광주에 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간 후 다시 탈북하여 남한에서 활동하는 위장탈북자가 50명 정도 있다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발표했다. 이들의 명단과 영상분석 내용들을 2015년 11월 7일부터 12월까지 인터넷에 널리 공개했다. 아울러 이들의 대부분은 남한의 모든 방송국에 출연함으로써 인기인들이 되고 국회에까지 진출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들이 정부의 정책기관들에 침투해 역량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 개인에 대해서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5.18광주사건은 북한이 주도하지 않았다고 반박을 했다. 거의 모든 일반 탈북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내용이 있다. 북한에서는 5.18을 김일성과 김대중이 야합해서 일으킨 폭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50명만은 이와 정반대의 주장들을 한다. 이들은 저자를 원색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미국대사가 당했던 것처럼 커터 칼로 자르겠다는 협박도 했고, 저자를 강제로 외진 곳에 데려다 감금하겠다는 위협도 했고, 매우 심한 욕설들도 했고, 저자가 미쳤다는 말도 했다. 신변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이 위장탈북자들의 스폰서 2015년 10월 29일, 저자는 위장탈북자 50명에 대해 국정원에 신고했다. “간첩신고‘라는 명분이었다. 그런데 국정원의 태도가 참으로 수상했다. 간첩신고를 하러 간 저자에게 ”봉투를 창구에 그냥 맡기고 가라“는 것이었다. 이 순간에서부터 저자는 국정원으로부터 적대적인 대접을 받았다. 1개월 이내에 신고자에 진행사항을 통보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국정원은 4개월이 넘는 지금까지 신고자인 저자에게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김대중이 좌익들로 채워놓은 대북정보 요원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으로 보인다. 모진 탄압 이겨내면서 발굴한 진실, 승리할 수 있게 도와달라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 그리고 세계의 모든 양심가들에게 호소한다. 앞에서 약술하였듯이 저자는 오직 역사의 진실을 밝혀 왜곡된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잡고, 대한민국의 안보와 인류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진실을 밝혀 징벌해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마음으로 개인으로서는 감내할 수 없는 가시밭길을 지난 13년 동안 걸으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저자는 무엇이 나에 이로우냐에 따라 세상을 살지 않고 무엇이 정의냐에 따라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이익을 추구했다면 아름답고 여유롭게 살아야 할 61세로부터의 인생 황혼기를 13년 동안이나 이렇게 험한 가시밭길에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70세를 훨씬 넘긴 지금에야 저자는 역사의 진실, 악의 진실을 밝히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제부터 저자가 한국국민과 세계인들에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 발굴된 진실이 승리로 기록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달라는 것이다.
2016.2.6. 지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