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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법사 영축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절로절로
부산 금정산의 미륵암입니다.
멀리서 보면 설악산의 울산바위와도 비슷한 형상이죠.
아슬아슬한 절벽난간에 세워진 암자들.
그 암자에 올라가 앞을 내려다보면 전망이 너무나 아름답고 좋습니다.
미륵암은 동래산성 북문에서 좌측으로 약 1킬로 내에 있으며 멀리서는 참 멋있다고는 하지만 길을 잘 몰라서 막상 가기가 힘든 곳입니다.
미륵사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 1-1번지
금정산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인 금정산성 북문으로부터 15분은 더 산행을 해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미륵사는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이다.
금정산성 북문은 범어사에서 보아 서쪽으로 1.6km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의 0.9km 지점에 있다. 최고봉인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 오르려는 잘록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사는 산행이 아니고서는 오를 수 없는 정통 산지 가람형이다.
미륵사 입구
미륵사는 산문이 없는 대신 노적가리 바위 두개가 산문! 한번쯤 나는 미륵사에 다녀갔다는 기억이 있었지만, 나는 정확하게 미륵사를 관찰하지 못하고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해서 처음 온 절처럼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는 절이다.
금정산의 미륵사는 통일신라시대 678년(문무왕 18)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 절은 금정산 미륵봉 왕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신묘한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미륵암은 산문이 없고, 노적가리 바위 두개가 좌우에 위치해서 산문을 대신 한다. 그래서 이곳의 절에서는 양식 걱정이 절대 없다는 말이 있다.
금정산 미륵암
금정산 미륵암은 금정산 고당봉으로 오르는 높이가 약 50m 정도 되는 거대한 암봉 아래 위치한다. 통일신라시대(10세기말)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가 세운 절이다. 미륵봉 암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자리한 미륵사는 산문이 없는 대사 노덕가리 바위가 좌우에 위치하여 양식걱정은 없다는 말이 전해온다. 미륵사는 당우들의 명칭에서 다른 사찰과 다른 점이 드러난다. 미륵전, 미륵암, 미륵사가 따로따로 서 있는 것으로 미륵암에서 미륵사로 승격되면서 이런 당우의 명칭이 함께 존재하는 모양이다. 원효는 미륵암에 주석하면서 '미륵 삼부경' 중의 '上生經 宗要'를 썼다. 또한 대사는 이곳에서 호리병 5개를 구하여 왜구 5만 병선을 물리치게 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왜적 첩자를 유인하기 위해 대사가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구멍이 지금도 독성각 옆에 그대로 남아있다. 금정산을 불국정토로 일으킨 의상·원효 두 대사의 이야기는 거의 비슷한 내용이 사람들의 입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유명한 가르침을 남겼다. 그러한 대사의 자취가 서린 미륵사는 미륵불과 독성불을 모신 첫손 꼽히는 기도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미륵사에는 한가운데 위치한 엽화전 뒤편의 거대한 바위가 스님이 좌선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선바위'로 불리고 있다. 이 바위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모자이크를 한 듯이 어울려 있는데, 해가 지고 난 뒤 바위와 바위 사이의 금(틈새)이 보이지 않게 될 때 전체로 보면 그 형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좌선바위 뒤편에는 미륵불과 닮은 '미륵불을 향해 좌선을 하고 있는 형상의 절묘한 터에 원효는 기도도량을 세운 것이다. 미륵암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한다. 또한 독성각 처마 한 모서리 뒤의 자연 암석에는 미륵바위의 장삼자락을 양각한 흔적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장삼 왼쪽 자락의 부족한 부분을 조각했던 것이다. 이 미륵바위를 훼손한 석공은 그날 당장 엄청난 재앙을 입었다고 한다.
독성각으로 오르는 좁다란 돌계단 길의 중간 부분에 석간수가 솟아나는 사각형의 샘이 있다. 이 샘에는 '쌀 바위 전설'이 예부터 전해온다. 매일 아침 작은 바위구멍에서 한 톨 한 톨 쌀이 떨어져 스님이 이 쌀로 끼니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사미승이 한꺼번에 많은 쌀이 나오라고 구멍을 작대기로 쑤신 뒤로 쌀 대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륵사의 영험한 약수를 마시고 금정산의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면 저절로 원효대사의 만물유심조(萬物有心造)처럼, "마음이 있으면 갖가지의 일이 생기고, 마음이 없으면 갖가지의 일도 저절로 없나니, 모든 일이 마음 갖기에 달려 있느니라."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있거나 없을 뿐이다. 마음을 비우면 천하를 준다 해도 티끌 하나만 못한 법이다
“義湘이 있는 곳에 元曉가 있고 元曉가 있는 곳에 義湘이 있다"
한국불교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로 숭앙받는 의상과 원효는 구도의 동반자였다. 그들은 郞智 普德화상에게 함께 배웠고 당나라 유학도 두 차례나 길을 함께 떠났다. 첫 번째는 둘 모두 중도에서 돌아왔고 두 번째는 의상만이 당나라에 건너갔다. 얽매임이 없는 元曉와 계율에 철저한 義湘은 결국 가는 길은 달랐지만 그 방향은 같았다. 그들이 함께 이룩한 삼국통일의 호국불교 정신은 고려의 의천과 보조, 조선의 서산과 사명으로 이어졌다. "의상이 있는 곳에 원효가 있다"는 말은 金井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義湘臺 서쪽 1백m 남짓한 거리에는 원효대사가 좌선을 한 곳으로 신성시되는 원효대(元曉臺)가 있다. `의상망해(義湘望海)'라는 이름처럼 이 바위는 `원효석대(元曉石臺)'라 불린다. 의상과 원효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화두를 주고받았거나 지척지간의 두 명당바위에서 좌선을 하면서 국태민안의 해법을 찾았을 것이다. 원효석대는 원효암 바로 뒤편 산봉우리 위에 있다. 주변 일대는 부드러운 육산으로 흙과 나무뿐인데 유독 이 석대만 암봉으로 치솟아 있다. 그 모습이 매우기묘하고 아름답다. 이곳은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고 오르기도 힘 든다. 원효석대에는 불상도 모셔져 있는데 신성한 곳이라 하여 함부로 출입을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의상망해(의상대)가 금정산 8경의 하나로 꼽히는 것처럼 원효석대는 범어사 3기(三奇)의 하나이다. 범어사 3기는 이밖에 `자웅석계(雌雄石鷄)'와 `암상금정(岩上金井)'을 꼽고 있다. 원효암은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가 미륵암과 함께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는 범어사 조실 知有스님이 장좌 불와의 수행을 하면서 주석하고 있다. 암자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동.서 3층 석탑이 있는데 부산에선 범어사 경내의 3층 석탑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다. 원효와 의상이 금정산을 찾았던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은 두 대사가 이미 득도하여 부처의 뜻을 널리 펴고 있을 때였다. 의상은 670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洛山寺와 浮石寺를 세운 뒤 금정산을 찾아 梵魚寺를 창건했다. 같은 해에 원효대사가 원효암과 미륵암을 금정산에 세웠다는 것도 바늘과 실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할 일이다. 금정산의 원효 이야기도 의상과 거의 일치한다, 의상이 범어사를 창건할 때 왜구 10만 병선을 불력으로 물리쳤다는 설화와 비슷한 원효의 전설이 미륵암(현재는 미륵사)에 전해온다. 원효 역시 왜구 5만 병선이 몰려오자 장군기를 꽂아 왜구 첩자를 유인한 뒤 호리병을 구해 도술을 통해 바다 위의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는 것이다. 범어사 미륵암의 창건 연대가 같은 만큼 두 대사가 같은 시기에 금정산을 찾아 각기 불력과 도력으로 왜적 대군을 격멸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의상망해'와 `원효석대'는 후세 사람들이 두 대사의 위업을 기려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사실 여부는 물론 확인할 길이 없다. 범어사나 원효암의 창건 주인공 역시 고증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설혹 두 대사의 제자들에 의해 금정산의 불사가 이룩되었다고 하더라도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고자 했다는 그 뜻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義湘臺는 영조 16년(1740년)에 펴낸 `東萊府誌' 고적조에 금정산정의 일출을 보는 곳으로 기록돼 있다. 의상대나 원효대는 동해가 시원하게 조망돼 예부터 일출의 장관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실제 이곳에는 역대 동래부사들이 즐겨 올랐고 李安訥, 朴乃貞부사의 한시(漢詩)가 전해오고 그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의상대의 음각 글씨는 이곳의 경치가 천하장관이라 휘호를 남기고 싶다고 노래한 吳喜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떤 사물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보다 전설이나 일화를 수용하여 마음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의상망해와 원효석대도 두 대사의 발자취를 생각하면서 마음으로 보아야 할 곳이다.
최화수선생님이 국제신문에 재직 시 1994년 12월 8일자 기재한 기사 글입니다.
벌써 20여년이 가까운 글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자료입니다.
눈 맑은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코끼리형상(7마리)
스님이 좌선하는 상, 미륵바위
정말 자세히 올려다보고 있으니, 바위 모습이 스님이 좌선하는 상이고 도솔천에 올라가 중생을 천도하는 스님 모습같다. 이 두 채의 바위 모습이 흡사 미륵존불과 같다하여 미륵사라고 이름하고, 절 뒤에 있는 봉우리를 미륵봉이라 이름 지었다한다. 그야말로 바위 하나하나가 뛰어난 자연 예술품이다.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난다."는 유명한 가르침을 남겼다고 한다. 미륵사는 미륵불과 독성불을 모신 금정산에서 첫 손 꼽히는 기도도량이다.
대웅전인 염화전은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정면과 측면 각 3칸씩의 규모로 1952년에 지은 절.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954년 조성한 후불탱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독성각 처마 한 모서리 뒤의 자연 암석에는 미륵 바위의 장삼자락을 양각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각종 기도에 정안수로 사용하는 석간수
미륵사의 석간수는 맑고 신성하여 각종 국제 행사 때나 부산의 각종 행사 시 정안수로 많이 사용되는데 1986년에 개최된 부산아시안 게임때 북한에서 가져온 물과 합하는 합환제를 지낸 물이 바로 미륵사의 바로 이 물이다.
뒤에 보이는 바위가 미륵암 인데 해가 질 무렵 석양에 비치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미륵불과 닮았다고 해서 미륵암이며 여기에 미륵사를 지었다.
바위 아래에 보이는 암자가 독성각 이며, 이 암자에는 불상이나 탱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위에 새긴 불상 암각화를 법당에 모셔놓았다.
미륵전과 미륵전 옆을 통과하여 독성각에 오르는 계단.
원효스님의 얼이 깃든 미륵암 독성각
쌀바위의 전설을 간직한 석간수
지친 욕심이 복을 멀리 하게 한다.
미륵사 한 가운데 위치한 염화전의 뒤편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해가 지고 난 뒤 바위와 바위 사이 그 현상이 더욱 선명하게 상을 드러낸다고 한다. 해서 원효대사는 이곳에 기도도량을 세웠다고 한다. 미륵암에는 재미나는 전설이 있는데, "쌀바위 전설"이다. 쌀은 불교에서 사리에서 유래된 말. 이 바위의 작은 구멍에서 매일 한 톨씩 쌀이 떨어져 스님은 이 쌀을 모아 공양을 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미승은 한꺼번에 쌀을 많이 얻으려고 구멍에 작대기를 쑤셨는데 쌀이 아닌 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독성각의 뒷편에는 지금도 원효스님의 장삼 자락이 아직도 남아 있는 미륵바위
원효대사가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
원효대사가 신라의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에는 지금도 독성각 옆에 사진처럼 움푹 패인자국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전설은 이렇다.
왜적 5만 병선이 동래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첩자를 뭍으로 올려 보냈다.
미륵암의 원효대사는 사미승에게 호리병 5개를 구해오게 하여 탑 앞에 나란히 세운 뒤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다. 그 장군기를 보고 2명의 첩자가 미륵암까지 올라왔다. 대사는 호리병으로 신술을 부려 첩자의 목을 졸랐다. 첩자들이 살려 달라고 하자 호리병 3개를 대장에게 전해주라며 돌려보냈다. 화가 난 왜적 대장은 호리병을 단칼에 내리친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왜적들이 모두 놀라 그대로 달아났다고 한다.
금정산
부산광역시 금정구와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801m. 태백산맥이 남으로 뻗다가 한반도 동남단 바닷가에 이르러 부산 북쪽에 솟은 명산으로, 부산의 진산이기도 하다. 최고봉은 북쪽의 고담봉(801m)이며, 북으로 장군봉·계명봉(602m), 남으로는 원효봉(687m)·의상봉·파리봉·상계봉 등 600m 내외의 봉우리들이 백양산(白陽山, 642m)으로 이어진다. 낙동강과 수영강(水營江)의 분수계가 되며, 낙동강의 지류인 화명천(華明川)을 바라보고 ㄷ자형을 하고 있다. 산정부는 각섬석화강암(角閃石花崗岩)으로 되어 있으나, 그 남동부는 마산암류(馬山岩類), 북부는 안산암질암류(安山岩質岩類)로 구성되어 있다. 산정의 능선상에는 암반이 노출된 첨봉이 많으며, 대체로 동쪽과 남쪽은 급사면이고 북쪽은 완사면을 이룬다. 급사면상에는 주빙하환경(周氷河環境)의 산물로 보이는 암괴류(岩塊流)와 사력(砂礫)이 덮여져 있고 이들 사이에 송림이 우거져 있다. 이 산은 주릉 북동쪽에 있는 범어사로 인하여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범어사 서쪽에는 주봉인 고담봉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 장군봉 동쪽에는 계명봉 능선이 에워싸서 동래온천장과 항도(港都) 부산을 발 아래로 한다. ≪삼국유사≫에는 ‘금정범어(金井梵魚)’로 기록되어 있어, 신라시대부터 널리 알려졌고 항상 금정산과 범어사를 연결지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산 이름 유래에 대해, “동래현 북쪽 20리에 금정산이 있고, 산꼭대기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이며 깊이는 일곱 치쯤 된다. 물은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전설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정이라는 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절을 짓고 범어사라 이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보다 앞서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즉, 금정은 금어(金魚)가 사는 바위 우물에서 유래된 것이다.
범어사는 678년(문무왕 18)에 의상이 창건한 화엄십찰의 하나로, 경상남도의 통도사·해인사와 더불어 3대 사찰의 하나이다. 20여 동의 가람과 신라 때의 석탑(보물 제250호)은 금정산과 더불어 부산 시민의 등산·야외 생활과 관광 명소로써 이름이 높다. 이 절 부근에 계명암을 비롯한 여섯 암자가 있어, 범어사 둘레의 명소를 이룬다. 이 밖에도 금정산성과 미륵암·정수암·국청사가 있고, 상계봉 남쪽엔 석불사가 있다. 금정산성은 사적 제215호로 되어 있고, 원래 동래읍의 외성으로 축성되어 동래산성이었으나 금정산성으로 개칭되었다. 산성은 임진왜란 후 당시 경상 감사의 진언으로 1703년(숙종 29)에 축성했고, 그 뒤 다시 증축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파괴, 훼손되었다가 1972년부터 2년간에 걸쳐 동·서·남 3문과 성곽 및 4개의 망루를 복원함으로써, 둘레 1만 7336m, 높이 1.5∼ 6m의 우리나라 최대 산성이 되었다. 금정산 주변에는 양산군 동면의 높이 12m가 되는 음각의 마애여래입상, 장군봉에 있는 자연굴인 은동굴, 임진왜란 당시의 전몰호국무신을 모신 충렬사 등의 명소가 있다. 이 밖에도 케이블카 시설·동,식물원·민속관 등이 있는 금강공원(金剛公園), 산성마을·동래온천이 있어 부산 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굽이치는 낙동강 칠백리와 하구언 을숙도가 가운데 자리 잡았네요.
중앙으로 멀리 해운대 앞바다와 마천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_^
나무관세음보살_()_
나무 미륵 보살, ^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