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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0일(화)
* 시작 기도
주님...
다윗의 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윗 왕의 식탁에서 함께 하는 자였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다윗이 왕궁을 떠날 때 므비보셋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 왕을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자기 자신을 돌보거나 맵시내지 않고 왕의 안위를 걱정하며 기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런 낮아짐의 삶이 바로 나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왕의 권력에 빌붙어 자기의 유익으로 삼는 악인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피조물의 자리를 잘 지키는 주님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 주옵소서.
날씨가 무덥다 못해 살갗을 태울 정도로 뜨겁습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이처럼 작열하는 태양으로 인하여 모든 만물이 생명을 얻는 것에 마음을 두어 주님의 일하심을 찬양하는 자로 서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2:1-13
제목 : 복음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방언이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비리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 나의 묵상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람들 120명 정도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고 있었다.
어느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50일이 지나 오순절이 되었다.
이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임하여 그 방을 가득 채웠다.
또한 혀처럼 갈라지는 불이 거기에 모인 사람들 각자의 머리 위에 하나씩 임하였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그들은 성령 충만하여 성령이 주시는 선물을 받았는데 그것은 서로 다른 언어 곧 외국어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서 명절을 지키고자 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와서 머물고 있었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제자들이 하는 소리가 자기들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를 듣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것이 너무나 신기하게 보여서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들이 태어난 나라의 언어로 들을 수가 있지?. 하면서 서로를 쳐다보며 놀라워했다.
이 사람들은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구레네에서 가까운 리비아 여러 지방 그리고 로마, 날 때부터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크레타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자기들이 난 곳 언어로 듣는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이라고 하였다.
이 일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면서 놀라워할 뿐이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제자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취했다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신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의 언어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원래 말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관계를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드신 기적적인 역사를 이루셨다.
사람의 언어는 원래 하나였다.
(창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그런데 사람들이 패역하여서 홍수 심판을 당한 후에는 노아의 가족만 제외하고 다 멸망하고 말았다.
노아의 가족이 다시 번성하여 땅에 편만하여졌다.
이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서 거기에 높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이제는 더 이상 흩어지지 말자고 결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계획을 아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탑을 쌓는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지고 탑 공사도 중단되었다.
(창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처럼 하나였던 언어가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여러 언어로 나뉘어졌는데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나뉘어진 언어가 하나로 통합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물론 이는 완전한 언어의 통합이 아니다.
완전한 언어 통합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곧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하여금 제자들이 하는 각국 언어로 들리게 하신 역사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는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
그 일은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도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방언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오순절에 있었던 외국어 방언을 하거나 아니면 히브리어로 말을 하는데 자기들이 난 곳 방언으로 들리는 일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라기보다 이 세상 사람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전혀 다른 언어이다.
따라서 이런 방언을 하려면 또한 통역하는 은사도 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고 미쳤다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나는 지금은 방언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답답하거나 전혀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짜 생명의 언어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방언을 잘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성령의 역사이긴 하지만 그것 역시 만물 안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생명 곧 영생에 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행하셨다.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생이다.
이 영생이 무엇이고 도대체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과연 그것이 문제이다.
영생은 두 차원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미래적인 영생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현재적 영생이다.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는 영생의 미래성과 현재성이라 한다.
영생의 미래성이란 요한복음 6:39-40절과 같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죽어서 가는 천국’이다.
물론 죽어서 가는 천국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영생의 미래성은 영생의 현재성에 기초한다.
왜냐하면 현재로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이는 미래적 영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생은 그저 관념적이거나 막연한 어떤 지식이 결코 아니다.
영생의 현재성은 아들의 생명을 얻어 지금 현재로 그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렇다면 이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영생은 곧 생명이며 이 생명은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의 생명은 위로부터 태어난 생명이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영생이란 이처럼 아들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것을 일컬어 거듭남이라 한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요 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처럼 거듭남 곧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거듭남은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섬기고 봉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통하여 얻는 거듭남이 곧 아들의 생명인 영생이며 이것이 바로 영생의 현재성이다.
(요일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에게 물어보면 다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의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무덤에 장사됨,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이요 그 믿음은 나 또한 예수님의 이런 구속 사건에 동참하여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믿는 자가 영생을 얻으며, 또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이는 믿는 것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요 6:56-58)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처럼 주님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이기 때문에 그것을 먹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주님의 살과 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다.
거듭남 곧 위로부터 태어남은 벧전 1:23절에서 오직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였고 요 3: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은 자는 이제 날마다 그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짜 영생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아는 것이란, 말씀으로 늘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을 말한다.
(요일 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나는 영생의 의미도 그 영생을 가져다주는 복음도 몰랐던 자이다.
그저 예수 믿는다고 교회에 다니다보면 거듭나는 줄 알았고 거듭남은 내게 막연한 지식과 관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나의 신앙은 항상 요동쳤으며 늘 죄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교회와 세상을 넘나들었다.
이런 내게 영생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성경 지식은 있었으나 그것이 내게 생명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 했던가?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며 성경을 읽었고 말씀에 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그래서 성경퀴즈를 하면 늘 상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그 생명인 말씀을 양식으로 먹지는 않았다.
육신을 위하여서는 하루 세 끼씩 꼬박꼬박 먹으면서도 영을 위한 생명의 양식은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나는 그 삶 자체가 무덤이었다.
그런 나에게 복음이 들려졌다.
이 복음이 나를 아들 안에 있는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였다.
십자가 죽음, 무덤에 장사됨, 새 생명으로 부활, 그리고 현현.
이 네 가지 복음이 내게 주어졌고 나는 이제 이 복음을 통하여 날마다 주님과 교제의 자리로 들어간다.
오늘도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이 자리가 날마다 들어가는 무덤의 자리이다.
말씀묵상의 자리가 나의 실존이 묻히는 무덤이다.
거기서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이 시간 나는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비록 지금은 방언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답답함이 없다.
나는 그보다 더 좋은 영생으로 나아가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언어가 있다 할지라도 복음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그 언어만큼 아름다울 수 있을까?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게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큽니다.
이 세상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방언이 있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방언도 많이 있지만, 그런 방언들을 모두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하지만, 영생을 주는 복음인 진짜 천국 방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이 곧 영생을 주는 방언이요 영생의 언어입니다.
이 종을 주의 영으로 강하게 붙드셔서 영생을 얻게 하는 참 복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만 의지하오니 나를 장악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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