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길·숲·마을'
'곤장 100대'로 지킨 금강송숲 너머… 굽이굽이 '굴구지마을'
가을의 금강소나무를 만나기 위해 경북 울진으로 달렸다. 설악산에 첫서리가 내린 날이었다. 봄의 숲이 싱그럽다면, 가을의 숲은 치유와 충만의 공간. 일반 소나무보다 3배는 더 촘촘한 나이테 덕에 튼튼하기로 이름난 이 '금강역사(金剛力士)'들이 푸르게 번진 가을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200년 넘게 산 금강송만 8만 그루가 넘는 한국 최대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다. 그 울창한 보물[蔚珍]을 만끽할 수 있는 울진의 길, 숲, 마을을 각각 추천한다. 금강송의 정기를 먹고 자란 자연산 송이버섯들이 한바탕 잔치를 벌일 울진송이축제(10월 1~3일)는 덤이다.- ▲ 가을의 숲은 치유와 충만의 공간. 금강역사처럼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울진의 금강소나무에 기대어 도시의 스트레스를 잊는다. 신선이 따로 있나, 산(山)에 들어가면 곧 선(仙)인 것을. /영상미디어 이경호 기자 ho@chosun.com
조선시대에는 보부상길로 더 익숙했던 금강소나무숲길을 걸었다. 울진 북면 두천리에서 서면 소광2리까지 13.5㎞다. 산림청에서 처음으로 국비를 투입해 닦은 길이자 국내 숲길 중 유일하게 예약탐방제로 운영하는 길이다. 지난 7월 20일 개장 이후 하루 탐방인원을 80명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2400명가량이 다녀갔다고 울진국유림관리소 이상을(56) 계장이 전한다. 바닷가인 울진 흥보장에서 산골인 봉화 춘양장까지는 대략 60㎞, 열두 고개 3박4일 여정이다. 이번 여름에 개장한 13.5㎞ 금강소나무숲길은 이 중 바릿재와 샛재, 저진치, 너불한재까지 고개 네 개를 넘는다.
샛재[鳥嶺] 성황사(城隍祠)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등짐장수와 봇짐장수들이 제발 산도적을 만나지 말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던 곳. 고개 수만큼이나 여러 번 고쳐 지었다는 남루한 서낭당에는 "미역 소금 어물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라고 노래했던 곡절 많은 짐꾼 장수들의 회한이 어지럽게 묻어 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길인만큼, 길은 지극히 조용하고 정갈하다. 일부러 꺼두지 않아도 휴대폰은 울리지 않는 첩첩산중. 급하게 꺾은 갈지자 오솔길과 띄엄띄엄 징검다리가 도시에서 쓰지 않던 근육을 요구한다. 길 양쪽은 금강소나무뿐 아니라 굴참나무, 물푸레나무, 낙엽송 등 온갖 나무들의 천국이다.
늙어서 아름다운 건 나무밖에 없다던가. 이들이 뿜어내는 맑은 기운이 도시 육체에 찌든 니코틴과 알코올을 묽게 풀어낸다. 지난 몇년을 온전히 이 길 닦으며 보냈다는 숲길 터줏대감 이 계장은 "걷기 좋은 길보다 걷고 싶은 길로 사랑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앞서 걷는 그의 배낭에서 경쾌한 방울 소리가 났다. 산양 뱀 오소리 너구리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이 방울 소리를 듣고 미리 피하라는 뜻이란다. 조선 중기 남명 조식 선생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 두 개를 항상 달고 다녔다고 했다. 3년 앞으로 정년이 다가왔다는 그에게서 숲과 산에 대한 짝사랑을 읽는다.
- ▲ 인적 드문 가을 왕피천은 폭포수 같은 계곡물이 주인이다. 천둥 같은 물소리에 사위는 오히려 할 말을 잊었다. 계곡의 가을. /영상미디어 이경호 기자 ho@chosun.com
트레킹을 마친 뒤 임도(林道)로 10여 분을 달린다. 금강송 군락지로 잘 알려진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이다. 사실 앞서 걸었던 금강소나무숲길은 이름과 달리 다양한 나무를 함께 만났던 길. 금강송의, 금강송에 의한, 금강송을 위한 숲을 보려면 여기 와야 한다. 수령 120년 된 소나무와 80년 된 참나무 줄기가 몸을 포개고 있는 공생목, 수령 350년·나무높이 35m·가슴높이 지름 88㎝인 잘생긴 미인송, 수령 520년을 넘긴 우람한 최고참 금강소나무…. 짧게는 10년, 길게는 500년 넘은 금강소나무들이 여의도 두 배 넓이 야산에 빼곡하다. 조선 숙종 때부터 출입을 금했고, 성종 때는 무단 벌목 한 그루에 곤장 100대를 때렸다는 금기의 숲. 덕분에 지금 이곳은 금강소나무로 꾸민 관능의 궁전이 됐다.
- ▲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은 관능의 궁전. 잘생기고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들이 여의도 두 배 면적 야산에 빼곡 하다.
지금 이 숲을 찾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접근성과 보존 등의 이유로 겨울 개방을 하지 않는 소광리 숲의 개장 기간은 7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제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탐방로 정상의 미인송 위로 가을 해가 저문다. 붉은 적송이 더 붉게 타오른다. 마을의 이름은 소광(召光)리. 빛을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왕피천 굴구지산촌마을
- ▲ 두천리 금강소나무숲길에 있는 성황사
하지만 평일의 굴구지는 번잡하지 않았다. 물길 트레킹은 원래 여러 차례 왕피천 계곡물을 건너가야 하는 고난도 코스이지만, 산허리 생태탐방로를 따라가는 초보자 코스도 있다. 용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양의 기암괴석이 있는 용소(龍沼)까지는 대략 1시간 거리. 생태탐방로를 따라가다 체험을 위해 계곡물을 한 번 가로지른다. 안내를 도왔던 마을 청년회의 '막내' 김동길(40)씨가 주저없이 바지를 벗는다. 가장 얕은 곳을 골랐지만, 벌써 허리까지. 뭍으로 나온 뒤 김씨는 또 한 번 주저없이 팬티를 벗고 비틀어 짠 뒤 햇볕에 넌다. "우리 어렸을 때는 늘 이렇게 놀았더래요"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그와는 오늘 처음 본 사이. 짐짓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같은 이름을 지닌 연세대 명예교수님을 화제에 올렸더니, "결혼 안한 것까지 나랑 똑같더래요"라며 또 한 번 너스레다. "며느리 들일 시킬 때 좋다"는 사나운 가을 햇살이 순식간에 옷가지를 말린다.
굴구지마을 뒷산에는 '치유의 숲'이라고 명명한 금강소나무숲이 있다. 소광리 숲을 제외하면 울진에서 으뜸과 버금을 다툴만한 금강송 군락이다. 마을에서는 이장 남중학(46)씨가 14개월 된 늦둥이, 대한이 자랑에 여념이 없다. 큰딸이 스물두 살이라니까 무려 스무 살 터울. 2008년 가을에 직접 캔 송이를 먹고 낳은 아들이란다. 굴구지 마을은 지금 자연산 송이 마케팅 중. 그러거나 말거나 대한이는 '대~한민국' 구호에 맞춰 박수를 치며 재롱 중이다. 바야흐로 산촌의 가을이 깊어간다.
가는길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에서 7번국도로 갈아탄 뒤 동해를 왼쪽에 끼고 남하하는 코스가 풍광이 좋다. 울진까지는 대략 4시간 30분 거리. 강릉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두천리 금강소나무숲길 예약탐방제다. 사단법인 울진숲길(ulgintrail.or.kr, 070 -7718-2999)에서 신청을 받는다. 선착순 하루 80명. 무료. 인기가 높아 주말에는 이미 10월분이 예약 완료. 평일만 가능하다. 숲 해설사 5명이 구간별로 배치돼 상세하게 안내해준다. 출발지점은 울진군 북면 두천1리 232번지.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 예약 없이 입장 가능. 무료다. 울진군청에서 36번 임도를 따라 대략 40분 거리. 내비게이션으로는 울진군 서면 소광리 152번지를 찍고 도착해 북쪽 외길로 5분 정도 더 가면 된다. 그만큼 산골 오지다. 울진국유림관리소 (054)783-4008
▲왕피천 굴구지산촌마을 마을이 공동 운영하는 산촌체험펜션(054-782-3737)이 인기. 지난해 문을 연 통나무 펜션으로 취사가 가능하다. 방 크기에 따라 10만~20만원(성수기·주말), 8만~15만원(비수기와 평일). 직접 캔 자연산 송이도 판매한다. 울진군 산림조합 경매 가격에 준한다. 남중학 이장 (010)4134-0565, www.gulgugi.co.kr
맛집 송이가 나오는 기간에 울진의 식당은 대부분 산림조합 경매가격만 받고 송이 요리를 판매한다. 남양숯불갈비(054-783-2357)의 한우 등심가격은 1인분 1만9000원. 여기에 전날 3등급 송이 경매가격이 1㎏에 10만원이었다면, 원하는 분량만큼 가격을 추가로 받고 판매하는 식이다. 금강소나무숲길에서 가까운 장모씨암탉(054-783-5820)에서는 4000원의 저렴한 가격에 훌륭한 칼국수를 낸다. 총각김치와 배추김치도 아주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