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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동학교를 중심으로 추진하는 일에 관하여 /윤석산
경북도청의 김남일 문화관광 국장과 경북대학교의 김문기 교수가 상주동학교에 관하여 추진하는 사업은 두 가지이다.
첫째, 상주동학교의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일
둘째, 상주에 국립동학박물관을 설립하는 일
김남일 경북 문화관광국장은 2014년 8월 10일자 대구매일 신문에서 “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시해 민중의 호응을 얻었고, 1864년 상주, 예천, 문경 등 도내 북부권의 5개 포(包-단위조직)를 중심으로 농민 봉기 활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 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며 “경북이 동학의 발상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자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이를 위한 지속적인 학술연구와 동학 정신의 가치를 국내외 홍보도 최선을 다 하겠다.”고 상주동학교의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배경을 말하였다.
또한 김문기 교수는 상주동학교의 기록물들을 번역하여 출간하는 등,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상주동학교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상주시에 국립동학박물관 추진의 의의로
첫째 경상북도가 동학의 발상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둘째 경북 지역에서 일어난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되살리는 데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상주동학교는 경북이 지닌 동학의 발상지로서의 의의와 아무러한 관련없다. 상주동학교는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崔濟愚) 선생으로부터 청림 선생인 김시종(金時宗)이 남접의 도통을 받았고, 이어서 청림 선생인 김시종으로부터 김주희(金周熙)가 도통을 물려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979년 상주동학교에서 발견된 ‘가사’를 한국정신문화원에서 『동학가사』라는 이름으로, 두 권의 책으로 발간할 당시, 연구자이며, 또 편집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현 인하대 명예교수인 최원식 교수가 동학가사』의 「해제」에서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남접을 이어받았다는 김시종, 김낙춘이 허구의 인물임을 상주동학교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김주희의 아들인 김덕용(金德龍)으로부터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상주동학교에 1915년 입교를 한 김병학도 김주희 생존 시에 이들 김시종이나 김낙춘의 실재에 관하여 들은 바가 없다고 증언하였다. 따라서 상주동학교의 기록물이나 유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상주시 국립동학박물 설립 추진을 위한 의의로 내세운 ‘경상북도가 지닌 동학 발상지로서의 위상’과는 아무러한 관련이 없다.
또한 상주동학교는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동학농민혁명과도 아무러한 관련이 없는 종파이다. 김주희의 아들인 김덕용은, “당시 이조말기 국정이 문란하여 갑오동학혁명 등 세태가 분요함으로 은거산림(隱居山林)하야 수도위주(修道爲主)러시니, 일조 황연대오하니 왈 천체행도(體天行道)라. 고로 남접(南接)이라 칭하시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에 상주동학교는 동학농민혁명에 참가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피해 산림에 숨은 종단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경북도청에서 말한 바와 같이 “1864년 상주, 예천, 문경 등 도내 북부권의 5개 포를 중심으로 농민 봉기 활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 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견해와도 상반되는 종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갑오동학농민혁명과 관련이 있는 듯 꾸미어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또 대중을 현혹시키는 일이다. 이와 같은 반론이 일자 경북도청과 상주시, 그리고 김문기 교수 등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종교의 정통성과는 관계가 없다. 다만 상주동학교가 남긴 유물이 중요하다. 다른 곳에는 동학의 유물이 없다.’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조건은 진정성, 역사성, 문화적 가치 등이다. 따라서 한국을 대표하는 진정한 정신과 가치, 그리고 진정한 역사성을 지닌 기록물이어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이 당연하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등재는 한국을 대표하는 유물이며 기록물이야 한다.
그러나 상주동학교의 기록물은 이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동학의 정통성과는 관계없고
따라서 이들 상주동학교의 기록물에는 한국의 정신인 동학의 정통적인 정신도 담기지 않았고, 또 한국근대사의 큰 획을 그은 동학농민혁명과도 관계가 전혀 없는 기록물들이다.
따라서 유네스코 세계기록물유산으로 등재되는 데에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물을 중심으로 국비를 들여 국립동학박물관을 설립한다는 것은 아무러한 의의도 없는 일로 국고의 낭비일 뿐이다. 만약에 상주동학교의 기록물이 유네스코에 등재가 된다면, 한국의 중요한 정신인 동학과 한국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상주시에 국립동학박물관이 설립된다면, 한국의 중요한 정신인 동학과 한국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동학농민혁명과는 아무러한 관련이 없는 국립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국의 위대한 정신과 역사를 왜곡시키는 데에 국비를 낭비하는 일을 경북도청이 나서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동학의 진정한 정신을 담은 기록물이 없다는 것은 전혀 잘못된 발언이다.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목판본 원본이 시기별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기록물, 유물들이 수없이 많이 남아 있다. 더구나 한국근대사의 큰 획을 그은 동학농민혁명의 일을 기록한 기록물과 동학교단에서 발행한 여러 문건들이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음은 동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면 그 누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왜곡하여 상주동학교 이외에는 유물이 없다는 발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상북도 도청은 진정으로 경북이 동학 발상지로서의 위상과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높이기 위해서는 지금 추진하는 상주동학교의 기록물을 유네스코에 등재시키는 일과 상주시에 세우려는 국립동학박물관 설립을 멈추고,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동학의 기록물과 유물을 모아서, 진정한 가치를 지닌 이들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물유산으로 등재시키는 일을 해야 하며, 나아가 동학의 발상지인 경주에 진정한 국립동학박물관을 세워야 한다.
/경북매일신문
/상주시청 홈피 http://www.sangju.go.kr/main/main.jsp?pageNumber=1&groupingField=ALL&home_url=sangju&code=CITIZEN_CITIZEN_6&board_url=board_read.jsp&write_seq=2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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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유산 추진 '상주동학교' 정통성 논란
학계 일각 "1,400여 점 유물 가치 없다" 이의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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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은척면 동학교당 냉방시설에 보관 중인 동학 관련 유물들. 고도현 기자 |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3114&yy=2014#axzz3KuZRFrpO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상주시 은척면 상주동학교당의 유물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학계 일각에서 상주동학교의 뿌리와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상주동학교는 동학의 적자인 천도교가 인정하지 않는 허구의 종단이며 왜곡된 역사의 유물이라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상주동학교당에는 동학대와 경전 발간물, 목판 등 289종 1천425점의 유물이 보관돼있으며 지난해 국가지정 기록물 제9호에 지정됐다.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봉건주의 타파와 새로운 체제를 갈망하며 민중들을 중심으로 크게 확산됐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주체가 됐다. 상주 동학교당은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동학본부 건물이다. 남접주(南接主) 김주희(1860∼1944) 선생이 1915년 건립해 이념 위주로 교세를 확장했다.
◆허구의 종단 VS 국내 유일 동학유물 보고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상주동학교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청림 선생인 김시종이 남접의 도통을 받고, 이어 김주희 선생이 도통을 물려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며 "하지만 청림 선생 김시종이 허구 인물이고 김주희가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과 지금의 천도교와는 아무 관련 없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이처럼 계통이 불분명한 종단의 기록물을 경북도와 상주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난센스"라며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준인 유산의 진정성, 역사성 등의 관점에서도 타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북대 김문기 교수는 "전봉준의 동학이 '혁명적 투쟁'이었다면 김주희 주도의 상주 동학은 경서 발간 등 교리 정립을 통한 내면화에 앞장섰다"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당시 세상을 구하는 인물로 청림 선생이 회자하는 때여서 허구 인물인 김시종 등을 청림 선생으로 내세우기도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포교를 위한 방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상주동학교는 방대하고 치밀한 경전과 엄정한 의례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는 물론 전라도,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교세의 범위가 광대했다"며 "실제로 수천 명의 교인이 신앙생활을 했던 점, 교단 운영 과정에 비리가 없었던 점과 1천400여 점의 동학유물이 유일하게 몰려 있는 것 등으로 볼 때 동학 역사상 그 어느 교파보다도 우월한 실체"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종교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논의할 일"이라며 "세계기록유산은 기록물 자체의 진위 여부나 그 가치, 영향력 등을 의미하는 것이지 종단의 계통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덧붙였다.
◆동학의 중심지는 경주? 상주?
이 같은 논란의 이면에는 교주 최제우 선생의 생가가 있는 경주와 국내 동학기록물이 몰려 있는 상주 간의 국립동학박물관 유치 경쟁도 숨어 있다.
경북도는 2016년까지 100억원을 들여 경주에 최제우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과 수련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하지만 450억원이 투입되는 국립동학박물관은 상주에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상주가 동학의 시발점인 경주를 제치고 동학의 중심지로 더욱 부각될 수 있는 셈이다.
윤석산 교수는 "경북도가 동학발상지로서의 경북 위상을 높이려 한다면 창시자의 생가가 있는 경주에 국립동학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며 "상주 동학교당의 세계기록유산 추진은 정통성 없는 상주에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경북도와 상주시는 "상주 동학이 최제우로부터 정통성을 이었느냐는 건 애매하지만 동학의 적자로 평가받는 천도교나 다른 종파에서는 이런 유물들을 남기지 않았다"며 "세계기록유산 등재 작업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경북도 관계자는 "상주동학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시키려는 것은 상주동학교의 위상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동학의 진면목과 가치를 세계에 알리려는 것"이라며 "상주의 동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다면 현재 동학의 정통으로 자부하는 천도교의 위상도 한층 높아질 "이라고 말했다. 상주 고도현 기자 dory@msnet.co.kr의 다른 기사
상주 ‘동학교’의 내력 / 이윤영
http://cafe.daum.net/donghaksesang/NwAu/122?q=%BB%F3%C1%D6%B5%BF%C7%D0%20%C0%B1%BC%AE%BB%EA&re=1
현재 ‘상주 동학교당’이라 알려진 상주 ‘동학교’의 내력을 ‘한국신흥종교연구소’에서 1992년(대흥기획) 펴낸 ‘한국신흥종교총감-저자 이강오’ 내용을 요약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한국신흥종교들은 1860년 경주에서 수운 최제우선생이 창도한 동학(東學)에서 비롯된다.
상략)동학의 교파는 크게 나눠 ‘전통교단과 방계교단, 그리고 변성(變成)교단으로 구분된다. 상주 동학교는 방계교단으로 구분된다. 방계교단이란 동학 정통파의 밖에서 교법의 공식적인 과정 없이 자기 나름으로 창교한 교파, 즉 동학교단이라 자처하는 교단들이다.
상주 동학교는 수운의 제자라 하는 김시종(金時宗)이 1869년 동학의 접주(接主)라 자칭하면서 경북 안동지역에서 동학교라는 명칭으로 교파를 만든 것이 시작이다. 그 뒤 김주희(金周熙)라는 자에 의하여 궁을도(弓乙道)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궁을도는 현재의 상주동학교당 자리에 본부를 두고 포교를 시작한다.
김시종이 동학교의 분파의 원조로서 스스로 남접도주(南接道主)라 칭하면서 1909년 동학교(東學敎)라는 명칭으로 교단을 만들었다. 경북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다가 2대교주 김낙춘(金落春)을 거쳐 3대교주 김주희(金周熙)가 상주군 은천면에 본부를 옮겨 포교하였다. 김주희는 동학교의 교명을 궁을도라 개명하였으나, 교리는 동학의 교리와 비슷하나 신비적 경향이 짙다. 궁을도는 미약한 교세로 유지되고 있었다.(궁을도는 현재 동학교라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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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상주 동학교당 즉 김주희는 동학교의 교주도 아니고 원래 김시중이 동학접주 또는 동학남접도주를 자칭한 동학의 법통과 전혀 상관없는 동학의 방계교단 즉 스스로 분파한 것이다. 현재 상주시나 상주동학교당 관게자들이 김주희를 동학의 남접교주라라는 역사를 완전 왜곡을 하고 있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하겠다. 김주희는 정확이 말해 동학에서 스스로 분파한 동학의 정통과 관계없는 동학교를 다시 궁을도라 칭하고 교주가 된 자이다.
어찌 수운 최제우 대신사로부터 직접 남접의 도주자리를 물려받았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동학역사를 홍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학의 남접과 북접이 사실상 없었다. 수운 대신사가 자신의 운명 즉 순교를 예견하고 대신사가 계시는 곳에서 북쪽에 있는 해월 최시형 신사에게 북접도주를 임명하였다가 다시 동학의 도주 즉 교주자리를 물려준 역사가 분명 있는데, 이를 왜곡하여 남접교주 운운하는 것은 김주희가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처음 동학에서 분파하여 스스로 접주와 남접도주라 자칭한 김시종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상주동학교당 김주희가 만들었다는 ‘상주동학경전’의 내용을 보면,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직필한 동경대전 내용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대신사 경전을 손수 편찬한 해월 최시형 신사의 목판본 필사본 등 경전을 그대로 인용하였다는 것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동경대전 내용에다 김주희의 작품을 첨가하였고 또한 김주희 작품으로 추정되는 여러 내용들이 추가된 것으로 봐 동학의 경전과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본다.
*상주동학경전 영인본은 198페이지로 이루어졌다. 수운 대신사님의 동경대전과 같은 내용에, 임의로 추가한 '무제, 분합무두'를 대신사님 경전으로 혼동되게 묘한 결합으로 되어있다. 이는 동학, 천도교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 시문)외 전부 김주희가 첨부 한 내용이다.
동경대전에 이어, 어떤 설명도 없이, 궁을경(심론), 통운역대(수덕문 외, 22편), 도원경(천지인 외, 2편), 도화경(1~4장), 성경(논학편 외, 6편), 도성경(1~3장 외, 1편), 축식(혼례편-상례펀 외, 5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상주동학경전영인본>
또한, '용담유사, 임하유서(林下遺書), 허황가(虛荒歌) 등 동학가사(東學歌辭), 림하유셔,챵덕가, 챵도가, 챵화가, 인션슈덕가 등 한글본 국한문 혼용본, 경호당(敬浩堂), 동학교적(東學敎籍) 등 기타 판본이 있다. 제작시기는 대체로 1920년∼1930년대이다.'<민족백과사전>
*참고문헌*
1. 한국신흥종교총감 130~136쪽(한국신흥종교연구소 이강오 저, 1992년발행-대흥기획)
2. 상주동학경전영인본(국역상주동학경전2008년발행-경북대학교퇴계연구소 역자 김문기)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상주동학교당유물 중 경전내용-1920~1930 제작, 김용만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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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산교수의 상주 동학교에 대한 논고
동학연구가이자 현재 천도교 상주선도사로 있는 한양대학교 윤석산 명예교수의 책자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174~175쪽 상주동학교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략)
먼저 남접을 자칭한 동학의 계파를 살펴보면, 이들 종단 대부분은 ‘남접주인’으로 ‘청림(靑林)선생’이라는 사람을 내세우고 있다. 이 청림이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분 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수운선생이 참형을 당한 이후 해월선생이 다시 무너진 동학의 교단을 일으켰을 때에, 혹은 해월선생이 참형(교수형)을 당한 이후, 스스로를 ‘청림’이라고 칭하거나 청림으로부터 도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나타나 동학의 분파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법통이 남접이라고 자처를 한다.
청림과 남접을 자처한 동학의 대표적인 분파로는 상주(尙州) 동학교(東學敎)와 청림교(靑林敎)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종단에서 수운선생으로부터 도를 받았다고 내세운 ‘청림 선생’, 곧 김시종(金時宗), 김낙춘(金洛春), 정시종(鄭侍宗) 등의 인물들은 모두 가공의 인물들임이 상주 동학교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김주희(金周熙)의 아들인 김덕룡(金德龍)의 증언과 학계의 연구에 의하여 이미 밝혀진 지 오래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청림’이라는 인물은 실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이렇듯 허구의 인물을 내세운 것은, 이들 스스로 남접을 교단의 설립자가 그 연령상 수운선생으로부터 직접 도통(동학2대도주)을 전수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중간에 ‘청림’이라는 허구 인물을 세워 자신이 세운 교단의 연원을 직접 수운선생에게 대고, 수운선생의 법통의 적자(嫡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상 동학에 관한 어느 기록에도 수운선생이 해월(최시형) 이외에 다른 조직이나 사람에게 법통을 물려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하략)
* 저와 윤석산 교수는 약 3일간에 걸쳐 상주 동학교 즉 김주희 교주라는 인물에 대해 토론하였다. 요즘 상주동학교당의 유물들이 국가지정기록물 제9호로 지정되었다는 뉴스소식과 또한 상주시에서 국립동학박물관으로 추진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필자는 국가지정기록물 등재와 동학박물관추진에 대해 전혀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밝힌다. 다만 동학의 역사를 왜곡하면 안 된다는 취지이다. 현재 상주시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홍보하는 내용을 보면 동학남접법통을 이어받은 김주희라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사실에 없는 역사왜곡이라는 것을 분명 밝힌다. 동학박물관추진의 동학관련내용에 있어 심각한 오류의 왜곡이 예상되므로 이에 대한 사전정보공유라는 것에 본 글들을 올린 것이다
참고글 /
한국일보연재 (7회연재) 2014.10.16~11.29 /연재1회, 7회 중 일부, 전체글은 첨부파일 참조
民主를 꿈꿨던 또 하나의 동학...100년 만에 베일 벗다
[변경의 동학 상주동학이야기] (1)프롤로그-상주동학을 아시나요
http://www.hankookilbo.com/v/a8c06297511544aea9fcf1ac73c574b1
2014.10.16
우리 역사가 망각한 상주동학
경북 상주 산골서 경전간행사업 주력...일제감시 피해 민족종교 맥 이으려 분투
1943년 대대적 탄압으로 교세 위축
우리나라 유일 동학유물 寶庫
지난해 말 289종 1400여점 '국가지정 기록물 제9호'로 지정
동학혁명 120년 맞아 동학史 보완해야
‘상주동학’을 아시나요.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지만, 우리들 기억 속에 상주동학은 낯설기만 합니다. 우리 역사가 상주동학을 기억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릇 역사는 경중을 따져 기록되고,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이 반영된 결과물인지라 빠져 있거나 누락된 역사가 허다한 것도 역사가 가진 한계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네 역사가 잘 알다시피 중앙 중심, 지배자 중심의 산물인 것도 우리가 상주동학을 기억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보는 상주동학을 ‘변경(邊境·frontier)의 동학’이라 명명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학이 ‘중심(core)의 동학’이라면, 상주동학은 이것과 교집합도, 합집합도 못 이루는 ‘천애고아’로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역사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상주동학은 변경의 동학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럼 중심의 동학과 변경의 동학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 걸까요. 그럼에도 두 동학이 어떻게 동류항이 될 수 있는 걸까요. 먼저 중심의 동학은 정홍원 국무총리의 최근 발언이 그 핵심을 잘 말해줍니다. 정 총리는 지난 11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식에 보낸 축하 메시지에서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일제의 침략 야욕에 맞서 우리의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동학농민군의 굳건한 의지는 그 이후 계속된 의병항쟁과 3·1 독립운동,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의 토대가 됐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공인하는 동학은 창시자 수운 최제우(1824~1864) 선생과 그를 이은 2대 교주 혜월 최시형(1827~1898),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1855~1895) 그리고 3대 교주이자 천도교의 교조로 거국적인 3·1 독립운동을 지휘한 의암 손병희(1861~1922)의 그것입니다.
정 총리의 발언을 토대로 시기별로 나눠보면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일제의 침략 야욕에 맞선’ 동학은 전봉준과 최시형을 위시한 동학도를 가리킵니다. ‘계속된 의병항쟁과 3·1 독립운동,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의 토대가 된’ 동학은 손병희와 함께한 동학도를 의미합니다.
상주동학은 이 노선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동학입니다. 시기로는 일제강점기 서울에 손병희와 그 동지들이 있었다면, 경북 상주에는 삼풍 김주희(1860~1944)와 그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가 기억하는 동학은 국가와 백성이 위태로울 때마다 온몸을 던져 구국(救國)·구민(救民)한 우리네 민초의 내력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상주동학은 온몸으로 맞서기보다 사방이 재(岾)로 둘러싸여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제격인 곳에 터를 잡고 적서차별, 인본사상, 인간존중을 기치로 한 동학 정신을 대대손손 전하기 위해 경전간행사업에 주력한 ‘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던 또 하나의 동학’입니다.
이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1864년 프로이센과 영토문제로 총부리를 겨누며 뜨겁게 맞붙었다가 전국토가 초토화된 덴마크의 국가부흥운동 성공사례를 연상케 합니다. 덴마크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공병장교 출신의 엘리코 달가스였습니다. 그는 박살난 국토를 누비며 “황무지 유틀란드 반도의 모래 언덕을 장미꽃 향기가 가득한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로 바꾸자”며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다독였습니다. 달가스가 동분서주할 때 농민교육자 니콜라이 그룬트비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자”며 대국민 정신교육을 감행했습니다.
그렇게 덴마크는 일어섰고 달가스는 국민 영웅으로, 그룬트비는 국부(國父)로 칭송받았습니다. 이 사례는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농업 과외 선생이었던 류달영 박사는 덴마크 사례를 들어 ‘새마을운동이 성공하려면 공직자들의 현장주의와 농민들의 정신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손병희와 그 휘하가 현장주의를 추구했다면, 김주희와 그 휘하는 정신교육에 매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손병희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29명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가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주희는 1943년 11월 25일 경전간행사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붙잡혀 역시 옥살이를 합니다. 똑같이 동학의 사상 틀로 움직인 결과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상주동학은 여전히 변경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지난해 말 상주동학교당이 100년 동안 보존하고 있던 동학경전 발간물과 목판 등 289종 1,425점의 유물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 기록물 제9호’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의미는 간단치 않습니다. 동학 관련 유물이 온전히 보전된 곳은 상주동학교당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합니다. 이 자료들은 서학(西學·천주교)에 반해 순수 우리 민족종교를 표방했던 동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데 유용할 뿐 아니라 우리 정신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입니다. 본보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그동안 변경에 머물러있던 상주동학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교주 김주희는 누구인지, 그는 왜 노선을 달리했는지, 당시 동학도들은 어떻게 생활했는지, 상주동학교당은 왜 상주의 외딴 산중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교당은 대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 많은 유물은 자그마치 100년 동안 어떻게 온전히 보전되어 왔는지, 그 유물을 묵묵히 지켜온 사람들은 또 누구인지 등이 교당 건립 100년 만에 베일이 벗겨집니다. 동학의 사상이 본디 그러했듯 그 역사 역시 통섭(統攝·consilience)되는 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합니다.
연재 7회 중에서
‘구국이란 정답은 같았으나 방정식이 달랐다.’
‘변경(邊境)의 동학-상주동학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 점을 또렷하게 알려준다. 시리즈 제목을 ‘변경의 동학’이라고 한 데는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상주동학의 지대한 가치를 우리 역사가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동학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천도교조차 상주동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이유로만 보면 변경은 단순히 ‘중심부에서 저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를 가리키는 변방(邊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변경은 발칙한 의미도 갖고 있다. ‘가장자리에서는 중심부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는 역발상의 용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기정사실화 한 중심부의 역사를 주변부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미국사학자 터너가 고안한 용어다. 관점이 달라지면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상주동학’이란 변경의 관점으로 동학을 이야기 할 때, 그동안 우리가 모르고 있었고, 안다고 해도 다르다고 간주하고 살았던 동학의 일부를 바로 볼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실제 상주동학의 관점으로 동학을 보면 그 역사가 보정된다. 우리 역사는 동학농민혁명의 최후를 대둔산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일본-조선 연합군은 1895년 2월 17일 ‘대둔산에 숨어있는 적괴를 토벌하라’는 상부명령을 받고 출동한다. 연합군은 이튿날 새벽 5시를 기해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은거지에는 허름한 초가가 3채였고, 3면이 큰 바위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에서 어린 소년 1명과 28~29세의 임산부를 포함한 26명의 농민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신식무기를 앞세운 연합군은 어린 소년을 제외한 25명 전부 사살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천황폐하 만세! 천황폐하 만세! 천황폐하 만세!”
동학농민혁명이 일단락되고, 3세 교주 손병희는 목숨을 부지한 교도들과 함께 조용한 애국애민 활동을 지속했다. 동학도가 다시 역사의 현장에 전면 등장한 것은 1919년 3?1운동 때였다. 그 시기 상주동학교는 버젓한 교당을 갖고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 탄압 전까지 상주동학교의 행적은 최제우의 사상을 통해 모두가 하나 되는 세상, 만민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시대환경이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학 정신을 공유하고 후대에 전하려는 상주동학교의 작업들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일제가 상주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이유는 ‘경전과 가사로 동학을 퍼뜨리려’했기 때문이었다. 70년이 흐른 지금, 상주동학교당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곳에는 289종 1,400여점의 동학유물이 보존돼 있다. 그런데도 상주동학은 동학의 주변부로 남아 있다. 왜일까. 역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이지 상주동학교가 산골짜기 변방에서 맥을 이었기 때문일 터다. 천도교가 상주동학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수의 천도교인들은 “동학 교조 최제우의 사상을 김주희가 달리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동학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천도교는 최제우의 사상을 온전히 지켰고, 상주동학교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동학’으로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 역사는 흐릿하게 기억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동학운동이 있었다. 1904년의 갑진민회운동이다. 최시형 순도 후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일제의 체포망을 피해 망명길에 올라 일본으로 피신한다. 거기서 동학 새 옷 입기를 구상한다. 이른바 ‘동학의 근대적 종교체제’ 구상이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동학도를 동원해 진보회를 조직한다. 그해 10월 8일, 조선반도 360곳에서 30만명이 일제히 양복입기와 단발을 단행한다. 이를 민간조직이 갑진년에 일으킨 운동이라고 해서 갑진민회운동이라고 한다. 천도교에서는 달리 부른다. 천도교가 주도한 대(對) 민중 의식개혁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갑진개화운동이라고 한다. 손병희는 당시 이 운동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 당국과 우리나라 개혁의 밀약을 굳게 맺은 뒤에 일본을 위해 러시아를 치는 한편, 국권을 잡은 뒤 정치를 혁신하면 우리나라 재생의 도(道) 이에 있을 뿐이라.”
이상하지 않은가.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짓밟았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오간데 없고 되레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갑진민회운동으로 동학도는 또 한 번 탄압을 받는다. 국내에서 이 운동을 지휘했던 이용구는 일제의 협박과 회유로 친일파로 돌아섰다. 돌아온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한다. 천도교는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이용구를 포함한 친일행위를 한 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했다. 이는 본류인 교조 최제우 사상을 버린 결과가 아니다. 시대상황에 맞게 교의 운영체제를 변용해 적용하려다 생긴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손병희 입장에서는 운영의 묘를 살려 위기를 기회로 넘으려는 전략적 실천이었다. 뭇 대중이 천도교와 동학은 다른 종교라고 오해하는 것은 시대상황이란 변수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주동학교에 대한 오해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산골오지에서 경전과 가사를 변종해 민족종교의 맥을 이으려고 했던 상주동학교가 ‘또 하나의 동학’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김주희를 위시한 상주동학 교도들이 만약 새로운 종교를 꿈꿨다면, 굳이 ‘동학’이란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김주희가 최제우 사상을 전복시키려 했다면, 수종의 경전과 가사를 만들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금지옥엽으로 여길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어쩌면 ‘시대상황’이라는 변수를 포용의 수단이 아닌 아전인수의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상주동학교가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된 것은 ‘동학을 유포한 죄’다. 이건 팩트(fact)다. 또 하나의 사실은 상주동학교가 국내 유일의 동학 유물 보고(寶庫)라는 점이다. 결국 구국이란 정답은 같았으나 방정식이 달랐다는 말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2014.11.28 /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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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지역의 동학연구 상주지역 동학교단의 활동과 동학가사-김상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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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수십 년 동안 없어 왔던 교단과 중진 교역자들이 ‘천도교는 동학교주 김주희를 인정할 것인가?’라는 매우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 문제를 제기하여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다시 원 주제로 돌아가 상주 동학교와 김주희에 대해선, 오지영(吳知泳)이 동학 교파에 대한 자료로 제시한, 동학사(東學史-永昌書館. 서울. 1939.)’ 附 동학(東學) 각파(各派) 일별(一瞥) / PP. 237-242. 도 소개된 바가 없고, 천도교단의 어떤 기록에도 설명된 바가 없다. 지난 100여 년 동안 그랬듯이, 무시하면 될 일이고 잊어버리면 될 것이다. 지금도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대 다수가 잊어버린 지 오래된 역사의 한 장면일 뿐이다.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의 『朝鮮の類似宗敎/1935년 9월 10일에 간행된 朝鮮總督府에서 부록 사진화보 36쪽 포함하여 총 991쪽으로 된 방대한 조사자료 보고서』의 第 四 節 東學系類似宗敎の現況.PP.59-292.에도 상주 동학교와 김주희에 대한 기록이 없다. 東學系類似宗敎の現況.에는 다음과 같이 열거되어 설명하고 있다.
一. 天道敎の四派. 新派, 舊派, 沙里院派, 聯合會派./P.64. 二. 侍天敎. 三 上帝敎. 四. 元倧敎. 五. 天오(두려워할 오; 심방(忄)변에 요(夭/예쁠 요 또는 오)를 더 한 글자)敎. 六. 靑林敎. 七. 大華敎. 八. 東學敎. 九. 人天敎. 十. 水雲敎. 一一. 大同敎. 一二. 天冒. 一三. 平化敎. 一四. 无窮敎. 一五. 无窮大道敎. 一六. 天法敎. 一七. 大道敎 등이다.
註; ‘상주동학교와 천도교 상주교당에 대하여’ 下 에서 오지영(吳知泳)이 동학 교파에 대한 자료로 제시한, 동학사(東學史-永昌書館. 서울. 1939.)’ 附 동학(東學) 각파(各派) 일별(一瞥) / PP. 237-242. 과 대조 비교해 보기 바람. 위에서 누락된 상당수의 교파는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의 『朝鮮の類似宗敎』에서는 흠치교(吽哆敎)의 유사종교로 분류되어 있다. / PP.293-350. 참조바람.
경전의 정리와 해설에 대한 문제제기만 아니라, 교리 교사와 수많은 각종 자료에 대한 시비곡직을 가리기 위한 비교분석 연구논문을. 필자가 10여 년간 동안, 제기했을 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이 무심하던 교단과 중견 교역자들의 논의에 대하여 의아함을 금할 수가 없다. 지금 논의의 중심에 서 있는 분들을 위하여 ‘상주동학교와 천도교 상주교당에 대하여’에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상주 동학교의 경전 전부를 포함한 60여 종의 자료들(이 자료들 중에는 김상일의 ‘東學歌辭의 主題類型 考’를 2003년 4월 월례 발표회에서 발표된 내용에 없는 경전 자료 4-5종을 더 가지고 있다.)을 바탕으로 매우 상세히 알려 드리려 한다. 논쟁의 주제에 대한 충분한 자료와 지식이 없이 논의와 논쟁을 한다는 것과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한 대안을 내놓는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고 부질없는 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세기에 가까운 무심함에 대하여, 필자가 10여 간 문제를 수없이 제기해왔으나 아무런 문의나 논의가 없었던 교단이다. 교단 내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2000년 초에 들어 이와 관련된 논의와 연구논문 결과들이 상당히 발표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면 이번 논의의 문제인 상주동학교에 대한 뿌리는 깊다. 1970년을 전후하여 韓 燦과 韓悌翊에 의해 檀君精神 宣揚會, 東學精神 宣揚會 그리고 東學 協議會, 東學 宗團 協議會가 결성되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韓 燦이 단독으로 출자한 자금으로 이 모임의 모든 사업이 운영되었다.
布德 116(1975)년에 東學 協議會의 명의로 “東經大全 演義”가 元容汶, 金根五, 韓 燦, 韓悌翊, 魚允東 등에 의해 해설과 주석(註釋)을 하였고, 이어 布德 119(1978)년에 東學 宗團 協議會의 명의로 “海月先生 法說註解”를 元容汶, 金根五, 韓 燦, 韓悌翊, 李光春 등이 집주(集註) 해설을 하였다. 이 간행에 측면으로 편집을 도왔던 필자는 총부가 이 출판을 도외시하여 시비곡직을 가리지 않는 우(愚)를 범했다. 이후 교단은 교단 내외에서 간행되는 모든 출판물에 직간접으로 간여하지 않았다. 단 한번 ‘하날님 말씀’이란 경전 영인본 간행에 관여한 교단 원로들을 출교처분을 한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布德 119(1978)년에 韓 燦이 주도한 海月 崔時亨 先生 紀念事業會(이 사업회 명의와 자금으로, 이 무렵에 경주 황성공원에 해월신사 동상을 건립하였다. 총부와는 전혀 협조한 바가 없다.)에 같은 경전 영인본을 “東經大全 附 용담유사”를 출간했을 때에는 서로 한 권씩을 달라고 까지 하였다. 이 들 중 천도교 측으로 참여했던 韓 燦, 韓悌翊, 金根五, 세 분 중 韓 燦, 韓悌翊 두 분은 이미 환원하여, 필자와 金根五 원로만이 그 때의 전말(顚末)을, 자신이 간여(干與)한 부분에서 어느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1970년을 전후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위 협의회가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위 협의회가 왕성한 활동에 대하여 천도교 교단과 상당수의 교역자들이 무시하고 비난을 했지만, 檀君精神 宣揚會와 東學精神 宣揚會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도인들 대다수가 그 당시 현존(現存)하고 있던 동학계열의 여러 종단의 대표적인 교역자들이었다. 이들의 꿈은 동학계열의 종단들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로하신 분들의 환원(還元)과 거동(擧動)의 불편으로 인하여, 위의 기구에서 각종 동학계열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사실상 어려워졌다.
이 협의회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했던 이들 중, 상주동학교에 소속된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천도교 교단에 관심을 보인 교인들을 모아 천도교 상주 전교실(가칭)을 개설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 결과 연로하신 분들의 환원을 한 후에 일정기간 천도교 상주 전교실이 운영된 적도 있다. 이 시기에 천도교가 보는 상주동학교에 대한 이해와 문제점에 대한 많은 토론을 통하여 천도교 교단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천도교 교단의 상주동학교에 대한 입장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의 기구의 운영이 해가 갈수록 차츰차츰 순조롭지 못하게 되었고 檀君精神 宣揚會의 사업만 유지되어오다가 중심인물이었던 韓 燦과 韓悌翊, 두 분 원로(元老)마저 환원하게 되어 모든 기구의 사업은, 정리(整理)수순(手順)을 밟아 2000년을 전후로 하여 각 기구의 문을 다 내렸다.
이후 상주동학교는, 당시 전국의 신도가 약 100여 가구에 지나지 않아 극소수였기 때문에 교당에 모여 의식을 치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들 중에서 천도교 상주 전교실의 운영에 참여했던 교도가 상당수였기 때문에 집회나 종교행사를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이때의 상주동학교와 유물관리 그리고 교당 운영의 책임은, 金周熙의 아들 김덕룡(金德龍)이 교단을 대표하고 있다가 1986년에 환원하고 난 후에는, 현재는 김덕룡의 아들인 김정선(金正善)이 책임을 맡고 있다. 현재 신도수는 안동과 상주 지역에 약 50여 가구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들 중 일부는, 천도교 상주교당의 동학 상주지킴이 경암 황 숙에 협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필자는 교직에서 2000년 봄에, 자진 퇴임하여 30여 년 동안 미루어 왔던 동학과 천도교에 대한 관련 자료의 수집과 기록내용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1차 사업기간 동안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그러 던 중 2005년 늦가을 10월 초에 김정선(金正善)과 연락이 되어, 필자가 30여 년 동안 위의 기구와 직간접으로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의 아내와 함께 찾아가 만나서, 상주동학교와 이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의논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장시간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때에 필자의 ‘동학사상 전개의 제문제’ 가 출간되었었기 때문에 기증도 하였다. 필자가 방문할 시기에 경북 지방 문화 사업으로 상주동학교 교당과 유물전시관 시설을 짓기 위하여 지반(地盤)을 정리하고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후 조용히 시간이 흐르다가 포덕 154(2013)년 어느 날에, 교단에 알려지지 않은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동학 상주지킴이 경암 황 숙이, 천도교 자유게시판에 여러 차례 천도교 상주교당의 현재의 형편을 전하면서 도움을 청하였으나 지금까지 그 결과에 대하여 필자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상주시 홈페이지에서 황 숙의 활동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도교 상주교당의 동학 상주지킴이 경암 황 숙(011-9850-5600)이 상주시 홈 페이지의 시민 광장 >시민의 소리 >시민 홍보 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고 있다.
‘참 좋습니다. 엄청 간단명료합니다. 살아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현실 종교 이면서도 내가 한울님으로 ‘내가 한울이 되시는 아주 쉽고도 간단한 동학’으로 모십니다. 라고 하면서 홈 페이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http://cafe.daum.net/sangjuct 여기에 세상 천당의 길이 있다.’/ 상주시청 홈 페이지 2013년 6월 22일의 보도 자료에서. 프레임을 독자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 임의로 변경함.
필자는 이미 상주동학교와 경전내용의 일부, 그리고 김주희에 대한 정보를 수없이 제공한 바가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林下遺書와 弓乙歌에 대한 解說’ / 포덕 151(2010)년 9월 29일.
林下遺書에 대해서 一部 記錄에는 作者未詳으로 되어 있지만, 발굴된 現存 資料에 의하면 龍虎大師 鄭北窓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오는 林下遺書와 尙州東學敎 敎主 金周熙가 지은 林下遺書가 있다. 鄭北窓의 林下遺書와 弓乙歌는 李完敎가 解讀한 “천지개벽을 말한다.” 副題 [동학과 비결]의 pp.56-70에 수록되어 있고 尙州東學敎 敎主 金周熙가 지은 林下遺書는
1932년에 慶北 尙州郡 銀尺面 于基里 728번지 金周熙가 主管한 東學本部에서 木版本으로 林下遺書라 이름하여 발행했으며, 그 뒤 1974년 12월 20일 復刊했다. 이 자료의 원문은 尙州東學敎가 간행한 經典 속에, 교주 자신의 가사를 龍潭遺辭라고 하고 第 二卷에서 第 三十九卷까지 100편의 가사를 실었다. 이중 林下遺書는 龍潭遺辭 第 二卷에 실려 있고 또 于石 洪 又가 일조각(一潮閣)에서 간행한 “東學入門”의 부록에 실렸고 1979년 10월 20일, 韓國精神文化院에서 발행한 '東學歌辭(동학가사)(2)' 421쪽~426쪽에 실려 있다.
龍虎大師 鄭北窓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오는 林下遺書 중간 부분에는
合其德 正其心이면 道下止가 이것이요
須從白兎走靑林을 道人外는 뉘알소냐
末尾 부분에서는
무궁한 이천지에 무궁한 나아닌가
四時四德 日月中에 木靑靑이 靑林이라 아는 사람 짐작하소
須從白兎走靑林을 내아니면 누가알고
金周熙가 지은 知止歌는 龍潭遺辭之第 二卷 標題 林下遺書로 구분된 5篇중의 하나이며, 歌辭 1篇째로 記述된 320句의 가사로 主題는 儒敎的 修道이며, 하날님을 공경하고 三綱五倫 및 忠孝로 修身하고 正心正氣하면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가 올 것이라는 내용을 노래했다.
知止歌 중간 부분에는
合其德而 正心이면 道下止가 이것이라
須從白兎走靑林을 道人外에 뉘가알꼬
말미 부분에서는
무궁한 이천지에 무궁한 내아닌가
四時四德 一元中에 木靑靑而 盛林하니
아는사람 짐작하소 須從白兎走靑林을 내아니면 뉘가알꼬
이 두 개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정북창의 가사를 김주희가 添削하여 改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須從白兎走靑林이란 문구가 들어 있는 김주희의 觀時歌도 있다. 觀時歌는 龍潭遺辭之第 二十五卷 標題 明察歌로 구분된 5篇중의 하나이며, 歌辭 75篇째로 기술된 155句의 시로 主題는 修道 또는 修身이며, 時局의 形便과 修身과의 관계를 노래하였다.
序頭부분에
須從白兎走靑林을 疑心없이 품어두고 百花爭爭 그 가운데 隱然히 빛을 감춰
暫時暫間 지내다가 貞節을 나타내어 靑林世界이뤄보세.
/ 상주동학교와 천도교 상주교당에 대하여 上 끝
尙州東學經典은, 직경 5.3센티 정도의 둥근 모양에 南接道主之章이라고 새겨 사용하였던 金周熙가 세운 동학계파 중에 하나인 尙州東學敎의 經典의 國譯本이다. 김주희는 鄭鑑錄에서 말하는 十勝之地의 하나라고 알려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 처음으로 敬天敎를 1904년에 세웠다. 한때 김주희의 號를 따라 靑林敎로 불리기도 하다가 1915년에는 東學敎로 개칭했고 1920년대 초에는 상주 동학교의 경전 40여권을 목판본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김주희는 1860년 10월 3일에 충남 공주군 신상면 달동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말에 국정이 혼란으로 인하여 민란과 동학혁명으로 어지러워지자 속리산에 들어가 수도수련에 열중하면서 세상에 대한 심회를 기술했고 이런 글들을 모아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목판본으로 총 40책의 가사집을 경북 상주에서 간행했다. 이 글들은 1970년대의 후손에 의해 재정리되어 상주동학경전으로 정착됐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상북도와 상주시는, 상주동학교가 보관해온 1,400여점의 東學遺物이 문화재에 준하는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유교문화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교당과 遺物展示館으로 확장공사를 마쳤다. 이러한 尙州東學敎堂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장인 金文基가 처음으로 尙州東學經典을 譯註하여 2008년 9월 22일에 간행된 것이다. 이 경전의 구성은 東經大全 弓乙經. 通運歷代. 道源經. 道和經. 聖經敎正經. 聖經道正經. 聖經道修經. 道誠經. 祝式으로 되어 있다. 이 중 도성경은 목판본으로, 축식은 목활자본이고 나머지 편의 원전은 모두상주동학교당 소장 경전판본으로 하고 있다. 동경대전은 戊子季春板하고 유사하나 법설의 순서가 다소 다른 점이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尙州東學經典 活字로 된 原文 과 尙州東學經典의 影印이 수록되어 있다. 敎主 金 周熙는 1944년 항일에 앞장 서 활동하다 교도들과 함께 구속되었고 이로 인한 옥고로 1944년에 病死하고 副 敎主는 獄死했다. 김주희의 子는 敬天, 號는 三豊, 尊號는 靑林先生이며 부친 金允集(1823-1881)이 수운의 문하에 입도하자 김주희도 입도했었다. 김주희가 자와 호를 敬天과 靑林으로 한 것은 동학과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須從白兎走靑林이란 詩句는 鄭鑑錄의 七言古訣이 原典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引用되고 變形되었다. 鄭鑑錄은 朝鮮朝의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代表的인 豫言書로 여러 가지 鑑訣類와 秘訣書의 集大成이라 할 수 있으며 異本이 많다. 형식면에서 豫言說, 讖謠, 易數의 풀이, 風水地理說의 해석 등이 실려 있다. 정감록의 作者로 鄭鑑 또는 李沁으로 알려졌으나 鄭鑑과 李沁의 對話體 形式의 構成에서는 오는 誤解이며 다양한 수십 편의 글들을 한데 모은 傳說的인 人物로 評價하고 있다. 或者는 鄭道傳이 朝鮮王朝의 易姓革命을 合理化하고 民心을 造作하기 위하여 著述하였다는 主張도 하고 있다.
鄭鑑錄의 核心 중의 하나인 鄭道令이란 眞人이 출현하여 이씨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예언에 따라 민중들은 현실적인 고난을 이겨내며 새 세상에 대한 갈망이 높아졌다.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진인인 정도령의 출현이 없자 靑林道士란 새로운 인물이 예언서에 등장하게 되어 정도령의 역할이 靑林道士에 옮겨가고 새로운 세상인 이상향이 靑林의 世上으로 옮겨 갔다. 김주희는 이런 흐름을 재빨리 看破하여 자칭 靑林道士라 하였고 동학에서 벗어나 敬天敎를 설립하여 靑林敎로 발전시키면서 暗黙的으로 靑林敎徒가 되어, 鄭鑑錄에서 말하는 十勝之地의 하나라고 알려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로 와서 다 같이 재난을 피하자고 했다. 그리고 김주희는 자신의 자와 호를 敬天과 靑林으로 지어 暗示的으로 자신이 정도령의 換身이며, 청림도사로 진인이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須從白兎走靑林이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이상향인 청림에서 청림교도가 되어야 재난을 피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弓乙歌는 數 種의 歌辭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용호대사 정북창의 弓乙歌.
2. 김주희의 弓乙歌.
3. 격암유록에서 弓乙에 관련된 여러 가지 詩歌.
4. 한국 가사문학 중의 작자미상의 弓乙歌.
일반적으로 학계에선 용호대사 鄭北窓의 弓乙歌를 원본으로 삼고 다른 노래들은 添削 또는 改作으로 보고 있다. 용호대사 정북창은 명종 때 사람으로 이름이 鄭磏, 1506년에 충남 아산 출신이다. 천문지리와 동물과 귀신의 세계까지를 이해한 奇人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天人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한다. 1549년에 젊은 나이로 죽었다. 金周熙 作인 弓乙歌는 龍潭遺辭之第 三十六卷 標題 弓乙歌로 구분된 것이며, 歌辭 95篇째로 기술된 517句의 장편가사이다. 主題는 修道이며, 궁을과 成道의 관계를 ‘궁궁을을 성도로다’ 라는 반복운율에 맞춰 설명하고 있다. 김주희는 100편의 방대한 동학가사를 지었다. 수운이 지은 용담유사를 龍潭遺辭之第 一卷이라 분리하여 가사 8편과 검결을 실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가사를 龍潭遺辭라고 하고 第 二卷에서 第 三十九卷까지 100편의 가사를 실었다. 상주 동학의 경전은 1920년대 초에 교조 김주희의 주관하에 일차로 경전을 목판 판각하고 裝幀은 漢裝本으로 인쇄를 하여 배포했던 것을 1970년대 초에 복간했다. 格庵遺錄은 格庵 南師古의 비결서로, 이 책속에는 궁을가란 독립적인 글은 없고, 弓乙論, 弓弓歌, 乙乙歌, 弓乙圖歌 등이 있다. 南師古는 용호대사 정북창과 같은 시대인 1509년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역학, 풍수, 천문, 卜筮, 相法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의 예언은 적중률이 높아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晩年에는 觀象監의 天文敎授를 지내다가 1571년에 세상을 떠났다. 끝으로 한국 가사문학 중의 作者未詳의 弓乙歌는 위의 1. 2. 중의 하나일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
弓乙歌란 二五思想에서 陰陽歌가 된다. 弓은 陰이고, 乙은 陽이기 때문이다. 二五란 陰陽五行을 의미한다. 弓乙歌의 내용은 당시의 時代的 狀況을 비관하고 陰陽의 調和가 必然的으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試鍊을 克服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제시하고 있다. 또 無道하고 暴惡한 外國勢力이 우리나라를 侵犯할 것이라 하고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弓乙歌를 至誠으로 부르면 모든 災殃이 사라지고 泰平天下가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엇나가 따로 노는 마당놀이(上 ,下)’에서/ 포덕 151(2010)년 10월 24일. 에서도 상주 동학교와 같은 문제점에 대하여 구체적인 자료문헌 제시와 상세한 설명을 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후 ‘天道敎의 神觀定立에 對하여(1-4)’ /포덕 152(201)년 5월 7일. 에서도 상주동학교에 대한 설명을 한 적이 있다. 위에서 기술 발표한 내용에 약간 첨가하여 기술했다.
‘필자가 발표한 ‘東經大全의 板本比較 分析硏究 拔萃文(上, 中, 下)’/포덕 151(2010)년 8월 14일. 에서, 미 발표분의 註. 15.에서 尙州東學經典은, 직경 5.3센티 정도의 둥근 모양에 南接道主之章이라고 새겨 사용하였던 金周熙가 세운 동학계파 중에 하나인 尙州東學敎의 經典의 國譯本이다. 김주희는 鄭鑑錄에서 말하는 十勝之地의 하나라고 알려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 1904년에 敬天敎를 처음으로 세웠다. 한때 김주희의 號를 따라 靑林敎로 불리기도 하다가 1915년에는 東學敎로 개칭했고 1920년대 초에는 상주 동학교의 경전 40여권을 목판본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김주희는 1860년 10월 3일에 충남 공주군 신상면 달동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말에 국정이 혼란으로 인하여 민란과 동학혁명으로 어지러워지자 속리산에 들어가 수도수련에 열중하면서 세상에 대한 심회를 기술했고 이런 글들을 모아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목판본으로 총 40책의 歌辭集을 경북 상주에서 간행했다. 이 글들은 1970년대의 후손에 의해 재정리되어 상주동학경전으로 정착됐다. 김주희의 子는 敬天, 號는 三豊, 尊號는 靑林先生이며 부친 金允集(1823-1881)이 수운의 문하에 입도하자 김주희도 입도했었다. 김주희가 자와 호를 敬天과 靑林으로 한 것은 동학과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항일에 앞장 서 활동하다 교도들과 함께 구속되었고 이로 인한 옥고로 1944년에 敎主 金 周熙는 病死하고 副 敎主는 獄死했다.’라고 기술했다.
상주시 지방문화재 민속자료에 의하면 동학교당 유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프레임을 독자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 임의로 변경함. / 참고사항; 다움 의 통합검색에서, 상주동학교당이나 상주동학교당 유물을 검색하면 상세한 자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문화재명 : 동학교당 유물
주 소 :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730번지
지 정 :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111호(1995.3.31 지정)
상세정보 - 상주동학교당에 보존되어 있는 동학교에 관한 유물로서는, 총 177종 1,084점에 이른다. 동학은 1860년(조선 철종 11년)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서, 처음엔 서민층에 널리 유포된 단순한 신앙형태이었으나, 나중에는 사회개혁운동의 주체로 변모되어 민족운동의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되었다. 2대 교주 최시형을 거쳐 3대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내부의 대립이 심화되어 30여 개의 교파로 나뉘고 각기 독립된 교당을 설립하였다. 1922년 김낙세 부자의 노력으로 설립된 상주동학교당은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벌이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편 끝에 상주, 문경, 안동 등 경북을 중심으로, 충청도 강원도에까지 교세가 이르게 되었다. 이 교당에 소장된 유물은 동학 경전을 비롯한 전적류 131점, 동학경서나 가사 등을 나무에 새긴 판목 792점, 의복류 31점, 교기와 인장 등이 130점 남아 있다. 동학교 내에서 상주동학교당의 지위와 성격을 밝힐 수 있고, 동학 연구에도 기여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상주동학교당 유물에 대하여 한국 민족문화 대 백과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다음 글의 프레임을 독자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 임의로 변경함.
[간략정보]
한자 尙州東學敎堂遺物
분야 종교·철학/천도교
유형 유물
시대 근대
성격 종교유물|동학 관련 유물
제작시기/일시 1920년~1930년대
수량 1,084점(177종)
소장처 동학교당(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소유자 김정선(개인소장)
관리자 김정선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1호
문화재 지정일 1995년 3월 31일
집필자 김용만
상주 동학교당 유물
[정의] -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동학교당(전통건조물 10호)에 소장되어 있는 동학 관련 유물.
[내용]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1호. 지정된 유물은 총 177종 1,084점으로 전적이 100종 131점, 판목 67종 792판, 복식 6종 31점, 유물 4종 130점이며, 제작시기는 대체로 1920년∼1930년대이다.
전적은 ‘동경대전총목록(東經大全總目錄)’ㆍ‘동경대전(東經大全)’ㆍ‘궁을경(弓乙經)’ㆍ‘통운역대(通運歷代)’등 경서, ‘용담유사’ㆍ‘임하유서(林下遺書)’ㆍ‘허황가(虛荒歌)’ 등 동학가사(東學歌辭), 『림하유셔』ㆍ『챵덕가』ㆍ『챵도가』ㆍ『챵화가』ㆍ『인션슈덕가』 등 한글본ㆍ국한문 혼용본, 『경호당(敬浩堂)』ㆍ『동학교적(東學敎籍)』 등 기타 판본이 있다. 판목으로는 동학경서판목ㆍ동학가사판목, 한글본ㆍ국한문 혼용본 및 기타 판목이 있고, 복식으로는 전복(戰服)ㆍ학창의(鶴氅衣)ㆍ받침예복(禮服)ㆍ오색예복(五色禮服)ㆍ오색관(五色冠)ㆍ유건(儒巾)이 있다.
전복은 두루막 위에 입으며, 주로 미성년자가 천제시(天祭時)에 입고, 학창의는 천제시에 일반교인이 입으며, 제사시에는 제관이 입는다. 받침예복은 오색예복에 받쳐 입고 오색관을 쓴다. 오색예복은 교주ㆍ부교주ㆍ성교장(誠敎長)ㆍ경교장(敬敎長)ㆍ신도장(信徒長)이 천제시에 입는다. 복식의 특징은 옆트림이 없고 직선배래이다. 유물로는 교기(敎旗)ㆍ인장(印章)ㆍ민구(民具)ㆍ인쇄용구(印刷用具) 가 있다. 인쇄용구는 목활자본을 인쇄하는데 사용하는 목활자ㆍ목활자 보관함ㆍ소도구ㆍ받침대 등으로 인쇄에 사용되던 도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동학과 관련된 유물과 교당건물이 이처럼 잘 갖추어져 남아 있는 곳은 전국에서 그 예를 찾기 어렵다.
다움에서는 상주동학교당 소개는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 다음 글의 프레임을 독자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 임의로 변경함.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의 평지마을에 있는 동학의 교당이다. 현 소유자의 부친 김주희(1860∼1940)가 1915년에 이곳에 본거를 정하고 민족 고유의 종교인 동학의 포교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4년에 지었다고 한다. 동·서·남·북재 4동의 건물이 사방에 배치되었고 곳간 채는 왼쪽 뒤편에 있다. 중심 건물인 북채는 성화실, 사랑채인 동재는 접주실, 안 사랑채인 서재는 남녀교도가 각각 반씩 사용하였으며, 행랑채인 남재는 남교도가 사용하였다. 원래는 모든 건물이 초가였으나, 후에 슬레트로 지붕을 고쳤다. 동학의 본부 건물이라는 특수한 예로 주목된다.
공식명칭; 상주동학교당.
한자명칭; 尙州東學敎堂
주소; 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 1리 728
종목; 시도 민속 문화재 120
테마;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민족종교, 천도교
또 다움에서는 상주 동학 본부에 대하여 민족문화 대 백과사전의 기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 다음 글의 프레임을 독자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 임의로 변경함.
■ 간략정보
한자; 東學本部
분야; 종교·철학/신종교
유형; 단체
시대; 현대/현대
성격; 종교|신종교
설립일시; 1904년
설립자; 김주희(金周熙)
집필자; 탁명환
■ 정의
1904년 김주희(金周熙)가 창시한 종교. 동학계의 신종교이다.
■ 내용
김주희는 충청남도 공주 출생으로 할아버지인 남접도주(南接道主) 김시종(金時宗)의 밑에서 동학을 공부하였다. 김시종은 천도교 제2세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등의 북접이 광제창생의 이념에 지나치게 철저한 것을 보고 수운사상(水雲思想)에 어긋난다고 생각, 최시형의 북접에 대하여 스스로 남접이라 하고 경상북도 안동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었다.
김주희는 1904년 할아버지의 뜻을 받아 김낙춘(金洛春) 등과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서 교당을 세우고 경천교(敬天敎)라 하였으나, 이 교단도 1908년부터 항일운동 조직으로 탈바꿈하고자 하여 김주희는 이에 결별을 선언하고 속리산으로 은둔해버렸다. 경천교는 1912년 까지 존속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1915년 에는 경상북도 상주군 은척면 우기리 자기 집에 동학본부라는 간판을 걸고 다시 포교를 시작하였다.
1922년 5월 에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얻어 포교에 주력하여 교당을 신축하고 충청북도, 경상북도, 강원도 지역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1929년 통계에 따르면 신자가 1,50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게다가 1933년까지 한문경전 10여 종, 한글경전 40책 115종을 목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본부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참여를 외면하였음에도 일제의 탄압을 수차례 받은 결과 1943년 교주 이하 많은 신자들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김주희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 교세는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었다. 김주희의 아들 김덕룡(金德龍)이 교단을 대표하고 있다가 1986년 에 사망하고 현재는 김덕룡의 아들 김정선(金正善)이 책임을 맡고 있다. 현재 신도수는 안동과 상주 지역에 약 50여 가구가 있다.
1979년 에는 동학본부에서 발행한 서책 40책을 한데 묶어 ≪동학가사≫ Ⅰ, Ⅱ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바가 있고, 또 본부 건물 1곽(전통초가 5동과 상하마석 깃대꽂이)이 국가 전통건조물 제 10호로 지정되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동학본부의 교의와 신조는 본래 동학에서 출발하였으므로 천도교와 큰 차이가 없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유·불·선 삼도합일(三道合一)을 주장한 것을 그대로 취하였으며, 덕에 의하여 무한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수도법이 강조된다. 경전은 ≪동경대전 東經大全≫을 비롯한 동학경전을 그대로 쓴다.
[참고문헌]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한국종교학회, 1985)
『朝鮮の類似宗敎』(村山智順, 朝鮮總督府, 1934)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 외,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김문기(金文基)는 국역 상주동학경전을 2008년에 간행하면서 일러두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상주동학교당 소장 경전판본을 대본으로 역주(譯註)하였는데, 동경대전·궁을경·통운역대·도원경·도화경·성경(교정경, 도정경, 도수경)·도성경은 목판본을 대상으로 하였고, 축식은 목활자본을 대상으로 하였다. 변역문은 원의에 충실을 기하여 위하여 가급적 직역(直譯)을 원칙으로 하되 부득이한 경우는 원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의역(意譯)을 하였다.
번역문 가운데 인명, 지명, 관직명 등의 고유명사 또는 문맥 가운데 뜻을 분명히 할 필요성이 있는 어휘에 한해서는 괄호 안에 한자를 함께 표기하였다. 번역문 가운데 시에 한하여 원문을 번역문 오른쪽에 수록하여 번역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라고 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김상일은 동학학회 월례 발표 자료로 ‘東學歌辭의 主題類型 考’를 2003년 4월 월례 발표회에서 발표하였다. 발표 내용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序論
2. 前‧後期 東學歌辭의 內容과 主題
1) 『龍潭遺詞』의 內容과 主題
2) 『尙州 東學歌辭』의 內容과 主題
3. 東學歌辭의 主題類型
4. 結論
※ 參考文獻으로 구성 되었다. 이 발표 논문은 추가 설명을 상세하게 하여 3년 후인, 2006년 12월에 발행된, 동학학보 제 12호(제10권 2호)에 ‘상주지역 동학교단의 활동과 동학가사’/ PP. 49-212,란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또 김상일은, 2003년 6월에 간행된 동학학보 제5호에 게재된 ‘전-후기 동학가사의 동학사상과 그 변모’ / PP. 177-223.에서 천도교와 상주 동학교의 경전의 한글 가사를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위키 백과사전의 조선의 종교 설명 중에 동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철종 때에는 이 천주교에 대립하여 최제우(崔濟遇)가 종래의 천신사상(天神思想)에다가 유(儒)·불(佛)·선(仙) 등의 삼교(三敎)와 풍수사상을 응용하여 동학(東學)을 개창(開倉)한 뒤에 이 역시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점차 민간에 전파되어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고종 때에는 동학혁명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뒤에 동학은 천도교(天道敎), 시천교(侍天敎)에서 상제교(上帝敎), 천진교(天眞敎)가 갈렸고, 청림교(靑林敎), 제우교(濟遇敎) 등으로 갈렸으며 이 밖에도 동학 계통의 유사 종교가 속출하여 농촌 사회에 널리 유포되었다.
오지영(吳知泳)은 동학계 교파에 대해서, 1939년에 출간된 ‘동학사(東學史 - 永昌書館. 서울. 1939.)’ 附 동학(東學) 각파(各派) 일별(一瞥) / PP. 237-242.에서는 다음과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각 교파에 대한 설명은 전부 생략함. / 一瞥; 한 번 살펴보다. 한 번 흘낏 봄. 간략하게 살펴 봄. 간락하게 설명해 봄의 뜻.
1. 天道敎 革新派. 1. 天道敎 復舊派. 1. 侍天敎派. 1. 上帝敎派. 1, 天道明理敎派. 1. 靑林敎派. 1. 白白敎派. 1. 敬天敎派. 1. 水雲敎派. 1. 大宗敎派. 1. 元宗敎派. 1. 天오(두려워할 오; 심방(忄)변에 요(夭/예쁠 요 또는 오)를 더 한 글자)敎派. 1. 濟遇敎派. 1. 濟世敎派. 1. 人天敎派. 1. 南辰敎派. 1. 東學敎派. 1. 大同敎派. 1. 天冒派 . 1. 平和敎派. 1. 无窮道派. 1. 无窮大道派. 1. 三聖无極敎派. 1. 天法敎派. 1. 大道敎派. 1. 辛由甲派. 1. 權一淸派. 1. 九月山派. 1. 馬耳山派. 1. 李仁錫派. 로 분류하여 설명하면서 결말에 ‘東學의 派黨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많이 있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외에 근래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동학계열의 甑山敎는. 브리태니커 사전에 의하면, 1902년 강일순(姜一淳:1871~1909)이 개창한 종교로, 이 종교는 교조의 사후에 많은 분파가 생겨났는데, 일반적으로는 이 분파된 종단들을 통칭하여 창시자의 호를 따서 증산교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 흠치교(吽哆敎)라고도 했다. 증산교는 한말 개항기에 나타난 동학·대종교와 함께 이 땅에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한다는 후천개벽을 주장한 대표적인 자생적 종교의 하나이다. 또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문화, 특히 무속(巫俗)과 선도(仙道)를 계승·발전시켜 한국 민중의 개인적인 신앙의식을 민간 중심의 공동체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증산교본부 [甑山敎本部]는 증산교 계통의 신종교단체로, 보천교(普天敎) 교도였던 이상호(李祥昊)가 세웠다. 그는 보천교의 핵심간부인 60방주(方主)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車京石)과의 불화로 인해 교단을 탈퇴했다. 그는 증산교의 전통을 확립하고자 증산교의 경전에 해당하는 〈증산천사공사기 甑山天師公事記〉·〈대순전경 大巡典經〉을 간행했으며, 그후로 나머지 다른 증산교단과는 달리 많은 문헌을 발간하여 증산교의 교리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교리와 의식상의 특징은 단군(檀君)·수운(水雲:崔濟愚)·증산(甑山)을 동시에 모시는 삼단신앙체계(三段信仰體系)이다.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인내천(人乃天)·인존사상(人尊思想)을 각각 재세이화(在世理化)·무극대도(無極大道)·천지공사(天地公事)와 연계시키고 있다. 교단조직은 선거제에 기초한 민주적인 종령제(宗領制)를 체택하고 있으며 교인들은 주로 혈연과 지연에 의해 묶여 있다. 그리고 이들은 증산교의 다른 교단들과 끊임없이 제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다른 사회단체나 지방행정기관과도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라고 브리태니커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증산교본부는 1973년에 간행된 洪 又의 “東學入門” 1980년에 간행된 “東學文明/미 책의 末尾에 ‘法文 玄武經’의 影印本이 수록 게재되어 있다.”과 1983년에 출간된 安耕田의 “이것이 開闢이다 上”과 2000년에 간행된 洪凡草의 증산교종단 가사집 “南朝鮮 뱃노래” 그리고 1993년에 초판이 간행되어 수정 보완된 “甑山道 道典”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고 있다 .도전 첫 페이지 전면에 한글로 된 심고문이 게재되어 있다. 洪凡草의 본명은 性烈이며, 증산종단연합회 회장을 지낸 인물로, 1982년에 “증산교 개설”을 출간하고. 1988년에는 “ 범증산교사”를 간행하였고 1988년 동년에 월간「천지공사」를 발행하였다.
洪凡草의 증산교종단 가사집 “南朝鮮 뱃노래” 는 김지하 시인을 감동시켜 1985년에 간행된 金芝河의 이야기 모음인 “남녘땅뱃노래”의 제 3부 남녘땅뱃노래/姜甑山의 남 사상 음미. PP.251-270. 란 副題의 글에서 “南朝鮮 뱃노래”를 우리나라 전통사상의 하나라 할 수 있는 江南思想의 한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註 김지하(金芝河-1941. 2. 4 - 생존. 전남 목포 출생) - 1970년대 반체제문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본명은 영일(英一), '지하'는 필명이다.
원주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다닐 때 4·19혁명, 6·3사태 등을 겪으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1970년대의 문학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정치활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1964년에는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1970년 담시(譚詩) 〈오적 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 색인 : 오적필화사건).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다음해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석방된 다음 달에 다시 체포되었다. 전 세계의 주목 속에 오랜 재판과정을 거쳐, 앞선 무기징역에 다시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6년간의 옥살이 끝에 정권이 바뀌자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 뒤로는 정치적 발언을 삼가면서, 그리스도교사상·미륵사상·화엄사상·선불교·기(氣)철학 등의 여러 사상들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독특한 생명사상을 펼치거나, 그에 따른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고 있다. 시에서도 정치적 경향의 시보다는 주로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담시와 서정시를 쓰고 있다./ 브리태니커 사전 참조.
또 동학계열에 하나로 알려진 大巡眞理會는 1974년에 “典經”이란 경전을 간행하여 크게 발전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의하면, ‘증산교(甑山敎)계통의 신종교로, 1969년 증산교의 일파인 태극도(太極道)에서 분립했다. 교리는 음양합덕(陰陽合德)·신인조화(神人調和)·해원상생(解寃相生)·도통진경(道通眞境)의 대순진리를 종지(宗旨)로 한다. 성(誠)·경(敬)·신(信)의 삼법언(三法言)을 수도의 요체로 삼고, 안심(安心)과 안신(安身)의 이율령(二律領)으로 훈전(訓典)을 삼아 윤리도덕을 숭상하고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하여 인간개조와 정신개벽으로 포덕천하(布德天下)·구제창생(救濟蒼生)·보국안민(報國安民)·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는 것이다. 주요행사는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증산(姜甑山) 상제(上帝)와 태극도의 창시자인 조정산(趙鼎山) 도주(道主)의 강세일(降世日)과 화천일(化天日), 그리고 영대봉안일(靈臺奉安日)이 있다. 교단조직은 최고직책인 도전(都典) 산하에 협의기구인 중앙종의회가 있고, 그 아래에 육영사업부·수강원(受講院)·감사원·종무원·정원(正院)·포정원(布政院)이 있다. 특히 종무원 산하에는 교리연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대순종교문화연구소가 있다. 종단 계통의 교육기관으로 대진고등학교와 대진여자고등학교가 있고, 1992년 대진대학을 설립했다.
경전은 다른 증산 교단처럼 대순전경(大巡典經)을 사용하나 그것의 축약판인 전경(典經)을 많이 사용하고, 정기간행물로는 계간인 대순회보(大巡會報)와 생애와 사상이 있다. 전국에 소재한 교당은 약 140개이며, 교직자는 약 1만 3,000명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는 다른 종단이지만 동학계 방계(傍系) 종단으로 알려진 청림교(靑林敎)에 대해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동학 계통의 신종교로, 창시자는 동학교도였던 남정(南正)이다. 교단 명칭은 그의 호(號)인 '청림'에서 유래했다.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끝난 후 지하로 들어가 포교활동에 종사했다. 그러나 1904년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 1920년 김상설· 이옥정 등이 서울을 거점으로 청림교 간판을 내세우면서 청림교를 합법화시켰다. 그들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의 지린 성[吉林省], 북간도지방까지 교세를 확장하여, 지부(支部) 42개, 전교실(傳敎室) 50개를 확보했으며, 당시 교도의 수는 30만 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2대 교주인 태두섭 부자(父子)와 간부들이 불온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일제 총독부에 의해 검거되어 교세는 급격히 하락했다. 그래서 1933년에는 교인 수가 600명 정도로 줄었고, 그후 교단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들의 교리는 최제우의 가르침을 계승한 천도교(天道敎)나 시천교(侍天敎)와 거의 차이점이 없다. 한편 최제우 당시 이백초(李白初)라는 사람이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어 청림도사(靑林道士)라고 칭하면서 청림교가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라고 했고, /집필자; 탁명환. 민족문화 대 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자; 靑林敎
분야; 종교·철학/신종교
유형; 단체
시대; 근대
성격; 종교
해체일시 1933년
설립자; 남정
[정의] - 동학혁명 후 남정(南正)이 창시한 종교.
[내용] - 남정은 동학혁명 이후 포교에 종사하다가 1904년에 후계자 없이 죽었으나 1920년 김상설(金相卨)과 이옥정(李玉汀) 등이 서울에서 소멸되어가는 청림교의 간판을 다시 달고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청림이라는 명칭은 남정의 호가 청림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교세가 늘어 한때는 만주의 길림과 북간도 방면까지 뻗어나갔고, 42개의 지부와 50개소의 포교소에 신도가 30여만 명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2세 교주 태두섭(太斗燮)과 많은 간부들이 항일투쟁의 죄명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된 뒤 교세가 약화되다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신앙의 대상이나 사상은 천도교와 동일하나, 최수운(崔水雲)은 5만년 후천개벽의 창세주이며, 백성을 제도하고 신성한 대덕을 이루어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펴자는 것이 이 교의 요지였다. 특히, 이 교는 자기들이 최수운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미래의 중생들을 선도하기 위하여 미신을 타파하고 바르게 깨달아, 새로운 지식을 발휘하여 도의 원리를 크게 깨달아 지상극락을 이루어가자고 가르쳤다. 신도들에게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주로 외우게 하는 수련을 시켰다. 초하루·보름의 가정치성과 연 세 차례의 전체치성이 있었다.
주(註); 위에서서 말하고 있는 청림교는 金周熙가 敬天敎를 설립하여 靑林敎로 발전시킨 청림교와는 전혀 다른 교단이다.-필자의 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