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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6, 39-45
오늘 예수님께서는 에둘러 말씀 하시지 않으시고 쉬운 비유 말씀으로 우리자신을 되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형제의 눈속에 티는 보면서 내들보는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말씀도 그렇고,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피해갈수도 도망갈수도 없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해 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람과 상황을 품으며 살아갈때도 있을때 나는 품이 넓은 정자 나무입니다.
행여..건강이나 어찌 할수 없는 상황으로 다소 짜증스럽거나 불만스럽다면 ,
위로나 시간이 필요한 나무입니다..
수녀원 나무를 돌보며 느낍니다.
사실 나쁜 나무는 없는것 같습니다.
물기를 싫어 하는데 습한데 심어졌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있고, 햇빛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강렬한 햇빛에는 화상을 입기도 하는 꽃나무를 봅니다.
우리는 삶으로써 하느님과 이웃에게 우리삶의 열매를 공유하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잘 돌보는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모든일과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
자신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가져보는것,
내가 좋아하는것을 해보는것..
자신을 위한 시간은 이기적인 시간이 아닌 경우를 많이봅니다.
하느님과 자신에게로 되돌아 가기 위한 시간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오늘 자신을 돌보고 사랑해주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형제 눈속의 티도 웃으면서 받아줄 수 있고,
우리의 선한 마음곳간이 열려 세상이 좀더 살맛나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는 모두 좋은 나무 입니다.
단,
하느님과 함께 내가 돌보아야 할...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6,43)
오늘은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과 재산 가족까지 희생하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날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정 루치아 수녀님)
3월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마르코 10,13-16
어린이의 하느님 나라는 부모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어쩌면 이 말씀이 마르코 복음의 핵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 나라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주제가 핵심입니다.
먼저 마르코가 설명하려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지금 마르코는 예수님의 두 번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유에 대해 풀어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사람을 악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창조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웃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이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8세기 당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살던 북게르만족은 인구가 큰 폭으로 상승하자 그 척박한 땅에서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육로로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박기술이 발달하자 바이킹은 잉글랜드 서쪽 지역을 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커다란 덩치에 무식한 도끼를 들고 싸우는 바이킹을 당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이킹은 오딘이란 신을 섬겼는데 싸우다 목숨을 잃으면 오딘의 나라인 발할라로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투 민족답게 방패 처녀라고 불리는 여성 전사가 전쟁에 다수 참여했고 고위직에 올라간 여전사가 존재했을 정도로 여성의 인권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전사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약탈하기 위해 오랫동안 집을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먹을 걱정이 없다면 목숨을 건 약탈은 왜 하겠습니까?
모든 약탈이 일어나는 이유는 생존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약탈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린이들이 부모의 돈을 훔친다거나 다른 아이들의 것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생존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EBS 부모 – 저, 혼나러 나왔어요’에서는 4학년 남자아이를 호랑이보다 무섭게 체벌하는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2021년부터 법적으로 아이에게 체벌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맞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신은 매 맞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어머니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지갑에 손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친구를 사귀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아이가 왜 약탈자가 되어가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먼저 아이에게 충분히 좋은 환경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환경입니다.
바이킹이 살던 땅처럼 척박한 부모는 바이킹처럼 약탈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환경에서 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체벌은 약탈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약탈자로 만듭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환경입니다.
부모가 생계 걱정을 하고 있다면 자녀는 어떨까요?
당연히 약탈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 되어주기 위해 제가 항상 추천하는 것이 ‘십일조’를 온전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있다면 자녀도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아이가 약탈자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디팩 초프라의 훈육법을 배우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먹고사는 건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너희가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찾고 이웃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만 생각하며 살아라.”
아들 둘은 에덴동산에서 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것입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었고 동생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형은 인도에서 커다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동생은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신이 언제까지 좋은 환경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을 찾고 그 신이 창조한 이유를 찾으라고 합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사업가로 혹은 교수로 하느님이 부르셨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삶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어 부모가 더는 아이의 환경이 되어주지 못해도 아이들은 신의 섭리 안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삶은 ‘경쟁’을 시키는 것입니다. 경쟁이란 환경은 지옥입니다.
지옥에서는 약탈자들이 생겨납니다.
약탈자들이 사는 세상은 또 지옥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를 낳을 부모는 없습니다. 약탈자를 낳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아는 자신이 자기 주인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뱀은 진정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땅에 살고 싶으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자아를 환경으로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약탈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자아가 만들어낸 척박한 이집트와 같은 환경에서 종살이하고 있나요, 아니면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나요?
어린이처럼 부모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를 부모로 믿습니다.
이는 증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양식을 주는 부모를 찾지 않으면 지옥의 삶을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며 자아가 강해지면 자아는 그런 환경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창조자가 있다면 증거를 찾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기가 부모를 찾는 것은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믿는 것은 선택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창조자로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분이 창조자이심을 믿기 위해 십일조도 내야 하지만 내가 에덴동산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자녀들도 또 다른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어린이처럼 그리스도를 하느님 나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뱀의 나라를 선택하든,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든.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마르코 10,13-16
다시금 어린이의 순수성을 회복할 때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올 한 해 동안 ‘하느님의 연인’ ‘상처 입은 치유자’, ‘지난 세기 대 영성가’로 불리는 헨리 나웬(1932~1996) 신부님의 생애와 영성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웬의 일생을 종합하면서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영원한 소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연세가 꽤 들었을 때도 삶의 모습이 소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60세 생일 파티 때 어릿광대로 분장하고 나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꽃을 선물하기를 좋아했기에 꽃값 지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헨리 나웬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 어린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직 살아있었을 때였습니다.
고국 네델란드의 위르옌 뵈머라는 목사님이 그에 대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제목이 ‘헨리 나웬, 하느님에 대한 쉼없는 추구’였습니다.
책이 발간되자 저자는 그 책을 헨리 나웬에게 소포로 보내드렸는데, 책을 받아든 그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엄청 기뻐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제가 쓴 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저에 대해서 쓴 책이 처음 나왔습니다!”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헨리 나웬은 연세 드셨어도 스케이트 보드 타는 것이나 사탕 드시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좋아했던 것이 서커스 구경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공중그네를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너무나 그게 한번 타고 싶었던 가 봅니다.
그는 서커스 단장을 찾아가서, 유명인 찬스를 씁니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혹시 헨리 나웬이라고 아십니까?”
“네 잘 알다마다요. 저도 그 신부님 책 많이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존경합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아, 네. 제가 바로 그 헨리 나웬입니다.”
“정말 그분이시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죄송하지만 공중그네가 너무 타고 싶어서요.”
“그러시군요. 그럼 좋습니다.
위험하니 안전장치를 해드린 후 태워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꿈을 이뤘습니다.
공중그네의 짜릿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걸 또 장문의 글로 표현했습니다.
헨리 나웬도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어르신, 할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그렇게 충격을 받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어린이 같은 순수성, 한결같은 소녀 감성, 충만한 단순성이 그를 깊이 있는 영적 생활로 이끌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제자들은 거듭되는 사목활동에 녹초가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드리는 마음에 그들을 물리치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크게 언짢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코 복음 10장 14절)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 영적 생활이 제자리걸음인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민해봅니다.
너무 힘을 많이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너무 큰 사람이 되어버린 탓이 아닐까요?
너무 높이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시금 어린이의 순수성을 회복할 때입니다.
어린이의 천진난만함, 어린이의 단순성을 복구시킬 때입니다.
어깨에 가득 들어있는 힘을 뺄 때입니다.
다시 한번 아래로 내려설 필요가 있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토요일 강론>
(2025. 3. 1. 토)(마르 10,13-16)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3-16).”
1) 여기서 ‘어린이’는, 작고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소외계층’ 사람들, 즉 복음서에 보통 ‘작은 이들’로 표현되어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영적인 소외계층 사람들’도, 즉 죄인이라고 무시당하는 사람들과 ‘잃은 양’ 취급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냥 놓아두어라.’는 “내버려두어라.”가 아니라, ‘인도해 주어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소외계층 사람들이(‘작은 이들’이) 나에게 올 수 있도록(나를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해 주고, 안내해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들은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소외당하지 않도록, 즉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일에(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더욱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하고,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이 실천해야 할 중요한 ‘사랑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이 기도는, 인간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당하지 않고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2)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매우 엄하게 꾸짖은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17.20-22).”
이 말은, ‘아가페 만찬’을 하려고 신자들이 교회에 모여 있는 상황에서, 부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킨 것을 꾸짖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라는 말은, “가난한 이들은 굶고 있는데, 부자들은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짓은 ‘사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고,
가난한 이들을 교회에서 밀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큰 죄’가 됩니다.
그렇게 ‘사랑 없는’ 식사였기 때문에, 그 만찬은
‘아가페 만찬’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부자들의 위선만 가득한,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식사였습니다.
3) 야고보서에 있는 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야고 2,1-4)”
만일에 교회 안에 빈부차별이 있다면, 그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절대로 빈부차별이 없다.” 라고 큰소리치기 전에 먼저, 교회 운영과 제 단체 운영을,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늘 ‘베푸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잘난 체 하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늘 ‘받기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 생각하면서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모두 ‘사회적인 기득권층 사람들’이 차지하면서, 그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4)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의 ‘어린이’는, 산상설교의 ‘참 행복 선언’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마태 5,3-12).
하느님 나라는 가진 것이 많다고, 배운 것이 많다고, 신분과 지위가 높다고 우쭐거리는 교만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15절).
그 나라는, 하느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이다.” 라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