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아주신가
우리네 아이들은 湖上이라던,
어르신들은 널목이라던
경북 의성군 봉양면 문흥동.
그 중에 지붕 높은 757번지,
우리 외갓집은.
-부주님 전상사리
글월을 따라
꿈속 어머니
늘 가고 싶던 곳.
따뜻한 어느 봄날, 어린아이 꾀들 무렵,
어머닐 따라 외가에 가는 날.
20리 남짓한 단촌까진 걸어가고,
거기에서 완행열차로 義城까지 가,
도리원 가는 버스에 오르면.
언곡을 지나고 팔바우 못미처
자그마한 학교를 돌아 물량이 모퉁이.
점방 앞 정류소에 차가 서면
바로 보이던 커다란 외가집.
새로 깐 신작로의 아스팔트가 참말로 신기해.
고무신 벗어들고 걸어 보던 길,
길가동네 외가.
교과서 책에서 본 중세 터키의 토담 흙집인 양.
비좁고 가파른 골짝과 산비얄에
빼곡빼곡 돌 축을 쌓아,
가재가 납작 엎드린 듯이 초가 이엉이 맞닿아있는
순각성받이 마을이었지만.
한 길가 바로 붙은 낮은 언덕에
사랑채 안채 행랑채 바깥채.
뒤란도 아주 깊은 동남향 집에
감꽃이 필 땐
솔향도 푸르러.
모두들
‘樂善齎 之字 悌字 吾峰할배’를
들먹이면서 늘 자랑하던
‘우리 아주 신가(鵝洲 申哥)’
‘우리 아주 신가’
2. 선잠결
대구로 나가는 도락구 불빛이
새벽마다 안방 문살을
흔들어, 흔들어.
깬 잠을 다시 한 번 청해 보아도
서걱거리는 뒤란가 시눗대.
무시로 꼬꼬꼬,
닭들의 잠꼬대,
검둥돼지 자며 뀌는 방귀소리며
잠투정하는 새끼염소들 애애 대는 소리.
사랑채 외할부지 가래침 소리,
그억, 그억, 퇫,퇫.
쇠죽솥 쇠죽물이 하마 설설설 들끓는 소리에,
저 멀리 앞냇가 골장얼음
쩌-엉 쩌-엉 금가는 소리,
선잠결 그 소리.
3.외가에 가면
방학엔 외가에,
외가에 가면은,
막깎은 맨머리에
짜브러진 탕건만 쓰고
메기수염에 염소수염 단 쥐똥영감은
눈곱만치도 무섭지 않은데.
(아버지는 맨날, 이렇게 불렀다)
반백의 고무칼래,
콧수염도 기르시고
김구 선생 안경 같은 맛보기에,
상아로 된 노리께한 빨부리로 꼭
궐연만 피며
자전찰 타고 귀미 도리원
볼일을 보러 출입하시는
벼락영감님 외할아버진
순사보다도 무서워, 무서워.
(아버지는 맨날, 이렇게 불렀다)
4. 하관
젊을 때 외할배는 일본으로,
징용으로 가기 전에
자진해서 돈 벌러 가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
고생을 하셨고.
작은집 외할배는
만주 일대로 돌아다녔다고.
혹독한 그 시절을
이국땅에서 헤쳐 나온 역정.
그래서 그처럼
독립심과 근면성으로
길들여지신 것은 아닐런지.
그래서 그처럼
벼락영감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어쩜 자신과 싸워왔는지도.
군 제대 말년에
부음을 받고 가
외조부의 하관을 볼 때,
마른 얼굴로 옆에 서있던
나의 뇌리에 스치던 바람결.
5. 내만 머르캐
어느 날
아버지 말대로
벼락영감 고 속아지를 쏙 빼닮았단 형.
형보다 한 살 작은 막내 아재랑 장난을 치다가,
문종일 오려 붙여 멋을 부린
사랑방 대청 유리를 깼을 때.
불같은 벼락영감 외할배 한테
호된 꾸지람, 종아리를 맞아.
-이모야, 외할배가 자기 아들은 덜 나무래고
내만 머르캐! 내만 머르캐!
당장 갈란다, 울 집에 갈란다.
속아질 부리며 대문 밖 신작로로 혼자 나서면
꽃댕기 늘인 이모 말고도
큰외숙모랑 작은외숙모 모두 나서서
형을 붙잡고 말리고 달래고, 야단법석인데.
형아는 가기 싫어 눈칠 보는 나를 마구 윽박질러,
-니도 빨리 가방 들고 안 따라 올래?
내 동생 아이가?
6. 벼락영감
셋째랑 막내 아재,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
방학을 맞아 내려오거나
외손자들인 우리가 가도
벼락영감이 봐 주는 법은 앗싸리 없었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면
문고리가 짠닥짠닥 달라붙는 겨울 아침에,
해도 뜨기 전,
정지 모퉁이 펌프가에다 매달아 놓은 쇠대포 종을
땅 땅 땅, 땅 땅 땅.
애들을 모조리 소리치며 깨워 놓고선
-이불 개어라
-요강 비워라
-청소 하그라
-쇠죽 끓여라
-마당 쓸어라
늦잠 자는 꼴, 꼴을 당최 못 봐.
샛바람 살살 부는 저녁 답에도
-뒷벌에 염소 몰고 오너라
-쇠마굿간에 보릿짚 깔아라
-쇠삼정 입혀라
-쇠여물 썰어라
-뚱거리 패거라.
한 시도 사람을 그냥 두질 않았는데,
난, 컴컴한 마구간에 들어가서
보릿짚을 까는 일이 제일 싫었다,
질벅거리는 쇠오줌똥 밟고.
그럴 땐 차라리
마음껏 숨쉬는 우리 집,
수염도 인자하신
친할배 계신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루라도 빨리.
어떤 땐,
외사촌 동생과 말을 맞춰
벼락영감 사정권을 벗어나기로
머리도 써봤다.
-오늘은 작은 집서
저녁밥 먹고 자고 올라니더.
7. 마당에 웬 별이
언젠가 아버지가
들려 주셨던 젊을 적 이야기.
해방 전, 열일곱에
동갑끼리 혼례를 치른 아버지, 어머니.
몇 해가 지났으나
그때까지도 아이가 없을 때.
귀하게 자라난 신랑이라
처가에 가도 장난이 꽤 심해.
밤마다 일가댁 총각과 처녀들이
불러내거나, 쳐들어오거나.
한번은 친정 온 어머니와
뒤티에서 갓 시집 온 큰외숙모랑
외할머니가 마실을 가게 돼.
안들네, 딸네들이 한 방 모여 편을 갈라
-한 사리네 두 사리네,
-석 동 났네 막동 가네,
건궁윷말로 씨워가면서
달이 지도록 놀다가 와 보니.
초저녁, 잠이 드신 벼락영감이
기다리고 있어.
벼락이 떨어져.
가지껏 부아가 치솟은 영감께선
벼락같이 숯불 담긴 놋화로를 번쩍 들어
냅다 마당에 집어 던졌겠다,
눈 내린 마당에.
그러자 새신랑인 아버지가
눈 마당에 퍽석 헤져
피식 피식 꺼져가는 숯불덩이를 바라보면서,
연기를 보면서.
- 아이구 이 집에는 마당에도 별이 떳구만.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
이죽거리곤 뒷골방으로 들어가 버리니.
더욱 더 노기등등, 분기탱천,
벼락영감님 저 거동 좀 보소.
끝내는
마누라와 새며느리와 친정 온 딸을
하얀 눈 위에 엎드려 뻗쳐!
군대식으로 기합을 주셨대.
무단히 밤마실 댕긴다고,
여편네들이 될 법이나 한 짓거리냐고,
흰소릴 쳐 가며.
8. 현곡 할매
어쨌던 그 후로도 몇 차례나
장인과 사위,
서로 틀어져,
자꾸만 틀어져.
아버진,
벼락영감 죽잖 전엔
널목에는,
그 집구석엔 다신 안 간다고,
발 끊을 거라고.
정말로 십 년 이상,
외가 마을에 발을 끊더니
쥐똥영감님 회갑 날에는
처숙모 보러 가야 된다며
나를 앞세워 널목으로 갔다.
-아이고 이게 누고?
사촌 김서방, 김서방 아이가?
참말로 버선발로 뛰어 나온 인
작은 외할매, 현곡댁이었다.
-자, 검재 김서방도 벌써 와 있네.
사랑에 나가 인사 올리게나.
그날의 분위기는 요샛말로 특별출연에,
깜짝쑈 같았다.
작은댁 외가집엔 아들만 다섯,
딸이 없는 터라.
워낙에 인정 많은 외할머니는
조카딸이나 조카사위를
노래 부르듯 끔찍이 아꼈다.
-사촌에 김서방,
검재도 김서방,
우리 새 사위들.
작은집 외할매 꼬장주 끈에는
壽福자 수가 놓인 귀주머니가 늘 매달려 있어.
우리가 외가에 놀러 가면
치마 들춰 주머닐 열어
꼬깃꼬깃한 십 원짜리 몇 장.
내 손을 감싸 쥐며 꼭 쥐여주던
인정스런 할매.
9. 용호댁 맏딸
어머닌,
벼락영감 용호댁네 맏딸이신 우리 어머닌,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이름도 귀희貴姬라고
외증조부가 무척 귀여워 해.
두 살 밑, 외삼촌이 조부로부터
천자문이며 명심보감과 동몽선습을
끓어 앉아서 읽고 배울 때면.
외할밴 옆에서 짚신을 삼으면서 듣고 있다가
외삼촌 더러 함 외어보라고.
가끔씩 틀리는 날에는 벼락이 덜어져
단박에, 삼고 있던 미투리로
볼테기를 훑배주는데
눈물이 쑥 빠져.
오히려 어깨너머 눈치글 배운 울어머닌
미리 앞질러 줄줄 외웠대,
-제왈 위선자 천보지이복
위불선자는 천보지이화라.
-아녀자 들이사 언문이나 깨치면 되지
진서 배워선 어디다 쓸라꼬.
그렇게 못마땅턴 조부께서도
손녀 재주가 하도 아까워,
귀미에 있는 학교엘 보냈다.
10. 가을 운동회
그날은 도리원 장날에다
추수철이 겹친 지라
놉도 하고 품앗이도 해,
한창 바쁜 날, 가을 운동회날.
물량앞 새들 논에
온 식구가 나가야 하는 형편이라서
조부가 가셨대, 손녀 운동회에.
면장도, 면서기도, 내지 순사도
인사를 하며
-귀문 문회 때 어르신께서
추곡공출에 협조하도록 공론 해 주십사.
노인은 쓴 입맛만 다시다가 다행히도 구장을 만나
차일 아래로 이끌리어 가셔.
가마에 설설 끓는 개장국으로 요기를 하신
그때까지도 모든 게 좋았다.
-다음엔 2학년 생도들의 율동 순서가 되겠습니다아~.
만국기 사이로
코맹맹이 마이크소리 울려 퍼지자,
손녀 생각에 운동장 안을 바라보던 할배,
기함을 하셨다.
줄 지어 청군 홍군
머리띠를 한 남녀 생도들,
손을 맞잡고 팔짱을 끼고
빙그르 빙글 돌아가다가,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가.
참말 가관이라.
자세히 살펴보니
당신 손녀도 그 틈에 껴 있어.
조부는 기겁하여 달려 나가서
손녀 손목을 붙잡고 나와
그 길로 직방 집으로 데려 가.
- 남녀가 유별한데,
남녀 칠세면 부동석이거늘.
공맹도 모르는 무지하고 몽매한 자들,
그놈들한테 내 손녀딸을 맡길 순 없제,
절대 안 될 일,
어불성설에 언어도단이지.
그것도 야만한 왜인들의 신식교육을,
어흠, 택도 없다.
낼부터 학교는 작파하고
집안에서 조신하게 길쌈 바느질,
부덕을 쌓그라.
한마디 이 영으로 어머니의 관인교육은
봉양소학교 2학년 중퇴라.
11. 단계댁 며느리
딸 가진 집안에선 늘 불안해
처녀 공출에
정신대 공출에.
급기야 내게는 증조모인
언곡할매가 중신을 들어,
당신 손부감을.
열일곱 들던 봄에 성혼을 한 어머니는
시집와서도 아래 윗동네 불려 다니셔,
글 잘하는 죄로.
잔치 때 사돈지도 읽어주며
편지를 대신 써 줘야 했으니.
장옷을 걸치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랫마을 일가 댁에 따라가 봤던
겨울밤의 추억.
자정도 놀랍다던 그 집 할매의 인사 소리가
지금도 새로워.
바느질 길쌈 솜씬 참 좋았지만
글을 못 깨친 시어머니는 김해 김씨라
옥루몽이며 장화홍련전 읽어드리던
아주신씨부인.
丹溪宅 며느리는 글하는 사람,
호가 나 있었다, 아래 웃마을에.
12. 진성 이씨
성격이 무던하고 수더분한,
진성 이씨 외할매는
벼락영감 외할배 만나 주눅이 들어도.
한 평생 대거리 한마디 못해보고
딸 둘, 아들 넷, 육 남맬 길렀다.
큰집의 머리 하얀 수상할매가
옥산 전디의 친정 질녀를 중신을 해서
혼례를 올린 둘째 외삼촌네.
첫딸인 현숙이를 낳고 난 후 얼마 안 있어
아재가 그만 맹장염에 걸려.
읍내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조리를 할 때,
아들 수발을 들겠노라며 외할매가 가셔.
수술 후 첫 방귀가 나올 때까지 절대로 물을,
주면 안 된다고, 줘선 안된다고.
의사의 당부 말을 듣긴 했어도
환자가 하도 물을 찾아 대니.
얼결에 물을 줘. 주고야 말았어.
결국은 그 바람에 작은외삼촌,
스물여덟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으니.
얼굴이 복숭아 빛같이 고웁던
두 해 아래 외아지매는
졸지에 생과수. 바깥채 담배집.
그 후로 벼락영감,
장날이나 읍에 일 보러 가시더라도
절대로 안 가, 후광병원 옆엔.
외할매,
그때의 자책감은 평생 죄인,
자다도 벌떡,
가슴앓았지만.
차례로 큰딸과 큰아들, 영감까지 앞세워도,
미수까지 누렸으니, 와석종신에,
인명이사 재천, 재천이고 말고.
13. 육군 소위 신경호
집에서 학교에서
붓글씨며 글짓기며,
재주 있고 반듯하던 큰외삼촌은
천신만고로 유학길에 올라.
경희대 전신인 전수학교 한방과에
야간으로 고학을 하던 중,
터지고 말았대, 6.25사변이.
처음엔
학도병, 의용군에 지원하여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대,
조상님 음덕에.
나중에 간부후보 과정을 거쳐
빛나는 소위,
육군 소위로 임관된 것이
군인으로 지내, 생애 대부분을.
그 후로
공병대 대위로 진급하여
교관으로, 지휘관으로
임지를 돌다가.
어쩌다 우리가 외가에 가 있을 때
찦차를 타고 집에 오시면
우리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주 귀여워해.
가끔은 사진도 찍어주고,
공기총으로 참새를 잡아
구워도 주셨고.
또 닭을 잡으면
석쇠에다 불고기로 구워놓고
안마당에 둘러앉아 먹었는데.
그런 방법은 우리집과는 영판 색달랐다.
14. 닭 잡는 날
집에선 고작해야 닭을 잡으면
백숙과 닭개장.
그것도 내 형이 닭고기를 먹지 않아
나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모처럼 닭 잡는 날 아침이면
할아버진 닭장문을 반쯤 열고
한쪽 팔을 쑥 집어넣으면
꼬꼬댁 꼬꼬꼬
닭장은 난리통.
실한 놈 한 마리를 골라잡아
쇠여물칸 날 시퍼런 작두에 놓고
살았는 놈을 단박에 싹둑,
모가지를 싹둑.
그러면 목도 없는 몸뚱이가
이리 풀쩍, 저리 풀쩍,
피를 흘리며 곤두박질치다.
잠잠해 잠잠해.
할머닌 데워놓은 기명물에다 담궜다 꺼내
우선 닭털을 솔솔솔 뽑는다.
그리고 부엌칼로 배를 가르면
모이 주머니, 내장이 나온다.
어떤 날, 암탉을 잡을 때는
말랑말랑한 새끼계란도 여러 개 나왔다.
손질을 마친 후 할머니는
베주머니에 찹쌀을 넣고
동솥에다가 계속 고았는데.
벽장속 밤,대추도 같이 넣었다,
또 도마 소리, 난도질 해대는.
그런데 닭 잡는 광경도 다 보고,
평소에 텃밭귀 두엄자릴 파헤치는
닭구발을 봤기 때문에,
닭고긴 못 먹어, 난 먹을 수 없어.
그리고 닭껍질은 느낌이 싫어,
물컹물컹한 그 느낌이 싫어.
할머닌 복통 살을 조금 찢어 소금에 찍어
손자들 입에 넣어 주셨는데.
외갓집 벼락영감 속아지를
쏙 빼 닮았단 형은 입도 안 대.
지금도 닭고긴.
15. 훈장이 있는 방
외가엔
큰외삼촌 서재 방이 난 제일 좋아,
너무 멋지거든.
방이사 열두 개도 넘었지만
큰아재 방이 제일로 근사해.
거기엔 정래혁, 송요찬, 또 정래혁,
무슨 부대장, 무슨 사령관,
즐비한 표창장.
멋있는 훈장들도 번쩍거렸고
사진도 많았어.
책상엔 경혈도가 촘촘 그려진
인체도도 있어.
둘이서 올라가서 마구 굴러도
끄덕도 없는 스프링침댄 진짜로 미제래.
사진을 구경하다
책상서랍을 슬쩍 열어보면.
거기엔 반짝 반짝 빛이 나는 계급장들이
참 많이도 있어.
똑 같은 밥풀데기 계급장도
서로 크기가 다른 것도 많아.
모자에 붙이는 것,
어깨 위에 붙이는 것,
가슴에 달고 옷깃에 다는 것,
공병대 휘장과 지휘관 휘장을
이것 저것 만지다 보면
큰외삼촌이 자랑스러워,
한없이, 한없이.
15. 끝용이 아재
작은 집 끝용이 아재는
나와는 한동갑.
호적에는 나보다가 한 해가 늦어
한 학년 아래다.
그러나 소꼴도 잘 베고
나무도 잘 해오고
지게 짐을 질 때에도
나보다도 빠닥심이 훨씬 세어
아재비값을 제법 하곤 했다.
외오촌 아재비.
초당의 배서방이
본가에 가고 없는 날이거나,
있어도 한 쪽에서 아무 말없이
사리 새끼만 다발로 꼬는
그런 날 밤에는.
그을음 냄새도 모르고,
남폿불 심지를 돋우고,
담배내 바람벽에 찌들었어도
우리는 그저 즐거워만했다.
거기선 제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사랑채까진 잘 들리지 않아.
우리는 편을 갈라 윷을 놀다가
심드렁해지면,
마분질 오려서 그림을 그려 넣고 끼워 맞춘,
석회가루 묻어나는 화투 목으로
먹구제비를 하기도 했는데.
끝까지 우기며 안 지려는 끝용이 아재,
그 막내둥이 심통머리가 밉살스러워도.
나이는 같았지만 항렬이 높아,
대장 노릇을 도맡아하더니.
3년간 전투경찰 갔다가 와서
경찰이 되었다.
지금은 중부서 내에서도
머리 히끗한 만년 경장이라.
연전에 잔칫날에 나를 만나서
빙그레 웃었다.
17. 널목 아이들
집들이 40여 호,
널목마을엔 아이들도 많아.
길수랑, 명수랑, 걸택이, 붙들이, 군중이 등,
그런 애들이 한두 살 사이,
여자 애들은 그보다 더 많아.
낮에는 소 먹이러 뒷산으로 가기도 하고,
다래끼 메고 꼴도 베러들 가,
수중보 막아둔 앞내에서 멱을 감으며
수경을 끼고 작살도 만들어.
겨울철 놀이턴
꽁꽁 언 얼음판
굵다란 빨랫줄 철사로
앉은뱅이 설맬 만들어
누가 빠르노 시합도 해 가며.
고무줄 칭칭 감은 발시겟또로
자빠도 지고, 물에도 빠져
모닥불 피워 젖은 옷 말리다,
묏벌에 불 나면
귀신 다 도망 가.
저물녘 샛바람이
황소갈기를 살살 날리거나.
싸락눈 싸륵싸륵 오는 밤이면
아이들은 죄 뉘집 상방에 끌어 모여서
화롯불에다 알밤도 굽고 감자도 굽다가.
때때로 시원한 동치미나
날고구마를 꺼내도 먹었다.
18. 모듬놀이
언젠가 정월도 보름 무렵,
모듬놀이를 한 적도 있었다.
아이들 여럿이 모여서
자루를 둘러메고
알만한 집을 돌아다니며
백미 몇 홉씩 두루 걷어서
반으로 갈라 쌀밥을 지었다.
나머진 전빵집에 내다 팔아서 장보기를 했다.
조포도 몇 모 사고,
계란도 한 줄,
콩나물도 사고.
알배기 양미리를 꾸덕꾸덕 짚으로 엮은
호매이 고긴, 흡사 호미 같애.
한 두름만 살까,
통조림도 살까.
밤참도 먹어야지, 돈이 모자라,
틀국수에다 라면가락을 섞어 끓이게
돈에 맞춰야지, 맞춰서 사야지.
그날은 정말로 허연 쌀밥, 고기반찬에,
비벼도 먹고,
지져도 먹고,
삶아도 먹고,
구워도 먹고,
우리끼리만 배 터지는 날,
포식을 하는 날.
19. 이거리 저거리
저마다 허리띠를 풀어도 가며
게트림도 한 후.
아랫목 이불 밑에 발을 묻고는
놀이들을 한다.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동서맹구 두맹구에
곁사돈네 집에 가서
국 얻어먹고 떡 얻어먹고
대추 남게 대 꽁.
니 다리 오그려.
말가죽 허리띠를 돌돌 감아
방바닥에 살짝 놓곤,
누구의 것이 오래 풀리나 내기도 하였다.
- 빙빙빙 빙글빙글
구루마발통 누가 돌렷노
집에 와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돌렸지롱.
20. 그리운 얼굴들
누가 와, 누가 와.
그날 낮, 솔무디서 연 날릴 때
먼발치로 봤음직한 여자 애들이 몇몇 몰려와,
지들은 지금 누구네 집에 모여 논다고,
같이들 놀자고.
걔들은 낯선 내가
용호댁네 외손자인 줄 다 안다는 눈치.
그 중에 특히나
외갓집 맞은편 비탈위,
점방집의 변씨네 딸은
그 아버지가 마차를 몰고 장에 댕긴다고.
그 애가 자꾸만 빠안히
내 얼굴을 쳐다봐 싸서
난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귓볼에 열이 나.
봉양서 중학에 다니던
나하고 같은 학년 신명수는 씨름을 잘해
대구에 있는 영신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이준희 홍현욱 최상일 등과 함께
T.V 에도 나오고 하더니.
지금은 대구에서 잘 나간다는
청구 씨름단 코치가 되었다.
이태현 백승욱 장사들과
중계방송 땐 얼굴도 비치는.
그 당시, 키가 작아, 더 안 자라
R.O.T.C로 군에 갔다 와
지도자 됐다고.
얼마 전 천하장사 경기장에서 한 번 봤을 때
참 반가워했다.
21. 서울네
그런데 정말로 큰 사단이 나고 말았대.
큰외삼촌에게.
그 오랜 군 생활의 잦은 전출로
식솔들 모두 본가에 두고
혼자 떨어져 지내다가보니.
그렇게 인정 많고 다정다감한 큰외삼촌인데.
잘생긴 용모에
군복까지 근사하게 차려입은 육군 장굔데
어찌 없었으랴, 따르는 여인이.
얼굴도 해사한 서울네란 여인네와
(외가에선 그렇게 불렀다)
새살림을 차렸다는 첩보에 접한 벼락영감은
벼락치듯이 그날로 당장 밤차를 타고 상경을 하였다.
- 니눔이 인간이가? 짐승이가?
내사 지금 욱수에미 볼 낯도 없고
뒤티 사돈 앞, 들 낯도 없다,
갈라 서그라, 두 말 말고 당장.
그러나 외로운 객지 병영,
한번 맺은 정분이란 게
말처럼 쉽게 끊어질까만
방도가 없어, 헤어질 수밖에.
몇 년 후 외삼촌은 예편을 하여
동네 사람들 침도 놔주며
향토예비군 중대장으로 근무하였는데.
그 여인, 서울네는
20리 지경 의성읍내로 혼자 내려와
작은 식당을 꾸리며 살았대.
어느 해 장날엔가
어머니가 거길 한번 들렀더니
열랍고도 싹싹하게
- 우리 형님,
우리 형님
불러가면서 뛸 듯 반가워 해.
어머닌,
쇠고기 반 근을 냄비에다
자글자글 얼른 볶아 대접하던 그 인정끼를
한동안 못잊어,
참으로 가여워.
22. 달뜨는 나라
때때로 외삼촌은 널목을 떠나
서울로 가고 싶기도 했으나.
맏이가 조상을 모시는 게 법도라고
어느 하루 빠짐없이
아침 저녘, 사랑에 들러
벼락영감께 절을 올리며 꼭 아뢰었다,
나가고 들옴을.
불혹의 나이에
넓은 세상 다 버리고 좁은 동네서
벼락영감님 까탈스러운 벼락성정을
다 맞춰가며 순종하자니
느는 건 술이라.
오호라!
과음에 간경화로
마흔 아홉에 돌아가셨으니.
사촌 沙村 누님처럼,
마흔 아홉 수에.
그리도 인정 많고 살갑던
누님 동생이
해 지는 하늘
달 돋는 나라 거기서나마
함께 거하시리.
영세를 누리리.
- 끝 -
첫댓글 감사합니다.
너무 길어여. ^^* 그치만 대하극을 보는 거 같았어요.
민조시 의 특성중 하나는 6음절 뒤에는 반드시 마침표를 찍어야 된다는군요..^^
해 지는 하늘 달 돋는 나라 거기서나마 함께 거하시리. 영세를 누리리.
도두아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